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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청계중일한관계사료 淸季中日韓關係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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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1893년 6월 5일)

북양대신 이홍장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도원 원세개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습니다.

조선의 동학교도들이 선동과 현혹으로 무리를 모은 일과 본관(원세개의 자칭 - 역자 주)이 수시로 조선 관원들과 만나 상의하여 처리해 온 여러 사실에 대해 이미 그 주요 내용을 뽑아 전보로 보고하였고 각하의 거듭된 전보 지시에 따라 상의해 처리한 것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조선 경상도 경주 지방에 술사(術士) 최제우(崔濟愚)라는 자가 있어 함풍년간(咸豊年間, 1851~1861)에 사교로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스스로 하늘로부터 도술을 얻었다면서 성ㆍ경ㆍ신(誠敬信)으로 하늘을 받들도록 가르치면서 본시 능히 귀신을 부릴 수 있고 3대 이상의 사람과 수시로 왕래할 수 있으며 또한 비와 바람을 불러오고 구름과 안개를 타고 다니면서 칼과 화살 그리고 창과 총탄도 모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의 법술이 조금 영험(靈驗)한 것을 보고 많이 믿고 받들었는데 무릇 방정맞은 선비들과 뜻을 잃은 관리 집안에서 그를 많이 따랐습니다.

동치(同治) 3년(1864) 봄에 이르러 경상도의 지방관은 최제우가 많은 무리를 선동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를 붙잡아 기시(棄市)에 처했습니다. 그로부터 그 교세(敎勢)가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교도가 여전히 많고 몰래 서로 결탁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3개 도 사이에 출몰하면서 지금까지 그 무리가 이미 십 수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3개 도의 여러 고을에 없는 곳이 없고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차츰 그 전모를 드러냈습니다. 매번 관리들이 처벌하려고 하면 바로 무리를 모아 저항하는데 특히 작년에 더욱 심하였습니다. 조선의 조정에서 남모르게 많이 걱정하여 여러 관리들에게 대책을 강구하여 금지하고 다스리도록 거듭 몰래 지시하였습니다. 그 무리들이 스스로 위태로움을 느끼고 드디어 작년 겨울에 충청도 감사(監司)의 관할 지방에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연명으로 최제우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아울러 조선 국왕에게 금령을 풀어 주고 그 종교를 허용해 줄 것을 대신 청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본관은 조선 조정에 조속히 근절시켜 그 세가 불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권고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경계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지만 우유부단하여 결국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충청도 감사에게 잘 타일러 해산시키라고 지시하고는 이것으로 일이 마무리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저들 무리들이 서울의 양반들과 소식을 서로 통해가면서 국왕의 뜻을 염탐해 알고 올봄 2월에 5~60명을 모아 서울로 와서 궁궐 문 앞에 엎드려 글을 올렸는데 앞서 청하였던 것을 재차 제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울러 서울 안팎으로 수십만 명을 매복시키고, 하루에 천 리를 갈 수 있고, 칼을 던져 사람의 목을 벨 수 있으며, 총기류는 전혀 없다는 등의 헛소문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또한 포고문을 내붙여 서양 사람들을 욕하였고, 서울의 객주(客主)들을 죽이겠다고 하니 객주들이 크게 놀라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의 헛소리를 믿고 몹시 무서워하니 일본이 군사를 동원해 왕궁을 지켜 주었습니다. 본관은 각별히 진정하여 절대 놀라지 말라고 사대부들과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조속히 수괴를 다스려 그 나머지 무리들을 단속하고, 아울러 적절하게 고시문을 내붙여 금지시킬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 사이 본관은 보고를 통해 군함 2척을 인천으로 파견해 탄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도 잇따라 고시문을 내붙이고 몇 사람을 붙잡아 심문하였더니, 비록 두목은 아니었지만 인심이 차츰 안정되고 각국의 부녀자와 아이들도 속속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3월 중순에 이르러 저들이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또다시 충청도 보은현(報恩縣) 경내의 속리산 장내촌(帳內村)을 점거하였는데, 그곳은 서울과 380리 떨어져 있습니다. 포고문을 내걸고 널리 호소하면서 겉으로는 오랑캐를 배척하자고 하면서 속으로는 난리를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였고, 성을 쌓고 ‘창의척축왜양(倡義斥逐倭洋)’이라는 글씨를 크게 쓴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또한 작은 깃발을 총총히 세우고 다섯 방향으로 색깔을 구분하여 각각 본래 살던 고을의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비록 총기류는 적었지만 활과 칼, 창을 어지럽게 펼쳐 놓아 기세가 매우 사납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곳 관리들이 산속으로 찾아가 거듭해서 타일렀지만 고집을 부리며 반항하면서 조선 8도의 인민과 서울의 관료들까지 절반 이상이 모두 저희들 무리라면서 서양 사람과 왜인들을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매우 놀라고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국왕이 관원을 보내 본관과 상의한 끝에 중국의 육해군 부대가 와서 진압에 대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본관은 거듭 권고하기를, 조선 조정에서 공정한 중신(重臣)을 보내 타이르고 여러 고을의 탐관오리의 가혹한 시책을 살펴 없애며 다시 각지의 연군(練軍)을 그곳으로 집결시켜 겉으로만 기세를 올리면서 토벌할 태세를 보여 주고 아울러 간절하게 타일러 해산시키고 그래도 끝까지 따르지 않을 경우 다시 (중국군의) 토벌을 논의하되, 갑작스럽게 중국 군사를 청하는 것은 천하가 놀라 또 다른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등의 말로 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몹시 난색을 표시하면서 감히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본관이 서너 번 말을 하고 직접 토벌 지휘를 맡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최근에 어윤중(魚允中)의 직임을 올려 선무사(宣撫使)로 삼고 조병호(趙秉鎬)를 충청 감사(忠淸監司)에 임명하고 전후로 충청도의 무능한 관리를 절반 이상 경질한 뒤 다시 청주(淸州), 강화(江華)의 친군연병(親軍練兵)을 속속 동원하여 탄압에 나섰습니다. 어윤중은 먼저 군사를 파견해 저들의 식량 공급 도로를 차단하고 또한 여러 곳에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 배치해 놓은 뒤 직접 저들을 찾아가 해산하라고 타일렀습니다. 마침 큰비가 내려 비도(匪徒)들은 형편이 매우 초라해졌고, 또한 조선 관군이 많이 집결한 것을 보았으며 중국의 군사까지 조만간 바다를 건너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고 저들의 교(敎)를 허용해 주도록 대신 청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후 조선 조정에서 곡진하게 용서해 주고 거듭 엄하게 타일렀습니다. 4월 초 4~5일에 드디어 모두 흩어져 가니 마음속의 걱정이 잠시 풀리었습니다.

