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1894)]
광서(光緖) 20년 갑오(甲午) 4월에 조선 전라도 동학당(東學黨) 괴수 최시형(崔時亨) 등이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켜 전주성을 점령하였는데, 조선 군사의 토벌이 실패하여 온 나라가 크게 놀랐다. (조선) 국왕이 우리나라의 조선상주(朝鮮常駐) 상무총리(商務總理) 특수절강온처도(特授浙江溫處道) 위정(慰廷, 원세개의 자) 원세개(袁世凱) 관찰(觀察)과 상의한 뒤 전보를 보내 위급함을 알려 오니, 북양대신(北洋大臣) 부상(傅相) 이홍장(李鴻章)이 황제에게 상주(上奏)한 뒤 사성(士成, 섭사성)에게 직례제독(直隸提督) 섭지초(葉志超) 군문(軍門)과 더불어 휘하의 정예병력 2,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때 마침 러시아와 조선의 변경 지방을 두루 돌아보고 방금 돌아왔는데 명을 받고 곧바로 노방(蘆防, 蘆臺 지방의 防營)의 기병과 보병 800명을 뽑아 선봉으로 삼고 5월 초 3일(서기 1894년 6월 6일)에 노대(蘆臺)에서 어머니와 하직한 뒤 출발하였다. 기차를 타고 천진에 도착해 부상 이홍장을 만나 하직하고 다시 기차역에 도착하니 예정(藝亭, 潘萬才의 자) 반만재(潘萬才) 군문, 치선(致先, 陳景熙의 자) 진경희(陳景熙) 직자(直刺)가 배웅을 나와 급히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작별해 기차에 올랐다. 당고(塘沽)에 도착하니 영변(營弁) 위가훈(魏家訓) 등이 이미 부대를 이끌고 기선에 탑승해 있었다. 곧바로 작은 기선 비마호(飛馬號)를 타고 항구를 벗어나니 대고구(大沽口)의 여러 포대에서 모두 깃발을 올리고 포성을 울리면서 바래 주었다. 바다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7시가 되었다.
도남호(圖南號) 기선에 오른 뒤 곧바로 출발하도록 명하였다. 함께 탑승한 사람들로 평재(平齋, 程允和의 자) 정윤화(程允和) 군문, 청천(淸泉, 袁世廉의 자) 원세렴(袁世廉) 직자, 수행원 동지(同知) 소재(筱齋, 史雲龍의 자) 사운룡(史雲龍), 막료(幕僚) 지현(知縣) 육상(毓祥, 羅秉楨 의 자) 나병정(羅秉楨), 현승(縣丞) 조화(藻華, 陶子綬의 자) 도자수(陶子綬), 곡생(谷生, 李寶森의 자) 이보삼(李寶森) 등이 있었다. 8시에 저녁을 먹었다. 이날 하늘은 맑고 공기가 시원했으며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았다.
초4일 아침 8시에 배는 연대(燕臺)를 지나 12시에 바다로 나가 동쪽으로 향하였다. 점심 후 정평재(程平齋), 원청천(袁淸泉)과 시국(時局) 이야기를 늘어지게 하느라 지루한 줄 몰랐다. 이날도 바람이 없어 뱃길이 매우 평온했다.
초5일 새벽에 일어나 배의 조타실에 올라 보니 100마리가 넘는 큰 물고기들이 배 양쪽에서 파도를 가르면서 배를 따라오는데 모두들 신기해하였다. 7시 무렵 푸른 산들이 구름과 바닷물 사이로 부침하며 어슴푸레 보이니 조선 땅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큰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1시간 정도 배를 멈추었다가 안개가 사라진 뒤 다시 출발하여 천천히 나아갔다. 상무위원(商務委員) 원극관(袁克寬)이 조선의 작은 기선 강제호(康濟號)를 타고 와서 항로를 안내하였다. 배가 홍주(洪州) 내항(內港)의 면구(沔口)에 도착한 뒤 평원호(平遠號) 군함의 관가(管駕, 함장) 이화(李和)가 삼판선[거룻배]을 타고 와서 인사한 뒤 곧바로 닻을 내렸는데 벌써 신시(申 時)가 되었다. 조선 국왕이 파견한 관원이 마중 나와 선박을 마련해주어 상륙하였다. 이날 늦게 여러 배들이 모두 마삼포(馬三浦)에 정박하고 조수(潮水)를 기다렸다.
초6일, 아침 조수를 이용하여 배로 다시 40리를 나아간 뒤 백석포(白 石浦)에 도착하니, 인천 이사관(理事官) 유영경(劉永慶)이 마중 나왔다. 상륙해 부대를 정돈한 뒤 아산현(牙山縣)으로 가서 주둔하였다. 고을에는 성곽이 없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백 가구의 주민들이 초가를 지어 살고 있는데, 높은 관과 넓은 띠옷을 입어 먼 옛날 밭 갈고 우물 파던 시절의 운치가 있었다. 대군(大軍)이 온 것을 보고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이끌고 모두들 찾아와 구경하였다. 관아 옆의 이사청(理事廳)에 묵으면서 고시(告示)를 내어 소란스러움을 막으니 시장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다. 조선 국왕이 외무협판(外務協辦) 이중하(李重夏)를 보내 군사들을 위문하였고 물품을 공급해 주는 것이 세심했다. 저녁에 서울의 원 총리(袁總理, 원세개)의 전보를 받았는데 조선 군사들이 ‘비도’를 토벌해 이미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초7일, 진시(辰時)에 비가 내리더니 오시(午時)에 날이 개었다. 걸어서 산에 올라 군영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사운룡(史雲龍)에게 백석포로 가서 섭 군문(葉軍門, 섭지초)의 부대를 마중하도록 명하였다.
초8일, 아침에 말을 타고 백석포로 달려가니 섭 군문이 유방(楡防, 楡關의 防軍) 각 영(營)을 거느리고 상륙하였기에 그와 만나서 인사한 뒤 다시 말을 타고 아산으로 돌아왔다. 섭 군문이 부대를 거느리고 아산으로 와서 함께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킬 것을 제안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倭)가 (조선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는 소식을 받았다.
초9일, 장병 100명을 파견하고 통역과 함께 고시(告示)를 지니고 전주로 가서 (병사들을) 불러 위로하였다. 정평재(程平齋)가 서울로부터 왔는데 섭 군문이 선봉부대의 영무처(營務處)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고시를 그대로 베껴 둔다.
초10일, 큰비가 쏟아졌다. 여러 부대가 산등성이에 흩어져 주둔하였는데 빗물이 장막에 흘러들어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11일, 이중하가 국왕의 명을 받들고 와서 군사들을 위문하였다. 첩보에 의하면 전주의 (동학)당 비도가 대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려 조선 군대가 전주성을 수복하였다고 한다.
