기록되지 못한 이름, 기억으로 이어지다
김영웅,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유태의 증손자
날짜 2026. 1. 28.(수)
장소 전라남도 광양시
참여자 김유태(1860~1894)
유족 김영웅(김유태의 증손자)
대담 기획운영부장 최두현
정리 기획운영부 임현진

김영웅,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유태의 증손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유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광양·하동·남해 일대에서 활동한 인물로 전해진다. 같은 해 12월 하동 송림에서 처형된 이후, 그의 행적은 공식 기록보다 가문에 전승된 구술과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이어져 왔다. 후손들은 흩어진 자료와 기억을 모아 선조의 행적을 확인하였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록을 통해 그 사실을 공식화하였다.
1.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독자분들께 인사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녹두꽃』 애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유태의 증손 김영웅입니다. 올해는 전봉준 장군 순국 131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병오년을 맞이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다시금 우리 사회에 올곧게 자리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현재 김 양식법을 개발·전파한 김여익 공의 기념물을 보존·관리하고 있는 ‘(사)김 시식지 유적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삶의 뿌리를 묻는다면, 무엇보다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증조할아버님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신 김유태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저는 김유태 참여자의 증손입니다. 증조할아버님께서 순국하신 이후에도 저희 가문은 고향인 광양을 떠나지 않고 그 터전에서 삶을 이어왔습니다. 세월이 130년 넘게 흘렀지만, 가문의 어른들은 늘 증조할아버님의 이야기를 기억 속에 간직해 왔습니다. 증조할아버님은 단지 족보에 이름으로 남은 조상이 아니라, 저희 가문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증조할아버님은 역사적 인물이기 이전에 삶의 기준이 되는 어른이십니다.
3. 증조부이신 김유태 선생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입니다. 김수용 할아버님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우던 때, 자연스럽게 증조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별히 의식을 하고 들은 것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그 이야기는 제 안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지만, “우리 집안 어른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셨다”는 말은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어린 나이에는 동학농민혁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정의로운 일을 하셨다는 자부심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장하면서 역사 공부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접했고, 그때 비로소 증조할아버님의 선택이 얼마나 큰 결단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4.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유태 선생님께서 광양, 하동, 남해 일대에서 활동하셨다고 전해지는데,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김유태 선생님의 활동 모습이나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증조할아버님께서는 학식이 깊고 기골이 장대하며 ‘명오(明午) 장군’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 별칭은 단순한 호칭이라기보다 당시 지역사회에서 받았던 신망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광양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셨고, 하동과 남해 일대까지 오가며 동지들과 뜻을 함께하셨다고 합니다. 단순히 전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역할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5. 김유태 선생님은 하동 송림에서 처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순국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1894년 10월(양력) 무렵, 하동 소오산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이 있었고 이로 인해 증조할아버님도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오산은 금오산의 다른 이름으로, 오늘날 이 사건은 ‘하동 금오산 전투’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당시 소오산 일대는 남해안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로,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요한 연결 지점이었습니다. 전투 이후 해당 지역은 급속히 통제되었고,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과 색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증조할아버님께서는 동료 10여 명과 함께 광양 인접 남해 지역으로 잠시 몸을 피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2월 무렵, 증조할아버님은 광양 진상면 섬거리 일대에서 발생한 전투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다시 동료들과 함께 참전하기로 결의하셨다고 합니다. 끝까지 뜻을 함께하겠다는 의지였다고 가문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전장으로 향하던 길에 혹여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자 광양 태인도 용지마을에 잠시 들르셨다고 합니다.
마을 앞 용머리 선창에 배를 대고 마을로 향하던 중, 주민의 밀고로 매복 중이던 일본군과 관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하동 송림으로 연행되었습니다. 1894년 12월 하순, 하동 송림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증조할아버님은 참수되었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달성 서씨 증조할머님께서 장남 김수용 할아버님을 데리고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시신은 이미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남편에게 손수 지어주었던 저고리의 타다 남은 옷고름 고를 발견하고서야 증조할아버님의 죽음을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손발톱이 흩어져 있었다고 하셨는데, 아마 극심한 고문의 흔적으로 짐작됩니다.