저 비도가 크게 모였을 때 조선 조정과 재야의 인사들은 세도가(勢道家)들과 간사한 무리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멋대로 부리면서 탐학(貪虐)스러운 짓을 일삼아 왔으므로 모두 난리를 일으킬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 안팎의 뜻을 잃은 사람과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무리들은 난리를 더욱 반가워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마침 왜 공사(公使) 오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己)는 위태로운 틈을 타 일을 꾸며서 여러모로 위협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왜인들의 움직임도 수상하여 아마도 김옥균(金玉均)과 이하응(李昰應)이 모두 비도와 내통하고 있으며, 왜인들도 몰래 호응하여 며칠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때 서울에 헛소문이 곳곳마다 떠돌아다니자 겁을 먹고 놀라 서울에 있는 조선인과 서양인들이 모두 의심을 품고 걱정하였으며 조선의 관리와 백성의 노약자들은 절반 이상이 시골로 도망가 버리고 물가도 크게 올랐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아무런 견해나 대책도 없었습니다. 국왕은 오로지 친군(親軍) 수천 명만 단속해 주야로 왕궁을 엄밀하게 지키면서 아울러 북한산성의 건물을 수리하여 일단 변고가 나면 곧바로 처자식을 데리고 왕궁의 북문으로 탈출해 험한 곳을 지키면서 화를 피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 대신들 모두는 본관이 조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자고 청하였지만, 국왕은 서울에 난리가 일어날 것이 두려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국왕은 비도가 쳐들어오면 본관에게 진압해 주기를 요청할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 본관이 서울을 떠날 경우 숨어 있던 무리들이 다른 마음을 먹을까 염려하여 서울에서 지켜 주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이것저것 두려움이 커져가자 뜻도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본관이 상황을 살펴보건대 저 비도는 오합지졸(烏合之卒)로서 크게 걱정할 것이 없지만, 다만 서양 사람을 해칠 경우 필시 외국과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며 혹시 왜인들까지 연결된다면 또한 큰 화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본관은 그냥 홀몸으로서 안팎을 모두 돌볼 수 없으니 거듭된 각하의 지시에 따라 수시로 대책을 강구하였고, 또한 제원호(濟遠號)와 경원호(經遠號) 군함 두 척 및 장문선(張文宣) 통령(統領)을 파견하여 대비해 주어 결국 사태가 풀렸습니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도 모두 감격해 동쪽 울타리인 조선의 대국(大局) 역시 다행스럽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 비도의 수괴를 한 사람도 붙잡지 못하여 저 무리가 계속 각지에 숨어 있고 이번에 무리를 지어 요구한 것이 크게 처벌받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욱 꺼려하거나 조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일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본관은 조선 조정에게 거듭 권고하기를, 비도의 소굴에 군사를 주둔시켜 방어하고 유능한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연군(練軍)을 잘 정돈해 비적들을 탄압하고 가혹한 행정을 없애 백성들의 어려움을 풀어 주고 또한 나이 들고 정직한 인재를 발탁해 기용하여 조정 안팎 사대부와 백성들의 기대를 수습하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인이 지금 당장 따르는 척하지만 시일이 지나고 나면 아마도 느슨해질 것입니다. 만약 저 비도가 다시 뭉쳐 일어난다면 아마 헛소문으로 겁을 주면서 말로서 달래기만 해서는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근본 원인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끝에 생기는 문제를 치료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워낙 미련한 본관으로서 일하고 있는 동안 오로지 보잘 것없는 마음이라도 다하여, 그렇게 해서 혹 조금의 효과라도 거두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래된 버릇을 타파하고 영원한 평온을 추구하는 문제에 대해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그러한 원대한 뜻이 없어서 국내의 우환 또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조선의 동학 비도가 난리를 일으킨 전말을 자세하게 보고하며, 아울러 저들 비도가 전후로 내붙였던 서장(書狀)과 방문(榜文) 및 조선 국왕의 마지막 교지(敎旨) 등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해 함께 올립니다.