12일, 비가 내렸다. 조선 백성들이 길가에 간판을 세워 (아군의) 군령이 엄격하다고 칭송하는 글을 써 놓았는데 매우 좋은 일이었다.
13일, 왜가 군사를 증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정부에서 전보를 보내 (아군의) 전진을 멈추도록 요청하였다.
14일, 아침에 영무처(營務處)의 근신(覲臣, 龍殿揚의 자) 용전양(龍殿揚) 부융(副戎)이 찾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에 장교 왕(王)씨가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조선으로 속속 증파된 왜군이 약 5,000명에 이르러 조선 정부가 크게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곧이어 부상(傅相) 이홍장께서 제군(提軍, 섭지초)에게 타전한 전보를 받았는데, 왜 공사(公使)의 욕심이 너무 많아 이미 주한총리(駐韓總理) 원세개 도원(道員)에게 군대를 철수하는 문제를 협의하도록 지시하여, 먼저 병력의 5분의 4를 철수시키고 400명의 병력을 남겨 인천에 주둔시킬 예정이므로 원세개와 더불어 상의하라고 했다. 용 부장(龍副將)이 작별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15일, 섭 군문에게 사운룡을 전주로 파견해 비도의 상황을 탐문하고 아울러 합동으로 귀순 공작을 시행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날 군영에서 이중하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흥을 다하고 헤어졌다.
16일, 정평재가 서울로부터 돌아왔는데 왜군의 상황을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17일, 원 위정(袁慰廷, 원세개) 관찰(觀察)이 섭 군문에게 타전하기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에게 요청하여 속히 해군 군함을 인천항으로 출동시켜 위세를 돕고 또한 육군 병력을 마파(馬坡)로 증파하도록 한다면 혹시 왜인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할 수도 있을 것이라 했으니 그 결정을 바란다고 하였다. 오후에 섭 군문이 찾아와 여러 가지 일들을 논의하였다.
19일, 섭 군문을 방문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 질 무렵에 산에 올라 아산의 지세를 살펴보았다.
20일, 아침에 정평재에게 지도측량생도 우광흔(于光炘) 등을 거느리고 서울로 가서 지형을 조사하면서 각 요충지를 그리도록 하였다. 원세개 관찰에게 편지를 보내 양총대(洋銃隊) 400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가서 중국 공사관을 보호하고 또한 400명의 병력을 수원에 주둔시켜 지원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회답 전보에서 왜인과의 협상이 아직 결과가 없으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고 요청해 왔다. 오후에 하해문(夏海門) 총융(總戎) 등이 이미 기병 100명과 지뢰병 100명, 보병 300명을 거느리고 기선 해정호(海定號) 편으로 아산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원을 파견해 백석포로 가서 마중하게 하였다.
21일, 전주 비도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토벌하려고 하였다. 곧바로 서울에서 온 전보를 받았는데 왜가 끊임없이 군사를 증파하여 상륙한 자가 약 1만 명으로 근진(厪津), 용산(龍山), 마파, 천주계(千酒計)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는데 기세가 아주 흉폭하다고 했다. 저녁 무렵에 왜군 10여 명이 백석포 일대에 와서 측량과 제도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1개 소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달려가 보았다. 왜군은 우리를 보자 서둘러 거룻배에 올라 노를 저어 떠났다. 이날 저녁, 섭 군문이 와서 전주로 출동할 계획을 잠시 늦추라고 하였다.
22일, 각 군영으로 하여금 요충지를 골라 나누어 주둔하고 진지를 단단히 구축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하해문(夏海門)이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이날 저녁 찾아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23일, 아침에 해군 군함의 관가(管駕) 협융(協戎, 林開士의 자) 임개사 (林開士) 및 유격(遊擊, 方伯謙의 관직) 방백겸(方伯謙)이 찾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곧이어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는데 비도를 토벌하되 서울은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지시였다.
24일, 새벽 두 시에 막료(幕僚) 이곡생(李谷生)과 장교 위가훈(魏家訓) 등을 거느리고 군사를 이끌고 전주로 출발하였는데 50리를 행군하여 안주(安州)에 머물렀다. 병졸이 민간의 채소 1포기를 훔쳤기에 그의 귀를 베어 군령(軍令)을 보이니 모든 군사가 숙연해졌다. 안주 수령 김(金)씨와 온양(溫陽) 수령 서(徐)씨가 모두 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에 조선 정부의 초토사(招討使) 홍군(洪君, 洪啓薰을 가리킴)이 장교를 통해 편지를 보내오면서 소 2마리, 돼지 10마리 및 달걀 1,000개로 우리 군사를 위문하였는데 달걀만 받아 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주도록 지시하고 답장을 보내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곧이어 원세개 총리(總理)와 섭지초 군문의 전보를 받았다.
25일, 부대가 광정(廣亭)에서 머물렀다. 애석(愛石, 趙秉鎬의 호) 조병호(趙秉鎬) 충청도 관찰사가 장교를 보내 마중하면서 술과 마실 것을 바쳤다. 서울에서 보내온 장교가 왜의 공사(公使)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보내온 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전날 내건 고시(告示) 내용의 진위를 따져 묻는 것이었다. 곧바로 회답 공문을 보내도록 지시하고 아울러 원 총리에게도 편지로 알려 주었다. 오후에 섭지초 군문의 편지가 왔는데 왜가 날뛰는 상황을 말하였다.
26일, 새벽 두 시에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아침 무렵 공주(公州)의 강변에 도착하였는데 조선 관원들이 노래하는 기생들을 데리고 마중 나왔다. 노로 배를 두드리며 강을 건너 성 북쪽의 웅진주(熊津州)에 주둔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 서리(署理) 조병호가 찾아와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떠났다. 원세개의 전보를 연달아 받았는데, 왜인들이 군사를 증파하면서 조선을 도와 자립하도록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상황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오후에 조 관찰사를 찾아 인사하였는데 술자리를 마련해 노래하는 기생들에게 술을 권하도록 하여 돈을 내서 상으로 나누어 주고 즐기다가 헤어졌다.
27일, 관찰사 조병호 공(公)이 금강각(錦江閣)에서 주연(酒宴)을 베풀고자 이 태수(李太守), 심 판관(沈判官), 박 중군(朴中軍)을 보내 가마를 갖추어 데리러 왔기에 막료 이곡생(李谷生)과 함께 따라갔다. 강기슭에 세워진 (금강)각은 산자락과 닿아 천연의 그림이었는데, 벽에는 명인(名人)들의 시가 많이 새겨져 있어 술자리를 벌여 놀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고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마음이 절로 즐거웠다. 술자리에서 조공이 여러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으로 술을 권하도록 하여 모두 상을 내렸고 기생들도 고맙다고 절을 하였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 조병호 공이 조선의 나랏일을 이야기하면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려 이 때문에 마음이 슬퍼져 기분이 좋지 않게 헤어졌다. 돌아오자 한 노인이 희끗희끗한 수염에 백발을 하고 홀연히 찾아와 옷소매에서 시 한 수를 꺼내 우리 군사들이 지나가면서 백성들을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다고 칭송하기에 관대하게 사례하였다.
