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경주 달대평 송사
1899년(기해년)이었다. 경주군 강서면 달대평이라 하는 큰 들은 경주, 흥해, 연일 삼군(三郡) 백성의 농장 창고로 예로부터 유명한 들이었다. 이때 정부에 관원이라 하는 사람이 국가를 위하여 생민을 구제할 마음은 본래 없고, 무슨 수를 쓰든지 관령을 빙자하여 백성의 재산을 털어먹을 흉계만 꾸미던 세월이었다.
경주군수 조의현과 대구 진위대 중대장 조중석과 진위대 하사 지재홍이 서로 동모(同謀)하여 달대평 3만여 두락(마지기) 중 매 두락마다 1원 46전씩 수세(水稅)를 해마다 받아먹을 계책으로 그 상류에 방천(防川)을 한다 빙자하고 와서 백성이 해 놓은 방천에 약간의 짐문지를 헤치고자 하였다. 다수의 평민 5〜6천 인이 모여 못하게 하니 조중석과 지재홍은 진위대 병정을 풀어 방천에 둘러 세우고 백성을 시위하였다. 평민들의 생각에는 농사짓는 백성을 진위대 병정이 어찌 관계하며, ‘설마 해하리?’ 하고 달려들었는데 백성을 향해 발포하였다. 그 중에 우한(愚悍, 우둔하고 사나운)한 농부들은 가슴을 풀고 달려들고 논 갈고 밭 매던 농부들도 삼삼오오로 분을 이기지 못하여 달려들며 대항하였다. 포중대는 ‘관령 거역죄’라 하여 유수한 평민 16명을 잡아 결박하여 전후좌우 병정들이 옹솔하여 갔다. 경주로 들어가서 가두어 두고 징치하면 군수에게 혹 원성이 더할까 하여 바로 대구로 압상하여 대구 경무청에 엄수하여 난민의 장두로 엄치하였다.
이때 잡혀간 16인의 가족과 평중의 상중하(上中下) 도감(都監) 셋이 강어귀에서 달대평 대도회를 부쳤다. 경작하는 사람의 수로 말하면 5,772명이요, 지주로 말하면 부자도 허다하였다. 평 중 공론은, 논 갈고 밭 매고 술이나 먹고 불과하다는 것이 장이나 가서 다녀오면 대단으로 알고 하던 사람 아니 될 터, 선비라 칭하여도 심장이 작아서는 안 되고, 주사(酒事)에나 다니는 풍류 남자도 아니 될 터였다. 시속 어문에 밝고 눈치 빠른 조화손도 있고, 3만여 마지기 만여 명 생령을 가히 통솔할 적격자를 택정(擇定, 선정)하여야 하였다. 장두를 택정해야 되는 공론에서 강동ㆍ강서를 통계하고 이러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구동성 권점(圈點)으로 하는 말이 강서면 구강동 5두락 답 지주 박모가 아니면 아니 된다고 하였다. (다음 날) 그 중에 연로하고 유수한 지주, 소작인과 3인의 도감들이 학초를 찾아와 달대평 일의 장두를 맡아 줄 것을 청하였다. (학초가) 부득이 출신하는데 부장두 재무겸 서기 하나, 말 두 필, 하인 둘을 정하고 비용은 재무, 서기가 쓰는 대로 당해 주기, 나중에 사금(謝金) 2천 냥을 주기로 정하였다. 동시 평 중에 지주 의무로 장두 외에 평 중 사(事)에 대하여 장두의 지휘대로 하기로 예정되었다.
다음 날에 안강 창정으로 다시 대도회를 열고 파임(역할)을 정하였다.
ㆍ5,772명에 소장 장두 1인
ㆍ상평도감에 겸 부장두, 서기 재무에 이순구(李純久)
ㆍ중평도감에 겸 후원 재무에 신유태
ㆍ하평도감에 겸 후원 재무에 이남기
ㆍ상중하 각 평에 감고(監考, 출납의 감독을 맡은 사람) 3인
ㆍ하인 마부 겸 이인 말 2필
ㆍ체수인 16인의 가족은 특별 후원 찬성인
학초가 각 항의 파임을 정하여 열좌(列坐)하고 평 중 회인이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이 사람이 달대평 중 근 만 명 인구의 대표 장두가 되었을진대, 잘되고 못 되고 모두 평 중의 일입니다. 범사(凡事)가 사람이 많으면 잘못한 점이 많아져, 원일에 방해되기 쉽고 작사도방(作舍道傍)이면 삼년불성(三年不成)이니, 단심단체(團心團體)로 장두하는 대로 일제히 따라 주셔야, 나중에 중도에 탄식할 일이 없습니다.”
서기를 불러 전 평 중 사람 모두가 다 알 수 있게 통문을 불렀다. 서기 이순구(李純久)가 받아썼다. (받아쓴 통문은) 각 면, 각 동, 가가호호 모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연이어 대구 관찰부에 보낼 의송장(議送狀)을 불렀다. 서기가 받아썼다. 당시 문투로 하여 번역하면,
경주군 강동ㆍ강서면 달대평 대소민 등 오천 칠백 칠십이 인 등의 의송장두 박학래
관찰 합하께 엎드려 고하건대, 이 생(生) 등은 자고로 국가의 관리는 각기 책임을 따라 백성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들었으되, 4천 년 동안이나 내려온 백성의 재산을 병정을 몰아 압제로 강탈한다는 말은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생 등의 소경답은 경주군 달대평의 경주, 연일, 흥해 3군 인민들의 경작 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개국 후, 단군, 신라, 고려, 이조(까지) 4천 년 내려온 유지를 대구 진위대 중대장 조중석과 대구 진위대 향관 하사 지재홍과 경주군수 조의현이 포가를 시켜 선희궁(宣禧宮) 지령이라 하면서 평민이 청구하지도 아니하고, 승낙하지도 아니한 무탈한 방천을 하고는 해마다 가을에 매 두락마다 수세로 엽전 7냥 3돈 5푼씩 받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백성이 한 방천을 다시 한다고 문지를 얹고자 하니 평 중 백성 5〜6천이 항변한즉, 진위대 병정을 풀어 발포하여 접전하였습니다. 평민은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논의 흙덩이로 탄알과 대전을 하니 하늘이 하감하시는 바입니다. 백성들이 농사짓는 것을 못하게 군병으로 저해코자 접전한다는 사실은 고금 역사상 들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정부에서 경주 달대평 백성의 땅을 강탈하라고 진위대 병정과 장관을 내실 이치는 없을 듯합니다. 선희궁은 국가 친척이라 하여 이유 없이 국정 외에 단독으로 경주 달대평을 강탈할 이치가 없습니다. 진위대 향관 하사 지재홍은 병정 양도나 향관할 직책이지 민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강탈할 법권이 없을 터이옵니다. 경주군수 조의현은 경주 인민의 원ㆍ불원은 전연 구제하지 않고 생 등의 평 중 토지에 없는 폐를 주출할 명령이 조가(朝家)에 없을 터입니다. 수륜과(水輪課) 파원(派員) 서상윤(徐相允)은 수륜할 곳이 아니고, 자연 천연수로 관개하는 탈 없는 땅에 부당하옵고, 전후 행위가 국가의 벼슬을 빙자하고, 위로는 조정을 속이고 아래로는 생민을 도탄에 빠뜨리면서 중간에서 자기의 비기지욕(肥己之慾)을 위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 같은 국가에서 실즉 다 달대평 5,772가(家), 인구로 말하면 5〜6만 인민이 무슨 죄로 일로 불법 관원의 식장이 되오리까?
