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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학초전 박학초실기
일러두기

경자년 청송 고적동 이사

광무 4년인 1900년(경자년) 2월 29일에 학초가 경주군 구강동에서 청송군 보현산 아래 월매 고적동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는 본의는 경주에서 서로 누가 누구인 줄 모를 때는 의사 영업이 날로 거마(車馬)가 영문하여 재미도 있고 영업이 잘되어 일 농장을 장만하고 남을 주어 나누어 먹으니 호구의 군속을 면하고 처자에 낙을 부쳐 4〜5년간 재미가 없다 할 수 없었다. 의병란이 종식된 후 원근 간 인사도 상통되고 각 관리의 탐학과 아객의 출몰 협잡배가 통행하며 그간에도 경주에서 학초가 경영한 일에 사람이 누구인지, 근본이 누구인지, 지식과 처사가 어떠한지 다 알게 되니 수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대답해 주자니 도리어 분요하기만 하고 이익은 없으니 산수(山水) 간에 탁적하여 소견세월 할 뜻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경주 친구 사람 하나가 가족이 의병으로 가화(家禍)를 당하고 유세력(有勢者力)자가 공으로 가산 재물을 들어먹을 처지를 당하게 되자 청송군 고적동의 일 가장을 지켜 달라 하였다.
 학초의 구강 가장은 마름[舍音]을 박치록에게 주고 이날 청송으로 왔다. 처자를 대동하고 중간 노당재를 올라 북으로 봉계와 청송을 바라보고, 남으로 동경 고도와 달대평을 바라보며 을미년(乙未年) 5월 24일에 이 재를 넘으며 생각하던 모양을 금일 다시 생각하니 세상일은 뜬구름처럼 변복하며 가고, 사람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흐르는 물과 한가지라. 적수공권(赤手空拳)에다 무가객(無佳客)으로 산수 인물 낯선 곳에 떼걸인으로 가서 세상에 소문이 널리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고 일 농장 토지 외 기와집까지 휴장을 두었다. 이제 번화를 마다하고 녹수청산(綠水靑山)을 찾아가니 인정 도차에 연로 강산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봉계동을 다녀 한티재를 넘어 죽장을 넘어가니 잔잔한 시냇물은 을미년 봄에 지났던 바와 한가지였다. 물은 한가지로 흐르지만 사람은 도로 고쳐 간다. 꼭두방재를 넘어 보현산 아래 월매 고적동에 오니 때는 삼월이었다. 봄꽃이 만발하니 산채도 별미이고 삼간초옥은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임하니 수성(水城) 중에 집이 있는 격이어서 조석으로 들으면 개폐문하는 풍악이 되었다. 반석(磐石)에 녹음이 우거지니 청려(靑藜,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산보하면서 물 밑의 고기도 구경하고 나무 위의 꾀꼬리는 봄빛을 노래하고 있었다. 수삼촌 위로 더불어 간혹 시(詩)귀도 지으며 위로 월매의 침류정과 아래로 천변리의 만수정 산간 고적으로 간혹 음아소견(吟哦消遣, 시구를 흥얼거리며 시간을 보냄)도 하고 산중 친구를 대하면 풍류지사도 방불코, 병든 사람을 대하면 의사도 되고, 걱정 근심으로 묻는 사람이 있으면 구절구절 이 사람이 화하여 근력대로 지보할 방침을 말하고, 집에 들면 처자에 독락으로 세월을 소견(消遣)하였다.

주석
월매 고적동 월매 고적동: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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