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강영문(姜永文)
1865~1894. 본관은 진주. 자는 이원(利元).
강대윤(姜大倫)
1931~ . 강영문의 손자. 삼천포에서 살고 있음.
1936~ . 강영휴의 손자. 충북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에 살며, 이장 일을 오래 봤음.
신영우
다시피는 녹두꽃
충청도 청주목 솔뫼[松山] 마을은 동학의 역사에서 두 차례 중요하게 언급되는 곳이다. 1893년 1월 이 마을에서 교조신원을 위한 상소문을 작성한다. 또 1894년 9월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직후 이 마을은 청의(淸義)대접주 손천민(孫天民)이 무장봉기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 마을이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은 접주 강영문(姜永文)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씨 집안에서 동학에 처음 입도하는 것은 태백산성 사고(史庫) 참봉과 절충장군 행용양 겸 경복장(景福將)을 지낸 강재옥의 아우인 재주 대에 와서이다. 그 다음 대인 기회는 오위장을 역임하고 또 침을 잘 놓는 의원으로 재산을 많이 쌓는다. 그리고 그 다음 영문이 접주로서 갑오년을 맞는다. 당시 13세였던 영문의 아들 학수는 그가 겪고 본 것을 외아들 대윤에게 상세히 전해주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솔뫼에서 잘살았다고 해유. 솔뫼 전체가 강서방네 땅이었다구 하대유. 청원 땅에서 제일 부러워했답니다. 돈 많구 우애 좋은 집안이기 때문이라유. 남들 나가서 사방 눈에 보이는 땅이 전부 강씨 땅이었구 물방아간 하나는 전부 할아버지네 일만 했닥 해유. 오창 뜰에두 땅이 많아 한해 겨울 내내 나룻배루 도지를 받아들였다구 해유. 종두 있었는데 행랑지기 머슴 대여섯 호가 있었구 집안에 수십 명이 들벅거릴 만큼 잘 살았슈. 기자 회자 할아버지가 한의사였는데 침술이 뛰어나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구 해유. 가난한 사람은 돈 안 받구 무료로 고쳐줬다구 하대유. 동학은 우리 집안에서 고조부 때부터 했대유. 형제분이 다 동학을 했대유. 솔뫼는 충청도 동학의 본부였는데 전라도 등 사방과 연락을 했어유. 우리 할아버지가유, 교를 해서 출타가 넓었는가 보대유. 이짝 저짝을 다니면서 항상 상주 모습을 하고 다녔다고 해유. 그러구 여느 사람하고는 잘 접촉하지 않고 항상 침착하니, 접주가 되다보니 지령 같은 것 있지유. 그것을 하러 다녔다고 해유. 거사 얼마 전부터는 방에서 나오질 안하구 각본을 짜는 것이지유, 인제. 중요한 손님이 와서 안으로 들어가먼 언제 가는 줄도 몰랐는데 그만 얼마 있다가 난동이 터졌다구 그래유. 아버지는 심부름 땜에 들어가면 그때 애들이니까 말을 삼가하는 것 같았는데 그래두 이런 얘기를 하더라 하구 들은 걸 전해주대유. 눈치가 빠르니께 무엇을 하는 줄 알았대유. 중요한 일은 직접 심부름을 시켰는데 서찰 같은 것을 주면 청주에도 믿는 사람이 많았는지 지금 죽재머리 동지내 도청이 있는 북문로 일가 이가 그리구 증평도 갔다오구유, 내수 있지유. 그리구 가차운데 주변은 아버지가 많이 다녔는가 보대유. 방에는 항상 몇 분이 있으면서 얘기를 노누구 대기하구 있는 거라. 여러 사람이 들락거렸는데 손가라는 사람은 지금 얘기 들으니께 손천민 씨 인가 보지유, 손씨가 있다는 것은 들었어유. 왔다가는 자구두 가구 바로 갈 때두 있구. 그분두 오면은 상주나 스님 복색을 하구 그런 사람은 지위가 있는 사람인 거라. 그러면 사정없이 아버지 방으루 들어간다구 해유. 우리 할아버지 방으루. 무명 인사가 오면 바깥 사랑으로 행랑살이들이 대접을 하구 이런 식으루 했다구 해유. 청주 부근에선 용평이라는 데서 박씨라는 분이 장 오시더랍니다. 효촌 다릿골서두 한 분 오시구. 주위에서 더러더러 평민복으루 오시구 부강서 오시구 사방에서 오시더라구 해유. 영남에서도 오구 전라도에서두 오구 경기도에서는 오지 않았대유. 단양에서두 오구. 괴산 증평 청안 충주 근방에서 손님들이 더러 왔다가구. 계속 드문드문 오더니 가을 찬바람이 나니 엄청나게 사람들이 오구 그래가지구 금줄을 치구유, 외부사람을 못 오게 했대유. 그리구 말 못하는 벙어리를 데려다가 집안일 하게 하구유. 할머니 등 안사람들은 사랑에 일체 금지, 여자는 어머니가 됐든 친척이 됐든 출입금지해서 아무두 왕래를 못하구 그런 식으루 몇 달을 지냈다구 해유.