영감 귀정에 훗날의 폐단을 막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때 관찰사는 김직현이었다. 학초가 부장두 이순구를 대동하고 즉시 달려 대구에 와서 의송장을 사송과에 접수하니 그 다음 날 지령에,
‘특별히 조사관을 정하였으니, 회보를 기다리라.[特定査官 以待回報事]’
학초가 의송장의 지령 받아 보고 사송과의 배정섭, 최석연에게 물어보았다.
“사관이 누구시오?” 한즉 대답하기를 “군수를 두고 영문에 월정(越廷)함은 절차에 월법(越法)한 것이고, 사실이 그를 듯하고 (더구나) 조정에서 명송한 영남대관을 모두 죄로 걸고 조가(朝家)의 선희궁까지 걸었으니 무엄도 심하다 할 듯하구나. 관령이 떨어지면 백성 된 이는 추상같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한데) 항차 진위대 병정이라 하면 당장 포살을 임의로 하는 것이거늘, 세상에 이 같은 소장을 보니 장두의 간담이 처음 볼 간담이오.” 하고, 명사관(明査官)은 흥해군수 강태형이라 하였다.
이때 수륜과 파원 서상윤과 중대장 조중석, 하사 지재홍이 평 중 백성들이 감영에 소장을 제출한 줄 모르고 16명 백성을 잡아 대구 경무청에서 죽을 지경으로 만들었다. 세상을 자기들 주장으로 생각하고 다시 병정 다수를 이끌고 경주군에 와서는 노령(奴令)을 더 대동하고 달대평에 다시 와서 설역(토목공사)을 하였다. 그때 평 중 장두는 아직 대구에 갔다 와서 (현장에는) 미처 오지 못하였다.
대구에 다녀온 마부의 선통에 평 중 장두가 생발한 눈치를 전하자 다시 포중대 서상윤은 소문을 들었고 다수한 평민들이 모조리 장작 세 가지, 마른풀 한 단씩 가지고 포중대와 서상윤을 불에 태워 죽인다 하면서 백성들이 동서남북에서 모여 인산인해가 되었다. 그 중에 한 백성이 “속히 가서 (장두를) 청해 와서 장두 명령대로 하자.” 하여 급보가 전해 왔다. 학초가 달대상평로 당산나무 밑에 이르니 장작가리, 마른풀가리가 산봉우리 같고 인산인해의 다수 평민이 장두를 환영하였다. 저편을 바라보니 백포에 막을 치고 진위대 깃발이 바람에 펄펄 날리고 병정과 나졸이 군용을 정제하고 그 옆에 역꾼들이 무덕무덕 앉아 있었다.
학초는 통문을 써서 서기와 다른 세 명에 명하여 대나무 장대에 달아 도감과 강구와 착수인 십육 명 가족을 대동하고 모여 있는 무리 속에 순회를 돌면서 외쳤다.
“짚단과 장작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것은 하등난민(下等亂民)의 처사입니다. 일절 행사할 생각 말고, 관찰부에서 명사관이 나왔으니 며칠 있지 않아 여기에 오십니다. 평 중 대소 인민들은 난동을 부디 부리지 말고, 불법 관리도 호인(好人)이 될 날이 있을 터입니다. 여혹 대하더라도 먼저 절하고 공손한 말로 다만 ‘억울하다’는 말만 하시오.”
그리고 학초는 평 중 장두가 진위대장 막소에 찾아가기를 원한다는 통지를 전하였다. 이순구가 말리면서 “장두 행적이 여혹 경솔한 듯 의심나오. 불법행위로 주장하는 저네들에게 잡히고 보면 뒤의 일 어찌하리까?”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그렇지 않다. 피차 이만치 모여 무성무취로 바라보고만 있을 이치가 없다. 아방전상에 형경도 만승천자를 사면으로 보았고, 화룡도에서 조조를 도운 관운장도 의기로 용서하였으니, 설마 저만한 군병 속이랴. 사관이 오거든 관원과 우리 평민까지 서로 대면할 때에 서로 괄시하여 난처한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일개 부장두 서기 한 사람만 대동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포중대가 연접하며 첫인사를 나눈 후 말하길 “백성을 위해 방천을 막으려 하는데 우매한 다수 평민이 기어이 반대를 저같이 하오. 이해로 달래 귀순케 하면 대구 경찰서의 죄수 평민도 곧 방송할 것이니 귀화를 하여 달라.” 하면서 (회유의 말을 꺼내었다.)
