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군수 권상문의 조사
(한 달 전인) 광무 2년 1898년(무술년) 3월 3일 경주군 구강동에 있을 때, 이때에 경주군수는 안동 사람 권상문이었다. 안동 사람이 많이 찾아와 아객(衙客, 관청 손님)이라 하고 읍저 여관이 ‘안동촌’이라는 말이 있을 때였다. 학초에게 사문사 배지를 군뢰(軍牢)가 가지고 나왔는데 배지를 받아 보니 구강에서 ‘박 약국이 유사문사하니 삼배도착래차’라 하였거늘 학초는 즉시 일어서서 군뢰를 앞세우고 안강을 나와 (상점)주인 박기계를 불러 돈 열 냥만 쓸데 있다 하고 구해 군뢰를 주며 “네가 차고 들어가되 오늘 저녁, 내일 아침까지 이중에 내 식채까지 겸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네 차지라.” 하였다.
삼배도배지에 지체할 수 없으니 학초가 속히 서둘러 앞서갔다. 이때에 차시에 출사 군뢰 풍속에 삼문사배지 하나만 얻어 나오면 죽쵀가 의례히 아무리 적어도 3∼4백 냥씩 받는데, 죄인이 (자신에 대한) 대우가 그 곤란한 곤역이 있는지 군뢰가 따라오며 묻는 말이 “본래 어디에 살다 오셨습니까?” 하니, 학초가 같이 가며 대답하기를 “순흥에 살다 왔노라.” 하였다. 군뢰가 말하길 “순흥 살다 오셨으면 앞두들 박 참봉 나리를 아시나이까?” 하니, 말하길 “나의 삼종 되시는 나리라.” 하니 군뢰가 깜짝 놀라며 “소인은 군뢰 김명생올시다. 자칫하였으면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그 참봉 나리의 일가가 되신다니 대단히 고맙습니다. 항상 문안을 가서 묻지 못하고 죄송하던 참이었는데, 항상 저희들의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어찌하여 그같이 인정이 영구불망 하느냐?” 하니, 김명생이 말하길 “소인이 전자에 진영에서 진영 군뢰를 거행할 때 그 참봉 나리가 숭덕전 참봉으로 있었습니다. 하루는 진영에 들어오시는데 사인교를 삼문 밖에 놓고 들어가서 나올 때 수군뢰(首軍牢)를 불러 ‘군뢰 하나 대령하라.’ 하셔서 소인이 갔습니다. 배지 하나 맡아 사람 하나 데려다가 전으로 대령하니 ‘잡혀온 백성을 관방에 들여오라.’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어찌 수작하였던지 (그 백성을) 보내고 소인에게 돈 3백 냥을 주시었습니다. 그 돈으로 그때 참죽굴 사세를 면해 없던 집도 사고 하여 살림을 차려 부모처자가 살림 밑천을 하였습니다. 항상 그때 장만한 그릇을 만지며 송덕하나이다.”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내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니 이따가 읍 40리를 가면 날이 저물 터라. 구태여 문간(사령청)에 가서 요위 체면에 곤란하단 말 말고 가는 즉시 향청(鄕廳)을 먼저 보게 하여 달라.” 하였다.
군뢰가 “그리하리다.” 하고 들어갔다. 날이 황혼이라 향청을 가니 향장이 없고 향청 아래 기생의 집에 사처를 하였다고 (하였다.) 사처를 가니 노령(奴令)들이 문밖에서 시위하고 방문 밖에는 등롱이 휘황하였다. 방은 비었는데 여화미인의 기생만 홀로 앉아 있고 향장은 동헌에 갔다 하였다. 학초가 군뢰를 문밖에 두고 방에 들어가 앉아 그 기생과 더불어 인사하고 향장의 거취와 내거 지속과 미인의 형편을 물으니 이 기생은 이름이 ‘금홍’이라 하였다. 당시 군수에 세도하는 향장 이능기(李能琦)의 수청 기생이었다. 정다운 수작을 하는 동안 (향장은) 알던 사람도 같고 초면이라 할 수는 없는 듯하였다.
그 차에 향장이 좌우에 등롱을 들이고 들어왔다. 학초가 일어서 연접하며 중전에 집에 있어 문약(問藥)하러 와서 한 번 본 면목(面目)에 두 번 보는 인사를 하였다. 향장이 먼저 “여기서 보기 뜻밖이오.” 말했다.
학초가 대답했다.
“남아는 노소를 막론하고 하처(어느 곳이든) 불상봉이지만, 향장의 내실에 돌입하여 사랑하시는 남의 내실 미인을 데리고 놀았으니 대단 실례올시다.”
향장이 웃으면서 “허물없소. 그년을 어이 좋아하는 물건이라 하특 득락이 좋으리까만 촌 선비로서 화류 수작을 알겠더이까?” 하였다.
학초가 말하였다.
“동도에 와서는 처음이올시다. 그 밖에 또 처음인 일이 있어 향장께 청하러 왔습니다.”