위와 같은 내용이 본 각작대신(閣爵大臣, 이홍장 자신을 지칭함 - 역자 주)에게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보고한 문서를 읽어 보고 알게 되었다. 조선의 동학교 비도가 무리를 지어 선동하고 현혹하였다. 지금 비록 해산되었지만 그 비도 수괴를 아직 한 사람도 붙잡지 못하여 또다시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담보하기 어렵다. 도원 원세개는 마땅히 수시로 조선 조정에게 진지하게 정치를 하도록 권유하여, 어질고 유능한 관리를 뽑아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군사를 훈련시켜 기세를 왕성하게 해야 한다. 무릇 지방관으로서 가혹한 정사로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엄히 징계하며 아울러 수시로 군사를 파견해 순시하면서 헛소문을 퍼뜨려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잡아와 다스려야 한다. 저들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므로 도원 원세개는 일을 함에 있어서 비밀리에 잘 헤아려 처리하여 속국의 안정을 꾀하는 효과를 거두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을 발송하는 외에 또한 보고서 원문을 귀 아문(衙門)에 자문(咨文)으로 발송하니 번거롭지만 살펴보기 바랍니다.

보고서의 원문을 그대로 옮김(照錄淸冊)

조선의 동학교 비적들이 전후로 제출한 소장(疏狀)과 방문(榜文) 및 조선 국왕의 마지막 교지(敎旨)를 뽑아 적어서 각하께서 살펴보시도록 삼가 올립니다.

차례대로 다음과 같습니다.(計開)

(1) 조선 국왕의 궁궐 대문 앞에서의 상소(上疏)

각 도의 유학(幼學) 박승호(朴升浩)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배(百拜)하면서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성신열(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聖神烈) 주상전하(主上殿下)께 말씀을 올립니다. 천지(天地)와 부모 밑에서 삼가 어려울 때는 부모를 부르고 아플 때는 천지에 호소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자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주상전하는 천지이자 부모입니다. 오늘과 같이 도리를 닦고 있으니 신들은 모두 주상전하와 천지 부모가 길러 준 자식입니다. 이처럼 어렵고 아프기가 끝이 없는 상황을 당하여 감히 외람되게 절차를 뛰어넘는 죄[猥越之罪]를 무릅쓰고 목소리를 모아 군주의 위엄이 바로 지척인 곳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분에 넘치는 행동이고 두려운 일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임금과 부모 앞에서 실로 망령된 말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원통한 사정을 천지 부모에게 호소할 수 없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또 어디로 찾아가야 하겠습니까?