28일(서기 1894년 7월 1일), 아침에 조 관찰사가 장교를 보내 안부 인사를 하였다. 정오에 섭 군문으로부터 전보가 왔는데 왜의 일이 조금 풀렸다고 한다. 이날 저녁 날씨가 무더워 앉거나 누워도 편안하지 않았다. 이곡생과 지난날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29일, 아침에 섭 군문의 전보를 받았는데 계속 전주로 가서 비도를 토벌하라는 명이었다. 병정(秉楨)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금강각에서 노닐면서 잔치를 즐긴 일을 적는다[遊宴錦江閣紀事]”는 시 한 수를 지어 서문을 함께 보냈고, 조 관찰사에게 현판에 새겨 금강각에 걸어 두라고 하였다. 저녁 무렵 조 관찰사의 관원이 서신을 가지고 왔는데 화답하는 시로서 구절이 아주 우아하고 합당하였다. 이날 밤은 시원하였다.
겹겹으로 된 성이 푸른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萬松蒼翠擁層城
비적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이곳에 군대가 머물렀네
爲靖狼煙此駐兵
갓 쓰고 검을 든 채 뜻하지 않게 강기슭의 누각에 오르니
冠劍偶登江上閣
酒筵을 베풀어 주는 사또의 정이 정말 고맙네
樽罍多感使君情
술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의 모습 어여쁘지만
座中歌舞憐紅粉
저 멀리 구름 감도는 산 너머로 임금님 계시는 서울이 있다네
檻外雲山接王京
바다 너머 하늘 끝 멀리 바라보니 氣象이 높아만 가는데
極目海天增氣象
깃발 빽빽한 저쪽은 바로 중국군의 軍營이라네
旌旗簇簇漢家營
6월 초1일, 아침에 가랑비가 내렸다. 정평재(程平齋)가 서울로부터 왔는데 원 총리가 군사를 아산으로 철수시켜 왜가 트집을 잡지 못하게 하자고 요청한다고 하였다. 오후에 조 관찰사가 내방하고 심 판관은 술상을 보내왔다. 사소재(史筱齋)가 말을 타고 전주에서 돌아왔는데 동학당 비도가 회유 포고문(布告文)을 읽고 모두 감읍(感泣)하여 무기를 버리고 돌아가 성실하게 살기를 바란다 하였다. 이에 조 관찰사와 심 판관 등을 붙잡고 함께 시원하게 술을 마신 뒤 저녁 무렵에야 헤어졌는데, 공문을 작성해 전라도의 김(金) 관찰사에게 발송하도록 명하였다. 술이 약간 취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초2일, 홀로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주로 출발하면서 정평재에게 부대를 거느리고 천안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도중에 비를 맞아 옷과 신발이 흠뻑 젖었으며, 이날 밤은 연진현(延津縣)에서 묵었다.
초3일, 닭이 홰를 치자 출발하여 8시에 여산(礪山)을 지나고 11시에 산리마호(山理馬號)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오후) 3시에 전주에 도착하니 문무(文武) 관원들이 줄지어 성 밖까지 나와 맞이해 주었다. 남문으로 들어서니 가옥들이 불에 타고 백성들이 머물 곳이 없는 것을 보니 매우 불쌍하였다. 전주 관아에 머물었는데 관찰사 김(金, 金鶴鎭을 가리킴)이 찾아와 인사하면서 음식을 바치고 비적들을 토벌한 사실을 자세하게 말한 뒤 곧바로 떠나갔다. 저녁을 마치고 부상(傅相) 이홍장에게 타전해 상황을 보고하고 또한 섭 군문에게도 회답 전보를 보내어 전주에 도착한 모든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날 밤 날씨가 무더워 마음도 불타는 것 같았다.
초4일, 김 관찰사를 답방하면서 난을 당한 주민이 모두 900호(戶)로 조사해 밝혀졌다기에 양은(洋銀) 1,806원(元)을 내주어 민 판관(閔判官)에게 호별로 나눠 주어 가옥을 수리하는 데 보태 쓰도록 하였다. 김 관찰사가 연회를 베풀어 환대하면서 기생들에게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권하도록 하였기에 모두 후하게 상을 주었다. 작별하고 돌아온 뒤 장교 유보태(劉寶泰)가 돌아와서 동학당의 수괴 몇 사람을 대동하고 (이들이) 항복하고 무기를 바쳤으며 하명을 기다린다기에 곧바로 김 관찰사에게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부탁하였다. 곧이어 민 판관이 와서 고시(告示)를 내건 후 난을 당한 백성들이 구휼금을 받아 모두 매우 감격해한다고 전해 주었다.
고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초5일, 아침에 섭 군문의 전보가 왔는데 속히 돌아오라고 하였다. 고시를 내어 귀순한 난당들을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이곡생에게 병사 몇 사람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도록 명하였다. 저녁 10시에 비도를 진압하는 일을 김 관찰사에게 맡기고 곧바로 기병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고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초6일, 아침 4시에 은택(恩澤)에 도착하니 이곡생이 신을 거꾸로 신은 채 반갑게 맞이해 말에서 내려 쉬었다. 곧바로 말에 올라 니산(泥山)을 지나는데 도중에 큰 비바람을 만났다. 산간의 강물이 크게 불어나 계곡에 가득 차서 기병들을 거느리고 세찬 물길을 헤치고 강을 건넜다. 이날 밤 공주에서 묵었다. 조 관찰사가 장교를 보내 위로하면서 술과 음식을 바쳤다.
초7일, 새벽 2시에 공주를 출발하여 광정(廣亭)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이곡생이 뒤따라와서 잠시 후 말에 올랐다. 마침 비가 내린 뒤라 진창길이 되어 천안에 도착하니, 벌써 아이들이 밥을 달라고 보채고 등잔불이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정평재(程平齋)와 위가훈(魏家訓)이 모두 와서 인사를 하였다.
초8일, 아침에 원 총리에게 답장을 작성해 보냈다. 경장(輕裝) 기병을 거느리고 급히 아산으로 돌아와 섭 군문을 만나 인사하고 비도의 난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부상 이홍장에게 속히 청하여 윤선을 보내 우리 부대를 국내로 철수시킴으로써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섭 군문은 주저하였다. 이날 밤 부상 이홍장에게 타전해 선봉부대가 비도를 진압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아울러 부대를 국내로 철수시키자고 청하였다.
