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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봄 63호 특집1
부를 수 없는 이름 ‘장흥, 동학농민군 집단 묘지’


 


부를 수 없는 이름 ‘장흥, 동학농민군 집단 묘지’

무연고, 방치에서 국가 관리의 장으로



최두현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전라남도 장흥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관련 이야기도, 죽임을 당한 희생자도 많다. 정읍 고부 봉기부터 장흥부사 이용태의 악행, 우금치 전투 패배 이후의 대규모 전투와 학살이 자행된 현장에는 당시 죽은 동학농민군 1,700여 명이 묻힌 묘지가 있다. 1월 22일, 맹추위 속에 현장을 찾았다. 130여 년 전 그날의 칼바람도 이토록 매서웠을까. 얼어붙은 대지 위로 이름 없는 넋들의 낮은 신음이 들리는 듯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고, 혁명 실패 이후 전국 각지에서 처형이 이어졌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이들이 모셔진 대규모 묘역은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유교 사회에서 참여자 가족으로 찍히면 가산 몰수나 추방 등의 보복이 뒤따랐음에도, 상당수는 가족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했기 때문이다. 전봉준과 김개남 등 최고 지도부조차 시신을 찾지 못한 사례와는 대조적이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및 관군과 맞서 싸운 장흥 석대들 전투 현장



  1894년 12월과 1895년 1월 사이, 장흥과 강진은 일본군 및 조선 관군에 맞서 동학농민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한 일부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공주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전남 지역 동학농민군이 합세해 약 3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장흥에 집결했다. 당시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된 뒤였고 김개남도 전라감영에서 처형된 이후였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이었지만 장흥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그해 12월 장흥 역참이 담당하는 벽사역을 점령하고, 이어 다시 장흥부사가 있는 장흥성(장녕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다시 강진으로 남하해 강진성을 차지했고, 이어 강진 병영면에 있던 대규모 군사 주둔지인 병영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제 남은 곳은 나주. 전라도 수부 전주를 점령하고 전주화약을 체결했듯이, 전라도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나주성 공격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공주에서부터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며 논산, 태인, 금구 등에서 동학농민군을 격퇴하며 남하했다. 이들은 나주성을 중심으로 좌우로 군대를 나누어 장흥에 있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최후 진압을 계획했다. 동학농민군은 군사력과 신식무기 등에서 월등히 앞선 일본군의 나주 수성에 맞서 나주성 공격 계획을 접고 장흥에 다시 집결했다. 그리고 약 20여 일간 일본군 및 조선 관군과 동학농민군 간 장흥 석대들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동학농민군은 수천 명이 희생되며 패퇴하고 만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알았지만, 동학농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더는 내려갈 곳도 이대로 돌아가 폭정이 넘치고 외세가 점령한 나라에서 살 수도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월등한 무기와 조직된 군사력으로 동학농민군을 사살했다.



1,700여 명의 무명(無名) 동학농민군이 잠들다


  짧았던 동학농민군의 장흥 일대 점령이 일본군의 본격적인 전투 참여로 꺾이고 말았고, 그들은 석대들 논밭에 쓰러졌다. 앞에 말한 유교 문화는 이곳에서도 그대로 작동했다. 장흥 지역 희생자들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집결한 연고 없는 동학농민군 희생자는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읍내 주민들이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그렇게 그들은 1989년까지 약 95년 동안 무연고 묘로,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묻혀 있었다. 장흥군이 이곳에 공설운동장 건립을 추진하면서 무연고 묘는, 다시 무연고 묘라는 이름으로 이장되었다. 