학초가 말하길 “백성은 ‘민유방본’이라 백성은 나라 근본이고, 농(農)은 천하지대본이올시다. 문관은 인민의 많은 억울함을 밝히고, 무관은 나라 도적을 진압합니다. 수륜과는 물을 못 대는 데에 관개하여 농사짓게 하는 것이올시다. 문관과 무관이 병정과 나졸을 풀어 농민과 압제 접전함은 밝고 밝은 하늘의 해 아래 부끄럽다 아니할 수 없고, 천연적 시사로 들어가는 봇물을 수륜이라 말함은 산에 가서 배를 타고 뱃삯을 내라 함이니 배 안 탄 그 산 초부는 필경 웃을 듯하외다. 부모 명령이라 가칭하고 그 자식이 도박에나 도적질을 하면 그 부모가 알고 걱정하리까? 좋다 하리까? 나라에 중대한 명리(命吏)가 되어 백성을 학민하거나 억울케 하면, 임금의 흉격(胸膈, 가슴속)이 막힌 병이라 하리까, 태평타 하리까? 우리 평 중에서 상부에 원정하여 명사관이 곧 오니, 옳지 않다면 명사관의 명사에 의하여 좌우간 귀화는 하리다.” 하였다.
양쪽이 서로 오랫동안 묵묵히 있다가 심중이 좋지 아니하던지 ‘그리하라.’는 대답을 남기고는 하직하고 (모두) 떠났다. 이때 학초가 평회석에 돌아오니 ‘언단 수단이 좋다.’라 하며 모두 좋아하는 모습이 헤아릴 수 없었다.
흥해(興海)군수 강태형(姜台馨)은 당시 공명 정직한 군수였다. 감영으로부터 ‘경주 달대평민을 명사 보라.’는 명령에 의하여 ‘달대평 중 자사 대소민은 등대하라.’는 선문을 먼저 놓은 후 찾아왔다.
전배, 후배, 형리, 통인, 나장, 사령 두 쌍 등 사인교를 옹위하고 나발로 ‘호호 때때’ 하며 달성주막 근처를 오는데, 달대평 지주 소작 간 대소 인민은 본 군수 악정으로 본 평 중 장두의 선역으로 타군의 군수가 명사관으로 온 셈이어서 나열하여 환영을 하였다. 명사관이 평민을 대동하고 방천의 보 설역하는 곳을 친히 살펴보고, 전말 사실을 일일이 듣고는 (그래도) 한쪽 평민의 말만 들었다고 경주로 향하였다. (경주군수의 이야기를 들은 후 사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영문(감영)에 보고한 후 (흥해로) 환관하였다.
청도(淸道)군수 김종호(金鍾昊)라 하는 사람이 또 나서 수륜과(水輪課) 위원이라 하면서 (같은 수륜과 파원인) 서상윤의 앞을 비호하여 관찰부에 재판을 청하였다. 명사관의 보고와 평민의 등소와 함께 선화당 재판을 세 번이나 하여 넉 달 만에 갇혔던 백성이 방송되고, 평 중이 득송(得訟)하여 개가를 부르면서 돌아왔다.
이때 이후 경상북도 감사가 경주군 달대평사 장두인 박학초의 사실을 나라에 장계하여 대구 진위대장 조중석과 향관 하사 지재홍은 파직당하고, 경주군수 조의현은 면 징계당하고 수륜과 주임 위원 서상윤은 면직당하였다. 조중석과 남영에 동임으로 있던 대소 장관과 본군 관리 감영의 각 주사가 다 모여 조중석의 전별회를 열었다. 기생은 누구누구 모였느냐 하면 당시 경국색으로 유명한 앵무는 자태임의 노련으로 오는데, 학희, 비련이, 춘옥, 추당, 계향, 월향, 초월, 초선이 등 30여 명이 왔다. 술자리가 어지러워지니 딱딱하였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떠나는 정이 미진하여 밤을 새워 가면서 일배 일배 부일배로 (기생의) 권주가 맑은 소리가 나온다.
‘산아 산아 팔공산아, 아미산 밝은 달에 기세 좋은 호응으로 정든 친구 미인들과 언제 다시 놀아 볼꼬.’
인정도차 이 곡조에 조중석이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며 주먹으로 자리를 땅땅 치며 취중에 진정으로 하는 말로 “이놈이 당초에 무관학도 졸업 출신으로 병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적년근사(積年勤仕) 이력으로 승차하여 나라의 봉명부월(奉命斧鉞)을 잡아 경상 일도 진위권을 취하고 다솔 병정을 옹위하고 나서면 산천초목도 가히 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듯하더니 한낱 박가 놈으로 하여 일시에 파직이 되니 백년신사가 일장춘몽이라. 다시 복직이나 승천은 기필하기 어려우리라. 아이고 분해라.” 하였다.
가까이에 앉아 있던 장관이 만류하며 달래며 말하였다.
“하관이 차후에 기틀을 얻어 그놈의 몸에 총이나 한 번 탕 하고 쏘아 원수를 갚아 드리리다. 염려 마소.”
조중석이 말하길 “그 말 말게. 자네는 직접으로 일을 당하면 총 한 자루 같은 것은 거꾸로 짚고 항복하고, 그 사람의 언권에 뚝 떨어져 도로 백년지교 친구 되리라. 다솔 병정의 총 머리에 칼 꼽고 기수 있게 가서 오천 백여 명과 상대하지는 못하였다네. 그자가 일개 한사(寒士) 복색이지만 담대히 나를 와 보는데 어찌 당장에야 따귀와 주먹 접전을 안 하고 싶겠는가만 당하고 보니 그렇지 아니하대. 당당한 의무로 사람을 거느리는 기술이 당전하네. 잠깐 들어도 구절구절이 격을 맞추어 말하니 분하던 마음은 자연 없어지네, 좋은 얼굴로 돌아오다가 마상에서 불현듯 생각하니 분하기야 헤아릴 수 없지만 부월지중(斧鉞之中)에 권점으로 뽑힌 장두인 그자가 한사일신이지만 하등 간담으로 담대히 들어와 말하는 인기가 곧 경주 일방의 대통령 자격이다. 다 당해 보면 경솔히 못하느니라.” 하였다.
곁에 있던 소대장 나종배가 나섰다.
