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동학농민혁명의 유전자
안삼환의 『역관일지』에 대하여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역관일지』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오늘의 시간으로 불러낸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혁명의 현장에 있었던 인물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불러내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 구조를 구성했다.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오늘의 사회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특히, ‘역관’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과거의 언어를 현재로 번역하는 일의 의미를 탐색한다. 131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이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전주 녹두관 건립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신 이종민 교수의 소개로 『역관일지』를 쓰신 안삼환 작가와 인사를 나눈 자리는 녹두관 앞 오르막이었다. 『역관일지』를 읽기 전이어서 녹두관에 모셔진 인물과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후에 알았다.
『역관일지』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131년 후인 2025년의 상황에 연결했다. 131년은 상당한 거리다. 시간도 공간처럼 거리를 갖고 있다. 공간의 어느 지점이 시력으로 버거운 지점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과거의 일들도 시간의 시야에서 그렇게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지도와 기록, 상상력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된 시간에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
131년이나 떨어진 시간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를 가져오려는 것은 그 일이 현재와 무관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일에 중요한 좌표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어서일 것이다. 믿음은 구체적 좌표를 설정하고 작동해야 한다. 안삼환 작가는 131년의 거리를 어떤 좌표로 읽었을까. 『역관일지』를 읽으며 ‘역관 기질’, ‘시민비극’, ‘언어의 타락’, ‘망각의 잠’ 같은 좌표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 좌표들로 『역관일지』를 이해해 보려는데, 그에 앞서 어느 시점 이후가 어떤 사회문화적 의미를 갖는지부터 짚고 가겠다.
『역관일지』 저자 안삼환
시간적 이후와 의미적 이후
우린 동학농민혁명 이후를 살고 있다. 132년은 그냥 이후가 아니라 현격한 이후다. ‘이후(以後)’는 시간적 이후와 의미적 이후로 나뉜다. 시간적 이후는 물리적 세계여서 피할 수 없이 찾아오지만, ‘의미적 이후’는 미미한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고 강하고 선명한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아예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고 여러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의미적 이후’는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후’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이후’도 ‘의미적 이후’도 단순히 흐려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원본을 흑화하거나 백화하고, 악마화하거나 미화한다. ‘의미’를 읽는 의도들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가 매 시대 벌어진다. 이분법적인 흑화와 백화가 아니라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를 얻기 위한 다른 독법을 취할 수도 있다. 취해야 한다. 다양한 독법을 갖는다면 좋겠지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역관일지』도 다른 독법을 취한 작품이다.
안삼환 작가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른 독법을 적용한 『역관일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한국 문학은 리얼리티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특별한 사건이라도 시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어렵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리얼리티가 전부는 아니다. 멀리 떨어진 과거의 사건에 대해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리얼리티 구현에 무게를 두는 방법, 다른 하나는 리얼리즘 구현에 무게를 두는 방법이다. 역관(譯官)을 자처한 안삼환 작가는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역관이 택할 수 있는 바람직한 경로일 수 있다. 역관의 길은 온 정성을 다해도 ‘가’(원전)에서 ‘가’(원전)로 가지 못한다. 피할 수 없이 ‘가1’로 가야 하지만, ‘가2’로 갈 수도 있고, 엉뚱한 ‘나1’로 갈 수도 있다. 리얼리티는, ‘의미적 이후’가 녹아 있는 리얼리즘이 추출되어야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역관 기질
안삼환 작가는 ‘역관 기질’을 언급한다. 역관으로 복무하지 않더라도 정도는 다르지만 ‘역관 기질’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기질보다는 자격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번역과 해석의 길로만 다가오고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말하기’와 ‘듣기’가 필요하다. 옳게 말해야 하고, 옳게 들어야 한다. 누군가 말해야 하고 누군가 들어야 하고 들은 이야기를 많은 이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듣고 전파하는 이가 역관이다. 녹두관의 인물이 ‘김일술 되기’를 선택한 것도 그렇다. 역관은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되지 않고 듣는 일은 132년 전의 동학농민혁명을 체감하기 어렵다. 동학농민혁명의 절멸을 도모했던 세력을 이해하기 어렵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역사 속 사건이 아니라, 당대의 일로 이해하려는 『역관일지』는 파우스트와 Y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을 중요한 소재로 설정했다. 파우스트와 Y 대통령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파우스트는 개인적이고 Y 대통령은 사회적이다. 둘에게는 ‘거래’가 존재했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다. 파우스트는 대가로 영혼을 팔았고 Y 대통령은 영혼을 거래 대상으로조차 보지 않았다.
작가는 Y 대통령 내란 사건이 132년 전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동의한다. 132년이 흘렀으나 폭력적이고 미성숙한 정신이 여전히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시대가 있기는 했을까? 미성숙한 폭력적 권력은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제국주의가 다시 득세하고 있으니 외부에서 왔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조건이 충분히 성숙했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다. 외부의 것이 곧 내부의 것이 되는 것, 그 또한 미성숙에서 온다. Y 대통령과 트럼프의 차이는 크지 않다. Y 대통령은 지독한 경험을 겪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싸움을 벌였고, 트럼프는 꿈 같은 시절을 보냈던 백인들을 우군으로 등에 업고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트럼프는 운이 좋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운이 좋았다.
