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할 일은, “10월 18일에 연기(燕岐)에 도착해서 정세를 살피려고 충청감영에 보고를 한 연유는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10월 20일에 받은 청주 병영의 감결(甘結,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내리는 공문)에, ‘목천 세성산에 몰려있는 비류(匪類)를 빨리 토벌하라’고 해서 그날 떠나 청주에 도착했습니다. 21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쯤 바로 목천 세성산에 가서 지형과 적의 기세를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산의 한쪽 면이 조금 편평하고 보루와 참호는 넓고 견고했으며 깃발은 숲처럼 서있고 포성이 들판을 울렸습니다. 조금 머물러 군사를 쉬게 하고나서 차례대로 나아갔습니다. 1소대는 동남쪽 기슭에서 포를 쏘며 위를 공격했고, 2개 소대는 북쪽 기슭아래에 매복했으며 또 다른 1개 소대는 응전하려고 주둔하였습니다. 반나절 적과 대치하다가 우리 군대의 공격을 받아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나자 동남쪽에서 위를 공격하던 우리 군사가 먼저 성지(城池)를 접수했고, 북쪽 기슭에 매복해 있던 군사는 수십 리를 추격하였습니다. 죽이거나 사로잡아 크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때가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 되었습니다. 획득한 물건은 실제 수효를 성책(成冊)해서 올려 보냅니다.
사로잡은 북접(北接)의 유명한 괴수 김복용(金福用)은 지금 선봉진에 보고했는데, 회신을 기다려서 조처할 계획입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계문하려던 참에 (첩보가) 도착하였다. 이것이 바로 행군하고 나서 처음 듣는 승전 소식이다. 더욱이 거괴(巨魁)를 잡은 것에 있어서랴? 병졸들이 명령을 잘 받든 것을 알 수가 있다. 매우 가상하다. 다만 보고가 여러 날 지체되었으니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성책 중에 탄환은 선봉진의 총구에 맞을 듯하니 옮겨서 사용하고, 기계와 곡포(穀包, 벼인 듯)는 쌀로 바꾸어 본군에 보관한 후 보고하고 나서 군수에 쓰도록 하라. 김복용(金福用)은 어찌 군대 앞에서 목을 베어 경계하지 않겠는가? 엄중히 가둬 놓았으니 선봉진의 조처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