“실상 말이지, 속세를 떠난 군자가 비록 삼베옷을 입어도 지식은 높은 사람이라. 청운재자(靑雲才子)를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 하느니. 문명세계로 말하면 인민이 일이 있어 법정에 들어서면 법률 조목을 찾아 말하는데, 법관이 흉격이 막혀 사직을 한다네. 그 사람이 들으니 지식과 문필이 있고 언권과 지조가 있어 용단과 득실을 함께 생각하니, 이 같은 사람은 부귀나 압제로 달래도 아니 될 터, 각각 의무만 지키도록 하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조중석이 술이 대취하여 ‘분해라.’하며 똥을 와락 싸고 옆으로 쓰러지니 가는 관리의 똥이 인정 날 수 없어 대소 요절하며 이런저런 다 흩어졌다고 하였다.
세상 인사가 (어찌 이런지.) 천지가 막막하고 일신이 죽어 가는 것을 살려 주어도 자고로 인정을 갚는 자 적고, 대소사 간에 남의 두목이 되어 다수인에게 수렴전(收斂錢)이 수효는 많지만 나중에 수합하면 오히려 축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연고라. 달대평 일에 비용금(費用金)과 학초의 사금(謝金) 2천 냥은 평 중 사람들이 송덕하며 내었지만 (학초의 수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학초가 평 중 일로 대구에서 경주로 돌아올 때가 하절기이었다. 안강 포사에 황육을 사서 집에 와 노독풀이로 육회를 먹고 병이 났다. 그 증세가 좌편은 전체가 황색으로 부어 돌같이 단단해지면서 아래위로 옮겨 가면서 고름이 터졌다.
간간이 오한이 나고 음식을 전폐하니 점점 강시(殭屍)와 같이 되어 여러 달을 누워 기동하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좌편 어깨 다음 팔에서 성롱(痂, 고름)이 되어 종기가 터지는데 농집이 한정 없이 나왔다. 부기는 점점 더해지고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집의 신롱유업(神農遺業)으로 백 가지 방문과 백약이 무효하고 사경이 극에 달아 문복(問卜)과 독경이 3일에 일차식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이었다. 병이 들어 누워 있으니 천리 객지에 일신만 무탈(無頉)하지 아니하고 수하로 응대하던 5,772인 달대평민은 제각기 농사에 각안 기업하였다. 간혹 와서 문밖에서 안부만 묻고, 3도감은 엽전 2백 냥만 우선 주면서 병 치료나 하라 하고 다시 아니 주었다. ‘죽는다 죽는다.’ 하는 소식은 날로 나니 이 동정 보아서 죽으면 그만두고 중간에 도감이 먹고 지낼 모양이었다.
이때에 학초가 병이 나서 누우니 실인 강씨가 밤마다 정결히 목욕하고 우물에 물 새로 길러 밤중 후원에 받쳐 놓고 가부(家夫)의 병이 속히 낫게 해 달라 하늘에 축수를 매일 하였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한결같이 하는데, 하루라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고름이 터진 구멍에 입으로 빨아내어 농집을 한 입씩 뱉어 놓는데, 대체 이 병이 무슨 병인지 빠는 사람 강씨의 입에도 독이 뻗쳐 부풀어 올라 입 모양이 흉하였다. 피고름을 입으로 빤다고 쉽게 말하지만 부모 형제 내외간에 날로 입을 대고 지성으로 빨기는 정말 어려우며 성심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식을 전폐하고 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각종 음식과 미음 등속을 쑤어 와 때를 맞추어 권하는데, 권하는 성력과 성심을 보아 한 번에 한 숟갈씩이라도 열 번에 열 술씩이요, 백 번에 백 술이 되었다. 인명이 병중에 치료하는 사람의 영역에 존망이 없다 할 수 없었다. 정말 사람마다 못할 일이었다.
하루는 복자(卜者, 점쟁이)를 불러 독경(讀經)을 하고 신장(神將, 귀신을 내림)을 다져 물었다. 학초가 누운 병석에 신장대를 가져오게 하여 “내 묻는 대로 물으라.” 하고는 의서(醫書)의 병명 목록을 내어놓고 각 항 병명을 낱낱이 따져 물었다. 묻는 말에 하나도 응하지 아니하다가 마지막에 뜻밖에 “육독(肉毒)이냐?” 하고 따져 물으니 그 신장대가 야단으로 흔들었다. 다시 물었다. “육독이면 자금정(紫金錠)이 적당하니 자금정을 쓸까?” 하니 또 흔들어 응하였다.
물리치고 즉시 자금정 재료를 구해 지어 썼다. 신기하게도 밤중에 강씨에게 의지하여 요강에 대변을 보니 무엇이 계란만 한 뭉케한 것이 하나가 나왔다. 이때 하절 장마가 져서 기왓장 낙숫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계하 청석에 놓고 씻으니 분명한 백명주실을 계란만 하게 둥글게 감은 것 같은 것이 도끼로 찍어도 잘 찍히지 아니하였다.
약을 연복하니 그 다음 날에 그보다는 작은 것이 또 나왔다. 세상에 괴이도 하지 그같이 서너 달을 두고 백 가지 약이 무효할 만치 중한 병이 숨결이 편안해지고 부기가 빠지고 고름 구멍이 아물어지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아졌다. 인명이 재천이라 하되, 나중에는 신장대로 병명 알기와 약의 효력, 그 무엇보다 강씨 부인의 특별한 성력 때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학초가 달대평 사(事)에 금 2천 냥 당봉 조건 중에 2백 냥만 병중에 받고 1천 8백 냥은 죽으면 그만으로 생각하는 듯이 보여 전일 병석에서 경성에 있는 재종제 박 진사 영래와 삼종씨 참봉 봉래 씨에게 받아 오라 우편으로 편지하였더니 두 사람이 내려와 도감들을 잡아다 안강 장터 조은현의 집에 앉아 사사로 구류하고 풍화가 야단으로 받아 가고 말았다.