6. 그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순국 이후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으며, 현재 묘소는 어디에 있는지도 함께 말씀 부탁드립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역적’으로 몰린 증조할아버님의 장례를 온전히 치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둔 청상과부의 처지에서,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가족 모두에게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타다 남은 옷고름 고만이라도 수습하여 용지마을 북쪽 부친 묘 아래에 매장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이 당시 가족이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장례이자, 증조할아버님을 기리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묘는 그 자리에 조용히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2001년에 진월면 진정리 가족 묘원으로 이장하여 현재의 묘소를 조성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이장이 아니라, 후손들이 증조할아버님의 뜻과 희생을 보다 온전히 기리고자 한 결정이었습니다.
하동 송림은 지금도 동학농민군이 처형된 장소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증조할아버님의 순국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그 시대 수많은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문에서는 증조할아버님이 끝까지 동료들과 뜻을 함께하려 했던 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가장 크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반역으로 낙인찍혔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뜻을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묘소는 지금도 후손들의 제향 속에서 조용히 그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7. 김유태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건립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와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겠습니까?
가족 묘원을 조성하면서 집안의 내력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르면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문의 뿌리와 증조할아버님의 삶을 정리하여 비석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가계의 연원을 정리하는 차원이었지만,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이 재단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단지 집안의 어른을 기리는 비석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증조할아버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지로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참여자로 인정받은 만큼, 그 뜻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기념비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8.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참여자 및 유족 등록 신청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습니까? 신청 과정에서 집안에서는 어떤 반응들이 있었는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함께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증손자인 김재무 전 전남도의회 의장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참여자와 유족 등록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집안에 전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족들은 모두 조심스럽지만 간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증조할아버님의 참여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자료를 모으고 증빙을 준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일이다 보니 문헌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고,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구술과 기록을 하나하나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증조할아버님의 삶을 다시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등록이 이루어졌을 때, 가족들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9. 김유태 선생님께서 처형당하신 후, 가족과 집안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젊은 나이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둔 청상과부가 되었던 증조할머님께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시절이었을 겁니다.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생활 또한 순탄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머슴살이와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른들 말씀으로는 형편은 어려웠을지라도 그 기개만은 꺾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자식들 또한 꿋꿋하게 살아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지나며 집안을 다시 일구어 냈습니다. 증조할아버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는 가족들에게 큰 시련이 되었지만 동시에 삶을 지탱하는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0. 김유태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이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가문 내에서 이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전해져 왔는지도 궁금합니다.
동학농민군 참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저희는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드러내기보다는 삶의 태도로 보여드리려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가문에서는 증조할아버님의 이야기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전해왔습니다. 후손들 또한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증조할아버님의 이름은 단순한 위인이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11. 한편, 마을에서도 김유태 선생님의 집안을 ‘동학 집안’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마을 사람들의 인식이나 태도에서 느꼈던 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 인식이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우리 집을 ‘동학 장군집’이라 불렀고, 증조할아버님의 장남이신 김수용 할아버님을 ‘총독 영감’이라 부르며 존중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증조할아버님과 김수용 할아버님께서 마을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이웃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시고 원금도 형편에 맞게 나누어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상생의 태도가 지역사회에서 신뢰를 쌓았고 ‘동학 집안’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12. 이처럼 가문 안팎에서 이어져 온 ‘동학 집안’이라는 기억과 인식이 후손들의 삶의 태도나 지역사회 참여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시는지요?
증조할아버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는 후손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 분야에서는 전남도의회 의장을 지낸 인물이 두 분이나 있었고, 시의회 활동도 했었습니다. 경제, 행정, 군, 체육, 노동, 종교,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후손들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와 지역을 위해 기여하려는 태도는 모두 증조할아버님의 삶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저 역시 김 시식지 유적 보존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13. 최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서훈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족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서훈을 받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날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유공 단체와 형평성에 문제가 없다면 서훈을 검토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영예라기보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4.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혹은 정부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여자의 후손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신 정부와 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던 이름들이 다시 불리고, 그 뜻이 공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은 후손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앞으로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특정 집단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사회 전체의 가치로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참여자 후손으로서 저희의 작은 활동 또한 배타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상을 바로잡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선생님. 귀한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유족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