손천민은 갑오년 당시 근거지인 솔뫼보다 최시형이 머물던 보은이나 청산 또는 여러 조직을 돌아다녔던 것처럼 보인다. 솔뫼에서 거사를 준비한 중심 인물이 강영문. 그 과정이 소상하다.
옛날 사람은 난리라구 합디다. 거사라구두 안하구 아니 자중지난이라구 합디다. 자중지난을 피웠다구. 그래 바짝 심하더니만 나중에는 폭탄이니 만들었대유. 반고개 옛날 옹기 굽던 데서 조대흙을 가마니로 소에다 조금씩 싣고와 조선 사기그릇 있지유? 모래 백인 거유. 그것을 절구통에다 빻더랍니다. 거기다가 화약 자구황하고 소오줌 찌끄러기 거품 같은 것을 섞어 뭉쳐서 만든답니다. 굳기 전에 구멍을 뚫고 담배같이 심을 꽂아 던지기 좋게끔 만든답니다. 심에다 불을 붙여 던지면 폭발합니다. 이것을 많이 만들었닥 하요. 화약은 집안이 아니구 저 너머 용재에서 만들구, 거기엔 훈련막인 집이 있었대요. 여느 사람은 못 가고 밥만 날라다주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고, 죽창 같은 것을 만들었답니다. 대나무는 전라도에서 가져왔는데 죽창 만들만큼 잘라서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꺼적대기에 싸가지고 와서 용재에서 만들었닥 해요. 몇 달 동안 엄청난 준비를 했던가 보대유. 폭탄 만든 것은 외처로 말에다 싣고 밤으로 가져가고, 쌀 같은 것 돈 같은 것을 가져가는데 그런 말씀도 하시대유. 중간놈들이 돈꾸러미를 즈이덜 집에 갖다주고 쪼끔 갖다주고 심지어 그런 일도 있었다구 해유. 높은 사람끼리는 자주 가구오구 안하니까 편지를 보내서 돈이 왜 도착 안했는가 하면 도망가버리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나중에는 그쪽에서 사람이 와야 보내고 일부는 전라도 저 군산꺼정 갔다고 해유. 돈을 어음으로 끊어주면 거기서 찾는 데가 또 있는가 보지유. 거사 직전에는 대단히 설쳤던게 보대유. 충청도 지방에선 우리집이 본거지고 재산도 많이 있다 보니께 사방으로 보내고 했는데 우리집은 지원을 받지는 안했다고 하대유.
무장봉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무기, 즉 화승총을 구하는 일이었다. 증언자는 화승총을 화심총으로 말했다. 심지를 넣고 불을 붙여 쏘는 총이니 승(繩)이나 심이나 한가지다. 탄환을 구하기 어려운 까닭에 종이를 뭉쳐 비상을 넣어 사용했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이 나온다.