초9일, 섭 군문에게 부상 이홍장 앞으로 타전해 부대를 철수시킬 것을 청하자고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군대는 본시 명을 받들어 조선의 난리를 평정하려는 것이지 왜와 다투자는 것이 아니다. 왜가 틈을 타서 육해군의 대규모 병력으로 조선을 압박하면서 요새를 차지하고 분쟁거리를 찾고 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꾸며 온 음모이다. 그리고 적의 숫자는 많고 우리는 적으며 지역적 이점과 군사들의 화합에서 모두 뒤떨어졌으니 마주 싸우는 것은 곧 저들의 계략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제 비도의 난리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마침 이때에 우리 군대를 국내로 철수시켜 구실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노자(老子)가 말하는 남보다 앞서지 않는 계책이자 또한 병가(兵家)에서 실을 피해 허를 치는 계략이다. 하물며 조선은 태서(泰西) 각국과 통상을 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으니 어찌 왜인들이 병탄하는 일을 허용하겠는가? 만약 계속해서 고집을 피울 경우 영국과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청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한편 우리의 육해군 부대를 동원하여 북양(北洋)과 봉천(奉天)의 변경지역에 주둔시키고 가을에 날씨가 선선하기를 기다려 우리 육군이 구련성(九連城)으로부터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해 저들의 배후에 접근하고 해군 전함의 대부대는 인천항을 봉쇄하여 저들의 목통을 눌러 버린다면, 그때 왜군은 힘을 들여도 전공을 거두지 못해 장교들은 교만해지고 병사들은 나태해질 것이므로 단번에 격파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왜는 우리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대국(大局)은 매우 위태로워질 것이다.” 곧바로 부상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는데 평화 협상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 잠시 아산에 주둔해 있으라고 하였다.
초10일, 섭 군문을 찾아뵙고 부대가 아산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마땅히 빨리 국내로 철수하도록 청하여 만전을 기할 것을 강하게 말하였다.
11일, 용근신(龍覲臣)이 서울로부터 찾아왔는데, 조선으로 출동한 왜의 병력이 약 3만 명에 달하고 대포를 끌고 곧바로 수도로 진입하였고 아울러 군사를 나누어 여러 요새 지역을 차지하였고 병력 배치가 엄밀하고 대오도 매우 정연하였으며 모두 신식의 연발총을 사용하며 일부 병력은 이미 수원(水原)까지 다가와 날뛰며 군사를 움직이려는 뜻이 있으니 병력을 이끌고 성환(成歡)으로 가서 방어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섭 군문은 싸움이 일어나게 될까 두려워 이를 힘써 말렸다.
12일, 이곡생에게 조강호(操江號) 군함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하고 조선의 상황을 장초보(張楚寶) 관찰(觀察)에게 직접 말하여 부상 이홍장에게 다시 보고하도록 하고 속히 선박을 보내 부대를 철수시켜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요청하게 하였다. 곧바로 받은 부상 이홍장의 전보에 평화 협상이 이루어지기 어려워 이미 강자강(江自康) 을 파견해 인자영(仁字營)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였다고 했다.
13일, 경장(輕裝)의 기병이 진위(振威)와 수원 일대에 도착해서 지형을 살펴보았는데, 바로 서울로 가는 큰 길목이었다.
16일, 급히 아산으로 돌아왔는데 성환과 진위에 모두 정찰 병력을 남겨두었다.
17일, 서울에서 전보가 왔는데 원 위정(袁慰廷, 원세개) 관찰은 어제 이미 인천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돌아갔다고 하였고, 왜의 정찰 기병은 벌써 진위 일대에 이르렀다.
19일, 봉천(奉天)의 섭계림(聶桂林) 통령(統領)의 장교가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경기도 지방을 지나는데 왜인들의 수색이 매우 엄격하였다고 한다.
20일, 강자강이 인자영 병력을 이끌고 오는데, 기선이 이미 내도(內島)에 도착하였다.
21일, 광을호(廣乙號), 제원호(濟遠號), 위원호(威遠號), 애인호(愛仁號), 비경호(飛鯨號)가 전후로 모두 내도에 정박하였다.
22일, 부상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는데 평화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속히 전투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강자강이 부대를 이끌고 도착하였다. 오후에 성환으로 급히 가서 지형을 살펴보았다. 성환은 아산(牙山) 서북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는데 그 앞에 수원과 진위가 있어 서울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이므로 병력을 주둔시켜 지키게 할 예정이다. 이때 왜의 병력 약 3만 명이 과천(果川)과 수원에 집결해 있었는데, 전선이 끊어져 소식이 통하지 않았다.
24일, 새벽 두 시에 부중(副中), 노전(老前), 연우(練右) 3개 영을 이끌고 성환으로 달려가 요새에 나누어 주둔시켰다. 저녁에 아산에 있는 섭 군문의 급한 편지를 받았는데, 광을호와 고승호(高昇號)가 왜에 의해 격침되어 싸움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전투에 미리 대비하라고 하였다. 첩보에 의하면 왜의 대부대가 이미 진위로 다가왔다고 한다. 병력이 부족하기에 급히 섭 군문에게 연락하여 속히 지원병을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25일, 섭 군문이 강자강과 허조귀(許兆貴)를 파견하자 부대를 거느리고 왔다. 곧바로 강자강의 1개 영(營)은 성환 서남쪽을 지켜 진위로부터 오는 길을 막게 하고 허조귀의 1개 영은 성환 동쪽의 산비탈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경보가 빈번하게 전해 오는데 관군(官軍)의 정찰 기병들이 이미 왜의 정찰병과 전투를 벌였다.
26일, 진시(辰時, 7~9시)에 섭 군문이 달려와 방어작전 계획을 물었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닷길이 이미 막혔고 지원군은 단연코 바다를 건너오기 어려우니 고립된 아산을 지킬 수 없다. 공주는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천연적인 요새이므로 급히 가서 차지해야 한다. 싸워 이길 경우 공주는 후원(後援)이 될 것이고 이기지 못하더라도 길을 에둘러 탈출할 수 있다. 이 사이 전투는 각 군영을 거느리고 힘을 다해 방어해야 하고 상황을 보아 전진하거나 후퇴할 것이다.” 섭 군문은 이 계획에 따라 곧바로 휘하 섭옥표(葉玉標) 등 500명 병력을 이끌고 갔다.