향장이 “무슨 일이오?” 말하자 학초가 “이름도 없는 사문사가 있으니 ‘구강 거(居) 박 약국 삼배도착래’로 왔는데 방금 잡아온 군뢰가 문밖에 있습니다. 다른 청이 아니라 삼문에 잡혀온 박 약국이 시명이 없을 수 없으니 박학래오. 박 참의(參議) 봉래의 삼종이요, 진사 영래의 재종이니, 이 말만 원님께 알게 하여 주소.” 하였다.
향장이 말하길 “그 말뿐이오? 그리하리다.” 대답하고는 ‘곧 들어가 다녀온다.’ 하고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나와서는 말하길 “사또께서 아시는 모양이라. 군기골 박능술의 집으로 주인 정해 주라 하더이다.” 하고 군뢰를 불러 명령한다.
향장을 하직하고 박능술의 집에 가며 생각하니 이 집에 묘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니 좌우에 5〜6인이 앉아 있는지라, 인사를 통하고 보니 안동 가일 살던 권문약이라는 사람과 안동 춘양에 사는 윤상제라는 사람이었다.
학초가 말하였다.
“평수상봉(萍水相逢)으로 각 처 친구와 상봉하니 반갑소만, 안동 양반은 좋지 아니하오.”
권문약이 말하였다.
“어찌하는 말이오?”
학초가 “어찌 오셨소? 원님도 아시지요?” 하였다.
(권문약이) 말하길 “아시기도 하고 관해(官廨)도 하고 하여 온 지가 달포 되었소.” 하였다.
학초는 “그만해도 나쁜 사람이라. 나쁜 행위를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그 위선을 알려 주어야겠소.” 하였다.
권(문약)이 “어찌한 말이오?” 하였다.
학초가 “선비 같으면 원님을 예전에 알았더라도 군 동헌에 와서 보고 (돌아가야지.) 아직 그 행세 수치스러운 줄 모르고 세도 아객을 제멋대로 하니 죄당 죽어야 마땅하지. 진정한 친구라면 충장으로 대위 조상을 할 터, 나는 그 같은 사람을 관해에 들이지 아니하지. 관해가 무슨 여관하는 집의 월녀인가? 한 놈 잡아 무슨 학민하여야 식대나 갚고자 하는 작정이겠지만, 댁 같은 사람이 많이 있어 어진 군수의 정치에 누명이 없다 할 수 없지. 경주 성내에 당시 안동촌의 폐단으로 유명하니, 댁이 안동촌의 한 부분 나쁜 터라. 깨달아 옳은 사람이 되소. 곧 밤이라도 떠나가오.”라고 말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윤상제가 말하길 “초면 친구가 너무 과하오.”라고 하였다. 학초는 (이번에는 윤상제를 보고) 말하길 “사람이 초면이나 세교나 간에 정정당당으로 말하고 사귀어야 하는데 우선 좋기만 한 간교한 수작은 곧 도적을 기르는 것이오. 정곡으로 말이지 윤상인은 당장 내가 태벌이라도 가하리라. 부모의 몽상(蒙喪, 부모상에 입는 상복)을 입고 부득이하여 아니 보고 안 될 일은 상주라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친구 군수의 아객질과 관해 구경에 아니하면 뉘가 허물하겠소? 아니하면 두통이 나오? 안동이 사부향(士夫鄕, 사대부가 많은 고장)이라 하더니 아주 간교하고 되지 못하며 장구치 못할 간심(奸心, 간악한 마음)만 (가진 사람들이구나.) 꽁꽁 죽으려고 섬어(譫語, 헛소리)향이라 할 듯하오. 어떤 말이냐 하면 위국모 복수에 뉘가 국모를 해한지 삭발자 목 베인다. 뉘가 출선위무인지 모르고 되지 못한 의병 같은 것 하다가 본 군수가 경주군수를 하여 서울서 내려올 때 가향이라 안동에 와서 친구를 찾으니 개화군수라 더럽다고 문을 닫고 보지 아니하지 않았던가? 의병의 기세가 수그러지니 도리어 동학 하다 왔느니, 의병 하다 왔느니 하고 출몰 아중(衙中)하여 막중한 민정을 누가 하고 있는가? 심지어 농상 간 (자신의) 직분을 버리고 학민 토전에 눈이 벌게가지고 (설치지 않았던가?) 심지어 상주가 여막을 남의 집 측간 보듯이 벌리고 와서 두류 세월을 하니, 관청은 두고 향당이 (일어나니,) 만일 법이 있으면 순회 볼기를 때려 보내어야 가하지.” 하였다.
권문약이 “너무 심하오.” 하는데, 학초는 (개의치 않고,) “내가 알지. 남자는 눈치가 만리경이라. 내가 안동촌의 음해로 사문사에 왔으니 이름도 모르는 약국 직업 하는 사람에게 사문이 다 무엇이오? 어진 군수의 정치를 안동촌 소행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함이라. 안동촌에 큰 북이 한 번 울어야 경주 백성이 살 터. 경주에도 사람 있지.” 하였다.