예부터 뛰어난 황제와 밝은 임금 및 현명한 재상과 훌륭한 보좌진들이 사방의 문을 열고 여러 곳의 소리를 듣고 음과 양을 다스려 사계절에 순응하고 태산처럼 편안한 곳에서 천하를 고르게 한 것은 오로지 천명(天命)을 받들어 하늘의 도리를 따르고 인간의 도리를 밝혀 기강을 바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도를 착실하게 실행하는 선비가 거의 없습니다. 헛된 문장에만 물들고 쓸데없이 겉치장만 숭상하며 경전(經傳)의 뜻을 훔치고 요란한 문장으로 명성만 좇는 선비가 열에 여덟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비들의 풍습을 말하자면 덕성(德性)을 지니며 배움으로 이끄는 일이 전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으니 이는 나라의 다스림과 관련된 것으로 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통한이 뼈에 사무쳐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의 운세는 돌고 돌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어 지난 경신년(庚申年, 1860) 여름 4월에 하늘이 가만히 돕고 귀신이 몰래 도와서 경상도 경주(慶州)의 고(故) 학생(學生) 신(臣) 최제우(崔濟愚)가 비로소 천명(天命)을 받아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도록 가르쳤습니다. 최제우는 바로 병자호란 때의 공신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6세손(世孫)입니다. 도를 베풀어 사람들을 가르친 지 3년이 지나지 않아 서도(西道)라는 명목으로 모함을 받고 화를 당하여 갑자년(甲子年, 1864) 3월 초10일에 결국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광경을 상상하노라면 하늘과 땅이 참담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바로 털끝만큼의 잘못된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히 억울함을 씻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 이처럼 흰 옥같이 흠집 하나 없는 대도(大道)가 그처럼 만고에 처음 있는 뜻밖의 재난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찌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에 만약 어긋난 일이 있었더라면 감히 ‘도학(道學)’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어찌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말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게 했겠습니까? 그의 글은 바로 시경(詩經), 서경 (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이고 그의 법은 바로 예악형정(禮樂刑政)이며 그의 도는 바로 온량공검(溫良恭儉), 효우목연임휼(孝友睦婣任恤), 지인성의충화(智仁聖義忠和), 변화기질(變化氣質)일 따름입니다. 최제우가 말하기를 “인의예지는 선성(先聖)들의 가르침이고 수심정기(修心正氣)는 오로지 내가 다시 정(定)하는 것이라.”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생각하건대 공자의 도(道)는 하나의 도리로서 정한 것인즉 오직 나의 도(道)와 논하자면 곧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조금 다르다고 한 것은 또한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다. ‘성ㆍ경ㆍ신(誠敬信)’ 세 가지로 하늘과 땅을 받들어 모시고 반드시 모든 일을 아뢰면서 마치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리는 실로 선성(先聖)들이 밝히지 않은 일로서 최제우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종지(宗旨)입니다. 그리고 어버이처럼 받들었으니 어찌 도리에 어긋나겠습니까? 또한 유불선(儒彿仙) 삼도(三道)를 하나의 덕(德)으로 합친 도리이기 때문에 약간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선(佛仙) 두 가지 도(道)에 대해 말하자면, 삭발하고 승복 입고 멀리 떠나 뒤돌아보지 않고 임금과 어버이를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불도(佛道)와 선도(仙道)를 겸하여 자비와 수련을 하나의 덕으로 합치는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공자의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대도(大道)의 이치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동학(東學)이라고 함은 그 학(學)의 이름이 본시 동학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나왔지만 동방에서 비롯된 까닭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서학(西學)이라고 배척하면서 밑바닥처럼 천대(賤待)하기에 최제우가 문인제자(門人弟子)들에게 말하기를,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지만 학(學)은 동학이다. 하물며 땅이 동과 서로 나뉘는데 어떻게 서에서 동을 말하고 동에서 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추로(鄒魯)의 기풍을 받아 이 세상에 전해 주었다. 우리의 도(道)가 이를 받아 널리 알리니 어찌 서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반드시 서학으로 돌리지도 않고 또한 반드시 동학으로도 보지 않으면서 이단(異端)과 이류(異類)로 대하고서 영읍(營邑)에서 붙잡아 가두고 형벌을 가하고 유배시키니 어찌 원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양심정기(養心正氣)하여 경외천리(敬畏天理)하니 사람들이 각자가 흐르는 물처럼 선(善)을 좇고 각자 그 형국(形局)을 따라서 성인(聖人)은 성인으로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으로 총명한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공자의 도리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뿐으로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단서가 있겠습니까? 대저 이 도(道)는 심화(心和)를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음이 화(和)해지면 기(氣)가 화해지고 기가 화해지면 모습이 화해지며 모습이 화해지면 하늘의 마음이 바로잡아져 사람의 도리가 서게 됩니다.