오후, 직산(稷山)에 적 기병이 출몰했다는 첩보를 받고 곧바로 산에 올라 왜군을 바라보니 대규모의 기병과 보병부대가 진위에 주둔하였는데 그 무리가 약 2, 3만 명으로 위용이 매우 성대하였다. 우리 기병과 보병은 2,000명도 안 되어 병력의 숫자가 너무 차이가 나서 매우 걱정스러웠다. 말을 타고 돌아왔다. 저녁을 먹을 때 우광흔(于光炘)이 찾아와 말하기를, 첩보에 의하면 왜가 오늘 밤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성환의 관군을 습격하고 한 갈래는 공주로 가는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하였다. 곧바로 각 군영에 명령하여 모두 밥을 든든히 먹고 대기하도록 하였다. 성환은 진위와 30리 떨어져 있는데 서남쪽에 높은 산이 있어 진위에서 오는 길을 멀리 마주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10리 남짓 나아가면 강에 다리가 있는데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었다. 동쪽으로 작은 산이 있는데 풀이 무성하고 나무가 우거졌다. 동남쪽으로 산이 하나 있는데 산 아래 좁은 길은 직산과 공주로 통한다. 곧바로 초장(哨長) 윤득승(尹得勝)에게 포대를 거느리고 서남쪽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적군이 지나가면 곧바로 포격하도록 명하였다. 방대(幇帶) 풍의화(馮義和)에게 정예병력 300명을 거느리고 강변의 숲 속에 매복해 있다가 적군이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초관(哨官) 서조덕(徐照德)에게 1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등성이에 매복해 정상에서 멀리 내다보면서 어느 방향이든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곧바로 등불을 내걸어 신호를 보내도록 명하였다. 방대(幇帶) 섭붕정(聶鵬程)에게 4개 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큰길 서쪽의 도랑가에 매복하고, 영변 (營弁) 위가훈(魏家訓)에게 5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지원해 주도록 명하였다. 익장(翼長) 강자강(江自康)에게 인자영(仁字營) 병력을 거느리고 적군이 아산으로 진격해 오는 길을 막도록 명하였다. 무비학생(武備學生) 주헌장(周憲章), 우광흔 등에게 건장한 병력 수십 명을 거느리고 진위에서 직산으로 가는 길옆에 매복하고 영변(營弁) 허조귀에게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성환 동쪽에 진을 치고 지원해 주도록 명하였다. 배치를 마친 뒤 비분강개하며 전투의지를 고취시키니 모두들 감격해 분발하여 목숨 걸고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오경(五更) 무렵에 왜군의 선발대가 과연 다리를 건너오기에 아군이 신속하게 총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때 마침 어두컴컴한 밤이어서 갑자기 매복을 만난 적들은 급기야 후퇴하였지만 다리가 좁고 사람은 많아 서로 밀면서 강물에 떨어져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아군은 적을 뒤쫓았다. 적군은 후방에 지뢰를 매설해 추격군을 막자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후퇴하면서 지뢰를 잘못 밟아 폭사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아군의 병력이 적어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다. 날이 밝아 오니 적의 후속부대가 벌떼처럼 에워싸고 길목으로 와서 아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생각 외로 윤득승이 산꼭대기에서 거듭 대포를 쏘아 매우 많은 적군을 죽였다. 한창 이기고 있는데 적군이 다시 산과 고개를 넘어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 포위공격해 오자 아군은 모두들 한 사람이 적군 열 명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인시(寅時, 3~5 시)부터 진시(辰時)까지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죽거나 다친 사람이 들판에 가득 쌓여 핏물이 도랑을 이루었다. 적의 무리는 갈수록 많아져 산골짜기에 가득 찼다. 아군은 사방에서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결사항전하여 산꼭대기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총소리가 멈추지 않았는데, 당시 빗발치는 총탄 속을 내달려 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지원해 주었지만, 탄약이 다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부득이 부대를 거느리고 포위망을 뚫고 나와 천안에 도착하여 섭 군문과 회합하였다. 섭 군문에게 먼저 공주로 급히 가기를 청하고는 직접 후방을 엄호하며 한편으로 후퇴하는 도중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저녁에 광정(廣亭)에서 묵었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대개 매복하여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의 적군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사상자가 겨우 1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초관(哨官) 오천배(吳天培), 섭여귀(聶汝貴), 학생(學生) 주헌장(周憲章), 우광흔(于光炘) 등이 모두 힘껏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다. 적군 사상자는 1,000여 명으로 이번에 크게 혼이 나서 감히 뒤쫓아오지 못하였다.
28일, 부대가 공주의 강변에 도착하였는데 관군(官軍)이 깃발을 되돌려 강을 건너오기에 놀랐다. 얼마 뒤 섭 군문이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왔기에 만나 보았다. 공주는 지킬 수 없으니 길을 돌아 평양으로 가서 대군과 회합한 뒤 다시 공격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휘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떠났다. 이에 부대를 한나절 동안 머물도록 하고 나머지 병사들을 수습한 뒤 출발하여 저녁에 연계 (燕溪)에서 묵었다.
29일, 50리를 가서 청주(淸州)에 도착하였다. 병사들이 굶고 지쳤기에 돈을 내어 조선 백성들에게 밥을 짓도록 하여 이를 먹었다.
7월 초1일, 50리를 가서 청안현(靑安縣)에서 묵었다. 고을의 백성들이 대군(大軍)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와서 문안하면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바쳤다.
초2일, 50리를 가서 진천(鎭川)에 도착하였는데 뒤떨어진 병사가 많아서 군사를 멈추게 하고 이들을 기다렸다.
초3일, 아침 기마 정찰병이 충주(忠州)에 왜병들이 주둔해 있다고 급히 보고하였다. 앞서간 부대가 잘못될까 봐 부대를 거느리고 70리를 달려 괴산현(槐山縣)에 도착해 섭 군문과 회합하였다.
초4일, 섭지초 군문이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먼저 떠나갔다. 홀로 기병을 거느리고 후진을 맡아 부상병들을 수습해 80리를 가서 흥당현(興塘縣)에서 묵었다.
초5일, 부대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청풍부(淸風府)에 도착하였는데 행군한 거리를 헤아려 보니 50리였다.
초6일, 30리를 가서 제천(堤川)에 머물렀다. 산 넘고 물 건너오느라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배불리 먹은 뒤 쉬도록 명하였다.
초7일, 40리를 가서 황촌(荒村)에서 묵었는데 백발노인과 어린이들까지 모두 와서 구경하며 채소와 땔감을 바치고 대신 물을 긷고 밥을 짓기도 하였다.
초8일, 40리를 가서 원주(原州)에 도착하였다. 부상당한 병사들이 병이 들어 움직일 수가 없어 모두 돈을 주고 남아서 의원의 치료를 받게 하고 장교를 파견해 돌보게 했다. 또한 조선 관원에게 통보해 일체 보호해 주도록 하니 병이 든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초9일, 30리를 가서 횡천현(橫川縣)에 도착하였다. 그 앞이 바로 춘천(春川)인데 원산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목이었다. 듣건대 원산에 상륙한 왜병 2,000명이 장차 이곳을 지나 서울로 간다고 한다. 섭 군문은 적군과 부딪힐 것이 두려워 사흘 밤이나 묵은 뒤 출발하였다.
