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수집강 장문건 자결
보통 사람이 세상에 처하여 죄악이 극독하면 하늘이 자연히 용서하지 아니하고, 불행히 난세를 당하여 남에게 악을 쌓아 기군망상(欺君罔上)을 하고, 탐재호색(貪財好色)에다 유공은인(有功恩人)의 은공을 감추어 죽여 없앨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기 위해 정부 관청에 보고한 자에게는 하늘이 자연 용서치 아니한다.
예천군 수집강(首執綱) 장문건(張文健)은 일명 장문환이라 하기도 하고, 외명은 장자근댁이요, 지체는 공생(貢生)으로 연소(할 때부터) 부랑 무리의 두목이었다. 갑오년 당시 수집강이 되어 이상에 기록한 범죄를 하며 의기양양하더니, 1895년(을미년) 봄에 대구 진위대에서 예천 집강의 장문건의 죄악이 난무하던 때를 당해 조죽 양령(鳥竹兩嶺) 이하 동학이 모인 화지 대도회(花枝大都會)에 의용접 박학초가 5,770여 인의 합심(合心) 두령으로 누만(累萬) 인민을 진심으로 귀화케 한 일이 있었다. 그 중에 조가(朝家)와 동학 중의 죄인을 잡아 주고 중한 약조를 의지하고 예천 옥거리에서 군기와 총을 묶어 바치고 살려 주십사 스스로 항복하게 하기로 하였다. 당당한 대의에 기꺼이 귀화하고 각자 귀가 약속을 의지하여 죄인 둘 잡아 교부 후 총성 한 신호로 4〜5만으로 칭하던 동학 생민이 각자 귀가한 후에, 잡아 준 죄인도 받아 능히 감내치 못하고 자유로 보내었다. (그리고) 암사(暗詐)히 동학을 잡았다 경상감영에 보고하고 동학의 탁명(託名)하던 백성을 잡아 무수히 학민(虐民)할 뿐 아니라 학초를 잡을 흉계를 부리고, 가산 탕척과 인명을 수없이 살해하며 탐재 호식으로 적굴을 차리고, 우한거수(憂恨渠首)를 하며 기군망상(欺君罔上)하였었다.
죄인 장문건을 잡으려고 대구 진위대 장관이 병정 백 명을 대동하고 예천에 도달하여 읍중에 파수를 매복시켜 장 집강을 찾았다.
진위대 병정 장관이 그 집 안으로 그같이 들어가니, 어느새 그럴 줄은 모르고 함정에 든 범은 함정 안으로 노는 듯이 보았더니, 급기야 더딘 후 찾으니 죄인 장문건은 이미 자결하여 세상을 하직하였다. (진위대는) 단순히 사망만 조사하고 회군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학초는 상주군 단밀면 주암리(珠岩浬)에 있으면서 간혹 대구도 다니고 안동도 다니며 세사를 둘러보았으나 처신할 곳이 없었다. 1895년(을미년) 정월 12일 주암리에서 실인 강씨를 데리고 용궁군 영동을 거쳐 어촌(漁村) 김 서방 집에 유숙한 후 안동 신경에 있는 남매 되는 김 서방에게 백목(白木) 한 짐을 사서 지우고 작반하여 3인이 떠났다.
이때 세전(歲前)부터 대설(大雪)이 내려 백설 덮인 천지에 원근 간의 길만 통하였다. 그날은 정월 16일 새벽 미명에 예천군 오천 장터를 지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세교(世交)로 친한 주인 장점석(張占石)의 집에 잠깐 들러 이별을 고하니 주인 내외와 자부까지 자던 잠을 한꺼번에 깨어 반겨 하였다. 이내 떠난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너무도 서운해하는 모양이 인비목석(人非木石)이라 석목 간장이 눈을 가히 어둡게 가렸다.
(장점석은) “언제 속히 다시 볼꼬? 소식이나 종종 듣게 하소.” 하며 인정에 못내 하는 정표물로 대추, 떡, 엿 등을 채채로 놓아 싸 주었다. 이 주인의 음식을 전에는 허다하게 먹었지만 인정과 음식을 다시 먹을 기약을 못할 것 같아, 부득이 받아 짐에 얹고 돌아서니 온 식구와 작별이 옛날 하양(遐壤)의 소무(蘇武)의 이별인가, 연로정의 양창곡(楊昌曲)의 이별인가, 역수한풍(易水寒風)에 형경(荊卿)의 이별인가? 목석 간장이라도 녹일 정성스러운 이별을 하고 오천 다리목을 건넜다. 오백령 우편 골짜기로 하여 우포 뒷재를 넘어 통명역(通明驛)에 당도하니 새벽 서리 찬바람에 동천(東天)이 밝아 왔다. 석바탕이로 길을 정하여 노장이로 하여 티재를 올라서니 좌우 산천은 구면목으로 좌우에 둘러 있었다. 부용산(芙蓉山) 높은 봉은 좌편에 있고 저 산 서록 한감동(漢甘洞)은 위양고택(渭陽古宅)이 있건만, 다녀갈 여가 없어 순흥 남대궐 본가로 바로 갔다.
풍기읍을 지나 수일 만에 순흥군 읍실동 광덕에 사는 권 노인 집을 찾아갔다. 권 노인이라 하는 사람은 삼대세교(三代世交) 친구의 집이었다. 하도 반겨 하며 정국에 난중에 있었던 일에 위로하고 대접하는 음식이 극히도 찬미하였다.
하루를 유해하고 본가 소식을 자세히 듣고 보니, 강원도 동란에 엄치장이라 하는 사람이 동학을 잘 잡는 공로로 영월군수를 제수받아 관포군을 사방에 파송하여 동학과 접전 중이라고 하였다. (그는) 살해 인명으로 재산 강탈에다 사람이 살 수 없게 하여 각처의 촌락을 충화한다는 분분한 소식이 예천의 장문건 이상이었다. 매기재를 넘어서면 부모 형제 집이 있건만 이 같은 난중에 아니 갈 수 없고, 세상이 모두 이와 같으니 진퇴유곡이었다.
사람이 세상에 처하여 난시를 당해서 부모 형제와 처자를 보전하지 못하면 사람 된 본의가 아니라 여하튼 만나는 보아야 할 터였다. 가져갔던 짐은 권 노인 집에 두고 매기재를 넘어 남대동 집을 찾아가니 집은 비어 있었다. 그 집 북편 태산 상상골 뚜립박골이라 하는 곳에 산다고 하였다. 장곡 험한 산곡에 참나무 잡목은 사방에 우거지고 백설은 질로 와서 빙천(氷川)이 되어 겨우 호박길만 통해 있었다. 벌목장의 정 소리가 나는 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에 일초막 투방집이 6〜7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중에서 부모 형제를 일석에 반겨 만나 무척 정겨운 일과 지리한 난중을 지내 온 이야기며, 목하에 있는 모양 실상 기괴한 형용을 다 형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