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철현 (金轍鉉)
1858. 11. 30~1895. 12. 23. 장흥 용산면 하금리 출생. 장흥 전투에 참가하고 처가에 피신하고 있다가 체포되어 처형됨.
1863. 3. 27~1895. 12. 23. 형과 함께 장흥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같이 피신하고 있던 중 형과 같은 날 처형됨.
김시현(金始鉉)
1933~ . 장흥에서 농업에 종사. 아들 수환(1961~ )은 현재 주택공사 대전지점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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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윤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6대조가 노비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문서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는 김철현의 집안은 그런대로 유족한 편이었다. 철현의 아버지 또한 한학을 한 유생으로서 인근에서 제법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철현이 농민군으로 참가한 이후 관군의 수색에 걸려 집안은 말이 아니게 변하고 말았다. 철현의 손자 삼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 증조부님이 원래 영리하신 분이죠. 지금 그 제자들 중에 훌륭한 분이 많죠. 동네 유지급이었지요. 우리 증조부님이 글을 하신 분이고 그래서 서적이 많이 있었더래요. 그 서적을 관군들이 전부 다 갖다 불태웠대요. 그래서 이제 문적이라고는 없어요. 증조부님의 전적은 구전으로 들어서 알지, 우리는 통 몰라요. 농사도 많았드래요. 당시만 해도 한 스무 두락은 되었더래요. 우리 백부님이 술을 좋아하셔서 살림을 다 없애부렀지.
철현이 농민군에 참가한 이후 관군에 의해 그때까지 남아있던 서적이라고는 모두 불타버렸다는 대목에서 관군의 보복전이 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이 곧 집안의 몰락을 앞당겼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철현의 큰 아들은 술에 의탁하여 시름을 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한 잔 두 잔에 결국 주당이 되어 몸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농민전쟁에서의 패배가 쓰라린 가족사로 이어진 셈이었다. 장흥 용산면 하금리에서 태어난 철현은 1894년 12월 장흥에서 치른 대접전에 참가한 후 용케도 살아남아 몸을 빼어 숨었다.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다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좁혀오는 관군의 포위망을 피해 철현은 동생 시현과 함께 처가가 있는 지금의 보성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의 상황을 손자 삼식은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말한다.
갑오년 동학 때 동학을 하시다가 피난을 가셨어요. 보성으로 임시 은거를 한 거지. 보성군 해청면이 그전에는 장흥군 해룡면이어. 거기 해룡면 영천리에 처가가 있었어요.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주위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고 그곳까지 수색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를 타고 꽤 먼곳으로 피하려 했던 것인데 그것이 마지막 가는 길이었을 줄이야.
그리 피난을 가셔가지고 형제가 거서[보성 율포] 동생하고 한날 돌아가셨지. 지금으로 말하면 율포지만 그때는 밤개, 밤 율자 개 포자해서 개포라 불렀어. 도망을 가려고 그 포구에서 배를 타시려다가 체포돼서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셨지. 무자비하게 칼로….
상식은 이 대목에 와서는 말을 잇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칼로…”라는 말만 되뇌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맺힌 조부의 마지막을 증언하려니 그동안 참아왔던 격정의 봇물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철현의 세 아들은 11살, 9살 6살이었다.
우리 아버님이 6살, 백부님이 11살인가 자시고, 중부님이 9살 자셨죠. 그 3형제를 냄기고 다 돌아가셔 부렸어요. 동생분도 돌아가셨지. 그리고 나서 할머니가 3형제를 데리고 용산면 어산리로 넘어오셨어요.
남자들이 참변을 당하면 그 뒷일은 여자들의 몫. 시신을 수습하여 망자의 안택을 마련하는 일이며,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며, 집안을 꾸려나가는 일이 모두 여자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철현이 죽고난 뒤 그의 부인이 겪어야 했던 거친 세파는 손자 삼식의 증언을 통해 아련히 전해질 뿐이다.
그때가 을미년 12월 23일 날인데, 시신은 바로 수습이 됐대요. 조모님이 혼자 계셨기 때문에 조부님 시신을 어떻게 챙겨 묻었는지 모르겄지요. 산소는 영천리에다 썼지.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가면 훌륭한 분이라고들 하지. 자기들도 전설로 듣고 뭔가를 알고 있으니께(김시현의 산소 위치는 모름). 그 뒤 할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지. 3형제를 데리고 여기에 와서. 백부님이 유산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자시고, 여그서 막둥이 아들한테 얻어 자시다시피 하다가 돌아가셨죠.
철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는 손자의 표정에는 그리움이 진하게 담겨 있지만 그의 말에는 그리 힘이 들어 있지 않다. 조부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조부의 삶을 잇지 못했다는 자책에서일까.
아,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는 지가 잘 모르죠. 그저 말로 들은 것인께. 보통체격이셨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성격은 쾌활하셨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마지막 전투로 석대전 전투에 참가하시고 피난을 갔다가 1년 지나서 체포되신 거죠. 원래 동학교도였던 것은 아니고 여기 평야 유림이었다고 그래요. 그랑께 유림파에서도 동학에 적을 둔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죠. 할아버지가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아버지도 인자 6살 자셨을 때이니 알라말라 하제.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한테 얘기를 자주 전했다고 그래서 우연히 알았죠. 그렇지 않으면 모르죠. 그때는 동학군을 반란군이라 해서 족보에서도 없애고 안내부렀소. 그랑께 통 증거란 것이 없죠.