  이전된 지 35년, 장흥군이 관리하고 있지만 장흥공설묘지 4구역에 빼곡한 봉분들은 모양을 잃고 낮게 내려앉아 있다. 잊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흙 속으로 잦아드는 무덤들을 보니, 세월의 무게가 이름 없는 죽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당시 현장 업무를 담당했던 공무원이자 무연고 묘지에 대해 집안 어른들에게 동학농민군 묘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양기수 씨는 말한다.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석대들 논밭에서는 사람 유골로 추정되는 뼈가 농사일을 하다 보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재국 대표는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이곳이 난리 통에 죽은 사람들 묘라고 했다고 한다. 보통 나이 든 사람들이 말하는 난리 통은 1950년 한국전쟁이다. 고 대표도 한국전쟁이냐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그보다 훨씬 이전 난리 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 시기다. 또한, 당시 관군과 일본군의 기록, 동학농민군 대규모 처형 현장, 전투지에서 나온 유해 등이 객관적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던 무연고 묘지, 바로 동학농민군 집단 묘지는 공설운동장 건립으로 인해 이장되었다. 당시 묘지 이전 작업은 장흥군의회 의장을 역임한 정정진 씨가 사업권을 받아 진행했다. 양기수 씨도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현장에서 직접 유해를 보았다. 당시 인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묘지에서 머리가 두 개도 있고, 다리뼈가 3개도 있는 등 집단 매장지 형태였다고 한다. 묘지가 이장된 지 35년이 흘렀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대체로 보국안민, 제폭구민으로 압축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뒤흔든 대역사였지만, 현장을 세세하게 찾아내고, 기억하고, 아픈 역사를 되짚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안타깝게도 장흥에 이런 대규모 동학농민군 집단 매장지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 여전히 행정적으론 무연고 묘로 되어 있다.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니 더더욱 존재감이 없는 공간으로 잊히고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장흥 석대들 전투 희생자 묘역



무연고 묘라는 망각, 이제는 국가가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야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현재 행정구역으로 약 90여 개 시군에서 동학농민군 봉기가 일어났다. 여기저기 전투지와 집단희생지가 있지만, 장흥처럼 대규모 집단 묘지는 없다. 동학농민군을 동비, 비류, 폭도 등으로 부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 민중이 아니라 그저 처형하고 박멸해야 할 무지렁이 백성, 역적 등으로 여긴 그들의 살육 작전에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다. 특히, 일본군과 관군은 석대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1895년 여름까지 주변 지역을 수색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찾아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은 동학농민군이 처음 점령했던 장흥 벽사역에서, 잡아 온 동학농민군 얼굴에 용수(籠首)를 씌우고 사살했다. 이곳은 안핵사 이용태가 벽사역의 군사들을 동원해 고부 봉기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혁명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도화선이 된 곳이다.


  장흥 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위의환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이사장이 집필한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에 의하면 이곳에서 공식 처형된 동학농민군이 장흥 300명, 강진 320명, 해남 250명, 나주 230명 등 1,100명에 이른다. 이중 장흥에서 이름을 남기고 죽은 동학농민군이 357명, 무명 전사자 1,165명이다. 


  장흥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규모 살인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다시는 이와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폭정, 국가폭력이 없도록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역사에 남겨야 한다. 또한, 일본군이 저지른 가혹한 폭력,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선 백성들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은 역사적 잘못을 우리는 기록해야 한다. 그 기록은 동학농민군 묘역을 정비하고 국가에서 제대로 관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의 평등, 인권, 자주의 정신,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정신을 살려 우리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다지는 기반이자 역사 현장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다 알고 있는 진실에 침묵하며 지금도 무연고 묘라는 이름으로 장흥군에 관리 책임을 넘길 일이 아니다. 정부가 책임지고 관리방안을 찾아야 하고, 역사 무대 위로 정당하게 끌어올려야 한다. 


  그들은 이름 없는, 부를 수 없는 존재로 죽어갔으나 한국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우리가 이들을 다시 제대로 부를 수 있을 때 그 상처는 치유된다. 그때야말로 폭력과 죽음이 평화와 인권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하루속히 대한민국 국력에 걸맞은 역사민주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나도록 정비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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