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진이 첩보합니다.
노성(魯城)으로 간 연유는 어제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경리청(經理廳) 부영관(副領官)인 안성군수 홍운섭(洪運燮)이 2개 소대(小隊)를 이끌고 연기(燕岐)에서 다시 문의(文義)․연산(連山)․은진(恩津)으로 가다가, 은진에 이르러 일본군 대위(大尉)의 통지를 받고는, 위의 2개 소대 가운데 1개 소대 병사 50명을 교장(敎長) 우기준(禹基俊)으로 하여금 이끌게 하고 일본 병사 100명과 함께 고산(高山)․용안(龍安)으로 출진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경리청 진영을 판치(板峙)에서 만나 그들에게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돌아가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경에 노성에 도착했더니, 곧바로 금영에서 보낸 초토사의 이문(移文)이 이르렀는데, 그 내용에 “한산(韓山)의 비류(匪類)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진(出陣)해 있는 저의 영(營)의 참모관 박홍양(朴鴻陽)이 진영으로 가는 길에 남포(藍浦)에서 보고한 바를 받아보니 ‘11월 19일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에 관군이 패배하여 각각 흩어져 도망가서 홍주(洪州)․보령(保寧)․남포(藍浦)․비인(庇仁)의 군병 중 서천(舒川)으로 다시 들어간 자는 200020명에 불과하며, 적의 형세세(賊勢)는 치열하여 실로 대적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군이 적의 칼날에 꺾인 것에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영(營) 또한 방비가 허술하니 지원병을 징발해 보내주셔서 힘을 합쳐 계엄하도록 해 주시고, 또한 정예병을 서천에 나누어 보내서 함께 토벌하도록 해야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성하영(成夏永)이 2개 부대 병력을 이끌고 이미 출발하여 갔으나, 필시 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 주둔하고 있을 것이니, 늦어져 제 때에 오지 못할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이처럼 함부로 날뛰는 적의 기세를 소홀히 대처하는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경리청 영관에게 명령을 내려 신칙하고, 또 한편으로는 1개 부대를 홍주(洪州)에 파견하였습니다. 선봉은 지금 먼 거리에 있어서 창졸간에 병사를 출동할 수 없습니다. 이에 경리청 각 부대(部隊)에서 편의대로 선발하여 쓰도록 충청도 감영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시(午時:오전11시~오후1시) 경에 은진으로 떠났으나, 놀랍게도 비도(匪徒)가 아직도 이처럼 창궐하니, 다시 정황을 탐지하고, 주둔하는 일은 형세를 보아 나아거가나 머무르도록 하겠습니다.
제(題): 군사들이 행진한 상황을 연속 치보(馳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