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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삼형제가 모두 참여한 광주 농민군 고광문, 증손 영두
대상인물

고광문(高光文)

1860~1898. 5. 8. 본관은 장흥, 자는 응삼(應三). 3형제가 모두 동학에 가담한 뒤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다 은신 생활. 1898년에 곡성 근처에서 병사.

증언인물

고영두(高永斗)



1930~ 자수성가해 30여 년간 사업을 하다 현재 광주 이장동 순생마을에서 농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동학농민전쟁을 이야기할 때 광주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광주가 주목받는 이유는 광주 출신의 농민군이 많았던 점 외에 전남 지역 농민군을 줄곧 괴롭히던 나주 수성군(守城軍)의 존재 때문이다. 1차 농민전쟁이 활활 타오르던 4월, 나주목사 민종렬은 수성군을 조직해 농민군에 적대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전봉준은 4월 8일 통문을 보내 ‘광주와 나주 사이는 피가 흘러 내를 이룬다’는 고결(古訣)을 인용해 협력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주목사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농민군 대 나주 수성군 사이에는 팽팽한 대립이 지속되었고, 그 결과 고결에서 말한 예언은 현실로 나타나기에 이르렸다. 특히 농민군들이 침략자 일본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재기병한 9월 이후, 광주에 진을 친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와 나주 수성군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다. 전봉준은 북상하면서 후방 안전을 위해 손화중으로 하여금 광주·나주방면의 방비를 당부하였다. 이에 손화중은 9월 23일 휘하 농민군에게 통문을 보내어, 광주에 있는 농민군 총본부인 남호도소(南湖道所)로 26일까지 집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에 근거지를 둔 농민군부대와 나주 수성군 사이에는 10월 20일 이후 광주와 나주 사이에 있는 침산, 선암, 두동, 죽산, 용진산, 남산 주변에서 11월 하순까지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죽어갔고, 그들의 붉은 피는 고결의 예언대로 황룡강을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광주·나주 지역 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농민군의 하나가 고광문 3형제이다. 이에 대해 그의 증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어렸을 때(6. 7세) 종증조(광인)가 집에 오셔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조화정’이라는 주문을 외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이 그분들이 동학에 관계하였다는 전부입니다. 조모님이나 이웃 일가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동학란 때 집안이 망했다는 것이며,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가난하였습니다. 고조 때까지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증조부 3형제가 모두 동학에 입교하시고, 막내 광동은 접주를 맡으셨고, 둘째 광인은 수하시어 충청도 교인촌에 사시면서 우리집에 연 1, 2회 내왕하셨습니다. 지금은 타계 하셨으나 묘소를 알고 있지 못해요.

이같은 구전과 집안내력은 실제 고광문 3형제가 농민전쟁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고영두 집안이 12대째 현재의 광주 남구 이장동 순생마을에서 세거해왔다고 하는 만큼, 고광문 형제들은 광주 지역에서 농민군으로 참여해 활동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광문은 손화중이나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에 편입됐을 것이며, 나주성 공격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농민전쟁 이후 고광문의 행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동학란 당시에 증조는 35살, 조부(고재언, 1879년생)는 16살로, 증조는 가산을 헌납하면서 혁명에 참전하였으나 패전의 결과로 부자가 고향에 살지 못하고 곡성, 옥과 등지로 은신생활을 하셨습니다. 3년 뒤 증조는 심화병으로 39살로 타계하시고 조부는 타향 곡성 근처에서 조모님(수원 백씨)과 결혼하셔 사시다, 일가들이 많이 있는 담양군 창평면 덕촌마을 쪽으로 이사하여 사셨습니다. 창평생활 5년여 만에 고모 한 분과 세 식구가 고향을 떠난 지 5년여 만에 귀향하셨으나 소유재산은 초가삼간 담장집뿐이었어요. 동학란 후에 증조모(영천 이씨)는 친정인 담양군 대전면으로 피신하여 사시다 거기서 타계하셨습니다.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후손들이 그렇듯이, 고광문과 그의 후손 역시 시련의 나날이었다.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광문이 옥과로 피신하였는데, 그때는 12월 초순 어느 무렵이었을 것이다. 광주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만 명의 손화중부대가 해산한 것은 12월 1일이었다. 이들은 해산한 뒤 인근 지역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장흥 쪽으로 내려가 계속 전투에 가담하였다. 또 일부는 능주 쪽으로 내려가 일본군과 정부군 및 나주 수성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다행히 목숨을 건져 피신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과 정부군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한 것인데, 고광문의 경우 역으로 동북쪽으로 빠져 곡성 방면으로 후퇴한 뒤 은신한 것으로 보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고광문은 어린 아들과 같이 옥과에서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감시와 가난으로 인해 가정은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부인은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친정 집이 있는 담양으로 가 일생을 마쳤다. 고광문 역시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농민전쟁에 패한 울분을 못이겨 결국 3년 뒤 타계하고 말았다. 당시 정부와 양반지배층은 농민군에 가담했을 경우 집과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예사였으며, 향약과 오가작통법 등을 시행하여 잔여 농민군을 철저히 색출해 처벌하였다. 그 때문에 살아남은 농민군은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타향으로 피신해 은둔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은둔 생활 역시 생활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역적이라는 누명과 감시의 눈초리 때문에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생존한 농민군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 전형적인 예를 고광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비록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의로운 역사를 남겼지만, 후손에게는 가난과 역적의 자식이라는 누명만 남겼을 뿐이다. 고광문의 자손 역시 사람들이 ‘동학란’을 점점 잊어갈 무렵 15년 만에 고향 광주로 돌아왔으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초가삼간 담장집뿐이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삶에 대한 의지와 부지런함이었다. 그래서 고광문의 유일한 손인 영두의 조부모는 추석에도 ‘놀고 있으면 심심하다’면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가내의 전통은 대대로 이어졌다. 고광문의 증손인 영두는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제법 성공하였는데, 이것은 조부나 부친이 가난해서 자신이 돈을 벌게 된 것이라고 겸손해 한다. 그는 부유한 사람은 덕을 쌓고 가난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그동안 터득한 삶의 철학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배가 고파서 공산주의를 했단다.

백야산 들어갔어야 했는데, 26살에 죽었어야 했는바…. 나는 프롤레타리아야. 그리고 돈이란 남이 벌어주는 것이다. 내가 24시간 일해서 번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도 ‘고씨는 정말 열심히 사는 분’이라고 한다. 그는 문중 일을 해도 사진이 나오면 안할 정도로 헛된 공명보다 참되고 성실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이처럼 동학농민군 후손은 국난극복에 참여한 죄로 조상에게서 가난을 물려받았으나, 그와 동시에 성실함과 참된 삶의 가치 또한 물려받음으로써 증손대에 이르러 다시 일가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증언을 마치면서 고영두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여덟 군데로 흩어져 있던 선조들 묘소를 한 군데로 모신 바 있는 그는 증조부에 대한 고증이 있어야 비석을 세울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한다. 그러면서 광주, 남평 지역 동학교인 명단이나 접주명단에서 증조부 3형제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가 새롭게 조명되고 그것에 참여했던 농민군이 재평가되면서, 이름을 확인할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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