이와 같이 건령수(建瓴水)같이 물이 쏟아지듯 말을 하였다. 이때 방 윗목 문 앞에 한 소년이 앉아 밤새 뉘를 기다리는 것같이 앉았다 돌아갔다. 윤ㆍ권 양인도 잠깐 갔다 아니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조조에 통인이 와서 학초를 찾아서 밖을 나가니 강서주인이 관가의 전령을 보인다고 하였다.
강서주인(江西主人)
일전(日前) 박 약국을 이타읍(以他邑) 민 백활사(白活事) 취착(就捉, 죄를 짓고 잡힘)이, 금위 사실 즉, 명면(名面)이 개비기인(皆非其人, 해당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으며 박 약국 삼자가 오착(誤錯, 착오)자라. 특위 방송(放送, 죄인을 풀어 줌)하여 온 여수자 외 모집지민이면 물론 수보하고 착수사(捉囚事).
무술 삼월 초사일
군수 인
“곧 떠나시오.” 하는 통인의 말에, 학초는 식후에 간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통인도 “일단 구경하고 가시오.” 하였다.
문밖을 쳐다보니 사령 군뢰가 마당에 가득 들어서서 윤ㆍ권 양인을 잡아 결박하여 각자 등에 북을 지이고 높은 영기를 앞에 세우고 북을 둥둥 치며 ‘안동촌 아객’이라고 소리를 친다. 성안과 성 밖을 2〜3바퀴씩 돌려서 진장(鎭場)이 워워(놀리는 소리)하니 간회(諫誨, 타일러 가르침)하여 쫓아 보내었다.
학초가 떠날 때 이 향장을 찾아보고 하직하니 향장이 “어제 저녁에 그 방에 젊은 아전 하나 있었지요? 조전(朝前)에 들어가니 원님 말씀이 박학래, 박영래가 갑오년 동반 진사이다. 갑오 난중에 시골에서는 진사 행세할 여가 없으되, 조가(朝家)에서는 분명 진사이오. 박봉래와 삼종이다. 소북(소북파) 영수로 유명한 밀창군 영의정 집으로 새로 신원된 색색한 집이라. 어찌하여 객지에 와 있지만 세계에 괄세할 사람이 아니다. 필히 떠날 때 향장을 찾을 것이니 같이 데리고 들어오라 합디다.” 하며 (학초더러) 동원에 가기를 청하였다.
그 곁에 있던 기생 금홍이 “박 참봉 나리 집안이 되시기에 이야기가 많으시지요. 저도 처음 보아도 내두에 정다하겠습니다.” 하였다. 학초는 “금홍은 차차 보려니와 관가에는 아주 못 가겠습니다.” 하고 떨쳐 나온다.
고성을 지나오니 아는 사람의 말이, 서울 사는 박 진사가 (조금 전) 강서에 와서 박 진사를 찾다 못 찾고 읍으로 갔다 하였다.
‘진사 영래가 어찌 나를 찾아왔는고?’ 하는 의심이 들었다. 왔다면 필야 군수를 보러 갔을 터라 도로 (경주로) 들어와 삼문(三門) 거리를 배회하였다.
이때 재종 박 진사가 서울에서 내려와 강서에 와서 학초를 찾으니 알 수가 없어서 군수 권상문을 보려고 읍으로 왔다. 당시 풍속으로 삼문 간 헐소(휴게소)에 서서 승발을 불러 통자하니 사령의 거행이 지체하면서 거만하여 팔팔한 성미에 아니꼬워하면서 나왔다. 이때 재종간에 만나게 되었다. (군수를 찾는 일은 뒤로 미루고) 주막에 들어가 앉아 적조 담화를 나누고 난 뒤 (영래는 군수를 만나 보려 삼문으로 갔다.) (삼문에 있던) 진사의 하인은 예전 서울에서 별순검에 다니던 사람이다. 문간사령을 각기 내 주인 섬기기는 일반이어서, (사령들이) 문밖에 온 손님을 막고서 들이지 않는 꼴을 보기가, 도시 하인의 불찰이라 하고는 도사령의 상투를 갓 쓴 채로 마구 치고 끌고 와서 마당에서 뺑뺑이를 시키고 있었다. 한 하인은 장작가지를 들고 발꿈치를 딱딱 팬다. 구경꾼이 들어설 때 형리와 승발이 문안 아뢰면서 삼문을 잡아 열어서 “듭시사.” 하였다. 아니 들어가니 통인이 와서 “아니 드시면 사또께서 곧 나오십니다.” 한다.
진사가 들어가더니 깜짝 반겨 인사하였다. 후에 내동헌에 들어가 군수의 모친과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며 무수히 반기고, 저녁 먹고도 진작 나오지 아니한다. 군수 모친의 서울 집은 전일 봉래씨와 살 때 진사가 ‘아주머니’ 하고 부르던 말 어법은 여전하였다. 군수가 “자칫하였으면 재종씨를 사문사에 실수할 뻔하였소.” 하는 말과 함께 (학초가) 계속 있게 청을 하여 한 친구 뒤에서 명고출송(鳴鼓出送)한 전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다음 날에 학초가 진사와 같이 군수를 찾아보니, 전후 정곡이 특별하여 그 후 내내 절교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