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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청계중일한관계사료 淸季中日韓關係史料
일러두기

5월 17일(1894년 6월 20일)

번역문을 그대로 옮김(照錄譯文)

일본의 7일자 신문(월일은 조선력(朝鮮歷)으로 씀 - 역자 주)의 발췌 번역

근래 일본 신문에 의하면 조선은 내란이 심각한데 비록 각 지방의 상황이 다르지만 전라, 제식(諸息) 두 도가 가장 심하여 그곳의 백성들은 아주 위험스러운 재난이 일어날까 봐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난리를 일으킨 자들은 도박꾼이나 불법적인 무리들이고 충청도의 비도(匪徒)는 평소 편안하게 분수를 지켰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러 지방의 비도를 말하건대, 백성들을 평화롭게 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결코 백성들의 고혈을 짜지 않으며 백성들의 어떤 물건을 쓰더라도 모두 공평한 값을 치러 주지만 관청의 창고에 쌓인 재산은 반드시 모조리 가져가 쓴다고 한다. 현재 이들 비도의 뜻은 서울을 도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급히 식량과 땔감을 비축하고 병기를 장만하며 군수품을 구입해 민심을 크게 얻는 데 있다. 이들 비도의 숫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일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의하면 도알곡(道戞谷)의 비도가 대략 4천 명으로 이번에 불어난 비적들의 뿌리라고 한다. 만약 모두 헤아린다면 1만 명을 넘을 것이다. 그들이 쓰는 병기는 같지 않아 조총을 쓰는 자가 있고 검을 쓰는 자가 있고 창을 쓰는 자도 있는데, 총이 약 3천 자루가 되는데 그중에서 2천 자루는 스스로 사들인 것이고 1천 자루는 군수창고에서 약탈한 것이다.

이들 비도 중에 말을 탄 자가 100여 명이 있어 정탐을 맡고 있는데, 일본 신문에 의하면 행군과 작전의 법도가 일찍이 훈련을 받은 것 같으며, 또 다른 신문에 의하면 그 속에 왜인(倭人) 몇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지방관과 무관 몇 사람이 비도 무리와 결탁하였는데 잠서(簪書) 지방의 통령(統領) 김사화(金士和)라는 자가 비도 무리와 내통한 사실을 사람들이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붙잡힌 적이 있지만 체력이 남들보다 뛰어나 감옥을 탈출하여 도망갔다가 곧바로 다시 잡혀 처형되었다. 3월 28일에 뢰산(賴山)에서 싸워 관군이 이겼으나 또 4월 초2일에는 다시 합추산(哈秋山)에서 싸워 관군이 패전을 거듭했다. 그 까닭은 관군의 작전계획이 잘못되어 적들에게 유인되어 적진으로 쳐들어갔다가 앞뒤로 포위당했기 때문이다. 다치고 죽은 자가 200명을 넘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번 싸움으로 관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중국에서 군함 3척을 근산(根山)으로 보내 군사 600명을 싣고 4월 초7일에 상륙하여 며칠 동안 주둔한 뒤 16일에 다시 녕삼(寧森)으로 갔다. 소문에 의하면 중국 해연호(海宴號) 군함의 관가관(管駕官, 함장)이 말하길, 조선에 주재하는 중국 흠차사신(欽差使臣) 원세개는 중국 군함이 조선에 파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 후 조선에서 거듭 간절하게 청하였기에 부득불 허락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듣기로 이들 비도가 민심을 크게 얻어 서울의 인민들이 저들과 서로 잘 지내며 믿는 자들이 약 3분의 2이고 문무관원(文武官員)들은 모두 의혹과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5월 25일 조선에 있는 탐방기자에 의하면, 이번 난리는 이미 큰 재난이 되었는데 실은 가혹한 정사 때문에 비롯되었으며, 당초 일부러 외국 사람들을 미워하는 말을 빌려 왔을 뿐이라고 한다. 현재 적도 세력이 매우 커져 대적할 수도 없다. 저들의 본뜻은 외국인을 쫓아내자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를 구실로 학정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저들이 내건 고시문을 보면 모두 충군애상(忠君愛上)의 뜻이 담겨 있다. 다만 오로지 관리들을 욕하는 것은 관리들이 지방에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숨기고 조정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 고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의 주무대신과 지방 관리들은 모두 나라의 살림과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수탈하여 제 뱃속을 채울 줄만 알고 있었으며, 과거 시험장을 헛된 형식으로 전락시켜 거의 장사꾼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나라의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제멋대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재물을 탐하고 색(色)을 즐길 뿐이다. 서울에 사는 여러 관리들이 도성 밖에도 집과 논밭을 갖고 있어 태평할 때는 서로 영합(迎合)하고 방자스럽게 굴며, 난리 때에는 간사하게 나라를 팔고 있다고 한다. 위와 같은 고시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다.

제랍성(除臘省)으로 출동한 군사는 전투에서 연거푸 패하자 국왕이 사흘 전에 교지를 내려 이들 비도에게 알렸다. 그 내용은, 국왕도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기를 매우 원하여 이미 그 도(道)의 관찰사(중국의 행정구역과 행정관에 대응시킨 것) 및 저들 비도가 난리를 일으킨 구포현(溝布縣) 현령을 파직시키는 한편 그 현령을 간세(奸細)한 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현재 국왕은 이미 고위 관원을 파견해 사태가 일어난 까닭을 조사하도록 하였지만 이 고위 관원의 보고 내용은 매우 애매모호하였으니, 국왕은 마땅히 유배시켜야 할 관리들을 처벌하는 외에 또 이번에 조사를 맡은 고위 관원을 파면하였다. 조선의 조정이 이번 큰 난리를 당한 것은 까닭이 없다고 할 수 없는바 사실 여러 대신들이 늘 임금에게 충성한다고 자처하면서도 그 충성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니 두려운 것은 이번의 난리가 계속 커져 도모하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만약 공정하게 조사 처리한다면 인민들은 다소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듣기로 논에 아직도 파종하지 못하였다는데, 만약 소식이 사실이라면 또한 매우 우려된다.

위 신문은 중국력(中國曆)으로 4월 29일에 나온 것이다.

전거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6권, 문서번호 1901, 3316~3317쪽

주석
발췌 번역 원문은 節議로 되어 있으나, 節譯의 잘못인 듯.
제식(諸息) 원문은 諸息으로 되어 있으나, 忠淸의 잘못인 듯.
근산(根山) 원문은 根山으로 되어 있으나, 群山의 잘못인 듯.
제랍성(除臘省) 원문은 除臘省으로 되어 있으나, 전라도의 오기인 듯.
구포현(溝布縣) 원문은 溝布縣으로 되어 있으나, 古阜縣의 잘못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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