참으로 이와 같다면 최제우가 앞서 성인들이 펼치지 못한 깊은 근원을 처음으로 만들어 우둔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천리(天理)의 근본을 알게 하였으니 어찌 단지 동학이라고 치우쳐 부를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것은 천하무극(天下無極)의 대도(大道)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일로 전하께 고하여 도를 실행하고도 효과가 없었다면 감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광명정대하거나 억울하지 않은 일로 전하께 고하였다면 역시 스승을 배반하고 윤리를 내버린 죄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천지 부모처럼 키우는 자식 같은 저희들을 아껴 주시어 하나는 신들의 스승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다른 하나는 영읍(營邑)에서 형벌을 받거나 유배 간 백성들을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이고 백성은 나라의 큰 뿌리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고 기(氣)가 합쳐져야 도(道)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급히 향교와 서원을 고쳐 선비들의 기를 배양하고 태조와 종사(宗社)의 영령(英靈)이 늘 임금님의 좌우에 가득 차서 생명이 영원하고 남산이 숫돌처럼 작게 되고 한강이 띠처럼 가늘게 될 때까지 영원하도록 하늘에 기원합니다. 신들은 황공하게 피눈물을 흘리면서 두려워하며 기원합니다.

광서(光緖) 19년 2월 21일(1893년 4월 7일)

(2) 서양인 문 앞에 내건 방문(榜文)

교두(敎頭, 선교사를 가리킴) 등을 깨우치는 일

너희들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아라. 기운이 약해지고 세상의 도리가 능멸되어 묘당(廟堂)이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곳으로 변해 도적들이 문을 열어 바깥과 내통하려는 마음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館, 교회)을 세워 교(敎)를 전파하는 것은 조약에서 허용하지 않았다. 너희 교두들이 방자하게 몰려와 말로는 상제(上帝)를 공경한다면서 오로지 기도만 하고 야소(耶蘇)를 믿는다면서 오로지 찬미(讚美)만 하고 있어 결코 정심성의(正心誠意)의 배움이 없고 조금도 말을 실천하고 행동을 굳게 하는 내실이 없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한다면서도 살아서는 공양하며 받들고 따르는 도리가 없고 죽어서도 곡하면서 문상하는 법이 없으니 가히 인륜(人倫)의 올바른 도리라고 하겠는가? 혼인의 풍속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야합(野合)했다가 나중에는 개가(改嫁)하여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곧바로 이혼하는 폐단이 있으니 부부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본시 거지들의 무리로 너희 회(會)에서 으레 내주는 은냥을 탐하고 거처하는 곳과 음식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기울여 처음에는 영어(英語)를 배우고 한문(漢文)을 가르친다며 양갓집 자제들을 불러 모았다가 결국에는 너희들의 교에 들어오도록 핍박하였다. 또한 학도에게 지급하는 물품과 꾸려 나가도록 마련한 봉급에서 밥과 옷을 빼내니 어떻게 이토록 비루(鄙陋)할 수 있는가? 전도(傳道)한다고 말하면서 오로지 유람하고 경전을 찍고 책을 파는 등의 일을 제일의 긴요한 것으로 간주하니 만약 영원히 고통스러운 지옥이 있다면 너희들이 반드시 먼저 들어갈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느냐? 지금에야 와서 조처해 주기를 감히 청하고 있지만 어찌 도를 닦는 학인(學人)으로서 너희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과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하겠는가? 이렇게 너희들에게 알리니 속히 짐을 싸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그렇지 않는다면 마땅히 우리의 충신(忠信)과 인의(仁義)를 무기로 삼아 다가오는 3월 7일에 너희들을 토벌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계사(癸巳, 1893) 2월 일.

