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군 난입
통정공이 옳게 여겨 떠나려 하던 차에 난데없는 포군 3〜4인이 뜻밖에 달려들어 불문곡직하고 의풍(義豊) 대장소로 가자고 하였다. 막지소위하고 세부득하여 학초 부자가 잡히어 의풍 20리를 내려갔다. 눈 속에 난 통로로 겨우겨우 의풍이라 하는 곳에 도달하니 한 주점에 4〜5십 명 관포군이 둔치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대장이라 하는 자는 한쪽 방에 사처를 정하고 있었다. 죄인을 무수히 잡아 군졸에게 맡겨 사정없이 매질하며 수없이 곤박을 하였다. 주로 하는 말은 동학이라 하여 죽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물 강취에 있었다. 다수 놈들이 공초문답(供招問答)을 하다 보니 바른 이치와 도리에 맞는 말에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죽거나 살거나 대장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죽어도 대장을 보고야 말겠다고 하니 한 놈이 대장에게 고하였다. 대장이 학초를 불러 놓고는 말하길 “동학에 몸담았던 자는 노소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한다. (동학을) 했느냐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학초는 천연한 안색으로 “자고로 요순 때부터 지금까지 착한 성인이 드물고 우매한 자와 난잡한 자가 많습니다. 초한 시대에 항우도 진나라 정부 말로 하면 난민 중에서 특출한 영웅입니다. 삼국 풍진에 각기 삼국 군왕 제장이 모두 난민 중 영웅이었습니다. 지금의 사소한 동학으로 말하면 다 같은 이조 신민입니다. 살지 못하는 생령이 아침에는 동쪽, 저녁에는 서쪽으로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형편입니다.) 어제의 평민이 오늘은 동학에, 오늘의 동학인이 내일은 평민이 될 수 있습니다. 동학인 중에도 만일 의리 남자가 있어 병불혈인(兵不血刃)하고 억조 생령들이 실심 귀화하며 ‘불입호혈이면 안득기자’라는 이치로 호랑이 굴에 갔던 자를 죄주는 지경입니다. 출전 대장이 승전하고 돌아와도 적진에 갔던 장수라 사형에 처할 것 같으면 금일 대장 각하는 장래에 만일 미앙궁전(未央宮殿)에서 회음 후 한신의 사적을 닦을진대, 표모(漂母)에게 걸식할 때가 마땅하리까? 괵철의 충간을 불청할 때 마땅하리까? 후세 사적을 기록하는 춘추정필(春秋正筆)을 어찌하리까?” 하였다.
대장이 말하길 “당세에 어찌 그런 사람이 있으리오. 저간 사실이 적고 크니 다시 자세히 말하라. 뉘가 그 같은 사람이냐.” 하니,
학초가 답하여 말하길 “본인과 대장 각하 두 사람 사이라, 불가사문이로소이다.” 하였다.
대장이 왈칵 성을 내고는 정색하면서 눈을 부릅뜨면서 말하길 “어떤 연고로 그러하냐?” 하니,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길 “본인도 명색이 조가(朝家)의 사마방목(司馬榜目) 출신자로 동란을 견디지 못하여 처신할 곳이 광대한 천지간에 없어 동학에 들지 않으면 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만장창해(萬丈滄海)에 빠진 사람으로 날개도 없고 헤엄질도 못하니 육지를 가려도 못 가는,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경상도백(慶尙道伯) 조 감사(趙監使) 말에 ‘불입호혈이면 안득기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탁적(託迹)하여 동학에 의탁하여 의용진 두령으로 예천에서 조죽(鳥竹) 양령 이하 동학이 갑오년 8월 28일 양진이 약조하여 일발 총성으로 누만 생령이 진심으로 각자 귀화하고 귀환하였습니다. 간사한 예천 집강이 동학을 잡아다 영문에 승전 보고를 하였지만, 그 뒤 그 일은 쓸데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전일에는 동학에 입도를 하였더라도 금일에 귀화하면 평민과 한가지로 가산 적몰과 인민 살해를 일절 엄금한다는 경상감사 관지(關旨)도 있었습니다. 하여 사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대장이 말하길 “그대가 예천에서 이같이 하였는가?” 하니, 말하기를 “그리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는 물을 필요 없이 경상감영으로 조회하면 누구인지 성명을 알 터입니다. 다음에 미앙궁전 한신은 본인이 될는지 대장 각하가 될는지 앞으로 두고 보아야 알 것 같소이다.” 하였다.
대장이 말하였다.
“만일 그 같은 사람이 그대일진대 어찌하여 대구감영에서 써 주지 아니하고, 이 같은 남대동 산중 뛰립박골에 와서 구구세월을 암혈에서 보내고자 하느냐?”
학초가 대답하였다.
“한나라 광무제 중흥 시에 엄자릉(嚴子陵)은 부춘산(富春山)에 탁적하였고, 적벽풍진에서는 (조조가) 마초, 한수를 이간질시켜 사지를 피하였습니다. 태평성세에도 도연명과 이태백은 청운을 마다하고 오류문과 채석강에서 티끌과 같이 보내었습니다. 항차 목금의 예천 사(事)가 유공허공이 될진대 약간의 신원이 쾌하다 할 수 없이 당초 아니하기만 못하니 산과 강을 의지하여 구름을 갈고 달을 낚으면서 세월을 보내며 부모처자가 안락 태평하면 이것이 성세에 생민의 본이 아니겠습니까?”