1899년(기해년) 12월에 서상윤, 김종호가 달대평에 일하던 장두가 병들어 사생이 경각에 있을 뿐 아니라 (설혹) 살더라도 평 중 사람과 비용금 문제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저희가 선희궁(宣禧宮) 돈 7천 냥이 달대평에 (설역에) 들었다 하며 받으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자) 전자에 붙들어 갔던 16인 중에서 4인을 잡아다가 대구 경무청에 착수하고 독책을 하였다. 이때가 1900년(경자년) 봄이었다. 평 중의 3도감과 착수인 가족이 (중심이 되어) 안강 창정에서 평 중에서 소장을 내어 등장하자고 평회를 모으는데 근 십 일을 두고 모아도 아니 되었다. 동쪽의 사람을 모아 놓고 서쪽으로 가면 동쪽의 사람이 흩어졌다. 평회가 이같이 되니 이러한 곡절은 만여 명에 장두가 없는 연고이었다. 모두를 모아 놓고 장두를 택정한다 해도 할 사람 없는 것을 이미 알아 온 터라, 오며 가며 만구일담(萬口一談)으로 박학초가 아니면 아니 된다 하였다.
이때 학초는 세상사 분요를 피하고 싶어 청송군 보현산 아래 고적동으로 이사할 작정을 세우고 있었다. 떠날 때가 되어 달대평 중 일로 연로 유수한 사람 6~7인이 와서 ‘한 번만 더 장두의 수고를 다시 하여서 죽어 가는 네 사람 인명을 구하고 평 중을 보존하게 하여 주면 영세불망 송덕비를 세우리라.’ 하며 만단(萬端)으로 애걸하였다. 학초가 ‘못한다’고 하였더니 옛날 주(周) 무왕(武王)이 여상망(강태공)을 보려고 이같이 찾았던가? 유황숙이 제갈을 보려고 삼고초려를 이같이 하였던가? 강동, 강서에 유수한 노인이 평 중 사람을 다솔하고 4~5차례나 찾아와서 한 번만 다시 장두를 하여 주시어 네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5,772명이 승전고를 울려 동경 고도의 2천 년 내 보전하던 달대평을 구해 달라고 하였다.
학초가 부득이 허락하고 그 다음 날에 안강 양월동 창정에 나갔다. 동서남북에 무덕무덕 둔치하였던 평민이 학초가 나오는 걸 듣고 사방으로 구름같이 모여드니 창정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전날까지는 함께 모이기 어렵던 사람이 이날은 희색이 만면하고 어깨가 비좁을 만큼 욱여들며 장두의 공사 내리는 것을 듣기 원하였다.
학초는 대상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달대평 사에 거년(去年)의 장두가 복차(復次)하였으니, 제반 절차 각 항 소임도 옛날 그대로 준행합시다.” 하고 상ㆍ중ㆍ하평 각 도감은 전과 같이 지원하여 각자 비용으로 대구까지 왕복 여비하고 즉일 발행하도록 하였다. 상평도감에 부장두 겸 서기 이순구를 불러 앞에 놓고 소장 정본을 불렀다.
(미리) 지어 둔 것같이 한 글자 어긋남이 없어 시속 있게 문장을 건령수(建瓴水,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같이 불러 대었다. 다 쓴 후에는 여러 사람이 모두 듣게 일러 준 후 받아가지고는 마부를 불러 행장을 등대하도록 하였다. 경주읍으로 하여 바로 대구로 길을 정할 계획이었다.
평 중 각인의 선두는 고성에 이르렀으나 한 무리는 아직 안강에서 머무를 정도로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강산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마부인 심석순은 하얀 발정매를 도도히 들고 전후의 사람을 영솔하기 위하여 걸음을 조용조용 제격으로 말을 몰았다. 만일 이때에 학초의 말이 떨어지면 초목도 요동할 듯하였다. 감히 지체할 사람 있을 리 없고 감히 거역할 자 뉘 있으리오? 선진(先陣)이 경주 동천 내를 건너니, 경주 육방 공형이 나와 마두에 고하였다.
“사또가 대구 영문에 가고 없는데, 이같이 다수의 인민이 읍에 들어오니 외군 풍성이 들으면 ‘경주는 민란이 났다.’ 할 것이오. 군의 공형된 이목으로 대단히 온당치 않아 보이오.”
학초가 말하길 “원래 호소와 인민의 등장이 예로부터 있었으니 새 군수 김천수(金天壽) 씨는 조정에서 명감(明鑑)이 나 있으니 어찌 풍설로만 그러하겠는가? 물러서라 바로 대구로 간다.” 하고 성안을 통과하여 남문으로 나서서 서진장을 건넌 후 평민을 점고하였다. 상ㆍ중ㆍ하평 각 도감이 각각 수십 줄로 앉아 호명(呼名) 점고(點考)한 후 다시 앉혔다. 인원수가 5,772명에 더한 수가 300여 명이었다.
김각간(金角干, 김유신) 하마비를 지나서 알마리 고개를 넘었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많아 하늘로 이길 수 있을 만하였다.
‘옛날 김각간 김유신은 살아도 삼천 병마, 죽어도 삼천 병마하였다 하더니 오늘 나의 영솔군이 육천 명이로다. 저 김각간 산소에 춘초(春草) 만연하여 푸른빛으로 뒤덮여 여러 행인의 지점처가 되었는데, 이날 학초의 자취는 후일 누가 지점할런가?’
이때 학초가 서진장에 와서 점고하고 모량을 지나오니 경주군수 김천수가 대구관찰사 김직현의 생일에 갔다가 군으로 돌아오는데 들리는 풍성(風聲)으로 경주 백성이 공관을 틈타 민란을 일으켜 영문을 향해 온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을 단속하여 ‘인민이 모여 있는 데로 가서 권장으로 두드려 내쫓으라.’ 하면서 오고 있었다. 학초가 모량에서 보니 원님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는 서리가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경에 군수가 모량을 지난다 하였다. 오전 11시가 되어 군수의 행차가 오고 있었다. 이때 풍속으로는 나발이 때때하며 전배 군뢰들은 용(勇) 자 책제립 쓰고 두 쌍 홍철릭에 권장 둘러메고 두 쌍 나장, 사령 특별로 두 쌍 전배, 후배 인장 맡은 통인이 앞서 타고 좌우에 옹위한 사인교가 오며 흥소리 권마성(勸馬聲)에 위엄이 추상같고 앞에 인민이 인산인해로 길을 막았으니 나졸들이 일병 권장으로 패며 “이놈들 민란을 일으켜 어디를 막고 있느냐?” 하면서 무지개 같은 백권장이 번개같이 쳐내리니 다수 평민이 물결 헤어지듯, 추풍에 돌개바람에 낙엽같이 논들 밭들 사방으로 헤어지고, 나졸은 지나고 군수 사인교가 그 차에 닥쳐왔다.
