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봉계동 이사
남대궐이라 하는 동 이름은 조선 단종대왕이 그 삼촌 세조에게 양위하고는 영월로 오고,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정배 와 있을 때 단종이 그 삼촌 금성대군을 보러 순흥을 내왕하면서 잠깐 앉아 쉬어 가신 자리이다. 그 동 백성이 불망기념(不忘記念)으로 비각을 지어 굴피나무 껍질로 위를 덮어 예로부터 전해 왔는데 이로 인하여 동네 이름을 ‘남대궐’이라 하였다. 그 동네에는 성황당도 있어 오래전부터 동인들이 보존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흘러 그 비각과 성황당이 퇴락하여 전복할 정도에 이르렀다. 통정공이 그 유적을 본보기로 삼고자 다시 중수하려 하였는데, 이번 일을 당하여 경주로 떠나게 되어 부자의 작심이 (무산되었다.)
떠날 때 정이 없다 할 수 없는 남대동 산천을 하직하게 되었다. 전에 있던 집에 내려와 행장을 수습하며 잠시라도 피난하였던 뚜립박골을 언제 다시 보기를 기약할 것인가? 평지에 있던 집과 전장은 재매부 되는 임경수에게 맡기고 떠났다. 이웃 친구며 남대동 산천이 모두 이별이 되었다. 사람의 자취가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이같이 구름에 정자를 짓는다. 후일에 지내는 사람이 뉘가 이 같은 형용을 지점하리오.
쑥밭재를 넘어 내성으로 작로하여 경주 길을 물어 왔다. 전에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지금은 얼음길이 되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전전긍긍하여 내려왔다. 이 모습을 (가사로) 기록하니,
새벽날 느지목이부터 풍설이 분분하다
남부여대 오자하니 연로에 거동보소
경주에 사람이면 구박이 자심하다
안동땅 섶밭주막 주인정해 숙소드니
경주산다는 성서방이 젊은아내 어린자식
봉놋방에 한데들어 구박모양 자세보니
처자의 소중이야 사람마다 같건만은
남녀분별 정이없고 가련경상 못볼러라
풍설이 장유하니 하루갈길 열흘간다
조조에 길을떠나 섶밭이라 하는동구
일행이 지내올세
어떠한 재관을 쓰고 (이때 체모 없이 한 자나 되는 갓을 쓰고) 길을 막아 앉아서 남녀의 체모 없이 보며 길을 비키지 아니하였다. 젊은 제수씨 동서가 길을 피해 길 아닌 데로 돌아갔다. 이때 학초가 뒤에서 오다가 보고 지팡이를 짚고 서며 호령하였다.
“이놈아, 네가 머리에 쓴 것이 무엇이냐? 당장 벗고 말하여라.”
그자가 일어서면서 말하길 “오늘 밤 꿈이 괴상하더니 무슨 곡절이오?”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이놈아, 네 머리에 쓴 것은 양반이 쓰는 관인데 행세는 남녀 체면과 행자양로(行者讓路)를 모르니 네가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당장 죽어도 죄가 많을 것이다.” 하니 그자가 복복 사죄하면서 말하길 “근래에 경주 사람이 남녀 체면은 아주 없이 허다 횡설로 나날이 길에 메이게 올라가는데, 당신은 홀로 내려가니 알지 못하여 잘못되었소.”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이 사람아, 관 쓴 값을 하려거든 귀천 간에 남녀 분별 행자양로 하여라. 제각기 소중은 일반이라.” 하고 돌아서 오며 생각하니 먼 길에 창피함이 이같이 막심하니 장부의 처사는 더욱 한층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재산이 없고 보면 길에서도 위엄과 형식을 잃고 있으나, 장부 기안은 없고는 안 되는 법이다.
이때는 을미2월이라 경주땅 기계면의
봉계에 초도하여 여간가대 전장산이
고향으로 대표하면 가헐은 하건만은
기지(基地)를 살펴보니 산수는 서출동유하여
북향마을 되었으니 봉서앞 높은봉은
서남간에 솟아 있고 마봉산 선돌바위
백호가 되었으니 임비장이 앞에있고
윤모등이 청룡되니 그가운데 나의집이
한사유거 마땅하나 북향이 한탄이라
궁춘(窮春)모양 들어보소 본형가진 사람없다
사람사는 마을마다 전장터가 분명하다
계견이 무성하고 야불폐문(夜不閉門) 살자하니
장장춘일(春日) 길고긴날 노고지리 수질뛸때
주린인생 허다모양 죽어죽어 바랜효상(爻象)
맥추등장 바랐더니 등맥이 되고보니
딴세상의 경주로서 걸인의 부자이라
나의생계 무엇인고 직업해야 살아갈터
이때가 1895년(을미년) 봄이었다. 갑오 흉년 여독으로 촌락이 모두 전장터 같은데 근근 생존한 생민이 농사를 짓자 하니 농가에 ‘소’라고는 명색이 없어졌다. 있더라도 당시 우질(牛疾)이 대단히 창궐하여 세상에 소가 영영 사라질 지경이었다. 객지 신접살림에 농우가 세상에 없으니, 생도 곤란이 백군이 형언할 수 없는 낭패소조이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면, 조선이 유래로 행부상(行負商, 등짐장수) 중에 각 진영 관하군(官下郡)으로 접장(接長) 명목이 조가(朝家)의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상리국(商理局)을 연락하여 각 상민의 수전 폐단과 토색을 직업으로 삼아 소위 행부상의 접장 호세(豪勢)가 한창일 당시였다.
