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월출산 아래에서 처형당한 김재득, 손자 찬영
대상인물

김재득(金在得)

1861 ~1894. 본관은 청주. 자는 인섭(仁攝). 1894년 12월 17일 사망.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동령마을 출신으로서 강진·장흥 전투에 농민군으로 참여. 월출산 불티재에서 체포. 영암 회문리 앞 용암마을 옆에서 볏짚 유지기를 쓴 채 처형당함.

증언인물

김찬영(金贊永)




1921~ . 족보명은 민식(珉植), 자는 찬영(贊永). 김재득의 양손자, 서울 거주.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이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갑오년이 저물 무렵 마지막 불꽃처럼 타올랐던 장흥·강진 전투의 격전지 출신인 강진 성전면의 농민군 김재득. 그의 손자 김찬영이 들려주는 고향 이야기다. “내 고향이 전남 강진인데요. 지금도 거기가 내 고향이예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동령마을. 거기가 나로 해서는 십삼대째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지요.” 타성받이도 섞여 있는, 대개 알 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동네였다.

광산 이씨가 같은 마을에 살았었어요. 주로 광산 이씨, 청주 김씨였는데 광산 이씨도 별 벼슬이 없는데, 저 윗대에 가서 승지 벼슬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 하나 틀린 점이 있어. 우리 윗대에 가서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공을 세우고 한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아주 윗대이고 거기도 아주 윗대이고. 그리고 숫적으로는 우리가 약세였어요. 지금도 그렇고.

김재득의 먼 윗대 이야기는 접어두고, 농사만 지으며 그럭저럭 사는 일반 농민들의 보통 삶이었다. “농사라는 것은 중농이라고나 할까 소농이라고 할까 그러한 뭐시기한 층이예요. 소농이지.” 그래도 한문을 익혀 선비와 출세를 꿈꾸었던 모양이다. “증조할아버지가 한문을 많이 해서 외부에 가서도 머시기를 하셨는데 자연히 그분 아들이니까 잘 하셨겠죠.” 그래서 김재득은 벼슬길에 미련이 있었던지 과거에 응시했던 사실을 들려준다.

무슨 출중한 벼슬하신 분이 없어요. 그래서 이 할아버지가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셨는데 거기서 낙방을 하셨어요. 그런데 낙방하고 살펴보니까 이씨 조정이 아주 부패해가지고 뒷거래가 없으면 무엇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것을 한탄하고 분개한 적이 있었대요.

부패의 현장을 본 김재득의 분노는 당연한 것. 한양에 갔을 때가 “서른네 살 때 갑오년에 순절하셨으니까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이 될 테죠.” 갑오년 얼마 전이다.

그 상황을 보니까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더래요. 뒷거래가 아니면 안되니까. 세상이 이러면 되겠냐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마을이 유난히 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돌아가신 선친께서 말씀하시는데 동학에 대해서 전마을이 노소가 동학을 해서 무슨 주문을 외고 그래서 득실득실했다고. 첫날에 한문서당에서 글읽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대요.

분개한 김재득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목한 것은 동학이었던 것 같고, 거기에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바로잡을 방안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리고 또 마을 전체가 동학에 휩쓸리는 형편에서 김재득의 선택은 불문가지였을 것이다.

언제 [동학에] 가입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마을이 몇 년 전부터 너도 나도 없이 했다요. 노소없이. 그래서 주문 외는 것이 동네가 들썩들썩했다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보면 그런 분위기에서 벼슬해서 떠나는 썩어빠진 이도 있고 그런 데서 발벗고 나선 것 같아요. 그런데 마을에서 희생당하신 분이 우리 할아버지뿐이야. 이 양반이 성격이 어쩐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시세에 따라 살았는데 이 양반 혼자 적극성을 띠었던 모양이여.

