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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학초전 박학초실기
일러두기

병신년 의병 불참

1896년(병신년) 봄, 이때는 각 도와 각 군에 동란은 종식되고 의병이 창궐하였다. 주로 내세우는 뜻은 국모 (시해를) 복수한다는 것과 삭발한 사람 머리 벤다, 정부를 교혁한다 하며 동학의 뒤를 이어 세록 사림(士林)들이 각기 문벌을 자창하여 각 군마다 대장이니 소모장(召募長)이니 하고 두서없는 군용을 취당하여 간간이 군수의 목을 베었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의 목을 베었다. 한창 포장 성세로 창궐할 당시에 청송군 의병장 홍성등, 이준구 등이 학초를 소모(召募)의 장관으로 추입코자 하여 찾아와서 설득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나라를 위하여 때를 얻어 입신양명하고, 중시조가 되어 가정에도 영광되게 함이 정당한 것이라.” 하며 다소 웅변으로 종사(從事)를 청하였다. 홍성등은 일가인 홍 진사 기섭의 집에 수삼 일 머물러 동침도 하며 청하였다. 학초는 심중에 짐작하고 정한 뜻을 바꾸지 않았고, 홍ㆍ이(洪李) 양장을 도로 설득하는 말을 할 입장도 못 되었다. 다만 당시의 의병을 두고 시를 지어 각각 창기도 하는 운자가 있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였다.

오백 년 나라 백성으로 친한 의기 있으니         五百年民義有親
바람 소리 높이 내며 옛나라를 새롭게 하자 하나  風聲高出舊邦新
마음 가운데 엄자릉의 집을 짓고자 하니          心中欲作嚴光宅
세상에 백이 숙제 같은 사람 어찌 많은가         世上何多夷叔人
겪어 옴이 오래이라 해동의 풍속이여             經來久矣海東俗
천하의 티끌을 싹쓸이 불 때를 기다리리라        待掃時乎天下塵
남양 땅 숨은 선비가 스스로 알고 누우니          南陽隱士自知臥
천이나 만이나 일어나는 군사가 참이라도 참 아니니라