(3) 서양인 문 앞에 내건 방문

아, 이 어린 것들아, 이 글을 받아 보아라. 우리 동방은 수천 년 예의(禮義)의 나라이다. 이러한 예의의 나라에서 태어나 이러한 예의를 행(行)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다른 가르침이 있겠는가? 너희들의 책을 읽고 너희들의 학(學)을 살펴보니 너희들이 비록 하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고 비록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람을 현혹하여 해치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니 무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비록 신선이 있다고 하지만 신선을 본 사람은 누가 있는가? 저들이 비록 천당이 있다고 하지만 천당을 본 사람은 누구인가? 마음이 아프도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 거짓에 현혹되어 황당한 것을 믿고 바른 것을 버리고 저들의 겸애(兼愛)를 따르며 제사 지내는 것을 그만두고 저들 음사(陰祠)를 거행하니 바로 성현께서 말씀하신 임금도 어버이도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도다.

지난날에는 열성조(列聖朝)의 현명한 재상과 어진 보좌진들이 충성과 유능함으로 잘 보필하여 학교를 세우고 가르침을 일으켜 차츰 인의(仁義)를 연마하여 교화(敎化)가 동과 서를 아우르니 이것이 바로 하나의 다스림이었다. 이제는 이도(異道)가 횡행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니 이것은 바로 하나의 어지러움이다. 너희는 충성스럽고 정직한 대신들의 후손이니 어진 선조들을 대하면서 어찌 안타까워하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우리 도의 큰 뿌리는 하늘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맑은 하늘이 환한데 스스로 이 도를 감히 날뛰면서 능멸할 수 있겠는가? 다스림의 도리는 임금에게 있고 의리와 너그러운 덕에 있으니 어찌 두렵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어린 것들아, 대도(大道)에 따라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서적을 불태워야 비로소 수만의 삶이 있게 될 것이다. 운운.

드디어 양 끝에 떨어지니 遂落兩頭
달이자 해이며, 月兮日兮
입에 나뭇가지 하나를 가로놓으니 口橫一木
먼저 임금이 물을 없애 버린다. 先王去水

계사(癸巳, 1893) 2월 일, 밤중에 백운산인(白雲山人) 궁을(弓乙) 선생의 제목을 모르는 책. 만약 지식이 있는 자는 계룡산(鷄龍山) 낙사촌(樂斯村)으로 내방하라.

(4) 일본인 문 앞에 내건 방문

대저 태극이 갈라진 뒤부터 음양이 자리하였고 사람은 그 문(門)에서 그 경계를 나누어 나라에 삼강(三綱)이 정해지고 오륜(五倫)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中土] 인륜(人倫)의 으뜸을 사람이라고 하고 몰지각한 부류는 이적(夷狄)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중국의 문덕이 멀리 오랑캐에까지 통하고 성인의 교화(敎化)가 머나먼 지역까지 미치는 것이다. 천도(天道)의 공정함은 오로지 착한 것에 혜택을 주고 악한 것을 벌한다. 너희들은 비록 머나먼 곳에 있는 족속(族屬)이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품성은 대략 같으니 역시 알 것이 아닌가? 이미 인도(人道)에 따라 각자 나라를 다스리고 각자 생산을 지키면서 영원히 제 구역(區域)을 보전하여 위로 모시고 아래로 자라게 함이 옳다. 망령된 욕심으로 남의 나라를 차지하고 공격을 장기로 삼고 죽임을 근본으로 하는 것은 과연 무슨 마음이며 도대체 무슨 짓인가?

옛날 임진년(壬辰年)에 우리나라가 무슨 용서받지 못할 잘못이 있었기에 나라를 죄다 없애려 왔다가 패배하고 쫓겨 돌아갔다. 우리나라의 비참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너희에게 잊을 수 없는 원한이 있는데, 너희는 오히려 우리에게 무슨 용서하지 못할 한이 있느냐? 너희의 남은 목숨에 아직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는데 어찌 잠시간의 목숨을 돌보려고 우리의 틈새를 노리는 것이냐? 너희는 동국(東國)의 성인(聖人)들을 들어 보지 못하였느냐? 서산대사(西山大師)의 가르침이 있고 사명당(四溟堂)의 책략은 오늘날까지도 칭송되고 있다. 석창(石窓)의 도(道)는 편순(鞭旬)의 산을 멈출 수 있고 옥호(玉壺)의 구름은 사위(死圍)의 으뜸을 깨뜨릴 수 있다. 우리 스승의 덕성(德性)이 끝이 없도록 넓고 커서 너희들을 널리 구제할 수 있는 울타리에 넣어 두었으니 너희들이 내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해칠 것인가? 하늘이 이미 미워하고 스승께서 이미 타일러 주었으니 안위(安危)의 기회는 너희 스스로 취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나는 더 말하지 않겠으니 급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계사(癸巳, 1893) 3월 초2일 유시(酉時) 조선국(朝鮮國) 삼수원(三帥員) 우초(羽草).

