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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동학운동’에 가산 탕진한 이성천, 손자 용우
대상인물

이성천(李聖天)

1873~1915. 본관은 전주. 호는 영암(靈菴), 자는 영규(榮圭). 서산군 이북면 당산리에서 태어나 1890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3년 보은 집회에 참여. 1894년 10월 태안에서 기포하여 홍주 전투(10월 28일)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피신하여 천안 광덕산에 은거하였다가 솥[鐵鼎] 행상 등을 하며 생활. 후에 충남 예산에 정착.

증언인물

이용우(李龍宇)




1936~ . 이성천의 손자로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도교 예산교구장으로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이성천은 전주 이씨 효령군파의 후손으로 선대에는 벼슬한 조상들이 많았지만 후대로 올수록 벼슬이 별로 없었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십삼대 손인데 이 양반으로 오대조가 대영[大榮]으로 좌승지를 했다고. 병자호란 때 난리를 만났으니까 인천에서 배를 타고 낙향하신 데가 서산이지. 그런디 수복 후 상경하라고 하니까 신하는 임금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야 하는데 나만 혼자 살자고 내려왔는데 무슨 염치로 올라가겠느냐. 거기서 계속 낙향을 했지. 창원 황씨를 얻어 후손을 얻었지. 거기서 계속 살다가 이 양반이 동학운동으로 나왔지. 이 양반이 삼대 독자요, 후손이 우리밖에 없어. 우리게로 팔촌 정도는 있지만, 가까운 친척은 없어요. 그 이후로는 벼슬하신 분이 없지요.

그래도 이성천이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비교적 넉넉하였던 듯하다.

이 양반이 태어났실 때는 살만 허셨지. 당산리 대추나무집에서 탄생하셨다구. 집이 커요. 아마 거기에서 생활이 부락에서 상위권이지. 그러면서 재산을 다 바친 거유. 동학운동하느라 가산 탕진했지. 다 내버리고 나온 거유. 재산이 아마 논섬지기나 됐을 거유. 논섬지기면 한 천 평 되지유. 스무 마지기니까.

동학에는 이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박덕칠을 통해 일찍부터 입도하였고, 같은 동학교인을 통해 결혼하기도 하였다.

이 양반이 어려서 조실부모하시고 상당히 말이 대단하시고. 글은 한학 하셨지. 사서삼경까지는 못 읽고 소학까지는 떼어가지고 아마 유식했던 모양이유. 한학에 있으니께 빨리 뭣했지. 그런디 포덕, 입교를 헐 때 박덕철씨가 염주를 걸고 꽹과리를 치면서 중 행세로 동학 포교를 했어유. 그 양반이 중 행세로 목에다 염주를 걸고 꽹맥이를 쳐대며 집집마다 포덕을 하며 다녔거든. 그래서 그때 포덕이 됐지유. 그렇게 돼서 김상배 씨를 알게 됐지. 부인이 김상배 씨의 종매여. 김장현 씨의 여식인데 할머니가 승자 규자유. 그런디 김상배 씨의 사촌동생이거든. 그러니 김상배 씨하고 김장현 씨하고 족질간이지. 김상배 씨가 서산 방갈리 접주유. 그러니 접주의 사촌동생을 얻은 거유. 그래 보니까 상당히 성격이 과감하고 명변이거든, 변론이 밝고 그러니께 동생을 준 거지. 결혼해놓고 이내 동학운동에 나왔거든. 그런게 이 양반은 젊어도 당산리 접주여. 이원면, 그때는 이북면이지, 당산리 접주라구. 방갈리가 처갓집이고. 그린디 방갈리서 서산에서는 최초로 기포했거든. 연결이 그렇게 된 거유.

일찍부터 동학에 가담한 인연으로 이성천은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한다.

신원운동기 때는 마을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간 거지. 따라두 가구 데리구두 가구. 그래가지고 갑오혁명 때는 방갈리 기포할 때, 거기 당산리도 거기는 원북면이고 여기는 이북면이라 이웃 면이유. 거기서 휩쓸려서 기포해서 나온 거지. 당산리서 기포해가지고 방갈리로 와요. 거기에서 해미 여미 평야로 나오지. 그래서 승전곡[면천]에서 대승하고, 거기서 인제 당진, 면천 읍내, 합덕 이렇게 해서 승승장구해서 신례원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러고서 덕산 거쳐서 홍주 들어갔었지요. 홍주 전투에서 패하자 달산 쪽으로 도주해 가지고, 매현 전투까지 참여했다가 거기서도 패하니까 고향으로 숨어들었지.