그리고 농민군으로서 갑오년 강진·장흥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당시 강진 농민군 김재득이 참가했을 강진·장흥 전투 상황을 살펴보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여 농민군이 뿔뿔이 흩어질 무렵, 이방언 장군 지휘하의 농민군 1천여 명은 장흥, 장평, 사창(社倉) 일대에 둔거하고 있다가 12월 4일 오전 8시쯤 벽사역을 들이쳐 점령하였다. 이어 농민군은 12월 5일 장흥부의 장령성(長寧城)을 에워싸고 총공격을 펼쳐 성을 점령하고 농민군의 깃발을 꽂았다. 장령성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의 농민군들은 속속 장흥 쪽으로 집결해와 다음 공격목표를 강진현과 병영으로 잡았고, 농민군은 공략하기가 쉬운 강진현을 1차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12월 7일 오전 8시쯤 사인점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이 강진현을 들이치자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나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는 핑계로 달아나고 말았다. 농민군은 이런 허점을 찔러 동문과 남문을 부수고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농민군은 강진현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10일 새벽 2시쯤 강진, 장흥 양 방면에서 압박해 들어가 병영성의 사면을 포위하였다. 농민군이 병영을 둘러싼 세 봉우리를 먼저 점거하여 일제히 발포하고 성 앞의 목책(木柵)을 불지르며 성가퀴를 올라가자 수성군은 스스로 무너졌다. 성안에서 벌벌 떨고 있던 병사 서병무는 두루마기 차림에 패랭이를 쓰고서 피난하는 사람 틈에 섞여 영암 쪽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깡그리 불타 잿더미가 된 병영은 1895년에 폐영이 되었고, 지금은 병영 국민학교로 변해 있다. 김찬영의 증언은 이 대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집하고 병영하고 거리가 십 리 반인가 돼요. 가까운 데요. 내 외가가 작천면인데 병영하고 우리집하고 중간지점에 있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외가에 가면 병영함성이라고 어쩌고 그런 얘기를 해요. 불을 질러놨고 하늘이 진동하도록 활을 쏘아대고 그랬대요. 병영함성하는 것을 어렸을 때 자주 들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나주의 관군은 일본군 제19대대 대장 미나미(南小四?) 소좌의 지시에 따라 세 길로 나누어 강진으로 진격했다. 한 길은 영암 쪽, 한 길은 장흥 쪽, 한 길은 능주 쪽을 택했다(「순무선봉진등록」 12월 12일조). 이때 북상하려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남하함에 따라 방향을 바꾸어 장흥에 집결하였다. 엄청나게 그 수가 불어난 농민군은 남문 밖과 건산리 뒷산 모정등(茅亭嶝 : 지금의 장흥고등학교 뒷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과 일차 접전하고 퇴각하였다. 다음날 새벽 수만 명의 농민군이 다시 성 밑으로 집결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관군의 신식 무기에 밀려 퇴각하였다. 15일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장흥읍에 도착하여 좌선봉 이규태의 통위영군과 합세하였다. 이제 농민군과 관군의 대회전은 피할 수 없는 외길 수순이었다. 농민군은 용산(蓉山)·웅치(態峙)·부산(夫山) 세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통위영군은 북쪽 주봉의 농민군을 막고 교도중대와 일본군은 성 모서리 대밭에 숨어있으면서 20~30명의 민병을 내보내어 농민군을 산에서 석대들로 유인케 하였다. 주변 계곡에서 내려온 농민군이 민병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석대들 전투는 화력에 밀린 농민군의 패퇴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김재득은 일본군과 관군에 쫓겨 고향이 있는 성전면 쪽으로 몸을 뺐던 것이다. 그러나….

갑오년 때는 그 양반이 월출산 부치재[화치재]에서 일본군과 관군한데 체포되었대요. 현재 영암하고 강진으로 국도인데 재를 넘어가요. 옛날에는 큰 동네였어요. 후퇴하다가 관군 일본군한테 체포되었다고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 속에서 동학에 대한 증거가 나와버렸어요. 그래 변명할래야 변명할 수가 없었다요. 당시 체포되어서 순절한 날인 제사가 섣달 열엿새니까 그러면 17일날이겠지요. 제사는 하루 앞당겨서 새니까. 거기에 참전해서 싸우고는 바로 나주에 있었던 일본군 수비대의 화력에 밀려서 병영은 다시 재탈환이 며칠 사이에 되었던가 봐요. 그런데 화치재에서 할아버지하고 두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이참에 증거를 수집해서 내려갔어요.

