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1894년 6월 30일)
번역문을 그대로 옮김
5월 초6일 동양 칠일보(七日報)의 게재 내용 발췌 번역
조선의 내란 및 일본 정부의 일 몇 가지
조선의 반란 무리들의 퍼져 가는 속도가 들불처럼 타오르는 까닭에 도쿄의 인심이 흉흉하다고 하면서 월요일 동경의 신문사에서 호외(號外) 1장을 찍었다. 그 내용에 경보(警報) 즉 4월 30일 조선 서울에서 보내온 관전(官電)에서 말하기를 조선의 관군(官軍)이 이삼(利三) 지방에서 패전하여 부(副) 장수와 장병 200여 명이 죽고 포로가 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전라도의 무리들은 이미 구희도(區希道)의 서걸약(西乞若) 지방을 점거하고 또한 장차 서울을 차지하겠다고 소문을 내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군사 500여 명을 파견해 태안(太安) 지방의 요충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조선에서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한결같이 반란 무리들이 크게 창궐하고 또한 세력이 날로 불어나 휩쓸려 들어가는 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조선 부산에서 보내온 4월 16일자 소식에 의하면 반란 무리들의 수를 짐작하면 약 1만 명이 넘는데 이 숫자는 다른 신문에서 발표한 것보다 좀 작지만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이름이 태도리(太道利)이고 부(副)두목은 두 사람인데 하나는 약삭알소(若索嘎蘇)라 부르고 하나는 색태알(塞太嘎)이라고 한다. 병사를 나누어 27개 곳을 지키고 있는데 낮에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밤에는 진영(陣營)에서 예의(禮意)를 배우는데 틀림없이 사술(邪術)을 연습하는 것과 관계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우두머리가 부하들에게 백성들의 목숨을 아끼도록 훈계하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도록 엄하게 경계하여 민간을 약탈하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이 점거한 지방의 속명(俗名)이 태창(太倉)인데 나라의 세금이 나오는 지방이다. 각 고을에서 마땅히 정공(正貢)으로 바쳐야 할 곡식을 모두 반란 무리들에게 빼앗겼다. 현재 조선의 관군마저 군량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잠서(簪書) 지방에 주둔하는 군사들이 식량 부족이 더욱 심각하여 심지어 병을 앓는 자들도 많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조선 정부에서 이미 온 나라의 지방 고위 관리를 모조리 경질하였는데 바로 반란 무리들이 난을 일으킨 까닭이 모두 지방 관리들의 가혹한 정사(政事)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을 잃고 우리를 고치는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이번 반란의 불기를 꺼 버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또 부산의 탁아포극의(托阿布克依) 신문에 의하면 일본의 조고사(祖古師) 및 아마탁(牙馬托, 일본어 やまと의 중국어 音譯인 듯) 두 척의 군함이 이미 3월 17일에 부산항을 떠나 반란 무리들의 소굴로 출발하였는데 중국과 프랑스, 영국의 군함 역시 그곳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또 일본의 어느 신문에 의하면 조선으로 출동한 중국 군사가 약 1만 명이라고 하였지만 일일보(日日報)는 그 말을 크게 믿지 않았다. 일일보에 의하면 중국에서 온 전보를 받았는데 보병 700명과 포병 100명이 대고(大沽)에서 출발하고 또한 보병 7~800명이 산해관으로부터 출발해 조선으로 출동하며, 또한 한 부대의 병사들이 여순구(旅順口)로부터 출발할 예정인데 지금 한창 급히 떠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또 동경신보(東京新報)에서 방금 받아 본 전보에 의하면 조선의 서울이 이미 반란 무리들에게 포위되었다고 하는데 이 일은 결코 믿을 수가 없다. 일일보에서 어제 받아 본 전보에 의하면 반란 무리들이 잠성(簪省)으로 간 뒤에 어느 지방을 점거하고 조선 관군과 대치하고 아직 싸우지는 않고 있다고 하였는데 따라서 조선의 서울이 포위된 적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말하기를 지금 러시아가 군대를 파견하였다는 소문을 접하였지만 아마도 거짓 소문일 것이다.
또 말하기를 어제 동경에서 천진으로부터 보내온 전보를 받았는데, 현재 길림(吉林) 지방의 토비(土匪)들이 난을 일으켰고 그 무리가 약 1만 5천 명이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일본 정부가 중국에 조회(照會)하여 이미 관군을 조선으로 파견한 것은 일본의 공사관과 영사관 및 상민(商民)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 하였는데 조회를 발송한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전거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6권, 문서번호 1907, 3324~3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