(5) 보은현(報恩縣) 장시(場市)에 내건 방문

무릇 왜양(倭洋)은 개나 양(羊)과 같다는 것은 우리 동방(東邦) 삼천리에서는 비록 오척동자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원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어찌하여 순찰사의 노련함과 밝고 진실함을 가지고 우리 척왜양(斥倭洋)하는 선비를 이와 같은 무리(虱類)라고 부르고 척왜양하는 사람을 사악한 무리라고 하는가. 개와 같은 서양인에게 종노릇하는 자는 올바른 무리[正類]가 되고 격왜양(擊倭洋)의 의로운 자는 죄를 주어 잡아 가두며, 화친을 주장하며 나라를 팔아먹는[主和賣國] 자는 높은 상을 받으니, 오호 통재라. 기운이 오랑캐의 운명인가? 어찌 우리 순찰사의 밝음으로 이와 같이 살피지 못함이 심한가? 거리에 이 방을 내거는 것은 현혹당한 자가 왜양(倭洋)의 종이 되어 관령(官令)을 따르는 일이 있을까 우려해서이다.

3월 22일.

(6) 조선 선무사(宣撫使)에게 올린 문서

창의(倡義) 유생(儒生) 허연(許延), 서병학(徐丙鶴), 송병희(宋秉熙), 이근풍(李根豊), 이중창(李重昌), 이희인(李熙人), 조재우(趙在憂) 등의 단자(單子)를 은혜를 베풀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저희들은 바로 선왕조(先王朝)에서 길러 주신 적자(赤子)이자 천지의 무고한 백성으로서 도를 닦아 삼강오륜의 밝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이 있고 왜양은 바로 개나 양과 같아 비록 오척동자도 저들과 함께 있기를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사서(史書)에서,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치는 것은 중국의 장기(長技)라고 하였는데, 지금 조선에서 양왜(洋倭)의 장기를 따라 배우고 있으니 통곡하고 한심한 일입니다. 각하께서 분명히 살펴보셨을 텐데 어찌 이것을 밝히지 못합니까?

그런데 의리를 주창하고 양왜를 치자는 것이 그 무슨 큰 죄가 된다고 한결같이 없애 버리려 합니까? 천지귀신이 내려다보지 않는 것이 없고 길가의 아이들과 뛰어다니는 하인들도 옳고 그름을 알고 있습니다. 관찰사의 잘못이 너무 심하여 이처럼 무고한 백성들을 모두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니 한 나라에서 함께 태어났는데 어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습니까? 또한 왜양이 우리의 임금님을 끝없이 위협하는데도 조정에는 한 사람도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지 않으니 주상(主上)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창의(倡義)의 선비에게 죄를 주면서 사악한 자들[邪類]이 무리를 모았다고 하는데, 왜양을 치는 사람들이 사악한 자들이라면 개나 양과 강화(講和)하는 것은 바른길입니까?

수많은 선비들의 충의로운 마음이 분통으로 찢어지는 이때에 각하만이라도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명망으로 성스러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널리 타일러 주시니 각 도(道)의 수만 명 선비들은 너나없이 목을 빼들고 우러러보기를 큰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는 듯합니다. 세상 일은 무궁무진하여 의리가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강적(强敵)의 형세로 어려움을 말한다면 천하만고(天下萬古)의 형세는 목숨을 버리고 의를 좇는 사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소생들은 비록 시골에서 비천한 품성을 갖고 있지만 왜양이 강적임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열성조(列聖朝) 및 높은 유학자들의 가르침에 모두 왜양을 치다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어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가 축하할 일이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각하께서 분명하게 살펴 이끌어 주시어 이 우둔하고도 충성스러운 무리로 하여금 의리의 분별을 알게 하시고 주상전하께 이 상황을 아뢰어 우리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이어지는 걱정을 없게 해 주시고 또한 소생들이 의를 좇는 길을 열어 주시는 내용으로 임금님께 아뢴다면 또 어찌 감히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목소리를 모아 어사 각하에게 크게 호소하오니 엎드려 원하건대 살펴봐 주시기를 삼가 기원하는 바입니다.

