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04-034
광서 20년(1894) 4월 28일 유시(酉時, 17~19시)
총리아문에 보냄
원세개가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와 아뢰기를, “조선 관군이 패하여 무기를 빼앗겼고, 조선의 각 부대는 모두 두려워하여 간담이 서늘해져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상의하여 한성과 평양의 병사 2,000명을 파견하여 길을 나누어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왕은 병사가 적은데 추가로 보낼 수도 없고 또 그 병사들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논의를 거쳐 중국에게 군대를 보내어 대신 토벌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보호에 귀의한 것은 그 내란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인데, 중국에 대신 토벌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상국(上國)의 체면을 고려할 때 그 요구를 물리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좀 전에 이미 당부하기를, 만약 반드시 중국 군대가 필요하다면 정부에서 관련 문서를 갖추어 오면 즉각 대신해서 전보를 관련 기관에 돌려 헌대(憲臺, 이홍장)에게 청하여 조사하여 처리토록 하였습니다. 만약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 사람 가운데 반드시 이를 즐겨 할 자가 장차 중국을 어떠한 지경에 빠뜨리게 될 것이니, 반드시 물리쳐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조선 정부의 문서가 이르게 되면, 응당 총리아문에 알려 일본 주재 왕성(汪星)에게 전보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조약문에 따라 관련 문서를 일본 외무성(外務省)에 보내게 해 조선의 요청임을 알려야 합니다. 을유조약에서 중국과 일본이 파병할 때는 다만 먼저 문서를 보내어 알리도록 되어 있을 뿐 당초에 중국이 파병한다고 일본 또한 파병한다는 문장은 없습니다. 일본이 만약 간섭하고자 한다면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병사 100여 명을 한성으로 보내는 데 불과할 듯합니다. 그러나 교비는 한성과의 거리가 아직 멀고 일본 병사가 오면 도리어 소동이 일어나서 조선의 외서(外署)는 응당 일본 병사의 입경을 저지할 것이고, 서양의 각 공사(公使) 관원들은 더욱 일본이 먼저 스스로 소란을 피우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좀 전에 일본의 역원 정영방(鄭永邦)이 일본 공사의 명령으로 와서 교비의 정황을 묻고는 아울러 말하기를, ‘교비가 오래 소란을 피워 상무(商務)가 크게 손상을 입어서 걱정되 는 바가 많습니다. 조선인은 반드시 반란을 평정할 수 없고, 시간이 오래갈수록 더욱 처리하기 힘든 법인데, 귀 정부는 어찌하여 속히 조선을 대신하여 토벌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저(원세개)는 조선 조정에서 또한 이러한 요청이 있었는데, 우리 정부는 조선 측이 전투에 익숙해져 스스로 강해질 것을 바랐기에 아직 인준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울러 을유조약으로 우리가 만약 파병한다면 응당 어디에서 통보하면 되는지 탐문해 보니, 정영방은 총리아문과 북양대신 모두 가능하니 이에 대하여 아국(일본) 정부는 반드시 다른 의견을 갖지 않을 것이라 대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이홍장)는 현재 조선 정부의 문서가 관계 기관을 거쳐 도착하기를 기다려 섭지초(葉志超) 제독(提督)을 보내 정예부대 천 수백 명을 대동하여 상륜(商輪)을 타고 속히 가도록 하고, 아울러 해군 함선 4척을 인천과 부산 등 각 항구에 보내어 보호하는 한편 왕성 공사에게 전보를 보내어 일본 외무성에 알려서 예전의 조약(을유조약)에 부합하도록 하려 합니다. 배치가 확정되면 다시 계속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