할아버지의 전투 참가를 증명하고 그 후의 행적을 밝히려는 김찬영은, 늦었지만 고향을 찾아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가닥을 발견하고 100년 전의 사실을 그런대로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내가 보첩을 할려고 내니까 우리 집안의 나보다 한 십년 수하의 문중일 보는 그분이 바로 이웃집에서 살았는데 거기도 처음 들은 일이거든요. 그래서 집안에 모두 알아보니까 모두 모른다 한단 말이예요. 이것이 한 칠 팔년 전만이라도 돌아가신 분이 안 돌아가셨어도 괜찮았겠는데 깜짝 놀랬어요. 그때 누구누구 고모 아들이지 손자나 아들이나 딸이지, 기순이나 누구누구 온 사람이 그 어머니가 나로 해서 고모 아니요. 그 고모가 그 할아버지 딸이요. 그런 딸인데, 아, 그러냐고 내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랬어요. 이 마을에 아흔두 살 잡수신 어른이 계신데 내가 그 자제 분한테 전화를 했어요. 이 사실을 한번 알아봐달라. 알아봐달라고 하니까 자기 아버님은 어려서 출생을 했는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가로 들어가서 커나서 어렸을 때는 잘 모르신다 그러셔서, 그러면 우리 할머니가 범골댁이다, 그 양반 범골댁인데 과수로 지냈거든, 아는가 알아봐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노인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희미하다고 그래요. 내가 올 봄에 유족회 결성 뒤에 진외가에 가봤어요. 생전에 가보지 않았고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어요. 호동마을이라는 소리만 들었지. 그래 진외가에 아저씨 되는 내외가, 내가 서른몇 살 때, 내가 집에 없었을 때 다녀갔다는 소리를 듣고 이름만 가지고 그 마을을 찾아갔어요. 내가 수첩에 이름은 적어봤으니까. 전화를 해보니까 일일사로 물어도 안돼서 그 관할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서 내가 호동마을의 아는 사람을 찾는데 전화번호를 알 수가 없으니 호동마을 이장 전화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마침 호동마을에서 나오신 분이 계세요. 그래서 그런 얘기하면서 내가 아무개를 찾는데 전화번호를 찾으니까 안 나와 있다 하니까 그분은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구요. 그 사유를 이야기하니까 마을 몇 사람 전화번호를 가르쳐줘요. 이 사람들한테 연락하면 알 거라고. 그래서 이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내려갔어요. 내려가서 만나보니까 할아버지가 부치재에서 잡혀서 영암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가서 그 영감을 만나서 마을회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마을 아무개하고 같이 잡혔었대요. 끌려와가지고 그 마을에서 같이 잡힌 사람은 빠져나오고 우리 할아버지는 영암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더라구요. 거기가 어딘고 하니 영암 회문리 앞 용암마을 옆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때 현지답사했죠.

할아버지가 불티재에서 체포되어 영암에서 처형당했다는 그 소중한(?) 말이 불면 날아갈까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어하는 손자 김찬영이다. 그래서 김찬영은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분한테 그랬다는 사실이라는 증거를 하나 써주시요. 그러니까 그러자고 써줘서 도장 찍어줬어요. 내가 직접 만나서 증언서를 받았는데, 이 증언서가 여기서는 틀림없지만 다른 데 가서는 내가 가도장을 파서 했는지 누가 알겠소. 그러니까 인감증명을 첨부해주시요, 그랬어요. 그때는 볼펜으로 썼는데 볼펜이 하도 초라하니까 인쇄를 해서 다시 가서 그분한테 도장을 받았어요. 그래서 거기 순절한 장소를 알게 되었고, 거기가 영암읍에서 목포로 가는 국도 중간에 회문교라고 있어요, 그 마을이 회문리여. 그 마을에 월출산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있는데, 그 개천가에서 처형을 시켰어요. 볏짚 유지기를 씌워서 그 사람들을 처형했대요. 일본군이 관군하고 그 때 인근 주민 전부 모아놓고 구경시키면서. 엄포하느라고 그랬을 테죠.

이어 그는 “그 뒤에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어요. 거기서 너희 증조할아버지가 순절한 곳이다, 하고 큰절을 시켰어요“ 자식들에게도 확인시키는 절차를 빼놓지 않았다고 하니 그 과정이야말로 정말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

돌아가실 때 서른네 살 잡수셨는데 일곱 살 먹은 딸과 세 살 먹은 딸이 있었대요. 그러니까 고모님 두 분이 계셨는데 아들은 없고요. 여기가 할아버지고 할아버지 동생이 여기란 말입니다. 큰아버지가 여기고 이것은 우리 아버지예요. 여기가 출계 숙부 재득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양자로 갔어요. 형제분이시죠 아버지가 작은아버지한테 양자로 왔어요. 손이 없으니까.