이때 학초가 길옆에 섰다가 달려들어 군수 사인교 채를 잡고는 “원통한 생민을 구하여 주시오.” 하면서 군수를 쳐다보고, 또 뒤를 돌아다보며 “장민아 들어서거라.” 하고 호통을 치고는, (다시) 앞을 보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는 목소리로 “생민을 살려 주실 공사하여 주시오.” 하였다. 학초가 ‘장민아 들어서라.’ 하는 말에 하나둘씩 차차 수십 명, 수백 명씩 떼 기러기 날아 앉듯이 꽉 들어서 앞길을 막아 좌우 전답까지 인산인해로 앉았다.
군수가 “가마 놓아라.” 하니 수배(隨陪) 형리도 말에서 내려 시립하고, 전배(前排)로 가던 노령(奴令)도 좌우에 권장을 짚고 섰다. 통인도 내려 인괴(인장이 든 상자)를 교자 안의 군수 앞에 드린다. 군수가 말하길 “너희들이 어떠한 백성이건대 길에서 관장을 압제 잡아 군정을 많이 거느리고 핍박하여 법을 범하느냐?”
학초가 앞에 앉아서 대답을 하였다.
“억조창생은 한 군수 합하의 적자올시다. 자식이 부모 행차 길에 환영 겸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은 죄 아니 되는 사실입니다.”
“소장을 이리 다오.” 하니 평 중 사 소장을 올렸다. 군수가 받아 보고는 덮어 놓고 큰소리부터 질렀다.
“환관(관청에 돌아옴) 후 정송(정식 소송)을 아니하고 다솔(多率) 민정하여 민란 행위로 연로에 풍화 난리로 이같이 강제로 어찌하자 하느냐?”
학초가 대답하였다.
“강제는 아니올시다. 저간 사실이 7천 냥 도적이 붙어 인민의 놓인 목숨이 시각이 급하기에 ‘위민부모지하’에 관력(官力)을 급히 얻지 않고는 모두 죽습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하였습니다.”
군수가 말하길 “급하면 모두 너희 백성 마음대로 하느냐?” 학초가 말하길 “백성이 억울하고 급하면 나라에 격쟁(擊錚)도 하고, 남산에 거화도 하고, 각 군으로 말하면 문루(門樓)에 올라 신문고도 칩니다. 천지 인민 간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가장 귀하거늘 인명이 곧 죽는데 더 급한 것이 어디에 있으리까? 밝으신 처분을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다중 평민은 모두 물리치고 너의 수삼 백성만 뒤를 따라 환관 후 처결하리라. 물렀거라.” 하였다.
학초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고래(古來)에 제왕은 일반에 삼토(三吐)도 하셨고, 일개인의 억울함도 유월비상(六月砒霜)이라 하였습니다. 나라가 경주 일방 생민을 위하시어, 이 같은 위엄으로 국록을 받으시면서 우리 경주 인민의 부모 군수 되셨습니다. 평인들이 사인교를 메고 바로 달대평으로 행차해 평 중을 친감(親監)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자리 일순각 같은 데 앉으셔도 이 평민의 억울을 빨리 알자면 밤을 타서 누지에 압행 조사를 하셔도 치정에 위력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군수가 말을 들으며 소장을 보더니 ‘선희궁(宣禧宮) 지령(指令)’이라는 구절을 보고는 “선희궁에 가서 정하지. 군수인들 상부에서 하는 일을 어찌하는 수 없다.” (하고 거절을 하였다.)
학초가 말하였다. “그렇지 아니합니다. 원로(遠路)인 서울을 다수 평민이 갈 수도 없고, 가더라도 지방 군수가 자세히 억울한 민정을 들어 보아 주시면, 속설(俗說)에 열 감사 한 원님이라 하나이다. 군수가 말하길 “너희 등이, 장두가, 지사 인민 수삼 인만 데리고 호소하여도 못할 일이 없는데, 다솔(多率) 인민을 취당하고 일군 연로에 출몰하며 노상(路上)에서 관장을 붙들고 강제로 이 같은 거조를 하면 치안 방해에 대한 민율(民律)이 있으니 엄치하리라. 어찌하여 이같이 하느냐?” 하였다.
이때 학초는 심중에 혼자 전체 평 사에 대한 대답이 불온한 듯하여 옆에 돌아보며 말을 아니하니, 이순구가 “많은 인민이 아니 모아 안 될 일이라 많이 모아 왔습니다.” 하니 군수가 크게 화를 내면서 말하길 “다중 취합하여 출몰 관정하자고 연노 중화에 민란이 났다 할 터이다. 네가 난민 괴수로다. 죽어 보아라.” 하고 잡아 물리라 하니 좌우 사령이 달려들어 갓 벗기고 ‘에쏘’ 하며 잡아 물린다.
학초가 이순구를 변호하여 앞에 나서 앉으면서 말했다.
“그 백성의 말이 그렇지 아니하오니, 생의 말을 들어 주시오. 한 풍진에 폐공(劉邦)이 의제의 죽음을 발상하니 천하가 폐공을 따라갔고, 미국의 화성돈(대통령 워싱턴을 가리킴)이 일어나니 부엌에 있던 부녀가 식도를 짚고 복종하였고, 금일 달대평 백성이 죽을 지경에 사가 등소를 한다 하니 기약하지 않고도 모인 죄로소이다. 모이는 형용을 말하면 우리 새 군수가 오셨다. 우리 달대평 일을 살게 하여 주실 줄 믿고 남촌 백성이 간다 하니 북촌 백성이 먼저 나서고, 앞집 사람이 간다 하니 뒷집 사람이 먼저 나서니 죽을 함정에 빠진 백성이 사는 길이 났다 하면 권고 없이 절로 나서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치이며,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이령 군수 하는 것이 어찌 민란이라 하오리까? 기약하지 않고도 모인 자가 6천여 민이로소이다.”
이때 군수가 학초의 말을 들으며 선초(扇貂) 부채로 사인교전(四人轎前)을 치는 줄 모르고 치면서 “이같이 다솔 인민에 장두가 없을 수 없으니 네가 장두냐? 자세히 말하여라.” 하였다.
