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19-03-050
광서 19년(1893) 3월 30일 해시(亥時, 21~23시)
총리아문에 보냄
원세개의 30일 전보에 의하면, “최근에 교비의 일로 인하여 조선의 양인(洋人)들이 분분히 와서 탐문하고 상의하였기에 오오이시를 방문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조금 틈이 생겨 비를 무릅쓰고 가서 대면해서 반복적으로 은근히 권하고, 아울러 일본과 조선 사이에 일이 생겨 아시아의 국면이 전면적으로 요동하여 타국이 이 기회를 틈탄다면 그 피해는 적지 않을 것이니, 작은 일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오오이시)는 정부의 뜻이라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뜻이 정해져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선 측이 이미 일본에 전보를 보내 처리하라고 했기에 다만 짐짓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좀 전에 남정철(南廷哲)이 와서 고하기를, 어떤 일본인이 그에게 권하여, 계속 6만 냥(兩)의 배상 논의를 견지하면 반드시 통할 것이라 했다 하였습니다. 저(원세개)는 남의 재난을 행운으로 여기는 무리는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이홍장)가 듣기에는 내무대신(內務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이 논의를 주관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래도 화평 국면을 고려하며, 오오이시 마사미가 강포(强暴)함을 고수하는데, 정부에 반드시 사주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