대장이 “장하다. 연소한 사람의 말이 유리하니 물러가서 그대 부친과 그간 식채(食債, 음식값)나 준비하여 다녀와 갚고 가라.” 하였다. 학초가 물러나오니 기하 군졸들의 말이 돈 300냥을 가져와야 무사하리라 하는지라 상상해 보니 본시 재물을 탐하여 사람을 욕도 보이고 말경 돈을 아니 주면 유죄 무죄 간 생살권(生殺權)을 임의로 하는지라, 학초가 부득이하여 그만해도 각인 중에는 특별로 잘 생각하는 모양이라 돈을 구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삼경이 되어 대설이 내린 사이로 뚫린 호박길을 얼마 정도 올라오니 태산장곡(泰山長谷) 중간에 길이 양편으로 갈라져 있었다. 어느 길로 가면 남대동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거의 십 리를 가니 쌓인 눈은 얼어 은세계가 되어 있었다. 깜깜 철야에 눈빛으로 인해, 먼 곳은 전혀 어두워 보지 못하나 가까운 곳은 길만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간간이 시냇물 흐르는 소리 들리고, 왼쪽은 넓은 밭이 있었다. 길옆 그 밭 가운데 돌출부가 하나 있어 그 바위 위에 우뚝한 짐승이 하나 앉아 불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우연히 머리털이 곤두서고 전신이 오싹하여 자연 걸음을 물러섰다. 잠깐 드는 생각에 생전에 보지 못하던 범이었다. 범은 예로부터 불려지기를 ‘산군(山君)’이라 하는 산중 명물이요, 짐승이다. 사람의 취맥(取脈)과 이유를 짐작하리라고 생각하고 우연히 나오는 큰 목소리로 호령을 하였다.
“이놈 네가 짐승일지라도 부모를 위하여 급히 가는 사람의 길을 막으니 당당히 죽을죄라. 네가 정말로 영물 산군일진대 사람이 급하고 부모를 위하는 전정을 구조도 하리라. 빨리 물러가라.” 하며 발을 구르고 강두사세로 크게 소리치니 졸지에 간 곳이 없어졌다. 다시 물러서 오던 길을 요량하니 당초부터 길을 잘못 든 참이라. 설중 산천이라도 가던 길이 완연히 아니어서 의풍으로 돌아갔다. 다시 대장소에 들어가 짐승에게 놀란 말과 가던 길을 말하니 (듣는 사람들이) 잘못 가는 길을 그 짐승이 막아 옳게 인도하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다시 하직하고 이날 밤에 떠나 남대동으로 향하였다.
근근전전(僅僅轉轉)으로 혼자 걸어가며 생각하니 소위 대장과 군졸은 강도가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우선 사세가 저 같은 놈들을 잡아 설치며 부모를 구할 계획은 돈이다. 하지만 돈을 주면 도적을 먹여 기르는 셈이요, 돈을 준들 그 도적이 또 무슨 흉계 있을지 알지 못하였다. 설사 돈을 주더라도 내 몸이 다시 그곳을 가면 뒤에서 설욕해 줄 사람이 없게 되고, 내 몸이 아니 가고 타인으로 대신하여 뇌물을 보내고 못 가는 통지서를 만들어 보내면 후환을 의심하여 들을 듯도 하였다. 한편 생각하니 뇌물을 주는 것이 죄를 자각하는 결과를 낳아 일이 잘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내 몸이 다시 가기는 불가하였다. 집에 돌아와 약간 돈을 준비하여 편지와 함께 사람을 대신해서 보냈다.
이때 학초의 심부름꾼이 의풍 대장소를 찾아가 군졸을 보고 먼저 대장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전하였다.
경계자(敬啓者)
시운이 불행하여 국가의 난리며 생민이 도탄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국가를 위하시는 일은 옥석 구분의 지탄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옥석 구분할 당시를 당하여 부자 함께 죽는 것은 알고 갈 바 없다 할 것입니다. 옛날 오자서(伍子胥)의 걸음이 강상(江上)의 한 어부(漁夫)가 후일에 평왕을 쳐서 토벌할 줄 알았겠습니까? 친구인 포서의 말은 불청하고 (무덤을 파헤쳐 원수를 갚은 후) 천금을 들여 초강에 표모(漂母)를 제사할 제, 당시에 오자서의 행적이 다시 어찌 없을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초ㆍ한 시절 초패왕이 성군(聖君)이 아닐지라도 남의 부모 한태공(漢太公, 유방의 부친)은 해하지 아니하고 돌려주었거늘 고금에 어찌 처사 웅양이 없다 하겠습니까? 생은 전말을 어제 저녁에 다 말하였으니 다시 거론할 필요 없습니다. 생의 부친을 이편에 돌려보내 주시면 크게 다행스러울 것이며,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만일) 이에 대한 처분이 없으면 경성을 통하여 좋게 만나 보기 바랍니다. 보내는 송금은 뇌물이 아니라 정이니 여비에 보태기 바랍니다.
을미년 1월 3일 박학래
영월 출주병 대장 좌하
대장이 (편지를) 보고는 군졸을 불러 일러 말하길 “박모 부(父)를 보내라. 그 아들이 큰일 낼 사람이요, 장차 조심하여라.” 하더라. 이에 (부친은) 무사 방면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