학초가 장두 대답 차점이 정말 어려운 마디이지만 선연히 말하기를 “생은 달대평 6천여 명의 장두이오. 지방 백성의 권점에 자연 추선을 면치 못하여 장두가 되었고, 영감은 조정에서 택출하신 경주 지방 일경 군수시니 상당한 처분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언권의 수단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라. 네가 그만한 웅변 수단으로 일찍 벼슬을 구하여 이 같은 공사를 아니하고, 뭇 백성의 등소(等訴)에 (겨우) 장두가 된단 말이냐?”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황송하여이다. 자격도 부족하고 세록가에 출생하지 못하고, 돈이 없어서 매관에 참여할 생심도 못 먹고, 5∼6천 명 중에 장두는 자원이 아니오라 그 평 중에 약간의 논이 있고, 6천 명 권점으로 불가 사폐할 사세에 오늘날 장두가 되어 이같이 존엄지장을 대하오니 일시 연분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명결하신 처분을 받아 공정한 장두가 되기 바라나이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어찌 된 사실로 지나간 일을 이전 군수에 하지 못하고 내게 미처 관민 간 곤란을 이같이 하느냐?”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기해년(己亥年) 봄에 대구 진위대장 조중석과 하사 지재홍, 체귀한 경주군수와, 수륜과 위원 서상윤, 김종호 등이 달대평 상류에 와서 신라(新羅) 이후 탈 없는 방천을 한다 하고 3만여 두락 답에 엽전 일금 1냥 3돈 5푼씩 해마다 받을 흉계로 선희궁에 세납 5백 냥씩 한다 하고 시역하는 것을, 평 중 백성이 다소간 모여 못하게 하니 병정으로 발포 접전이 된 후 평민 16명을 난민 장두라 하고 잡아서 대구 경무청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평 중이 등장(等狀)하니 관찰부에서 흥해군수로 명사관을 정해 특별 무사하고 끝났는데, 또 이제 다시 거조하되, ‘선희궁 돈 7천 냥이 평 중에 들었다네.’ 하고 평 중 백성 4인을 대구 경무청에 잡아갔으니 나라에 일이 없는 것을 공연히 중간에서 5백 냥 세금을 빙자하고 수륜 위원 자의 사탁(私橐)을 채우고자 하니, 나라의 중간에서 사람의 흉격이 같이 막혀, 무단히 백성이 소유하는 3만여 두락을 도적의 밥바당을 만들려 하니 억울함이 고금에 없는 억울이오. 백성은 나라에서 내라고 하는 땅의 지세에 따른 것이 열한 가지요, 동의 호세가 6∼7가지요, 장사하면 행부상의 폐단이오. 살지 못한 백성이 살기를 바라 이 같은 사실을 바로 임금 전에 알게 하여 살게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였다.
(학초의 이야기를 듣고) 군수는 “그 사연을 상부에 보고해 줄 것이니 다솔 평민은 당장으로 해산케 하라.” 하니, (학초가 말하길) “그것은 못할 이유가 있으니 못합니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어찌하여 못한단 말이냐?” 하니, 학초가 말하길 “한천(旱天, 심한 가뭄)에 감우(甘雨, 단비)를 빌던 백성은 검은 구름만 보고는 ‘풍년’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데, 너도 가자, 나도 가자 기약하지 않고도 모인 자 6천여 명이 체수한 백성이 돌아와도, 화살에 놀란 사람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 마음을 놓지 못하듯이 부득이 위민부모의 명령을 받더라도 보고를 발송하는 초건(草件, 초를 잡은 원고)을 아니 보고는 흩어질 수 없나이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각 동 인민만 있어 보고 그 외는 일병 해산하라.” 하니, 군수의 말에 이노령이 같이 거들며 “그리하리다.” 하였다.
학초는 다시 말을 꺼내었다.
“인민이 되어 한다 하고 못하면 시키는 것이라. 가는 길로 말하여도 모두 읍으로 갈 터, 잘된 형적 보고 싶은 마음은 각각 같습니다. 아무리 가라 하더라도 다 보고 갈려 할 터. 자식이 되어 부모 하시는 처분 명령을 기다리는 자를 무슨 의무로, 두드려 패도 안 될 것이니 아주 속히 보고 떠난 초건을 등본하여 낭독한 후 송덕하고 갈 듯한 사유를 아주 고하나이다.”
군수가 말하길 “그리하라. 속히 물러서라.” 하였다. 학초가 절을 하고 물러서니 6천여 명이 모두 송덕배를 하였다. 오전부터 하던 공사가 황혼이 되었다. 학초가 평 중에 명을 하되, 급히 다섯 중에 횃불 한 자루씩 준비하여 원님과 같이 경주로 들어갔다. 불시에 횃불 1천 2백 병이 전후좌우에 벌려 서니 달대평 장두의 기구가 정말 적다 할 수 없었다.
학초가 군수의 행차 수배에게 전갈하되 “이미 날이 저물어 평 중 백성이 횃불을 준비하니 같이 모시고 행차 평안히 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달대평 6천여 명 백성이 장두가 원님을 대하여 주고받고 하는 수작이 청산유수로 구절구절이 격당도 하는데 흥바람이 절로 나서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걸어갔다. (중간에) 이순구의 한마디 대답에 그만 잡아 물리는 통에 정신이 낙착하다가 학초가 다시 변호하여 언두가 슬슬 풀어 나가는 구절에 바다가 자는 듯, 춘풍에 흥취가 나듯 하였다. 이순구가 갓 들고 물러서며 절하고, 만장 인민이 ‘우리 장두님 행차 모신다.’ 흥바람을 내며 횃불을 든 사람은 길에 칸을 골라 서고, 홰 안 든 사람은 시위 소리로 권마성을 한다. 군수나 뒤의 장두의 행차나 가히 산악을 놀랠러라. 이날 그 같은 대로에 오고 가는 노상 행인이 길을 못 가고 머물러 구경한 후 ‘달대평 장두 말 잘하더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알마골 개울을 넘어 김각간 하마비 앞을 지났다. 평 중 백성은 승전이나 한 듯 개가를 부르듯이 흥취가 야단이었다. 서진장에 당두하니 읍에 삼공형리 육방 관속이 군수 행차를 환영하였다. 이날은 특히 아니 다르다 할 수 없었다.