화심총은 어디서 무명자루 삼베자루에 말아가지고 왔는데 용재서 쏘는 것은 봤다고 하대유. 목표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갈치는 거라. 쏘고 맞나 안 맞나. 그런데 엄청히 더디다고 그러대유. 한방 쏠려면 꺾어가지고 화약을 재가지고 심지에는 부시를 켜서 쑥방망이에 붙이면 픽타들어가 자구황 화약에 닿아 탕 터지면 탄알이 나가서 허수아비를 맞히구. 쑥 말린 것을 뭉팅이로 사서 집에서 쑥방망이를 만든다고 해요. 그건 불도 크게 안 나고 계속 타는거라. 총 구입비가 소 두 바리 세 바리, 그것을 워디루 가서 구해오는지 그걸 제일 구할려고 애를 쓰는디 대단하더랍니다. 가구오구 연락이 오구. 거사 직전에는 사방에서 오구. 화심총이 그래가지고 솔뫼에는 칠팔 정이 있었고, 각지루 퍼진 게 약 삼백 정은 된답니다. 지탄알은 종이루다가 똘똘 뭉쳐서 만드는 거라. 문어풀을 고아가지고 그것은 동해안에서 가져온답니다. 솥에다 문어를 되게 고면 그것이 끈끈하게 아교풀마냥 돼가지고 비를 맞아도 누기가 안 차고 땀이 나도 습기가 안 차고 항상 그대로 있다고 하대. 아교는 비가 오면 물렁물렁한데. 문종이를 똘똘 말아서 지름물에다 삶는답니다. 비가 맞아도 피도 않고 부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게 하고 칼로 끊는대유. 비상은 썰은 다음에 송곳으로 구녁을 뚫구 거기다 비상을 박는기라. 비상을 박아가지구 촛땜을 하는기라. 초는 옛날에두 흔하니께. 소지름을 가지구 초를 만드니께 딱 봉하면 비가 와두 붙어있답니다. 지탄알은 가찹게 맞으면 살을 파구 들어가서 죽는답니다. 멀리 맞으면 안 죽지만. 나무를 쏘면 퍽 퍼져버리구 종이니께. 총알이 뚫구 들어가지는 않지만 살이 썩어서 죽는기라. 위협을 주는 기지. 소리가 꽝하구 대단하답니다. 골이 꿍꿍 울리는 기지. 아버지가 육이오 때 요새 총알은 콩볶는 거지 예전 화심총은 대완구 터지는 소리가 난다고 했심니다. 또 놋쇠 있지유. 놋쇠를 가지구 총탄알을 만드는데 그건 돈이 많이 들어서 못한답니다. 지탄알 화심 화약은 집에서 만들구. 약한 부대는 여기서 보내주고 사방에서 만들구. 칼은 서 말이니 두 말이니 했구. 청주 동지내에서 벼리구 만든 거지. 소리가 뚱땅거리구 나니께 단검이니 일부 창 같은 건 거기서 다 밤으루다 만들어가지구 오구. 단검은 일절 몸에다 품구 다니구 전장 때 써먹을라구 큰 칼 있지유? 그걸 만들구. 그런데 그걸 별루 써 보지두 못하구 쫓겨가는 바람에 전부 다 들에다 버리구 동암 넘어가는데 길에 꽉 찼더라구.
9월 18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이후 청주 일대의 동학 조직은 합세해서 청주성 공격에 나섰다. 동학농민군은 여러 날 동안 읍성을 둘러 싸고 치열하게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만다. 9월 29일 안성 군수가 받은 순무영의 전령에 겨우 격퇴했다는 구절을 보면 이미 그 이전에 싸움이 끝나 있었다.
진눈깨비가 오구 안개가 끼던 궂은 날에 동학 거사를 했대유. 깃대를 많이 만들어서 대장기는 석 자 되는 큰 걸루 졸병기는 한 자 되는 걸루 들구서유. 척왜 깃발을 들구서 청주 동헌있는 데루 밀고가는데 채 못 가서 대비하구 있던 관군과 싸움을 시작했대유. 지금 도청있는 데서 쌈을 시작했는데 자꾸 밀려서 육거리까지 와서 싸웠더랩니다. 제일 많이 싸우기는 남다리 냇물을 가운데 두구 싸운 거지유. 관군들은 얼추 총이 있었답니다. 그 사람들두 화심총이라. 옛날에 쪼그만 포 있지유? 청주 영문에 한 문 있었답니다. 집어넣구 뒤에다 불당기문 확 나가는 거 안있소? 메구 다닐려문 포탄하구 한 열 명이 따라다녀야 한답니다. 그걸 쏘구 그것 바람에 많이 놀래서 달아나구. 그걸 쏘면 여러 수십 명이 질신을 하구 놀라구. 옛날에는 남다리 내가 아주 넓어 지금 사범학교 중간까지 냇물이었답니다. 냇물을 두구 고만 거기서 엄청나게 싸웠답니다. 마아악 마악 동학 노래를 하구 여러 날을 싸웠답니다. 낭중에는 포가 나오구 그래서 쫓겼답니다. 남다리꺼정 밀려나와서 거기서 냇물을 앞두구 여러 날을 싸웠던 모냥유. 냇물을 건너갔다 건너왔다, 심지어는 던질 게 없어서 돌풀매질두 했다는 게비데. 막 육박전두 해서 서로 발로 차구 쎄려 붙으구 남다리를 며칠 만에 건너서서유. 뚝방으루 돌아나오구 사범학교로 들어가는 들판에 공터가 있지. 거기서 육박전이 벌어져서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 하대유.