9월 그믐부터 본격적으로 기포하기 시작한 이 지역 농민군들은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홍주성을 압박해갔는데, 이때 가장 대승을 거둔 곳이 바로 해미 승전곡 전투와 신례원 전투였다. 바로 그 승전곡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다음에는 여느 농민군과 마찬가지로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고, 그 고통은 그의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지. 갑오혁명 이후 다시 고향으로 은신하니까 거기에서 동학군을 마구 잡아다가 작두로 막 처형시킨다 이거여. 그래서 밤에 동학 믿는 여러 사람들이 배를 타고 저 광천 독배로 나왔다고, 서산서 배를 타고 안면도 아래로 해서 광천에 도착했지. 그래가지고 공주 사곡면에서 피신하다가 천안 광덕산 만복굴에서 움막을 짓고 은신했대요. 다음해에 방갈리로 가가지고 방갈리 처갓집 식구들하고 배타구서 그냥 광천으로 해서 만복굴로 데려간 거유. 그 후로 목천 등지로 다니면서 보부상, 철정[鐵鼎] 행상[솥장사]으로 포덕하면서 연명했대요. 만복굴에서 장사를 하고 조금 나아지니까 서산 가서 할머니를 모셔왔지. 거기서 살다가 여기 무한 천변[신암면 탄중리]으로 낙향했지. 그래서 무한 천변에서 자리 잡고 살면서 포덕 운동을 하다가 을묘년[1915년]에 피습당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니께 척양척왜 사상이 상당히 강인하거든. 그래서 돌아가신 거지요. 그런데 그 후로 후손이 문제지. 큰아들이 을사생[1905년]이유. 만 열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러고 작은아들이 신해생[1911년]이거든. 신해생이니께 만 네 살 때 돌아가셨어. 그런디 큰아들이 회환 씬디 도저히 가정을 이끌어갈 수 없으니까, 어머니하고 작은 아들하고 김상배 씨네 집에다 갖다놔유. 그리고 자기는 나와서 탄중리[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서 머슴살이 하고 그러다가 자기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들어갔는디, 열네 살까지 거기서 키워유. 꼭 십년이지. 여기에서 경전 공부를 하구. 그 양반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아주 경전에 통달했어유. 작은아들이. 김상배 씨한티 배워 가지구. 그래서 동학사상이 상당히 도가 깊어, 자기 동생을 열네 살 때 데려다가 정씨네 집에서 고용살이를 한 거지. 그 집이서 밀양 박씨하고 혼인시켜줘. 그래서 여기에서 딴살림 나가지구 우리 형제를 낳은 거지. 작은아들이 회문인데 우리 아버지유. 아주 이 양반도 도가 밝아가지고, 도를 배워서 상당히 명변이유. 그래서 여기 육이오 동란 때도 다 그 어려운 사람들 인명을 구제해유.

그러나 농민전쟁에 가담한 탓으로 당했던 고통은 이후 이들 가족으로 하여금 세상살이에 ‘요령’을 깨우치게도 하였다.

[아버지는] 여기에서 아주 부락에서 신망을 받았어유. 다 형님이라구 했다구. 지금도 다 아버지 의형제들이라 전부 내가 아저씨라고 하고, 나보고 다 형이라고 그러고 그러지. [그들이] 상당히 도움을 받아서[그런 것이다]. 육이오 동란 때 죽을 사람들 많았거든. 다 얘기 해가지고 많이 넘어갔거든[‘공산당’을 안했다는 말]. 그게 다 공산당에 휩쓸려갈 사람들, 가지 말아라, 아무 당이라도 [가지 말아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께 그것이 해방되고 나서 정당에 가입을 안해유. 이 양반이 정당 가입허는 사람 있으면은 말려유. 왜냐하면 동학당인디 어디 가입할 수 있느냐 이거지. 절대 당은 말리지[어느 당에라도 들어가면]. 죽는 당이다 말이지, 절대 들어가지 말아라. 그래 여기서 절대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아. 그러고 집의 쌀 같은 거 다 노놔서 함께 먹었는데, 그렇게 생활을 했지. 없어도 교육열은 강해, 동학물 먹어서.

이성천의 ‘뜻’은 훗날 그의 아들이 3·1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다시 살아났다.

체격이 장대하셨어요. 키는 구 척이 다 됐어. 풍신이 상당했지. 큰아들이 그렇게 닮았어. 큰아들 혜환 씨는 천도교 예산교구장이었시우. 이 양반 밑으로 내가 대신하지. 이 양반 성격이 대단해. 열네 살 때 만세 불렀어. 신례원 주재소 가서 사흘 동안 구류 살기도 하시구. 열네 살 땐가, 목욕하다가 을사생인께, 목욕하다가 빨개벗고 만세 불러가지구 주재소에서 얻어 맞아가지구 입까지 비틀어져가지구 수염을 이렇게 길러가지구 댕겼시우. 얻어 터져서 입이 비틀어졌다고.