홍ㆍ이 양장이 이 글을 자세히 읽어 보고 학초의 불응 작심을 알고 떠났다. 이때는 병신년 사월 그믐날일 것이다. 그 후에 홍성등은 청송군 의병대장이 되고 이준구는 소모대장이 되어 다수 군병을 영솔하고 천지를 희롱하는 듯한 기세로 청송으로부터 (경주로 가서) 경주성을 함락하고 영변 칠읍과 안동과 울산 지역까지 통솔한다는 대단한 풍성이 들렸다. 홍성등의 종형 되는 홍 참봉이 경주성을 함락한 다음 날 이른 아침에 학초를 찾아와 그 소문을 듣고 좋아하여 비밀 정곡으로 풍성을 조화하여 다가올 일에 대해 의논 겸 물었다. 학초가 “좋아하는 의무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어찌하리오?” 하고 되물었다.
 홍 참봉이 “(홍)성등이가 집안사람으로 대장일 뿐더러 청송에서부터 경주 본군에 와 있으니 가서 보고 싶기도 하고, 경주 함성하던 소문이 굉장하였지. 경주군수 이현주가 의병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성안 군졸을 통솔하여 성 위에 올라 위엄이 엄숙하게 사대문을 철옹같이 지켜 총살이 비 오듯 하나 동문에 황월 놀던 의병의 기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을 때, 홍성등이 동문 성 돌을 짚고 솟아올라 날았다 하지. 의병의 기호를 동문산에서 듣건대, 뒤를 따라가니 군수는 남문으로 도주하고, 의병이 성중을 웅거했으니 경주 같은 웅도가 이제는 의병 소혈이 되었다고 하니 들어가 보고자 하노라.” 하였다.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6~7일 만이면 육통(六通)주막에서 만날 것이니, 문전의 육통을 두고 40리 경주 성내로 가 볼 필요 없으리라.”
 홍 참봉이 그 연고를 묻는다. 학초가 “단지 두고 보라.” 하고 그 변경 내용은 경솔하게 앞질러 말하지 않고 보내었다.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홍 참봉이 학초에게 와서 ‘6〜7일 만이면 홍성등을 육통주막에서 상봉한다.’는 말을 굳이 알고자 하였다.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길 “세상 사람들이 처음과 끝을 생각하지 못하고 범사를 성한 쪽으로 쫓는 자가 모두라 하여도 허언이 아니오. 의병이 아직까지 대병과 접전을 못해 보고 각기 자유로 물밀듯 하는 오합지졸이요, 성중 백성도 역시 한가지라. 우선은 반긴다 하더라도 의병이 양식이 없어 성중 백성의 장다락이로 팔아 사서 먹는 양식을 빼앗아 (먹을 수밖에 없을 터). 그 간두 사세가 5일 내외간이 될 것이다. 우매한 의병은 성중 군기를 큰 기물로 믿고 들어왔지만 군기고(軍器庫)의 구식 화약은 실상은 떡이 되었을 테니, 5일 안에 모두 개량하고 정비하지는 못할 터. 총이라 하는 것은 쓸 만한 것은 진작 다 없어지고 쓰지 못할 수효만 채워 놓았을 터. 정비할 여가 없이 군수 이현주는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당일 내에 대구로 가서 진위대병을 청병할 터. 1〜2일 내에 울산 진위대병과 기약 어기지 아니하고 4〜6일 내면 서쪽으로는 대구에서, 남으로는 울산에서 다수의 진위대가 (경주성에 다다를 터). 경주성 위치를 둘러볼라치면 북의 안강 쪽은 놔두고 남의 봉황대에 올라 천보대가 터질 것이다. 의병은 다시 동문은 의심 많아 못 가고 무인지경인 북문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불가불 6〜7일 만이면 퇴병 도주하는 화용도(華容道) 군사가 되어 안강을 거쳐 육통주막에서 영락없이 상봉할 것이다. 서로 면목만 보고 정곡담화(情曲談話)는 나눌 여가 없으리라.” 하였다.
 홍 참봉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기를 “성중 백성이 관속에 연심(애뜻한 마음)한지라 그도 의병 되어 일조가 될 터이니 설마….” 하거늘 학초가 말하길 “설마가 불연(不然)이라. 조선의 아전 관속이라 하는 것은 구관이 갈렸다 하면 우선 신관 오기 전에 구관을 괄세하기 주장이오. 목하에 의병이라 하는 사람이, 동도(東都)는 원래 화류계란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례히 부녀를 겁간, 화간할 터, 값없이 전곡을 취할 터, 강제로 인심을 상해 병(兵)이 나가기를 (고대할 터.) 서남(西南)의 관군(官軍)과 내응이 잘되어 반장지간에 오합지졸이 눈치 빠른 성중 관리이니 (관군의) 선봉이 되어 (의병은) 곧 퇴병하리다.” 하였다.
 7일 만에 해가 넘어간 후 홍 참봉이 찾아와서 말하였다.
 “과연 학초 선생이로다. 이같이 빈촌에 와 있는 것이 정녕 무슨 경륜이 있는 줄 짐작하려니와 실상 옛날의 남양의 제갈이 지금의 남양 은사와 짝을 이룰 참으로 알 바이다. 어찌 당시 제갈이 아니리오. 과연 말하던 7일 만에 오늘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육통주막 앞에서 훨훨 지나가는 (홍)성등을 잠깐 보았습니다. 인사뿐이지 어디로 가나 하니 말이 없고 집안 안부 나눌 여가 없어 눈으로만 인사 하직하고 갔습니다. 일이 이 같으니 어디로 가시리까? 그같이 간 뒤 흥망 행적이 어찌 될는지 전일과 같이 자세히 가르쳐 주기를 바라나이다.”
 학초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육통에서 기계로 들 터, 다시 청송은 아니 갈 터, 냉수정으로 하여 영덕을 가실 터, 다시 5~6일 내에 단지 영덕뿐으로서 추도 오강에 자문지 지장이라 그 마두와 같습니다.
 또 그 후 오륙일 만에 홍 참봉이 다시 와서 수색이 만면하고 공손히 정곡으로 물었다.
 “홍성등의 말에 일전 하시기를 육칠 일 내에 추도 오강에 자문지장이 어찌한 이치 속의 말이온지 알기를 바랍니다.”
 학초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하였다.
 “겪어 알았을 터에, 겪으신 이가 아니 본 나에게 취맥(取脈)을 하시려오? 다름이 아니라 범어 만사가 추리 예산으로 조화도 또한 그 안에 있는 것이고, 변통도 또한 그 안에 있는 것이요, 불변 당액도 또한 그 안에 있는 것이니, 모두 주역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일은 (진위대에서는) 전화 급보로 서로 연락 상통하여 북에서는 원산 진위대가 해상으로 강릉을 지나 영덕에 내리고, 안동 진위대가 청송ㆍ영양을 지나 일자를 맞추어 영덕으로, 대구ㆍ울산 진위대가 경주 왔던 그 길로 영덕으로 한날한시에 남ㆍ북ㆍ서에서 자연히 포성이 일시에 발포되는지라. 동으로는 망망 창해에 승어오강으로 물에 쓸어 드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일약 십 명으로도 장수라 할진대 다음 일어날 일은 달리 어찌할 수 없음이라. 사나 죽으나 진위 병정이 바닷물에 쫓아 처넣을 터, 시신을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내게 되어 찾지 못하리다.”
 (학초의 대답을 듣고 난) 홍 참봉이 말하였다.
 “과연 일자도 그같이, 패진 형세도 그 모양으로 일을 맞혔으니 참 명감을 감복하겠나이다. 그렇지만, 가족의 사세를 과연 어찌하면 보존하리까?”
 차차 내사(來事)를 의논하며 세월을 보내었다.

