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19-04-022
광서 19년(1893) 4월 5일 신시(申時, 15~17시)
총리아문에 보냄
원세개가 5일 전보를 보내어 아뢰기를, “좀 전에 조선 측이 협주(浹州)에서 보낸 전보를 보여 주었는데, 교비들이 조선 국왕의 타이름이 진솔하고도 엄준하고 경병(京兵)이 도착하여 방비함을 보고는 곧 차례로 해산했지만, 그 우두머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앞서 병이 들었던 수십 명은 현재 또한 몸을 피신했습니다. 보은 지방은 피폐해지고 주둔 병사는 몹시 군색하여 철수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비의 우두머리를 아직 붙잡지 못하고 동학당을 아직 섬멸하지 못하여 장차 다시 모일까 걱정이 되니, 이로 인하여 두 초병(哨兵) 부대를 남겨서 속리산의 교비 소굴에 주둔시켜 방비에 보탬이 되게 하면 내우(內憂)는 또한 풀 수 있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