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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봄 63호
전봉준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걸까

전봉준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걸까 



길윤형 한겨레 논설위원

 

 

* 해당 그림은 AI로 제작된 이미지입니다.



왜 동학농민혁명은 아직도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을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는 망국이라는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우리 구한말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논쟁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특히 1894년 10월(이하 날짜는 모두 양력) 이루어진 2차 봉기는 조선의 국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한 일본의 군사 행동에 맞선 조선 민중들의 명시적인 저항 운동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불합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관련법에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독립유공자’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먼저 2004년 3월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1조)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견줘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독립유공자를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1조) 이들로 정의하면서, 법의 적용 대상자를 ‘순국선열’(“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숨진 이)과 ‘애국지사’(“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이)로 구분하고(3조) 있다. 동시에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선 일본에 맞선 저항 행위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한’을 두고 있다. 이렇게 시기적 제한을 두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불세출의 영웅이긴 하지만,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비극’이 발생한다. 앞서 살펴봤듯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을 뜻하고, 독립유공자는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법률적 정의만 놓고 볼 때 양자를 딱 잘라 구분해 ‘전자가 후자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국가보훈처는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로만 무려 다섯 차례(2006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에 걸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 곤란하다’며 보류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1894년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라는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1894년, 이미 시작된 국권침탈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1894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려 보자. 탐관오리인 고부 군수 조병갑(1844~1912)의 학정에 시름하던 조선 민초들의 자연발생적인 저항 운동이 시작된 것은 그해 2월이었다. 농민들은 1894년 2월 14일 봉기를 일으켜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하지만 후임 군수 박원명이 부임해 와 선처를 베풀자 농민들의 분노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다시 사태가 험악해진 것은 안핵사(지방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하는 임시직)로 임명된 장흥 부사 이용태(1854~1922)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가 동학농민혁명을 적대시하며 봉기에 참여한 이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자 동학농민군은 4월 25일 무장(현재 전북 고창)에서 ‘보국안민’을 내걸고 봉기했다. 세가 점점 늘어난 동학농민군은 5월 1~3일 부안에서 백산대회를 열어 전봉준(1855~1895)을 총대장, 손화중(1861~1895)·김개남(1853~1894)을 총관령으로 뽑았다. 기세가 오른 동학농민군은 5월 10~11일 황토현(정읍)에서 관군인 전라감영군, 27일 황룡촌(장성)에선 양호초토사(양호는 호남과 호서, 초토사는 변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내려보낸 임시직) 홍계훈(1842~1895)이 이끄는 경군(조선 수도 한양의 정예군)을 잇따라 격파했다. 이어, 31일엔 전라도의 핵심 도시 전주까지 점령하게 된다. 깜짝 놀란 조선 정부가 6월 3일 청나라에게 원병을 정식으로 요청하자, 그 틈을 노린 일본이 청-일 간의 힘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8000여 명이란 대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게 된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자진 해산 결정을 내리며 전주성을 비운 뒤에도 조선 정부의 거듭된 철병 요구를 한사코 거부한다. 모처럼 얻은 출병 기회를 살려 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조선을 자신들의 반영구적인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경복궁이 무너진 뒤, 다시 깃발을 들다


  조선의 팔을 꺾기 위해 틈만 엿보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3~1911) 주조선 일본 공사는 1894년 7월 20일 조선 정부에게 ‘최후통첩’을 전해왔다.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니라면 22일까지 청의 군대를 국경 밖으로 쫓아내고, 청과 종속 관계를 전제로 맺은 여러 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이어 문서의 말미에는 “만일 귀 정부의 회답이 지연될 경우 본 공사는 스스로 결의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위협을 잊지 않았다. 