이성천의 괄괄한 성격은 고통을 당한 이후에도 여전하였으며, 그 성격 탓으로 일제시기에도 일경의 미움을 사다가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본인의 육혈포에 쓰러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양반이 성격이 상당히 괄괄해유. 그래서 독립기념관이 있는 목천에서 솥장사를 하다가 여기 나오면은 갯벌, 무안천 여기는 그전에는 물이 드나들었어유, 배도 들어오고 그랬다구. 밭을 일구면은 농사지어먹고 실컨 허겄다구 이리로 여러분이 이접하셨다구. 문원정 씨 할아버지, 조석헌 씨 선친, 문장준 씨 등이 같이 나와서 했는데. 여기서 인제 예산 지역의 포덕을 하다가 을묘년[1915년]에 육혈포를 매고 온 무장한 왜인이 조선사람하고 섞여서 한 네 명이 왔대. 네 명이 와서 육혈포를 들이대고서 그냥 쏘고 갔시유. 민족운동하기 때문에 그랬겠지유. 그렇게 해서 돌아가셨지요. 그때 배경을 지금 조사중이여, 이교장 선생[이상재, 예산군 오가면 신양리 임성중학교 교장]은 유적, 화적이 그리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는데, 이 양반이 워낙 성격이 활달하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배일사상이 농후하기 때문에, 그때는 여기에 헌병댄가가 와 있었대. 그 사람들이 연결되어가지고 죽인 거 아니냐 보는 거지. 괴한들로부터 피격당해 돌아가셨으니까. 그때는 경술국치 오년 후거든.

농민군 이성천의 후손들이 살아간 최근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고생은 말도 못해요. 왜정시대 보면요. 요시찰 인물이여. 요시찰 인물이라 한 달에 한 번씩은 개인 방문해 와서 뭐 묻거든. 또 사대기념[천도교의 기념행사] 때 꼭 와서 어디 가는가 물어요. 중앙총부 기념 보러 가느냐, 예산 지방에서 몇 명 가느냐, 누구누구 가느냐 꼭 와서 묻고 가거든. 그러니까 활동에 제한을 받아 함부로 말도 못하고, 전부 비밀이니까. 근께 오죽하면 애들 학비 주는 것까지 그렇게 고통받아도 말이지 남한테 윽소리 한 번 안하고 딴 사람이 저건 큰댁이서 학비 치뤄줘서 공부하는 형제라는 소리까지 듣고 그랬다니까. 그래 왜놈들이 와도 꼭 일러바칠 만하지. 요즘은 농사짓고 독서도 하고, 천도교 사업도 하고. 농사가 한 이천 사백 평, 밭 한 오백 평. 소가 한 여나무 마리 됐는데 다 팔구 여섯 두인데. 내가 콩나물 장사해서 애들 가르쳤시우. 여기 보면 콩나물 온실이 있거든. 거기서 길러다가 배달해주고, 저 차가 석 대째 뽑은 거요. 이렇게 해서 소 팔아서, 콩 팔아놓고 그놈 쪼개서 애들 학비 주고하면 또 빚져. 그건 애들 교통비라든가 책값이라든지 이런 거라면 괜찮은데 등록금은 완전 빚이거든. 그러면 천만 원, 이천만 원 막 빚져유. 그러면 또 먼저 빠져나온 놈이 직장 잡고, [그 밑에 놈은] 군대 보내지 휴학시키구. 그동안 어쩌고 해서 빚 갚고, 또 어쩌구 해서 여태 세 번 고비를 넘겼다니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농민군 할아버지가 남긴 뜻은 지금도 한편으로는 이어지고 있었다.

[동학교인은] 사리에 두서는 알아. 동학인들은 세계정세에 밝고, 국내 정세에 밝아 그러고 할 일을 알아. 민족적 차원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되나. 그게 그러더라고 요새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다 대고 대포를 쏜다 이거여. 인공위성 말이여. 하늘이 무너진다 이거여. 하늘이 무너지면 사람이 어떻게 살 수가 있느냐 이거야. 근디 하늘이 다 오염되어 살래야 살 수가 없시우. 지금 물신한테 잡혀가지구. 사람이 물건을 만들었는디 물귀신[物鬼神]한테 잡혔거든. 핵무기를 만들어놨는데 핵무기 공포 속에서 사람이 떨고 있다 이거유. 근께 지금 북한하고 미국하고 야단 아니유? 세계가. 그런께 이 핵무기, 물귀신의 위력을 벗어나려면 시천주 사상이 되어야 한다. 개벽사상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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