예천에 이학민(李學愍)이라 하는 사람이 있어, 비록 무식하다고는 하지만 상읍에 적연한 이력으로 공정한 의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서울에 가서 접장을 구사할 때 많은 돈이 들어 구하지 못하여 가긍한 형상에 처하였다. 이때 (부친) 통정공이 서울에 머물러 계실 때 담보하여 주었다가 이학민의 정직(正直) 의무는 낭패되고, 통정공이 그 다대한 채무 횡증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분산(分産)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시었다. (그 뒤) 학초가 수다히 전래된 문외갱색전(門外更索錢)을 의생설약(醫生設藥)으로 직업하여 가정에 유래한 수많은 채무를 청산하였다. 생전 작심은 물론 잘살든 못살든 문외갱색전 소리 아니 듣기로 작심하고 한 농장 가장을 장만하여 몇 년이 걸리지 않아 살림이 넉넉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면서 일러 오기를 어찌하든지 간에 좋은 밭이나 좋은 논을 사서 소작을 주기 원하여 왔으나, 막상 문전답을 매수하려다 갑오 난리 때를 당하였다. 동산은 물론하고 부동산이라 하는 토지도 풍파에 구름정자가 되고 말았다. 살던 곳 사방 십 리에 허다 채권이 물 흘러간 빈터가 되고 인정변복(人情變覆)으로 말하면 평화롭고 좋은 시절에 내게 먹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두 쓸데없어짐이 허다하였다. (반면에) 알듯 말듯 하고 지내던 사람들은 난중은인(亂中恩人)으로 연연불망(戀戀不忘) 그리워서 잊지 못하는 점도 기이하였다. 인정의 이와 같은 변복이 뜬구름과 흘러간 강물과 같이 감회가 일었다.
그 중에 이상에서 기록한 것은 시장(市場)에 있는 장점석(張占石)이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전일에 장점석에게 황우(黃牛) 두 마리를 사서 사양으로 주었다. (장점석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절의 인심으로는 팔아 쓰고 잃어버렸다 하든지, 아니면 죽었다 하고 아니 주어도 족히 넉넉하였는데, 이 사람은 혼자 신의를 지켜 각기 준 사람을 단속하여 본 주인이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2월 보름에 찾아가니 그 지역에 우질(牛疾)이 어떻게나 창궐하였던지 137호나 되는 동네에서 소라고 이름이 있는 것은 다 싹쓸이 죽고 학초의 소 한 마리가 홀로 살아 동 휴송림에 매어 있었다. 또 83호 되는 동네에 소가 싹쓸이 죽고 학초의 소 한 마리가 역시 동구 임야에 매어 있으니 두 곳 소를 안동 솔티에 있는 매가(妹家) 김 서방(金書房) 집으로 몰아오니 보는 사람마다 이 소 임자 운수는 하늘이 보호한다 하였다.
이 당시 학초 부인 최씨와 유아 병일(丙一) 남매가 풍기군 은풍골 한감동(漢甘洞) 외갓집에 피난을 가 있었다. (이번 기회에) 같이 데리고 풍기읍을 거쳐 내성(內城)으로 갔다. 전에 용궁군 어촌에 살았던 친구 신동건(申東健) 역시 안동 법전(法典)동의 외가에 피난을 와 있어 이곳을 찾아갔다. 신동건 삼 부자가 하도 대단히 반겨서 수일을 머물렀다. 그곳에 같이 머물면서 살고 싶지만 부모 형제를 이미 경주에 두었으니 골육 분리라 차마 못하였다. 난리의 소문이 아직 가라앉지 않으니 부득이 하직을 하고 법전을 떠났다. 내성에 와서 처자를 대동하고 안동을 경유하여 (맡겨 두었던) 소를 몰아 경주로 향하였다. 안동 쇳재를 넘어 청송 유신내로 하여 입암(立岩)으로 길을 정하였다. 한티재를 올라 봉자암의 높은 봉을 목하에 두 번 보니, 이 역시 병주고향(竝州故鄕)될 터이라. 저 산 아래 봉계촌(鳳溪村)이 우리 부모 형제와 새 터로 잡은 동네로다.
봉계에 와서 (흩어져 있었던) 권솔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으나, 경주는 곡식이 없었던 해라 순흥의 곡식을 운반하여 식량으로 하자니 곤란 막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