  오토리가 입에 담은 “스스로 결의하는 바”란 일본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거하고, 대원군을 옹립해 새 ‘친일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군사 행동이 시작된 것은 사흘 뒤인 23일 새벽이었다. 일본은 서울 주변에 배치해 두고 있던 병력을 대거 투입해 경복궁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오토리가 대궐을 침범할 때 평양병 500명이 대궐을 호위”하고 있다가 총을 쏘았지만, “고종을 협박해 함부로 요동하는 자는 참한다는 교지를 내리게 하자 병사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뒤 도주하였다”라고 적었다. 이후 일본은 고종을 사실상의 포로로 잡은 채 조선 내 친일 개화파들을 앞세워 갑오개혁(1894~1896)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대대적인 ‘국가 개조 프로젝트’에 나서게 된다. 


  이 광경을 지켜본 조선 민중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이 마침내 전북 삼례에서 2차 봉기를 일으킨 것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한 지 석 달 뒤인 10월 12일(음력 9월 10일)이었다. 전봉준은 훗날 체포된 뒤 이뤄진 첫 심문(1895년 3월 5일)에서 ‘왜 다시 기포했느냐’고 묻는 우치다 사다쓰지(内田定槌, 1865~1942) 주한 일본 공사관 서울 영사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귀국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일언반사도 민간에 전해 알림이 없고, 또 격서(檄書)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을 놀라서 움직이게 하였기로 초야의 사민(士民)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 사람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한 차례 청해 묻고자 함입니다.”


  우치다는 6개월 뒤인 1895년 9월 2일 동학농민혁명 관계자에 대한 모든 사법 처리가 끝난 뒤 자신의 상관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공사에게 올린 장문의 보고서에서도 2차 봉기의 이유에 대해 “봉준은 일본 군대가 대궐을 침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것은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려는 뜻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일본 거류민을 국외로 내쫓을 목적으로 재차 거병을 도모하였다”고 적었다. 이어, 우금치 전투 이후 전봉준의 행적에 대해서는 “봉준은 더욱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기도하였으나 일본군은 공주에 있으면서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봉준의 부하들은 점차 도망가고 흩어져 마침내 수습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마지못해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일본군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그 모집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1895는 되고 1894는 안 된다


  당대 일본 정부 당국자조차 인정한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국권침탈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을 ‘독립운동’이 아니라고 하기 위한 유일한 ‘합리적 이유’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라는 시기적 구분을 러일전쟁이 발생한 1904년 이후로 규정하는 것뿐이다. 실제 2012년 10월 만들어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시점을 ‘러일전쟁 개전 시’, 즉 1904년 2월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게 되면 갑오개혁,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활동, 대한제국기 고종의 여러 개혁 조처를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정부가 국권침탈의 시기를 스스로 10년이나 앞당기는데 동의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까.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다. 동학농민혁명 바로 이듬해인 1895년 발생한 을미의병은 무려 145명이 이미 독립유공자로 서훈돼 있다. 결국,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에 해당되는 시기를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1894년’이 아닌 ‘을미의병이 시작된 1895년 이후’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1년을 사이에 놓고 이런 근본적인 차별을 해야 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설명에 납득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전봉준이 재판소로 이송되고 있는 모습

(무라카미 덴신, 村上天真 촬영)


  역사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가마 위에 처연히 앉은 전봉준의 사진을 찍은 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유명 사진기자인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真, 본명은 무라카미 고지로村上幸次郎)이다. 이 광경을 묘사하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 1895년 3월 12일 기사를 보면, 전봉준은 “총검 때문에 붕대를 감았고 안색은 창백해 병든 듯했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났다”라면서 “아아 아까운 명사여”라는 탄식을 남기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전봉준을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에서 탈락시킨 것은 벌써 다섯 번이다. 이것이 정말 맞는 결정일까. 을미의병의 서훈을 취소할 게 아니라면, 전봉준에 대해서도 마땅히 취해야 할 조처를 하루빨리 취하는 게 옳다. 




 





길윤형(한겨레 논설위원)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2001년 11월 『한겨레』에 입사해 사회부·국제부 등을 거쳤고, 2013년 9월부터 3년 반 동안 도쿄 특파원으로 재직했다. 귀국 후 『한겨레21』 편집장과 『한겨레』 국제뉴스팀장, 통일외교팀장을 맡았고 국제부장을 거쳐 통일외교국제 담당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조선의 갈림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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