12일, 섭 군문이 정예 기마병 수백 명을 뽑아 선발대로 삼도록 명하였는데 도중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산길이 험하고 날씨가 무척 무더웠다. 80리를 가서 춘천에 도착하였다.
13일, 80리를 가서 낭천(狼川)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봉천(奉天) 통령(統領) 좌보귀(左寶貴)의 정찰병을 만나서 그제야 관군(官軍)이 모두 평양에 주둔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4일, 도중에서 조선 백성을 만났는데 산 뒤쪽에 왜병 100명이 숨어 있다고 하기에 기병을 거느리고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90리를 가서 김화현(金化縣)에서 묵었다.
15일, 도중에서 왜병 두 명과 조우하여 기병을 이끌고 잡으러 갔지만 벌써 고개를 넘어 도망가 버렸다. 밤에 평강(平康)에 머물렀는데 행군한 거리를 헤아려 보니 50리였다.
16일, 10리 남짓을 가서 어느 마을에 도착하니 뽕나무와 삼을 심고 닭의 횃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옛날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모습이었다. 큰비가 그치지 않아 결국 이곳에서 묵었다. 주민들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바치고 가옥을 내주어 머물 곳을 제공하기에 모두 후하게 상금을 주었다.
17일, 부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갔다. 비가 온 뒤 계곡물이 갑자기 불어나 사람과 말이 물살을 헤치고 건넜다. 초저녁에 이천(利川)에서 묵었는데 행군한 거리를 헤아려 보니 80리였다.
18일, 70리를 가서 지석장(支石場)에 도착하였다. 그제서야 부상 이홍장이 앞서 보내온 전보를 받았는데, 아군의 적은 병력으로 저들의 많은 병력을 당할 수 없으니 길을 에돌아 한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해 대군과 회합하고 무기를 보충한 뒤 다시 싸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였다.
19일, 90리를 가서 수안(遂安)에 도착하니 산비탈에 교회당이 보이기에 우리 병사들이 왜의 정탐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여 다투어 들어가 수색하였다.
20일, 큰비가 내려 길을 떠날 수 없었다. 관정(冠亭, 左寶貴의 자) 좌보귀 군문이 기병을 파견해 마중 나왔다.
21일, 90리를 가서 상원(祥原)에 도착하였다. 섭 군문은 이미 먼저 평양으로 달려갔다. 연일 장맛비가 내려 길을 떠날 수 없었고 사람과 말이 모두 먹어야 하는데 식량과 사료를 지급하지 못하였다.
23일, 섭 군문이 장교를 보내 우리 부대를 출발하지 못하게 하니 병사들이 속으로 많이 불만스러워 하기에 좋은 말로 달래었다.
24일, 식량이 끊어져 황주(黃州)에서 식량을 사들였다. 곧이어 들으니 조정의 상유(上諭)로 장병들에게 은 2만 냥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고 하였다.
25일, 장맛비가 그치지 않았다. 들으니 섭지초 군문이 선봉 부대 장병들의 포상을 청하는 문서를 이미 부상 이홍장에게 타전해 대신 상주(上奏)해 주도록 요청하였다고 한다.
26일, 부상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는데 몇 개의 영(營)을 더 모집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병사들이 이를 전해 듣고 모두 기뻐서 날뛰었다.
27일, 식량이 끊어지고 병사들이 굶었다. 그래서 장교를 파견해 섭 군문에게 청하여 부대를 옮겨 평양에 머물게 해 달라고 하였다.
28일, 날이 개자 대오를 정돈해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하니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 섭 군문을 만나 인사한 뒤 곧바로 관정(冠亭) 좌보귀(左寶貴), 후재(厚齋, 豊昇阿의 자) 풍승아(豊昇阿), 형산(荊山, 馬玉崑의 자) 마옥곤(馬玉崑), 달삼(達三, 衛汝貴의 자) 위여귀(衛汝貴), 복산(馥山, 聶桂林의 자) 섭계림(聶桂林) 등의 장수를 만났는데 모두 친절하게 위문하면서 아주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29일, 나가서 보니 대군이 작전 배치가 없이 아무렇게 흩어져 있어 은근히 많이 걱정되었다.
30일, 섭 군문과 좌보귀, 위여귀 등 여러 장수를 만나 각 부대가 마땅히 각각 요충지를 골라 나누어 지키면서 적군의 포위공격을 막아야 하고 여러 부대가 모두 평양성 안에 주둔해 있는 것은 대책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모두 옳다고는 하였지만 아쉽게도 제때에 배치할 수 없었다.
8월 초1일, 전보로 전달한 상유(上諭)에서 섭지초 군문을 여러 군의 통수(統帥)로 임명하니 전군(全軍)이 모두 놀랐다. 장병들의 전공을 청하는 보고서 역시 전보로 전달된 상유로 윤허되었다.
초2일, 부상 이홍장에게 타전해 천진으로 돌아가서 병사들을 모집할 것을 요청하였고 전보로 허락을 받고 곧바로 풍의화(馮義和)를 선발대로 보냈다.
초3일, 섭지초 군문이 노방(蘆防) 통령(統領)의 도장을 위가훈(魏家訓)에게 주어 대리토록 하고 부중(副中)의 영무(營務)는 곧바로 방대(幇帶) 섭붕정(聶鵬程)에게 맡기도록 명하였다.
초4일, 닭이 홰를 치자 말에 올라 떠났는데 줄곧 찬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말발굽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순안(順安)을 지나 숙주(肅州)에 도착해 행군한 거리를 헤아려 보니 110리였다.
초5일,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새벽에 출발하였는데 새벽별이 하늘에 떠 있고 서릿발이 땅 위에 가득했다. 말들이 지나가니 여우와 늑대들이 울부짖어 그 소리가 숲과 골짜기에 울렸다. 60리를 가서 안주(安州)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다시 50리를 가서 가산(嘉山)에 도착해 묵었다.
초6일, 60리를 가서 선주(宣州)를 지나고 20리를 가서 곽산(郭山)을 지나 다시 20리를 가서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줄곧 관군(官軍)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어 안부를 물었다.
초7일, 자욱한 안개가 짙게 퍼져 해가 떠오른 뒤에야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80리를 가서 철산(鐵山)에 도착하였는데, 해가 이미 서산을 넘어가고 있고 밥 짓는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라 그곳에 묵었다.
