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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섬진강에서 전사한 농민군 손상옥, 손자 용채
대상인물

손상옥(孫相玉)

1851 ~1894. 본관은 밀양. 자는 윤영(允英), 본명은 홍조(洪祚), 상옥은 호적명. 전남 광양군 옥룡면 계현리에서 출생하여 1893년 12월 22일 집을 나간 뒤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섬진강변에서 44세에 전사함.

증언인물

손용채(孫龍采)




1940~ . 손상옥의 손자. 1970년까지 광양에서 농사짓다 현재 자영업을 하고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1894년에 농민군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전투 역시 치열했던 곳으로 순천과 광양을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금구 출신의 김인배(金仁培)지휘 하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가 1894년 6월에 설치된 뒤, 이를 중심으로 농민군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영호도회소는 9월 1일 하동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항일전쟁에 들어가, 섬진강을 건너 서부 경남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영호도회소 농민군 부대는 승승장구하여 9월 17일 진주를 점령하였으나, 곧이어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진주와 하동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10윌 하순에는 섬진강 주변의 광양과 하동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최후의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크게 패한 뒤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손상옥은 바로 이들 전투에 참여해 전사한 장본인인데, 살던 곳은 “전남 광양군 옥룡면 계현리[행정구역으로는 죽천리 계현]”이다. 현재 그의 손자 손용채가 생존해 있어 손상옥과 그의 집안내력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 컸어요. 훤칠허니 남자다운 품위를 가졌지. 우리 아버지도 키가 크시거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키가 작어. 그래서 우리가 작지. 용모도 아주 남자답게 호탕하게 생겼다고. 계현리 우리 집안에는 대소가뿐이었어. 손씨들이야 많이 살지. 그런데 우리가 밀양에서 나에게 오대조 때 광양으로 오셨어. 벼슬은 특별히 한 것이 없고.

재산과 지식 정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전한다.

집 나가시기 전에 사신 것은 형편이 없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한문을 잘 하셔. 그래서 전번에 이상식 교수한데 갈 적에 우리 할아버지가 필사한 주역을 갖고 갔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때 한문에 밝고 그러니까, 요새로 말하면 학자지, 점잖으시고. 또 말타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의기심이 있고, 그런 성격이 있었던 모양이야. 향교에도 다니고. 그래가지고 일도 전혀 안하시고, 선비타입으로 댕기시니까 정보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 우리 사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고, 단지 오두막 하나 가지고 살았으니까. 그러다가 우리 아버지가 차차 커가면서 터전을 잡아가지고 살고 그랬지.