철현은 향촌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던 유생이면서 농민의 한 사람인 동시에 돌아가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느낀 깨인 인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동학에도 참여하였던 것이고 끝내 농민군의 일원으로 뛰어들어 장흥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종을 받는 관군과 격전을 치렀던 것이다. 그때 철현이 참가하였을 장흥 지역에서의 전투는 이랬다. 공주 우금치 전투를 장렬하게 치르고 농민군의 본대가 해산할 무렵, 오히려 장흥 지역에서는 본격적인 전투가 불붙었다. 12월 4일 아침 농민군은 벽사역을 급습하였고, 다음날 장흥부의 장령성을 점령하여 우금치 전투 이후 농민군의 사기를 한껏 돋구었다. 장령성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던 농민군은 용산면의 어산접(접주 이방언) 1,000여 명, 부산면의 용반접(접주 이사경) 500여 명, 웅치접 1,000여 명이 주력이었다(『장흥군지』). 장령성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쪽에서의 패배로 주변에 웅크리고 있던 농민 군들이 속속 장흥 쪽으로 집결해왔다. 북쪽에서의 패배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더욱 사기를 드높이고 다음 공격목표를 강진병영으로 잡았다. 각 지역에서 밀려오는 농민군은 강진병영과 40리 거리의 장흥 사창 장터를 향하여 달렸다. 장흥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병영을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병사 서병무는 다급한 나머지 12월 6일 선봉진에 급박한 상황을 보고하고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순무선봉진등륵』12월 8일조). 장령성을 점령한 장흥의 농민군은 6일 오전 10시쯤 벽사역 뒤 언덕으로 진을 옮기고 오후 2시쯤에는 장흥과 강진의 경계인 사인점(舍人店 : 현재 장흥읍 송암리) 앞들에 집결하였다. 병사 서병무는 양쪽에서의 협공 위협에 빠진 병영의 위급함을 재차 선봉진에 보고하고 애걸하다시피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런 상황은 나주 초토영에도 전해져 관군의 출병이 불가피해졌지만, 선봉진은 8일까지 장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일본군이 해안을 따라 7일 하동에 들어와 여수와 장흥 쪽으로 진격할 태세에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하느냐 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농민군은 강진 병영과 강진현의 공격을 서둘렀다. 7일 오전 8시쯤 사인점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이 강진현을 들이쳤다. 현감은 나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농민군은 이런 허점을 찔렀던 것이다. 농민군은 강진현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강진, 장흥 양 방면에서 압박해 성의 사면을 포위하여 10일 새벽 2시쯤 병영을 들이쳤다. 농민군은 병영의 안산인 3봉을 먼저 점거하고 일제히 대포를 쏘았다. 포화는 성을 향해 쏟아지고 화약연기는 하늘을 가렸다. 목책(木柵)을 불지르고 성가퀴를 올라가자 수성군은 스스로 무너졌다. 성안에서 꼼짝 않고 떨고 있던 병사 서병무는 겁을 집어먹고 두루마기를 입고 패랭이를 쓰고서 피난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영암 쪽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강진병영도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이즈음 좌선봉 이규태의 관군은 일본군 제19대대 사령관 미나미(南小四郞) 소좌의 지시에 따라 세 길로 나누어 강진으로 진격했다. 한 길은 영암 쪽, 한 길은 장흥 쪽, 한 길은 능주 쪽을 택했다(『순무선봉진등록』12월 12일 조). 이규태군은 12일에야 강진병영에 도착했다. 이때 인근의 농민군은 차츰차츰 남쪽으로 모여들어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고, 이들은 장흥에 집결하였던 것이다. 장흥에 집결한 농민군은 건산리 뒷산 장흥 모정등(茅亭嶝)에 본진을 두고 있다가 관군과 일차 접전하고 석대들로 물러가 진을 치고 있었다(황현, 『오하기문』3필 12월 12일조). 15일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장흥읍에 도착하여 좌선봉 이규태의 통위영군과 합세하였다. 농민군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다음은 『순무선봉진등륵』12월 20일 조와 『오하기문』 3필에 근거한 전투상황이다. 농민군은 장흥의 주변 산과 들판을 차지하고 봉우리마다 기를 꽂아놓고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아댔다. 통위영군은 북쪽 주봉의 농민군을 막고 교도중대와 일본군은 성모서리 대밭에 숨어 있으면서 2~30명의 민병을 내보내어 농민군을 산에서 평야로 유인케 하였다. 농민군이 산에서 내려와 민병을 공격하자 숨어 있던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농민군은 삽시간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농민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군과 관군은 20리를 추격했다가 계곡에서 습격당할 우려가 있어 장흥읍으로 돌아왔다. 17일 교도중대가 남면 40리 거리의 죽천(竹川) 장터에 나아가니, 농민군이 옥산리(玉山里)에 둔거해 있다가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며 기세를 높였다. 관군은 이에 대응해 100여 명을 포살하고 20여 명을 생포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주변으로 흩어졌는데, 주로 천관산 일대에 둔취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이로써 장흥과 강진 일대에서의 전투는 대강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철현이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지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그 당시 수많은 농민군 중 한 명으로서 석대들 전투에까지 참여하였을 것이고, 그 후 관군의 추격을 피해 몸을 날려 처가가 있던 해룡면 영천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결국 거기서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다 잡혔다는 것은 위에서 적은 그대로이다. 그 후 철현의 집안은 여느 농민군의 집안과 같이 역사의 현장에서 고난의 연속이었고, 지금까지 자손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멍울의 역사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철현의 세 아들 중 큰아들인 한삼은 술로 타계하고, 둘째아들 한동은 장가는 들었지만 자손이 없이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막내아들(한춘 : 삼식의 친부)이 부지런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살림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한춘의 두 아들을 각각 한삼과 한동의 양자로 보내 대를 잇게 하였다. 지금이야 김삼식 옹도 살 만하지만 기억 너머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꿈같은 순간들이 떠오르는지 조부의 생가(김삼식의 집에서 20~30m 떨어져 있음)를 가리키는 김옹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그런 순간들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