거사 준비는 치밀했던 듯하나 농민군은 훈련이 안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완강한 반격에 쉽게 허물어졌다. 청주의 농민군 구성 내막은 이렇다.
주모자들은 있지요. 한 일년 전부터 계획을 짰었던 모양인데 만약에 말이 새고 비밀이 샐께비 일부 얘기두 안된 데가 있던 갑대유. 사람 됨됨을 봐가지구 포섭을 했지 모르는 사람은 몰랐는 갑대유. 청주 주위에도 믿는 사람이 있는가 보라. 그래두 건달로 댕기구 노름판에나 다니구 상놈이었던 사람들을 끌어모아가지구 한번 벌리는 식으루 했구. 막된 사람들 머슴꾼들 전부다 머슴꾼들 남의 집 행랑살이라구 하대. 서자들, 집에서 미끌어지구 삐뚤어져서 돌림받던 사람들, 잘되면 한 감투 쓰구 잘살 수 있구 우리두 양반이 되어 세상을 평등하게 살 수 있다구 했대유. 한번 입적이 되면 도새 발을 빼면 죽는다, 죽어두 같이 죽구 살아두 같이 살자구 했대유. 명단에 올라가면 거사에 빠져두 죽는기라 명단이 있으니께. 도통을 해서 앞날을 내다볼 수 있다구해서 들어온 사람도 있구. 마지막 판에는 머슴살고 건달패 댕기구 얄궂은 것들 이런 걸 죄다 싹 추려다가 도 믿는 사람들이 있지유. 생활 보장한다구 했대유. 좋다구 믿으라고 해두 안 믿는 놈은 공갈을 치구. 사람이 많이 모여야 깃대를 들구 총을 쏘구 몽둥이를 들지. 무조건 천대받는 인간들은 모여라 해서 사람을 꼬여서 많이 들어왔다구 아버지가 하대유. 그래가지구 도통을 하구 다 같은 인간대우를 받구 상놈두 양반 되구 세상이 평정이 되면은 우리두 출세할 수 있다, 과거길두 나갈 수 있다, 도통을 하면 벼슬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거짓말 아니요. 도를 믿으면 수수깽이 지팽이루다가 총나간다 하면 저쪽 총구에선 물이 나오구 이쪽에선 총알이 나간다, 도를 믿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가 없다, 난리가 나서 왜적이 쳐들어오구 옛날 임진왜란 같은 거 당한다, 주문을 많이 외워라, 소지를 많이 해라, 서로 만나면 맞절하구.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근거지가 기습을 받는다. 그런 뒤 강영문 일가는 호된 보복을 받았다. 남겨진 후손들이 심하게 고생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충청도 사투리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는 강대윤의 말로 듣는다.
아버지가 노가지봉에서 망보니께 남들로 새까맣게 개미 떼같이 영평뜰과 궁뜰 앞으루 도망했다네유. 동학군 옷은 갓 쓰구 행전치구 중이적삼을 입었는데 관군은 검은 옷을 입었답니다. 동학군은 얼마나 절단났는지 도망하는 뒤루 관군이 갈가마귀같이 새카맣게 밀려오더랍니다. 그 길루 동학군은 솔뫼 우리집으루 와서유, 식전에 새터와 용재에서 물을 몇 독 길어왔는데 동학군들이 한참 만에 다 먹어치우드락 해유. 신발과 무기는 있는 걸 전부 다 끄집어내 풀어서 식량이구 뭐구 참, 떡을 했더랍니다. 백설기를 말려가지구서유, 말려 뿌셔서 한 자루씩 넣어놨는데 그걸 있는 대로 다 퍼서 갈라주구 동암으루 문의 골짜기루 갔는데 그 질루 끝두 다 안 넘어가서 막 관군이 넘어닥쳐서 총을 막 쏘고 그게 새벽이랍니다. 솔뫼 넘어가는 길에 우리 산소 있지유. 거기 깃대 버리구 간 거 뭐 흘리구 간 거가 꽉 찼더라니께. 동암에 가 진을 쳐서 거기서 일부 또 싸웠답니다. 그 다음엔 보은 주성 창말에서 싸우구 내북면 세거리에서 되게 싸우구 헤어졌답니다. 영문할아버지는 피신하지 않구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할머니와 그 자리에서 죽어 불타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장사지냈지유. 마을이 불타서 시커먼 잿더미를 치우구 송장두 치우구. 아버지 동생들 둘은 행방불명되었답니다. 열 살난 딸 하나는 난리통에 경상도에서 온 사람을 따라가 머미의 노서방 재실에서 살구. 시집간 고모 둘은 역적 집안이라구 집안에서 흩뜯구 쫓겨 와서 움막처럼 해놓은 집에서 살다가 하나는 얼마 안되어서 목을 매달아 죽었대유. 이리저리 친척들 열두 명이 죽었대유. 아버지는 술을 한잔 하면 울었어유. 