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남대동 피신
투방집이라 하는 것은 나무를 마구 베어 우물 정(井) 자로 얹어 놓고 그 틈을 흙으로 바르고 위는 연목을 디밀어 놓고 풀로 덮은 집이다. 밤에 솔불을 쓰고 있으면 호랑이 등속이 사람 있는 줄을 알고 투방 밖이나 지붕 위에서 허비며 서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내다 간다고 하였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감자뿐이지만 속은 별미였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고봉장설(高俸丈雪) 위에는 백운(白雲)이 유유히 흘러가고, 얼음 속에서는 잔잔한 물소리뿐이었다. 이때는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이었다. 부모 형제 내외가 서로 돌아보니 반가운 마음은 자연 골수에 박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로 믿고 살아가지만 앞날을 살아갈 계획은 있어야 하므로 서로가 생각하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동생 붕래(鵬來)의 생각은 죽으나 사나 그냥그냥 이곳에서 지내 살 작정이었다. 노모와 소실 동서는 남편과 시부(媤父)가 하는 대로 따를 뿐이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동이 되고 보면 농사를 해야 살아갈 사세이었다. 어느 곳으로 가서 평안히 농사도 하며 살아가 볼지 광대 천지가 도처에 난리이니 의논을 하여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학초가 부친께 고하였다.
“소자가 대구에 있을 때 징청각(澄淸閣) 뒷방에서 전일 경주 영장의 동생인 김유석이라는 사람에게 들으니, 경주 등 영변 7읍은 동란은 없고 단지 지난 갑오 흉년으로 인민들이 거의 이산하여 비어 있다고 합니다. 빈집과 허다 농장이 (주인이 없어) 이 마을 저 집 사든지, 이 논 저 밭 사든지, 마음 뜻대로 다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값은 상등와가(上等瓦家)라 하더라도 엽전 100냥이 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상등 밭은 3〜4냥, 상등 논은 열 냥, 스무 냥이면 몰아 산다 하니 모두 떠나고 없는 경주로 가서 다른 사람이 버린 것을 거두어 사는 것이 상책일까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