이같은 증언 내용으로 보아, 손상옥은 체격이 크고 한문에 밝은 가난한 선비(몰락양반)였으며 향교에 다닐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가 농민군으로 활동한 증거는 현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지 않으나, 손용채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가 갑오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한테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어. “느그 아버지가 이러고 저러고 해서 너 네 살 때 저 하동 쪽에 가서 돌아가셨는데”, 동학혁명이 일어나니께 우리 할아버지가 계사년[갑오년 전해] 12월 22일날 집에서 나가셨다는 거야. 그러고 안 돌아오셨어. 그 뒤 갑오년에 섬진강변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수소문을 듣고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등에 업고 그 현장에 가보니까, 사람이 즐비허니 수백 명이 죽어가지고 있더래요. 피투성이가 되고 흙범벅이 되고 해서, 우리 할머니가 할아버지 시체를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드래요. 그래 뭣을 알았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말타기를 좋아했어. 도포를 입고 댕기셨는데, 말안장에 올라가시다가 도포자락이 째졌어.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그놈을 꿰매서 입히셨단 말이야. 그것을 봐가지고 우리 할아버지라는 걸 알았지. 그래 찾아놓고 시체 운구를 할라고 보니 여자 몸으로 혼자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인가에 가서 인부를 두 명인가 사가지고 거기를 갔더래요.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좀 걸렸겠지. 그래서 가니까 전부 구덩이 속에다 넣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버렸어.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시체를 못 찾고 돌아온 거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집 나간 지 거의 1년 만에 들려온 비보, 어렵게 찾은 시신, 사라진 주검. 하동 쪽 섬진강변에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는 말은 손상옥이 농민군으로 참여하다 숨진 확실한 증거로서, 1894년 9월 29일 이후 특히 10월 19일부터 10월 22일 사이 광양과 하동을 잇는 섬진강 주변에서는 수차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죽었는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東學史)』에 의하면 이때 섬진강에서 죽은 자가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손상옥이 전사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섬진강 주변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농민군 주력인 김인배 부대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다른 어느 농민군의 후손과 마찬가지로 손상옥 후손들도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갖고 집에 와서 사는데, 관가에서 거기 참여했다고 해서 우리 할머니를 찾아다니고, 큰집에 가서 협박을 하고 야단이 났더래요. 큰집이 이 키로 정도 떨어져 살았는데, 우리집 오는 길초[길목]여. 그래서 큰집에 가서 상옥이라는 사람을 찾고, 요새말로 하면 수색을 하고 그랬던 모양이지. 그래서 그 집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피해를 보았던 것 같애. 그러니 큰집에서도 오지 못하게 해서 가지도 못 가고. 그래 우리 할머니가 겁이 나서 큰집에도 못 가고 작은집에도 못 가고 친정으로 어디로 다녔어. 그때는 생활 근거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워낙 없게 살고 험한 세상이다 보니까 어디 붙어 있을 수도 없고, 남의 집에 이리 저리 다니면서 품팔이도 하면서 먹고살고.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를 길렀는데, 우리 아버지가 어느 정도 자라니까 그렇게 아파쌌드래요. 그래서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보니까, 아버지 시신을 못 모시고 객사를 해놓으니까, 그것이 원한이 돼서 자식한테다 거시기 한다 그렇게 얘기를 허드래요. 그전에는 체백[시체]이 없으면 가짜 체백을 만들어서 한다드만. 그래 밤나무를 가지고 사람 형상으로 체백을 만들어서 우리 뒤에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다 모셔놨드래요. 그런깨로 그 뒤부터 그래서 그랬는지 건강이 회복될라고 그랬는지 안 아파. 체백을 거기는 동네라 못 모신다고 해서 다른 데로 이장을 했어. 현재 계신 곳으로 모셨는데, 그 뒤부터는 괜찮다고 그래. 그런 말씀을 할머니가 아버지한테 전하고, 아버지가 우리 데리고 앉아서 어렸을 적에 얘기를 하시드라구. 우리야 나중에 조용해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움막을 치고 살았어. 거기서 농사짓고, 대소간에 거기서 살고. 당내간에도 그 근방에 살고. 지금 젊은 세대들은 도시에 살지.

이처럼 손상옥 후손들은 직계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들도 피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시신이 없어 체백을 만들어 무덤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리저리 피해다니다가 나중에야 고향으로 돌아와 움막을 짓고 살 정도였다. 이러했던 손상옥의 존재와 그의 후손이 밝혀진 것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언론에서 크게 보도하고, 이를 본 손자 손용채가 조부의 행적을 찾아나선 데 있었다.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그간의 사정을 이렇게 전하였다.

그동안에 동학혁명에 가담했다는 것을 구전으로 전해 듣고 나서 통 명심을 안하다가, 근년에 광주에 있는 무등일보에서 등학혁명에 대해서 쭉 연재를 했어. 그걸 내가 보고, 우리 할아버지도 거기에 가담했다는디 행여라도 이름이 있는가 해서 항상 그걸 봤지, 그런데 몰라. 그리고 금년 봄에 엠비씨[MBC]에서 한 번 방송을 하더라고, 저짝 장흥 쪽에. 그래서 전화를 했어. 누구냐고 해서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그걸 좀 알고 싶다고 그러니께, 방송국에서 전남대 이상식 교수한테로 연락을 해주드만.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거기서 와달라고 그래. 서너 번 갔었어. 가서 사실대로 얘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길이 있냐고 그랬더니, 방송에 한번 응해서 내보내자고 그러드만. 그래서 금년 3월 31일날 8시 10분 엠비씨 목요광장에서, 저기 현장에 가서 대담한 것을 방송한 적이 있어. 그러고 이걸로 다 된 것이냐 하니까 아니다 이것이여. 그래서 전남대 세미나 갔었지. 거기서 장사장[장원석]을 만났고, 장사장이 김영중 회장[동학농민혁명유족회]을 소개해줘서 연락이 된 거지.

이와 같이 손상옥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가슴 속 깊이 묻어둔 한을 풀고자 하는, 그래서 선조의 명예회복을 꾀하고자 한 후손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손용채가 바라는 것도 역시 농민군의 명예회복뿐이었다. 그는 “바라는 것은 그분이 불명예스럽게 돌아가셨으니까 명예회복을 첫째 목적으로 삼고, 그렇게 마음먹고 추진을 했고”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함을 힘주어 말하였다.

우리 유족회가 운영이 될라면, 첫째 자금이 있어야 운영이 되잖아. 앞으로 유지될라면 자금 원천이 있어야 되니까,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야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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