아버지는유, 속리산 쪽으로 들어갔다가 솔뫼에 오니까유 사람들이 너 어떻게 왔냐, 잡히면 죽으니 피해라 해서 저 오대산 월정사까지 가서 피했대유. 가는 길에 청주 육거리를 가보니께 날다리 싸움에서 죽은 동학군들을 불에 끄슬려 쌓아놓은 걸 봤대유. 냄새가 지독해서 주위에 사람이 없었대유. 월정사에 가서 중이 되어서 지내다가 왔는데 살 수가 없어서 뒤에 깽깽이라고 하던 양금을 켜면서 동냥하며 살았어유. 땅도 한 떼기 없이 중마냥 고깔쓰고 양금키고 문전걸식하니 큰집과 작은집들도 창피하다고 멀리 지냈어유. 그리구 불경과 함께 동학 주문을 외웠어유. 월정사 큰절에서 배운 게 또 있는데,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을 만드는 거하구 풍물하는 거래유. 아버지가유, 젊었을 땐 풍물판에서 제비처럼 날쌔게 놀았대유. 그러다가 어머니를 만나서 호적 신고도 하지 않구 살았대유. 아버지가 켜는 해금 소리에 홀려서 머리가 허연 영감한테 온 거지유. 아버지는 바깥으루 나돌구 돈도 안 벌어오구 풍물만 했대유.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키우느라구 고생했지유. 한동안 청주 변두리 영우리에 가서 방 한 칸 얻어가지구 있었지유. 해방되기 전까정 일본 순사가 큰 칼을 차구 와서 늘 살폈어유. 동학하던 사람 자식이라구 그랬대유. 그때 영운동 이웃집에 지금 현대 배구 이인 감독이 살았어유. 어머니끼리 잘 알아서 나하구 의형제를 맺어줬어유, 일본놈이 쫓겨간 해에 내가 여덟 살이었어유. 그때부터 가출을 시작했어유. 맨발로 조치원에 가서 쩨비차 타구 서울 갔지유. 남대문 시장에서 구두닦기 조수하다 혼자 있는 엄마가 생각나면 다시 쩨비차 타구 청주에 왔지유. 남의 나무를 도벌해서 팔기두 하구, 새우젓 장사를 하기두 하구 안하는 일 없었지유. 아버지는 이런 좋은 날이 올 줄 알았는지 나를 보면 수시로 옛날 일을 말했어유. 엄마가 없으면 불러서 물어보구 얘기해줬어유. 이리와 봐라 하시면 난 울구 뛰쳐나갔어유. 할아버지가 그렇게 잘살았다면 왜 우리는 먹을 것두 없이 배곯구 동네 애들이 놀리구 그러느냐구유. 지금은 삼천포에서 농사 짓구 살아유.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데 자식들에겐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을 해주지유. 사람 많은 데 가지 마라. 도장 찍어주지 마라. 무슨 도[道]든지 하지 마라. 그래야 산다.
강영문의 방손 순원 씨는 청원군 남일면 솔뫼마을에서 나서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이장을 여러 해 맡았기 때문에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 동학 관계 기록에 나타난 솔뫼마을의 내력 조사는 주로 강순원 씨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다.
남일면 솔뫼에는 옛날에 동학이 심했다고 해요. 동학하는 이들이 대청에 모여앉아서 주문을 외웠지요. 그리고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네것 내것 없이 음식을 만들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고 해요. 보은에두 갔었대요. 솔뫼에서 사람이 들끓다가 보은에 몰려갔는데 한 관원이 연설해서 설득되어 헤어져서 왔답니다. 동학을 해서 크게 일으킨 사람도 인물이었고, 연설을 하여 설득해서 수만 명을 헤어지게 한 사람도 큰 인물이었다구 하대요. 어른들 말로는 솔뫼에 동학하는 이가 많아서 병정들이 몰려와 총을 쏘고 난리가 나서 피난했다고 합니다. 총을 쏴서 누가 배를 맞기도 했대요. 어느 할머니는 어린 손자한테 총소리 때문에 솜으로 귀를 막아주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1893년 보은집회에 참가해서 겪었던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참혹했던 솔뫼마을의 보복행위는 단지 몇몇 사건으로만 남아 있다. 그 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은 집안이었던 화수는 그때 청주병영 훈련대장으로 있었다. 그가 농민군을 치러 쳐들어온 것이다.