초8일, 70리를 가서 강구(江口)에서 묵었다. 평양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도중의 민가들은 열에 아홉이 비어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우리 병사들이 백성들에게 폐를 끼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대가 행군하는데 어찌 군령을 엄하게 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초9일, 30리를 가서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구련성(九連城)이 있으니 중국과 조선의 변경이다. 오감천(吳鑑泉) 관찰(觀察) 등도 도착하여 함께 기선을 기다려 천진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11일, 부상 이홍장의 전보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지시였다. “조정의 상유(上諭)에 따라 선봉부대의 잘 싸운 장수는 굳이 천진으로 돌아와 병사를 모집하지 말라.”
12일, 오감천 관찰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부상 이홍장이 전보를 보내와 천진으로 돌아오지 말고 평양의 사태가 위급하니 되돌아가서 싸움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오군(吳君)은 장하다고 하였다.
15일,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는데 평양의 형세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거리인 160리를 밤낮으로 달려 안주에 도착하였다.
16일, 새벽에 성군마대분통(盛軍馬隊分統) 위본선(衛本先)을 만났는데 평양에서 패전하여 관정(冠亭) 좌보귀(左寶貴) 군문이 전사하였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곧바로 위본선과 안주를 지킬 대책을 논의하였다. 섭지초 군문 등이 전후로 말을 타고 달려왔는데 곧바로 명령을 내려 흩어진 부대를 수습해 안주를 지키면서 진지를 튼튼하게 구축하여 적군을 대비하자고 청하였다. 섭 군문이 청을 들어주지 않아 결국 뿔뿔이 부대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곧이어 나머지 부대를 거느리고 안동(安東) 육백조(六百吊)의 요충지를 지키도록 지시하고 적들과 한 달 남짓 맞서 싸웠다.
9월 25일(서기 1894년 10월 23일), 섭지초 군문이 문책을 당하고 상유(上諭)에 의해 방판군무(幇辦軍務) 축삼(祝三, 宋慶의 자) 송경(宋慶) 궁보(宮保)가 전군의 통수로 임명되었다. 그때 병사들이 몹시 피곤하였고 식량과 무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또한 마금서(馬金敍)의 노방(蘆防) 3개 영이 명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병력이 더욱 부족하였다. 증원군을 요청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곧이어 송경 통수의 명에 따라 부대를 옮겨 율자원(栗子園)과 호이산(虎耳山)을 나누어 지키게 되었다.
26일, 왜군이 상류의 포석하(蒲石河)에서 몰래 압록강을 건너 호이산을 공격해 왔는데 그 무리가 약 4~5천 명 되었다. 부대를 이끌고 나가 막고 묘시(卯時)부터 오시(午時)까지 총과 대포를 서로 쏘아 사상자가 서로 비슷하였다. 오후에 이르러 적이 더욱 몰려왔다. 아군은 탄약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갑자기 송경 통수가 봉황성(鳳凰城)으로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보고받고 세력이 더욱 고립되어 하는 수 없이 대포 2문을 땅속에 파묻은 뒤 부대를 이끌고 싸우면서 후퇴하여 필자구(筆子溝)에 잠깐 머물렀다. 이튿날 병사들에게 땅속에 파묻었던 대포를 파내 싣고 오도록 명하였다.
28일, 부대를 거느리고 봉황성에 도착하여 송경 통수를 만나 인사를 하니 마천령(摩天嶺)과 석불사(石佛寺)로 가서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그때 손자양(孫子揚)과 여도생(呂道生)도 역시 통수의 명에 따라 성군(盛軍) 기병과 보병부대를 거느리고 부근의 연산관(連山關)과 첨수참(甛水站) 등지에 주둔하였다.
10월 초4일, 송경 통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개평(蓋平)을 지원하면서 8개 영을 증파하여 대고령(大高嶺) 일대를 나누어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때 봉황성은 이미 적군에게 점령되었다.
14일, 왜군의 대부대가 연산관을 공격해 왔다. 성군(盛軍)의 기병부대가 나가 싸웠는데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당하지 못해 잠깐 사이에 함락되었다. 놀라운 소식을 듣고 급히 가서 구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부득이 산꼭대기를 지키면서 힘껏 저항하였다. 그때 아군의 병력이 적어 빽빽한 수풀 속에 깃발을 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군사처럼 위장하고 아울러 틈을 타서 기묘한 계략을 내어 저지해서 죽이고 불시에 출몰하고 가는 곳마다 방어진을 치고 겹겹이 매복하여 눈밭에서 자고 바람을 맞으며 10여 일 동안 힘들게 지켜 결국 적들이 넘어오지 못하였다.
26일, 상유를 받들어 특수 직례제독(直隸提督)으로 임명받았다. 조정의 은혜가 높고 두터우나 시국이 어려워 나도 모르게 감격스러운 눈물을 흘렸다.
29일, 눈이 내렸다. 밤에 성군(盛軍)과 몰래 호응하기로 약속하고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들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연산관의 요충지를 빼앗았다. 그때 적들은 꿈속에 들었다가 놀라 깨어나 아군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없어 분수령으로 도망갔다. 아군은 총을 쏘면서 추격하여 적군을 셀 수 없이 죽이고 또한 왜의 지휘관 부강삼조 (富岡三造)를 죽였다. 날이 밝자 성군의 부대도 어지럽게 뒤따라왔다.
11월 초2, 3, 4일 여러 날에 각각 소부대를 출동시켜 적군과 싸웠다.
초9일, 정예병 1,000여 명을 뽑아 세 부대로 나누어 분수령 곁으로 접근해 매복한 뒤 갑자기 뛰쳐나가 공격하였다. 적군이 지탱하지 못하고 고개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초하구(草河口)까지 쫓아가면서 적군을 죽였다. 이때 하청운(夏靑雲)에게 기마병을 거느리고 분수령 앞으로 전진해 지키게 하고 경봉명(耿鳳鳴)에게 봉군(奉軍)을 거느리고 연산관에 주둔토록 하였으며 손현인(孫顯寅), 여본원(呂本元)에게 성군(盛軍)을 거느리고 첨수참에 주둔하게 하고 강자강(江自康)에게 인자영(仁字營)을 거느리고 노호령(老虎嶺)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섭붕정(聶鵬程), 심증갑(沈增甲)에게 각각 본영(本營)을 거느리고 제가외(齊家崴)에 주둔하도록 명하고 내가 직접 정예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오가면서 지원해 주기로 하니 작전 배치가 조금 엄밀해졌다.