이때 1896년(병신년) 8월 모일, 경주 홍천 홍 진사 집에서 30여 명 동네 친구가 모여 놀더니 불시에 대구 진위대 병정 하나가 사랑방 문 앞에 들어서서 총을 짚고 대구 병정 일 소대가 하룻밤 자고 가기를 묻는다. 불시에 홍 진사 부자는 사색이 되어 말대답을 못하고 학초를 돌아보며 대답하기를 바라는 표정이라.
 학초가 말하였다.
 “어찌 된 연고로 다수 출주(出駐)하신 병사 장관이 이 집에 숙사를 정하나이까?”
 병정이 “장관의 명령이라.” 말했다.
 그러던 차에 일 소대 병정이 뒤를 이어 동구를 찾아 들어오는지라. 주인은 흩어지고 학초 혼자서 다수 병사와 장관을 인접하여 친밀히 담화하고 주인 대신 하룻밤 접대하여 주었다. 다음 날 떠날 때 숙식한 값을 일일이 주고 갔다. 떠난 후 주인을 찾으니 그 전일 병정이 들어올 때 비단 홍 진사 집뿐 아니라 일촌 남녀노소가 졸지에 난리가 난 듯이 모두 엎어지고 구렁에 떨어지며 도망하고 세간 집물은 곡식 밭골에 모두 묻었다가 다시 모았다. 학초가 안연부동(晏然不動)으로 천연히 수접을 잘하고 밥값까지 받아 준 것을 세상에 처음 보는 일로 말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홍 진사는 의병대장의 족속이 되므로 위겁이 더할 뿐더러 진위대로 시위를 보리라고 역노 외 숙식을 하고 학초가 접대할 때 그간 눈치도 관계없는 변호를 한 바 되었다.

주석
소모장(召募長) 소모장(召募長):군사를 모집하는 책임자.
안동관찰사 안동관찰사:1896년 전국 8도를 23개 관찰부로 개편하고 안동에 관찰부를 두었다. 혼란이 많아 1년 뒤에 23개 관찰부는 폐지되고 전국을 13도로 나누었다.
김석중(金奭中) 김석중(金奭中):갑오년에 상주 소모영 유격장으로 민보군을 이끌고 상주와 충청도 보은 청산 영동 옥천을 순회하며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인물으로서, 그 공으로 안동관찰사가 되었다가 왜관찰사(倭觀察使)란 비난을 받다가 의병에게 살해된다.
엄자릉 엄자릉:후한 광무제의 절친한 친구로 광무제가 황제가 되자 낙향하여 초부로 살아감.
남양 땅 숨은 선비 남양……선비:남양에서 평민으로 은거하고 있을 때의 제갈량을 일컬음.
황월 황월:도끼를 지칭하며 접전이 있었음을 표현한 말.
육통(六通) 육통(六通):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천보대 천보(天步)대:1729년(영조5) 윤필은(尹弼殷)이 만든 총으로 총신이 작고 가벼우며, 탄환이 천 걸음의 먼 곳까지 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사용되었다. 『두산백과』
추도 오강에 자문지 지장이라 그 마두와 같습니다. 추도……같습니다:초한 시절 항우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방과 휴전을 맺었으나, 유방 휘하의 한신이 휴전을 무시하고 항우를 공격하여 항우는 쫓겨 겨우 오강에 이르렀다. 부하들은 강을 건너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였지만 항우는 자신의 애마 추도 오강을 건너지 않으려고 하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면서 사랑하는 우미인과 말의 목을 벤 후 자결하였다는 고사를 인용.
안연부동(晏然不動) 안연부동(晏然不動):천연하고 침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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