시민비극, 언어의 타락, 망각의 잠
안삼환 작가는 ‘시민비극’을 말한다. 시민비극이 끝나야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구현된다. Y 대통령은 한 번의 시험을 우리에게 더 선사했다. 어떤 시민이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안타깝게도 시민이 반드시 ‘긍정적 정신 공동체’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적인 극우화는 그런 사실을 방증한다. 전 세계에서 시민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전 세계 시민의 정신이 취약해지고 미성숙 상태로 추락하는 어두운 ‘시민비극’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삼환 작가는 J교수의 입을 통해 ‘언어의 타락’도 말한다. 언어의 타락은 사유의 타락이고 정신의 타락이다. 지고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니 가치는 사라지고, 그 끝은 시민이 폭력적 권력에 압살당하는 ‘시민비극’이다. 그런 현상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만연하고 있다. 최근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로 ‘문해력’의 추락이 꼽히고 있다.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해의 능력이 있어야 언어가 타락하지 않고 고품격의 민주주의가 살 수 있다.
저자가 등장시킨 또 하나의 좌표는 ‘망각의 잠’이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망각의 잠’이 정신을 가다듬는 휴지기의 잠이 아니고 역사를 잊는 잠이라면 무서운 일이다. 망각의 지속은 정신의 뿌리를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망각의 잠’은 저열한 이분법을 쉽게 안착시킨다. Y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피아(彼我) 구분의 풍경을 만들어낸 걸 유심히 봐야 한다. 우리 모두 역관일 수 있지만, 모두가 자격을 갖추지는 못한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지키겠다는 의지에 대한 보상은 가혹하다.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져도 고통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파우스트는 몸을 얻고 잃은 것이 있다. 영혼이다. 한국은 어떤가. 몸집이 크고 근육이 탄탄한 몸을 얻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정신이고 영혼이다. 몸만을 얻는 것은 구원이 아니다. 『파우스트』 속 그리스를 위해 노래하는 합창대는 전쟁에 지고 포로로 끌려온 트로이의 여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라를 잃었을 때 이 땅에서도 그런 합창대가 만들어졌다. 지금 혹시 그런 노래가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자신을 위해 노래하지 않고 강대국을 위해 노래하는 이들은 없는 것일까. Y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서 항공모함이 오고 있다는 노래가 있었다.
무명의 공간과 리얼리즘
현장으로 달려가는 젊음이 등장한다.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구현은 현장에 구애받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곳이든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구현된 현장이어야 한다. 삶이 그러해야 한다. 그런 삶이 곳곳에 있으면 우리 모두 녹두관의 무명과 동일인이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유전자가 번성하기를 원한다면 무명은 곳곳에 있어야 한다. 구호가 아니라 생활로 있어야 한다. 녹두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곳곳에 서 있어야 한다.
구현되지 않으면 억울함이 길어진다. 당대의 억울함보다 더 큰 억울함이 후대에 존재할 수 있다. 당대의 억울함은 힘이 없어서다. 힘 있는 자들이 외부에서 오고, 그 외부를 안에서 부른 것이어서 억울하다. 후대의 억울함은 망각에서 온다. 힘을 가진 자들이 오래전 찾아왔던 외부 세력과 힘을 합쳐 망각을 주사하기 때문에 억울하다. 132년 전의 사건을 ‘리얼리티’로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이 있다. 감사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석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제 막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해석이 필요한데 하물며 132년이다. 해석은 냉철하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위치를 계속해서 바꾸어 넓은 조망을 가져야 한다.
『역관일지』는 꿈으로 추동된다. 안삼환 작가의 꿈은 의지의 세계를 끌어낸다. 의지는 꿈 같은 세계에 있고 현실 속에는 흔적들만 있는지도 모른다. 의지적 꿈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의지가 없으면 마땅히 열어야 할 숙명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놀랍게도, 숙명의 문은 열리지 않아도 제압할 존재들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안에 들어온 존재는 인식해야 할 운명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걷는다. 그럼 비극(시민비극)이 만들어진다. Y 대통령의 내란은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132년 전에 핀 핏빛 꽃들의 근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결여된 난폭한 한 장이었다.
132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다. 일본, 러시아, 미국, 중국이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다. 그때는 힘이 없었고, 흐름을 읽지 못했다. 그 두 가지 사실이 달라져야 한다. 힘이 있어야 하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역관일지』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현재의 자리에서 읽고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현재의 리얼리티에 동학농민혁명의 리얼리즘을 담은 책이다.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소설가)
시집 『순간의 젤리』, 『풍경도둑』, 장편소설 『이야기꾼 미로』, 문화비평서 『어제를 표절했다-스타일 탄생의 비밀』, 산문집 『작은 날씨들의 기억』. 인문매거진 계간 《바닥》 주간 역임. 계간 《문예연구》 편집위원. 일간지 칼럼 필진(2006년∼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