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참여를 문제 삼는 협박꾼들
1898년(무술년) 2월, 안동에 산다 하는 김봉재가 찾아와서 못 살겠다는 원정 겸 구걸같이 돈을 달라 하였다. 학초의 생각에는 ‘저 사람이 직업 없이 다니니 죽을 날이 멀지 아니한 사람이요, 무단히 남의 집을 찾아 돈을 달라 하니 강도가 아니라 할 수 없고 법관에 고소하여 징치를 한다 해 보았자 현행 법관 역시 이 사람과 다름없을 터, 설혹 엄중한 죄를 준다 해도 나로 인해 인명이 위태하면 내 손으로 사람 해한 것이라 할 만하니,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차마 못하리라.’ 하여 한 등 장사 밑천 될 만치 주어 보내었다.
(부인 강씨에게는) “아까운 재산으로 저 사람에게 영결(永訣)을 하였구나.” 하니 부인 강씨가 그 연고를 물었다. 학초가 답하여 “사람이 직업이 없고 무단히 남에게 돈을 달라 하니 약간의 돈을 주어 전송하는 나는 내 손에 칼을 들지 아니하고 군사를 명령하여 적장을 베는 격이라. 저 행습을 재미 보아 다른 곳에 가서 또 이같이 할 것이니 그 사람은 단정코 나 같지 않을 것이오. 서로 죽더라도 죽을 날이 멀지 아니하니 두고 보소.” 하였는데, 과연 그 다음 해에 부자 자손으로 무직업 패망자인 김수길이라 하는 사람과 서로 때려 두 사람이 다 죽었다고 하였다.
1898년(무술년) 윤3월 초이튿날 대구에 산다고 하는 정치근이라 칭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되 “주인이 순흥에서 살다가 동학 난리에 경주 이곳으로 오셨지요?” 하거늘, 학초가 “과연 그러하오.” 학초가 그렇다고 하자 정치근이 말하길 “내가 전에서부터 장사를 하러 다녔는데, 갑오 동란에 예천 경진에서 오백 금 재산을 잃었으니 대신 물어내시오.” 하였다. 학초가 들으니 김봉재와 같은 당이라. 큰소리치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이와 같이 해 주다가는 그 수를 다 셀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살펴 주면 돈을 주고 죄를 사기 쉽고 물려고 드는 범은 막아야 될 터, 잠깐 계교를 내어 대답하였다.
“더 할 말 없소. 노형이 오실 줄 몰라 돈을 준비해 두지 못하였으니 집에 유숙하면 대접할 터, 돈을 구해 오리다.” 하고 집에 묵고 있으라 해 두고 바로 비밀히 경주읍으로 들어가 사실대로 소장을 지어 고소하니, 이때 경주군수는 안동에서 온 권상문이었다.
군수가 소장을 자세히 본 후 소장에 지령을 하였으되,
근거없이 모함하여 이와 같이 토색질을 하는 것이 극히 놀랍다. 정치근을 즉각 나졸을 시켜 잡아올 것
[無端構陷 行此討索 極爲駭然 鄭致根卽刻捉來事 羅卒]
윤3월 초4일 오후에 학초가 나졸을 대동하고 집으로 돌아와 도적을 찾으니 정치근이 스스로 의심이 났는지 있지 아니하고 ‘다음에 온다.’하며 가고 없었다. 부득이하여 죄인을 놓친 사연을 군수께 회고(回告)하여 사유를 고하니 그 소장에 특별 지령하기를,
소위 정치근이란 구함 촌민이 무단 토색하니 죄를 엄히 물어 급히 붙잡으려 하였으나 아직 잡지 못하였다.
[所謂鄭致根 構陷村民 無端討索 罪當嚴飭 及其發捕而未捉]
동민은 꾸짖지 아니하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차후 혹시 다시 침입하면 영칙을 기다리지 말고
[洞民難免疎虞之責 此後 如或更侵之端 不待令飭]
동임(동장)은 동민에게 맡겨 동네에서 결박하여 올릴 것
[自洞中 結縛捉上事 洞妊等歸只]
윤3월 초파일에 정치근이라 하는 자가 다시 왔다. 학초가 동네 사람들과 연락하고 정치근에게 “네가 무엇이 할 직업이 없어 강도질을 하고자 하니 네 평생이 김봉재가 아니냐? 다시는 용서할 수 없으니 죽어 보아라.” 하고 잡으려는 공문을 보이고 동인을 부르고자 하니, 정치근이 아주 자복을 하고 다시 그 같은 행습을 아니하기로 자복증서를 써 바치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 부득이하여 자복증서를 받고 다시 그같이 아니하기로 하고 용서해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