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수의 공문
중노 마상에서 수하 기찰이 집강의 사자를 대동하고 말머리에 문안하며 공문을 올렸다. 이 공문은 동학 대진이 사방에 욱여드니 읍중 관민이 오도 가도 못하고 황황급급히 살기를 위하여 위험 속에서 혼을 잃고 있어 군수가 부득이 급박하게 보낸 공문인데, 그 안에 박현성이 있건만 이를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보낸 공문의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예천군수 하첩 위 관동 동학 화지 대도회중 대소 인민전
전자에 용궁 군기 탈취와 오늘 화지 대도회가 거병하여 (읍으로) 들어오는 군사로 관ㆍ민 간은 물론하고 뉘가 경동하지 아니하리오. 도중의 죄인은 도중에서 조치하고, 비읍 집강 조처는 군이 조처하기로 (하는 것이 좋겠으며, 따라서 도중 군사는) 읍을 들지 말고 각자 귀가해 각안 기업하기로 이행하시기 바람.
갑오 팔월 이십팔일
화지 대도회중
학초는 마상에서 그 공문을 보고 말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냥 앉아서 행장의 지필을 내어 그 답장을 보내니,
회장
직접 하첩함이 어찌 의심이 있다고 하는지요? 이미 정한 조약을 정중하게 이행하여야 하거늘 아이 희롱하듯이 변경하는 것은 부당하오. 한 가지도 어김없이 행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궁 군기 사건은 본회와는 본래 관계가 없고 본 조약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기재하였던 국록의 죄로 만민방회하는 도중 죄인을 잡아 보내는데 아니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이미 정한 조약에 대한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가볍게 행동하지 마시고, 전일 언약대로 하고 각자귀가, 각안 기업하도록 행하기를 회보함.
즉일 화지 대도회 행진 도중 답
이라 하였다.
예천읍 지형은 북으로 태산(泰山) 위 성(城)재가 서(西)로 두르고, 북(北)의 물이 동남으로 흘러 서쪽으로 가니 그 강변에 쌓은 제방 북쪽은 수읍인 (예천읍을) 이루고 신거리에서부터 물을 따라 서쪽으로 옥거리를 지나 서정자(西亭子) 앞으로 경진(京津)까지 길게 흘러간다. 동학 대진이 서로부터 화지 서하여 무학당(武學堂) 건너로 둘러 신거리로 향하였다. 벌재 동학진이 일시에 때를 맞추어 연속 둘러쌌으니 그 가운데 읍이 형세와 지지 형편으로 볼 것 같으면, 동학진의 주머니 속 물건이라 해도 가하고, 단지 속에 잡아 가두어 놓았다 해도 가하고, 가마솥 안에 잡아 넣고 뚜껑을 덮어 놓고 불을 뗀다 해도 허언이 아니었다.
이때 학초가 말 위에 앉아서 보니 기구와 위령이 강산을 동여 녹여 놓은 듯하였다. 만일 영을 내리면 예천 집강의 조부(祖父)라도 잡으려면 잡을 터였다. 읍 뒤 성지(城地)를 바라보니 성중 남녀 생령들이 산에 가득하여 절벽을 붙들고 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 구월 단풍에 초목의 단청 같았다. 실즉 다 저 백성이 제각기 귀중한 몸으로 저같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동학진에서 한 번 발포라도 하면 팔월 추수에 대추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았다. 선봉 기찰 방성운의 선봉 깃발이 벌써 옥거리 타누비 앞을 갔는지라, 잠깐 말을 멈추라고 전진에 분부하였다.
“선봉기는 옥거리에 들지 말고 남쪽 편 강 건너 제방으로 진을 옮겨 행영하라.”
예천 집강의 거동 보소. 소위 군기, 총 등속을 다섯 열씩 묶어 옥거리 입구에 나뭇단같이 세우고는 환영인지 항복인지 길이 꽉 차게 복지하여 ‘살려 줍시사’ 손이 아프게 비비면서 애걸함이 무수장관이고 그 옆에 박현성이 모시옷 바지에 흑립을 쓰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강 남쪽을 바라보고 서서 손을 친다. 그 강물은 마침 많지 아니하고 사천(沙川)에 흩어내려 혹 뛰기도 할 듯, 발등에 지나지 아니할 듯하였다. 이때에 도중 죄인 둘을 뉘라서 잡아 결박해 저 건너로 보낼꼬? 무슨 수단을 할는지 서로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