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 수접주 최맹순 부자 붙잡힘
원래 소야 동학 대접주 최맹순은 충청도 보은, 장안의 최법헌 다음으로 관동포로는 제일 접주였다. 사람이 체골은 썩 장대하지는 않으나, 심지가 총명하고 단아하여 포덕을 많이 하였다. 항상 도인들을 보고 도인의 형세를 빙자하는 것을 일절 하지 말고, 유불선 수도나 착실히 하면서 각안 기업(各安其業)하라고 권하였다. 도인 중에서 혹 정당하지 않은 행위를 하면 하지 못하도록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독자 자식의 나이가 근 이십이나 되었으니 부모의 뜻으로 성취할 때라 친구의 중매로, 예천 벌재라 하는 곳에 사는 범절과 인물이 당세에 특출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김씨가(金氏家)의 규수와 혼취를 시켰다. 아들이 그 신부와 첫날밤 자고 이튿날 부자가 함께 예천 집강소 포군에게 잡혔다. 예천 집강소는 일본 군인과 용궁에서 소야로 가서 해산시킨 줄 알고 그 뒤 빈터에 가서 인민의 재산을 샅샅이 강탈하던 차, 최맹순 부자가 은적하여 혼인한다는 말을 듣고 맹순 부자를 죽이고 그 신부를 탈취하고자 읍에 잡아다 가두어 놓았다. 최맹순의 죄로 말하면 포덕만 많이 하였지 자기가 나서서 누구를 침토한 일은 없으되 대접주로 불리게 되었으니 ‘돈을 많이 주면 살려 준다.’ 하여 있는 대로 빼앗아 먹었다. 그 아들이야 또한 무슨 죄가 있나? 동학 접주의 아들에 불과하지만 미색 숙녀의 남편이니 죽여 없애야만 할 터, 첫날밤 하룻밤 동침한 그 김씨는 포군에게 잡혀 읍에 데려와 가두지는 아니하고 집강 포군이 만단으로 달래었다. 화간 강간을 만단으로 청하여도 김씨는 기어이 듣지 아니하였다. 집강자들이 말하길 “내 말만 들어 주면 남편을 살려 준다. 동학군은 쓸데없다. 우리와 살면 금의 호식에 영광과 사랑을 받는다. 만일 안 들으면 죽인다.” 하면서 백단으로 달래어도 듣지 아니하였다.
말래에는 최맹순 부자를 함께 죽이고 난 뒤, 김씨는 의탁 없고 남편 없으면 자연 수중에 있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고 죽은 후에 만단으로 달래었지만 전혀 듣지 아니하고 자살 순절하였다. 당시 강도 굴혈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 성세에 따라 아침에 모이고 저물 때 흩어져 아첨을 드리며 재산을 털어 갔다. 뿐만 아니라 생남생녀 자식 낳아 기르던 여자도 승세를 좇아 송구종신으로 예천 집강인 서방이라면 등용문처럼 여겼다. 최맹순 자부 김씨는 초혼한 하룻밤 지낸 남편에게 무슨 깊은 정이 있으리오만, 강도 천지에 우뚝한 ‘일야정부 만고입절(一夜情夫 萬古立節)’이라 하겠다. 애석하다, 최맹순은 자손이 멸망하였다.
하루는 학초가 예천 집강소에 대한 풍문이 하도 흉악하여 용궁 대죽동의 피약골이라 하는 산에 올라 예천을 바라보았다. 집강자들의 행패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동학인의 집이라 하여 재산을 털어 가고 집에다 불을 질러 여러 곳에 화염이 충천하니, 하늘이 내려보시건대 세상이 크게 두렵더라.
이때에 집강자 등의 흉계가 영문(營門)을 속여 동학 잡아 스스로의 공이라고 거짓으로 보고하기 위해 재산 강탈과 살인 음모를 꾸몄다. 취상으로 박학래의 사람됨이 21세부터 수천 명 다중의 두령으로, 처사기모(處事機謀)가 있는 자, 경향 관부로 길이 있는 자, 금번 화지 대도회에 우리 포군을 스스로 군기를 바치도록 일 만드는 술수와, 화호각산을 하여 각안 기업 조약 이득으로 주장한 필적이며, 화지에서 예천으로 행진하던 중로에 마상(馬上)에서 답 공문을 예사롭게 하던 재주, 옥거리에 들어서며 다수한 선봉기를 말 한마디로 퇴진시켜 남천 방천으로 건너서게 하니 실상 우리의 공을 되게 한 주장자인지라 이 사람을 없애야 우리 공이 장구히 실상이 되고 후일 거짓으로 보고한 죄를 면하리라 (생각하고) 어디에 가고 머무는지를 비밀히 탐지하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