사실 자기 벼슬하는 바람에 자기 집안 쳐들어와 가지고, 딴쪽에서 신고해가지고 간 거예요. 때려부수고, 일부 죽고. 그라고 불지르고, 우리 사당 다 때려부수고 했어요. 나중에 [군대가 해산되자] 또 인명피해가 날 수가 없어서 불러들였다는 거여. 팔도에 있는 병사 기질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여가지고 “너희들 싸워서는 안되니까, 싸우면 사람만 많이 죽고 동학 때도 많이 죽었는데, 일본사람하고 싸워서 도저히 이길 승산이 없는데. 무장을 해제시키는 대신에 벼슬을 하나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재물을 요구하면 재물을 주든가 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그랬대요. 그러니까 이이[화수]는 말이유, 나는 벼슬도 싫고 돈도 싫고. 무장이 말이유 무기 버리고 한 사람이 그까짓 거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술이나 실컷 먹게 해달라고, 나 그거 소원이라고. 그러니께, 고종 황제가 웃으면서 그러냐고 하면서 주패를 줬대유. 그걸 가지고 이 양반이 망나니 짓을 했어요. 그래서 자식도 못 두구 그냥 무해버렸어요. 내가 육이오 직후 청주가 수복된 다음에 시내에 있는 제일교회에 나갔더랬어요. 당시 엄경술 목사를 집에 모셔다 집회를 열었는데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시고 저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교[敎]라는 게 되지 못했다는 거지요. 일을 할 생각은 안하고 뭐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무슨 교고 있는 놈은 더 내고 없는 놈은 나누어 먹기만 하는데 종당엔 잘살 수가 있느냐고 그러셨어요. 옛날 동학이 그랬답니다. 아버진[姜大奭, 熙東, 1888년생] 일곱 살 때 동학 난리를 만났다고 해요. 영문할아버지는 제 방조되시지요. 동학접주를 하셨는데 솔뫼에서 아주 잘살았대요. 그 윗대 어른이 오장 벼슬도 했어요. 유명한 한의사라서 침을 놔주고 부자로 살았대요. 동학 난리 때 그 집이 뒤집혀서 쑥대밭이 되었지요.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처형되고 처형된 이의 부인되는 분은 목을 매어 자살했답니다. 그 손자에 강대윤이란 이가 있습니다. 나보다는 나이가 한 살 아래지만 아저씨 항렬이지요. 지금은 시사 때나 만나고 하지요. 그 아저씨가 참 고생 많이 했어요. 청주서 나무 장사하다가 지금은 삼천포로 가서 자수성가해 잘삽니다. 그 아저씨 아버지가 동학 난리를 피하느라고 강원도 월정사에 가서 오랫동안 있었다고 해요. 거기서 나와선 양금을 키고 다녔어요.
내가 쪼그만할 때 직접 봤지요. 어른들은 깽깽이 치며 동냥이나 하고 집안 망신시킨다고 멀리 지냈어요. 이 마을은 옛날에 솔뫼였는데 지금은 신송리입니다. 송산리하고 다른 마을하고 합해서 신송리가 됐지요. 소나무가 참 많았어요. 아름드리 나무가 마을을 둥그렇게 감싸서 보기가 좋았지요. 잘사는 강씨들이 많아서 부촌이었다고 해요. 마을 앞에서 남들로 나가면 바로 산 밑으로 있지요. 거기가 옛날 큰길이었답니다. 청주에서 보은 가고 문의 가고 하는 큰길이었대요. 솔뫼는 이 길에서 조금 돌아 들어오는 곳에 있는데 장꾼이나 길손들이 지나가다가 쉬러 오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빨리 전해들을 수 있었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함자가 영자 수자신데 선비라 일을 안하셨습니다. 밭이 많았어요. 밭농사는 주로 목화니 콩이니 들깨니 팥이니 했지요. 목화를 많이 하셨댑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힘들게 길참을 했지요. 지금 논 이십 마지기에 밭이 한 육칠천 평 되지요. 산도 삼 정보가 있고. 지금 이 마을은 행정구역이 개편돼서 신송리라고 부르는데 신송리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냈지요. 강씨 종가는 동학에 같이 어울리지 않아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