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경주 봉계동으로 이사
이때 학초가 청송군(靑松郡) 보현산(寶賢山) 아래 월매촌 고적동 반석상에 와서 산수에 탁적하고 처자에 낙을 부쳐 소견세월을 하자 하고 잔잔한 강수(江水) 반석상을 배회하고 혹 시율도 독창하며 수년을 지내 보니 각처에서 친구가 오는 방문만 피차 불편케 하였다. 난리 풍상을 겪어 가솔을 죽이고 새로 답답한 마음이 생겨 경주군 봉계로 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그해 8월 9일에 새로 성혼한 실인 정씨를 그리로 신행을 하게 하고 청송에서 경주로 나왔다. 꼭두방재와 죽장 장터가 갑오년 오던 일이며, 산수 인정이 무비역려 천지에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할러라. 봉계로 말하면 봉좌암 높은 봉과 윤모등 늘어진 장송은 병주고향(竝州故鄕)의 면목이며 사람까지 반기는 중에 마봉산 돌바위도 새로 환영하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