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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법부 형사국 기안 法部 刑事局 起案
일러두기

광무 원년 월 일 기안 광무 원년 월 일 시행 대신 협판 형사국 제1과 주임 김창형(金昌炯) 형사국장 제1과장 제2과장 고문관 전라남도 재판소에 훈령하는 건 아래에 제시한 문건을 베껴 보내는 것이 어떠할지, 이에 재결을 바랍니다. 안(案) 제23호 귀 전라남도 재판소 보고서 제25호를 받아보니, “본 전라남도 관할 하의 광주군(光州郡) 부동방(不動坊) 양림리(楊林里)에 사는 정기우(鄭琪愚)가 건양 원년(1896) 12월에 원장(原狀)을 안고 관찰부 관정(官庭)에 와서 읍소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정순교(鄭洵敎)가 매우 애매하게 범치명(范治明)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살인범의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입니다. 살인 사건을 심리하는 일은 어렵고 신중해야 하므로 동복군수(同福郡守) 최준상(崔俊相)을 특별히 사관(査官)으로 정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복군수가 해당 사건의 초검(初檢) 및 복검(覆檢)의 원안(原案)을 철저히 조사하고 이웃들이 증언한 진술들을 다시 샅샅이 조사한 결과를 성안(成案)하여 보고해 왔습니다. 이를 토대로 본 관찰부에서 증인들의 진술을 상호 참조하고 인범(因犯)을 집정(執定)하여 이치를 따져서 알린 지령에, ‘이를 조사하니, 사건에 의혹이 있으니 비록 열 번이라도 조사하여 반드시 사실을 파헤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정범피고(正犯被告)는 우선 논하지 말고, 고주(苦主)가 범인으로 지목하는 자는 바로 딱 한 사람 정순교인데 오랜 동안 법망을 피해 달아나서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지령이 도착하는 즉시 특별히 더욱더 기찰하고 탐문하여 체포하는 대로 즉각 보고하기 바랍니다. 그 유사한 것을 명목에 바꿔 넣으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 어찌 흠결이 없겠습니까? 수감되어 있는 정기우는 풀어주고 그 아들 정순교를 특별히 더욱더 기찰하고 탐문하기 바랍니다.’라고 해당 광주군에 훈칙(訓飭)하여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7월 일에 정기우의 소장을 받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옥사(獄事)는 사람 목숨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가 남에게 피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고 산 자는 억울하게도 살인자의 누명을 쓰게 되면 비록 이승과 저승이 다르다 할지라도 어찌 죽은 자와 산 자가 주륙(誅戮)하는 이치가 없겠습니까? 범치명이 갑오년(甲午年, 1894) 12월 일에 조포(租苞) 문제로 비괴(匪魁) 백반석(白半石)의 진술에서 흘러나와서 관가에 체포된 적이 있습니다. 범치명은 10여 년 동안 저희 집 논의 마름[舍音]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같은 달 16일 해질 무렵에 저의 아들 정순교를 찾아왔습니다. 이날 정순교는 군수 책실(冊室)의 생일 잔치에 가서 부재 중이라 범치명은 저에게 백반석이 빼앗긴 조포를 도와줄 문제, 관가에 체포된 내력, 무사하게 주선해 달라는 사안 등 몇 마디를 부탁한 뒤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동이 트기 전에 범씨들 30여 명이 범치명의 시신을 둘러메고 정순교를 지목하여 관아에 발고(發告)하였습니다. 검험(檢驗)할 때 시신에 아무런 상흔이 없었던 점을 여러 사람들이 보았고 하늘의 태양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검관(檢官)이 형리(刑吏)들에게 분부하며 「이같이 실질적 증거가 없는 사건을 어찌 성안(成案)한단 말인가? 한번의 보고로 결단할 수 있는가?」 운운한 것을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보고 들었습니다. 또 이웃들의 증언에 진술된 것을 보더라도, 범치명이 해질 무렵에 저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정순교를 만나지 못하고 저와 더불어 잠시 이야기한 뒤 돌아간 상황은 증언이 분명합니다. 범치명이 그날 밤에 술에 취해 서문 밖 냇가에 거꾸러져 있는 것을 수성군(守城軍) 송순지(宋巡之), 조영중(趙永仲)이 돌아오는 길에 똑똑히 보고서 그 아들 범현식(范玄植)을 찾아 촌점(村店)으로 업고 들어가 구호했으나 소생시키지 못한 사실은 진술 내용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구타를 당했다는 무함은 허망한 결론으로 귀착되고 범치명의 죽음이 정순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저절로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판에 가서는 절린(切隣)인 김판복(金判卜)과 이춘화(李春化)에게 형(刑)을 시행하며 억지로 문초하여, ‘구타를 당하여 죽음’으로 논하고 ‘정범(正犯)’으로 단정지어 갑자기 옥안(獄案)을 뒤집어 이같이 천만으로 애매한 사람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악명(惡名)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금석(金石)은 갈아 없앨 수 있으나 이 악명은 없앨 수 없습니다. 천신(天神)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추후의 복검(覆檢)이 한결같이 초안(初案)과 같게 되어, 이렇게 중요한 문서를 저렇게 공정하지 않은 문서로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극도의 원통함을 여섯 차례나 전주감영에 호소했으나 아직까지도 다시 심사하여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법부에 호소하니 제사(題辭)를 내려주었고 그것을 수령하러 내려왔습니다. 저의 아들 정순교가 6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악명을 벗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저와 범치명이 이미 접촉하여 얘기를 나눈 적이 있으므로 이러한 죄로 범치명 사건에 연루된다면 혹은 원통함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범치명과 정순교가 피차간에 풀어주기 어려운 악명을 갖게 된 것을 보지 않는다면, 비록 범치명의 귀신이라도 유죄(有罪)요, 정순교의 귀신이라도 유감을 품게 될 것입니다. 