계사(癸巳, 1893) 3월 일.

(7) 조선 국왕의 4월 초1일 교지(敎旨)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너희 무리들은 모두 나의 명령을 들어 보아라.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는 훌륭한 분들이 대를 이어 예를 가르치고 인륜을 밝혀 사람이 지킬 규범을 세우고 유학을 숭상하고 나라의 풍속을 이끌어 사람마다 공자의 덕행을 따르고 집집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을 읽어 충신과 효자, 열녀들이 대를 이어 가며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자의 생업을 즐겨 온 지 오늘날까지 오백 년이 되었다. 우매한 내가 대위(大位)를 이어받은 뒤로 밤낮으로 조심하며 감히 편안하게 있을 겨를도 없이 착실하게 지키고 실행해 온 것도 오로지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어두워지고 풍속이 구차해지면서 나아가는 방향이 서로 달라 망령된 자들이 주술로서 우리의 온 세상을 현혹시키고 우리 백성들을 잘못 이끌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나 땅에 넘어진 자처럼 깨우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무슨 까닭인가?

하물며 너희들이 말하는 학(學)이라는 것은 스스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받든다’고 하는데 너희들이 말하는 ‘공경한다’는 것과 ‘받든다’는 것은 결국 하늘을 모멸하고 속이는 것이다. 원칙을 어지럽히고 나쁜 마음을 품으니 어찌 모멸이 아니겠는가? 거짓을 퍼뜨려 이익을 탐하니 어찌 속임이 아니겠는가? 무리를 지어 바람처럼 모여드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깃발을 내걸고 서로 호응하면서 감히 창의(倡義)라고 써 놓고는 혹은 통문(通文)을 보내고 혹은 방(榜)을 붙여 인심을 선동하니 너희들이 비록 어리석다고 하지만 어찌 천하의 대세와 조정에서 체결한 조약을 듣지 못하고 감히 핑계를 대고 결국 화를 일으켜 집이 있는 자는 재산을 탕진하게 하고 농사짓는 자는 농사철을 놓치게 하는 것인가? 이것은 의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난리를 주창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진을 치고 자리를 차지해 무리가 많은 것을 믿고 방자하게 굴고 조정의 정사가 아래까지 전해지지 못하게 하고 명령도 실행할 수 없게 하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도리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것은 모두 내가 너희들을 잘 이끌어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사리(私利)를 탐해 너희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들은 이제 곧 처벌할 것이다. 나는 백성의 어버이로서 백성들이 스스로 옳지 못한 길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프니 어두운 데서 밝은 데로 이끌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행호군(行護軍) 어윤중(魚允中)이 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어 나를 대신하여 달려갔으니 이에 널리 선포한다. 이것은 먼저 가르친 뒤에 벌을 내리려는 뜻이다. 너희들은 마치 부모의 말을 듣는 것처럼 반드시 그러한 까닭을 느끼고 서로 알리어 해산하라. 협박을 받고 추종한 너희들은 모두 착한 백성이다.

만약 괴수(魁首)를 붙잡아 바치거나 상황을 몰래 고하는 자는 곧바로 중(重)한 상을 내릴 것이다. 각기 도망갔다가 돌아온 자들은 역시 그 논밭과 재산을 되돌려주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게 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처럼 널리 타이른 뒤에도 너희들이 계속 뉘우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큰 처분을 내릴 것이니 어찌 너희들이 하늘 아래 다시 용납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곧바로 새롭게 마음을 바꾸어 스스로 나라의 법에 걸리지 말도록 하라.

전거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5권, 문서번호 1807, 3156~3175쪽

주석
석창(石窓)의 도(道)는 편순(鞭旬)의 산을 멈출 수 있고 옥호(玉壺)의 구름은 사위(死圍)의 으뜸을 깨뜨릴 수 있다.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所藏文書 韓國東學黨蜂起一件의 1893.4.25 문서에는 “石窟道矣止鞭句之由至玉壺之雲能辟死圉之元”으로 되었고, 1893.4.29 문서에는 “石窟之道奚止鞭甸之由玉壺之雲能辟死圍之元”으로 되어 있고, 『청계중일한관계사료』에는 “石窓之道矣止鞭句之山玉壺之雲能辟死圉之元”으로 되어 있다. 세 가지 모두 상이하고, 적어도 『청계중일한관계사료』에는 옮겨 적는 과정에서 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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