12일, 적군이 공격해 오자 부대를 독려해 맞서 싸우고 적진으로 곧바로 쳐들어갔다. 적군이 패하여 달아나자 기병을 거느리고 수십 리를 뒤쫓아 통원보(通原堡)를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13일, 적의 대부대가 공격해 와 직접 하청운 등의 부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 의극당아(依克唐阿) 통수(統帥)가 적개심을 품은 용감한 기병을 이끌고 와서 모여 금가하(金家河)에서 크게 싸워 적들을 수없이 죽였다. 관군도 사상자가 생겨 적개심이 더욱 커졌다. 이날 밤 의극당아 통수의 부대는 초하구(草河口)에 주둔했다. 나는 하청운 등의 부대를 이끌고 분수령으로 돌아와 지켰다.
14일, 우리의 정찰 기병이 왜의 정찰병을 만나 총격전을 벌여 적군 1명을 죽였다.
15일, 봉천장군(奉天將軍) 수산(壽山) 유록(裕祿) 통수의 전보를 받았는데 연산관과 분수령을 수복한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장병들의 전공을 청하는 보고가 상유에 의해 다른 사항과 함께 윤허되었다고 한다.
20일, 적군이 거듭 패전하자 설리참(薛里站)으로 물러가 지켰다. 곧이어 개평(蓋平)을 잃어 전신선이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이 부족한 것을 크게 걱정하여 상황을 부상 이홍장과 유록 통수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23일, 의극당아 통수의 군에서 보내온 통보에 의하면 영산(永山) 통령(統領)이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봉황성의 적군 소굴을 곧바로 공격하여 용만(龍灣)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거의 성공하려다가 결국 전공을 이룩하지 못해 깊이 아쉬웠다.
25일, 당인렴(唐仁廉) 군문이 장교를 보내 강자강의 인자영(仁字營)을 귀환시키려 하였지만 마천령(摩天嶺)의 방어가 긴급하여 한창 사람이 필요하므로 보내지 않았다.
26일, 원세개 관찰이 부상 이홍장의 전보 및 송경 통수의 서신을 받고 모두 부대를 되돌려 해성(海城)과 개평을 지원하도록 명하였다. 홀로 생각건대 마천령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의 문호가 되는 중요한 지점으로 어찌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곧바로 남아서 지키는 일을 여도생(呂道生), 손자양(孫子揚), 경기산(耿岐山) 세 사람과 상의하였지만 모두들 과감하게 이 임무를 맡지 않았다. 곧이어 유록(裕祿) 통수, 장순(長順) 통수 및 요양(遼陽) 주목(州牧) 서경장(徐慶璋)이 급히 보내온 서신을 받았는데 모두 남아서 지키되 가볍게 움직여 대국(大局)에 지장을 주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실로 그쪽 사정을 돌보기가 매우 어려움을 부상 이홍장과 송경(宋慶) 통수에게 다시 보고하였다.
12월 초5일, 의극당아(依克唐阿) 통수가 보내온 자문에서 요양성(遼陽城)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부대를 거느리고 달려가 지원하여 적을 막으니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때 왜군은 봉황성을 소굴로 삼고 대부대는 설리참(薛里站)과 강가보(康家堡) 일대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었다.
초7일, 전보로 부상 이홍장과 송경 통수에게 대략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전쟁이 일어난 뒤로 오로지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것만 들었을 뿐 우리가 전진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이 점이 적들이 거리낌 없이 진군해 왔기 때문이다. 마천령(摩天嶺)의 방어 배치를 엄밀하고 튼튼하게 해 놓고 정예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적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오고 가며 유격전을 벌여 혹은 군수물자를 나르는 길을 차단하고 혹은 쌓아 놓은 물자를 불태우면서 여러모로 소란을 일으켜 저들로 하여금 앞뒤를 모두 돌아보게 한다면 막자고 하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대군(大軍)으로 공격한다면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회답 전보를 보내와 말렸다.
15일, 수산(壽山) 유록 통수의 전보를 받았는데 요산(堯山) 의극당아 통수, 학정(鶴汀) 장순 통수, 축삼(祝三) 송경 통수가 18, 19일 등의 날짜에 군사를 모아 해성(海城)의 왜군을 공격하려고 하니 각지에서도 동시에 크게 싸움을 일으켜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도록 명하였다.
16일, 직접 기병과 보병 1,000명 남짓을 이끌고 통원보(通原堡), 대전자(大甸子), 금가하(金家河)를 지나 설리참의 왜군 진지까지 전진하여 적군을 견제하였다. 성군(盛軍)의 여도생, 손자양과 봉군(奉軍)의 김득봉(金得鳳), 경기산(耿岐山) 및 강자강 등도 각각 부대를 출동시켜 응원하니 적군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19일, 매복한 군사들이 적군의 선봉대 기병 몇 명을 공격해 죽이니 적군은 급기야 병력을 거두어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직접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군의 진지까지 다가갔다가 군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21일, 왜군이 봉황성으로부터 대부대를 출동시켜 연산관(連山關)을 빼앗으러 온다는 첩보를 받고 한밤중 대오를 거느리고 산을 넘어 동쪽의 공가둔(孔家屯)에 매복한 뒤 수산(壽山) 통령의 산군(山軍)과 적군이 지나갈 때 양쪽에서 공격하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적군이 나타났지만 정말로 아군의 기습공격이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28일, 공가둔 서쪽의 적군이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을 헤아려 미리 대오를 두령자(陡嶺子), 장령자(長嶺子) 일대에 분산 매복시킨 뒤 각각 서양 나팔 몇 개를 지니게 하고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산꼭대기의 나팔소리를 들으면 모두 나팔을 불고 곧바로 총을 쏘며 공격하되 뱀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쥐처럼 숨어서 끊임없이 모였다가 흩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적들이 아군의 허와 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뛰어난 군사이다.” 곧바로 몇몇 병졸에게 서양 나팔을 갖고 길을 돌아 산꼭대기에 매복해 적군의 움직임을 내다보도록 명하였다. 날이 밝자 적군이 다가오는데 산꼭대기에서 나팔이 울리자 곳곳에서 나팔소리와 총소리가 함께 터지니 적군이 놀라 도망을 가면서 서로 짓밟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우리 군사들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병력이 부족하여 과감하게 뒤쫓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가둔에 주둔하였다.
그믐날은 중국의 새해 명절이므로 적군이 반드시 틈을 노려 습격해 올 것을 헤아려 하청운(夏靑雲)에게 부대를 거느리고 토문령(土門嶺)에 매복해 있도록 명하였다. 날이 조금 밝아 오자 적군의 기병과 보병 500여 명이 습격해 왔는데 하청운의 부대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여 왜군 지휘관 한 명을 사살하니 곧바로 흰 깃발을 휘두르면서 병력을 거두어 설리참(薛里站)으로 도망갔는데 적군의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뒤쫓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후 적군은 굳게 지키면서 감히 나오지 않고 오로지 정찰 기병들끼리 서로 부딪쳐 총을 쏘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