법부의 제사를 곧바로 전주부(全州府)에 바쳐서, 광주군에서 심사하고 또 나주부(羅州府)에서 재판하여 범치명의 아들 범민식과 초검, 복검의 형리들과 3자 대질한 후 앞뒤의 정절(情節)을 다시 샅샅이 조사하여 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부에서 또 훈령하기를, 나주부에서 광주군으로 다시 조사하라는 훈령을 보내어 당시의 중요한 증인들에게 직접 진술을 받아서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안(斷案)을 받지 못하자, 병신년(丙申年, 1896) 9월 일에 다시 관찰부에 원통함을 호소했더니, 동복군수를 사관(查官)으로 정하여 사건 당시 질문에 응했던 각각의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조사하여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범가의 식주인(食主人) 전철문(全哲文)의 진술 내용에, 그날 밤 ‘죽은 지 이미 오래된 범치명의 시신을 왜 우리 집에 메고 왔느냐? 즉시 퇴송(退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치명의 아들이 말한 이른바 「살아나서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의원(醫貟) 천성재(千成在)가 진술한 내용에, 12월 26일 밤에 범덕중(范德仲)이 ‘길을 가다가 협체(挾滯)한 사람이 있으니 급히 약을 써야 한다.’고 하기에 소합환(蘇合丸)을 내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범치명이 비괴 백반석의 진술에서 나온 일로 체포되어 읍에 들어가자 겁을 먹어 기(氣)가 막혔음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조사보고서 중 「구타 당했다.」는 것이 무함(誣陷)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 때문에 송사를 결단하여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천만으로 울며 호소하였습니다. 법부에서 내려온 지령을 보니, 「정범피고(正犯被告)를 논할 것 없이 정기우는 풀어주고 정순교를 기찰하고 정탐하여 붙잡는 대로 보고하라.」고 처분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순교가 검험 전에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증인들을 윽박질러 만들어낸 진술서로 성안(成案)하여 인범(因犯)으로 잘못 지목되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6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이렇듯 원통함을 품고서 도망친 것입니다. 사건 당일에 정순교가 책실의 생일 잔치에 하루 종일 참석하였으며 밤에도 돌아오지 않은 사실은 삼반관속(三班官屬)들이 모두 목격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정범(正犯)으로 지목받은 것을 발명(發明)하여 벗어나려면 필경 그 당시에 범치명과 접촉하여 말을 나누었던 그 아비에게 피고라는 이름을 귀착시키게 됩니다. 부자지간에 죄명(罪名)을 서로 덧씌우는 경우에 그가 악명(惡名)을 입더라도 지극히 원통합니다. 다시 심리(審理)하여 상부에 보고하여 악명을 벗어던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정순교가 범치명 사건을 뒤집어쓴 것에 대해 그의 아비 정기우가 피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일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검안(檢案)을 다시 살펴보면 이 옥사는 의심스러운 사건인데 그 의심을 깨뜨릴 한 가지 단서가 있으니, 이 단서를 잡고서 규명해 보면 인범(因犯)을 억단(臆斷)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순교가 당일에 책실의 잔치에 참여했다가 밤중까지 돌아오지 않은 점은 사람들이 다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범치명이 술에 취해 서천(西川)에 거꾸러져서 냉기에 접촉된 후 업혀 온 점은 송순지, 조영중의 증언에 명확하고, 사망한 지 이미 오래된 범치명의 시신을 다시 물리쳐 보낸 점은 식당 주인 전철문이 진실하게 진술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치명의 아들 범민식이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유언을 남겼다.’는 말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니, 누가 입증하겠습니까? 고주(苦主)가 정순교를 지목한 것은 비록 긴절(緊切)하나 무릇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어서 어찌 고주의 말에 따라 편파적으로 사건을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그 죽고 사는 문제의 상황에서 유감이 없어야 하는 입장에서 신중하게 불행이나 과오로 인한 죄는 용서해 주고 정당한 판결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범치명이 정순교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증인이 없었는데, 범치명의 아들이 그 아비의 유언이라고 가탁하여 정순교를 지목함으로써 정범으로 귀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건이 단정된 후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갑작스레 도망쳤으니 그를 탐문하여 붙잡아야 하는 것은 법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비가 호소한 바를 보면 부자지간에 죄명을 서로 덧씌울 수는 없어서 사세 부득이하게 도망친 것이라 하니, 인륜을 따져 봄에 그 실정이 용서할 만하기도 합니다. 의심스러운 사건에 살리는 은전(恩典)을 시행할 것을 논의하다 보니 신중하게 살피지 못하여 결국 억울한 호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부득불 법부에서 명확하게 조사하여 재판하신 연후에야 원통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사실에 근거하여 보고드리오니, 밝게 조사하여 원고와 피고를 대질 조사하여 판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조사하니, 사망한 자가 술에 만취해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은 지금 보고하는 내용에 토대해 볼 때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인범(因犯)을 확정하여 지목할 때 어찌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지하여 판단하겠습니까? 귀 재판소에서 법률 적용을 논의한 바가 매우 타당하니 정순교를 추적하여 탐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훈령하니 이대로 시행하기 바랍니다. 광무 원년 9월 17일 의정부 찬정 법부 대신 한(韓)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 윤웅렬(尹雄烈)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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