족보를 내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상황을 설명하는데, 김재득이 죽고 나니 어린 두 딸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고, 김찬영의 아버지가 김재득에게 양자로 가 대를 잇게 되었다는 말이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까 증언해준 분이 전수철씨인데 진외가 마을 분이예요. 그분이 나하고 만나기 전에 전화할 때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시신을 우리집으로 모셔왔다고 그랬어요. 바로 여기가 진외가 마을이고. 그러니까 바로 연락은 왔던 모양이예요. 그러나 같이 잡히신 분이 이 마을 분인데 그러면 그때도 뭔고 하니, 우리 할아버지는 강진 사람이 영암으로 끌려갔으니까 객지고, 여기서는 아전들하고 교섭해서 빠져나왔다요. 시신은 그때 우리가 모셔와서 선산에 모시고 있어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어 무척 다행으로 여기는 김찬영은 그의 집안이 농민전쟁 이후 별로 피신을 다닌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따님이 두 분 계시고, 두 분 다 출가해서 거그도[첫째딸] 학산면으로 가고, 영암하고 가차운 데예요. 작은고모님은 바로 영암면으로 출가했어요. 그리고 일곱 살, 세 살 먹었는데 출가할 연령이 된다치니 시일이 많이 흘러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출가해서 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지는 얼마 안되고, 그 양반들이 다 친정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주 지극했어요. 내가 지금도 그런 것을 얘기하는데, 지난 음력으로 유월 초여드레, 지난 주 토요일이예요. 학산면에서 우리집 오는데 삼십 리 길이요. 교통이 불편한데, 언제든지 옛날에는 제삿날이면 멥쌀하고 닭하고 뭣이든지 가져와요. 제삿날이면 매년 그 고모님이 비가 와도 언제든지 오시니까, 길목에 앉아서 우리 마을 뒤에 돌무덤이 하나 있는데 요즘에는 그걸 보호한다고 합디다. 고인돌 무덤이라고, 거기서 보면 대략 그 시간[일정한 시간] 정도 되면 도착하셨어요. 그만큼 정성이 지극하셨어요. 작은고모님도 몇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큰고모님은 그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한 구십 이상 사셨어요. 목포서 내가 작은고모님을 찾아뵜는데, “내가 제사 때 고모님 생각을 했다. 제사 때면 오늘 저녁에 우리 아버지 제사라고 작은고모님이 생각하고 계실 거다고 그런 얘기를 했소”하니까. 고모님이 그날 저녁에 목욕재계하고 서울 가려다 말았다고 하시더라. 작은고모님은 일제 때 일본 대판서 사셨어요. 제사 때가 닥치면 보름 전에 제사 모실 돈이 와요. 그때 돈으로 십 원을, 쌀 반 가마니 좀 더 되는 돈을 보내왔어요. 큰고모님은 일정한 시간에 꼭 오시고 아버지, 어머니 제사도 있는데 누님 생각은 잘 안 나요.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때는 그 고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잘할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딸이었던 만큼, 만약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북쪽으로 두르고 산에다라도 큰절을 하시는데요. 동지섣달에도 남 부모들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니까 절실하니 느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고모를 회상하는 김찬영의 눈시울은 벌써 붉어지는 것 같다. 김찬영의 아버지는 모범적인 농군이었다 한다. “이런 얘기를 해요. 시장이 오 리 거리에 있는데 거기 한번 갔다오면 농사짓는 데 지장이 생기더랍니다. 하루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논에 가는데 빈 걸음이 없었어요. 한 번을 가더라도 벼포기가 넘어지면 세우고, 그만큼 농사에는 정밀하신 분이예요. 농사를 짓더라도 작황이 아주 우수하고 모범적으로 지어졌다. 시장 한 번 갔다오는 것도 아까워할 만큼 농사짓는 데 골몰했어요.” 그래서 약간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한다. 덕분에 김찬영은 “나는 태어나서 한문도 많이 읽었고, 학교도 다녔고, 젊었을 때 공무원 생활도 했고, 이렇게 늙고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서울은 약 삼십 년 전에 올라왔어요.” 이제는 그도 아들 세 명과 딸 넷을 둔 할아버지다. 그런 김찬영이 1994년 3월 3일 유족회 창립총회 기사를 보니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동아일보에 보니까 기사가 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발기인 총회였던 모양인데, 출가한 우리 딸이 전화해보고 나한테도 연락을 했는데, 대한극장 뒤 어디 어디로 골목을 가라고 하는데, 지금 보면 역사문제연구소였던 모양이제, 복잡하니 어디로 갈지 몰라 안 가버렸어요. 나중에 동아일보 보니까 동아일보사 별관 십칠층이라고 하니까 이것은 뭣이라고 할 것 없이 쏙 들어오더라고. 그래 찾아간 날이 3월 3일이었는데 가보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창립총회한 날이요. 그래서 그때 가입한 사람이요.

그래서 유족회 회원이 되었다는 김찬영.

할아버지가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이죠. 그래서 족보에 넣은 것도… 전남 장흥에 보청[譜廳]이 있는데, 거기까지 갈 수 없어서 대신 내가 세밀하니 만들어 보냈어요. 내 생각에 평소 우리 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그때 세상에는 개죽음 했으니까, 좌우지간 개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족보에 올라간 것이요.

할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김찬영은 가족들에게도 그런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해서든 전달하고 싶다. 그래서 올해는 큰마음을 먹고 가족과 함께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금년 식목일날 조카자식들하고 시골할아버지 선산에 갔제. 선산 벌초를 남한테 맡겨버리면 되겠냐 해서. 그리고 강진에 연락해서 [식목일] 전날 내려가서 영암서 자고 다음날 선산에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나무를 준비시키고, 순절현장을 가서 증조할아버지가 여기서 순절하셨다고 얘기해주고, 사진도 찍고, 족보이야기도 하고. 그 정도여요.

이번에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김찬영의 마음은 여느 때와는 달리 유난히 가볍게 느껴진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