경주읍에서 숙박하고 익일 관가 사관 후에 형방청에 가서 군수가 상부에 한 보고 초를 등본해 보니 구절구절이 장두의 소원대로 잘됨을 보고 그날은 물러왔다.
1900년(경자) 정월 27일에 경주군수의 보고를 떠나 대구 관찰부에서 3월 1일 궁내부(宮內府)로 보고하여 아직 회제가 돌아오지 못할 때이었다. 경찰서 유치에 있는 사람 가족이 조급하여 다시 또 관찰부에 등장(等狀)한다고 다수 평민을 안강 창정에 평회를 하고 학초를 청하였다. 학초가 출석하여 “금번 등소는 불길한 점이 여러 가지 있으니 하지 말라. 이 사람은 못한다.” 하니 그 이유를 물었다. 학초는 “모든 일이 형편을 보아야 하듯이, 장수가 행군하는 것같이 지지와 형편과 강약을 보아 하느니. 유치(留置)에 있는 이가 아무리 급하기는 하지만, 관청에서는 자연 각 도 사건이 총총하여 지체될 수 있음이라. 먼저 군수의 보고에, 관찰사의 보고가 궁내부에 갔으니 차차 상당 처분 무사할 것입니다. 시방은 아니 될 조짐이 있습니다. 관찰사 김직현 씨가 갈리고 지금은 서리 관찰로 하양군수 김종호 일가가 대구군수를 하고 있습니다. 자연 그 일가 김종호의 두호청(斗護請)이 없지 아니할 터. 외군의 장꾼이 5∼6천이 온다 하면 연로에 풍성(風聲) 소문이 대구로 먼저 가서 4대문에 순검이 수직(守直)하여 경주 사람이라 하면 잡을 터, 경찰서에 달대평 죄인만 더하거나 아니면 화용도 군사 되어 유익(有益)함이 없으리라.”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평 중에 타인이 임시 장두로 갔다 하였다.
하루는 개동의 이성률이 와서 웃으며 말하기를 “큰일에 대한 모사는 옛날 장량이나 제갈량이 금일 곧 중화(학초의 자)에 더하지 못하리로다. 과연 화용도 군사 되어 의관도 버리고 신발도 미처 신지 못하고 대구 4대문과 주인집(여관)에 샅샅이 순검이 찾아 잡아들이는 통에 도주하다 조수 밀리듯이 하여 밤새도록 왔으니…” 하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묻는다. 학초는 “가만히 있으면 먼저 군수 보고에 무사하리라.” 하였더니 과연 그 후 무사하였다.
경주군 강동면 당귀동에 사는 이경험의 별호는 이춘풍이라 하였다. 부랑으로는 영변 칠읍에 으뜸이었다. 부랑당류 십팔 형제가 있다 하는데, 이때 달대평 일로 대구 경찰서에 갇혔다가 방송(放送)되어 오는바, 1900년(경자년) 2월 23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경성 내부에서 전보 훈령으로 득방한 그 아들이 아비를 위하여 서울에 가서 2월 26일에 전보로 ‘고미득제 전로난판’이라 한 사람이었다. 학초가 장두로 있을 때 경주군수 보고로 관찰사 김직현이 떠날 때 선희궁(宣禧宮) 당상은 (마침) 김천수의 부친이었다.
(이와 같이) 경주군수의 보고로 방송된 일을 이경험 부자가 ‘돈이 들었다.’고 거짓으로 말하고는 달대평 중 매 두락에 돈 40전씩을 받아 내는데, 일본인 하나와 차경욱이라 하는 사람을 데리고 동네로 다니면서 1만 1천여 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때 학초는 청송 고적동으로 이사를 가 있었다.) 학초의 논을 소작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수전 독촉의 난감을 말하였다. (학초가 생각하니) 세상인심이 이같이 허무함을…. 이때 경주군수 겸관이 영천군수 강영서였다. 8월 7일에 학초가 즉시 겸관에 소장을 정하니 지령에,
구기(究其) 이경흠(李敬欽) 부자(父子) 소위(所爲)가 절절가통(節節可痛)이라. 당초의 일로 말을 하건대 23일 죄인이 풀려난 일을 전연 부지하고 36일 서울에 가서 전보를 ‘고미득제 전로난판 운운’ 하고는 이 일에 자신의 돈이 들었다고 주장하여 만만부당한 만여 금을 횡증하여 만민을 어려움에 빠뜨림이 이와 같으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코자 하는가. 관 또한 별도의 통치가 있을 것이거니와 너희들이 이러한 뜻으로 먼저 상부에 정할 것.
학초가 군수의 지령을 받아 대구 관찰부에 정하니 순사 둘, 부례 둘을 보내주었다. (숫자가 적은 듯하여) 영천에 와서 나졸을 대동하고 또 경주로 가서 나졸을 대동하여 당귀동으로 나갔다. 이춘풍을 잡아 경주 노실 주점에서 날이 저물어 숙박하였다. 이춘풍의 아들이 매 사람마다 1원씩 주고 50명을 모군하여 각각 대창을 들고 달려들어 죄인 이춘풍을 뺏어 갔다. 이 사실을 출장 온 순사가 보고하여 대구 경찰서 일동과 영천과 경주 나졸과 삼공형이 군기를 갖추어 당귀동 일대 동네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그 중에 들어갔으나 (이춘풍을) 잡지 못하고 대신 그 동네 다소의 유수인을 잡아 경주에 데려와 어떻게나 압형을 가하였든지 잡힌 백성의 가족이 사골 이장거의 집 벽장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춘풍을 잡아 오는데 경주 남문 밖에서부터 상투를 풀고 결박한 것을 말꼬리에 달아 대구 경찰서로 끌고 와서 아홉 달 징역으로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달대평 사에 (감사) 김직현과 (장두) 박학초 선정 송덕비를 만들어 달대평 상류에 갖다 놓으니, 이춘풍 가족이 방해를 지어 세우지 못하고 방천에 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