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 도회 참여
이때 동학이 없는 곳은 민란이 일어나는 곳이 많았다. 영천군수 홍용관과 경주부윤 민치헌, 김해부사 조준과 영해군수 등은 백성들이 모여 삽짝을 태워 매어다 버린 소문이 (돌았다.) 전라도 고부에서는 전봉준(全琫準), 김개남 등이 민요(民擾)로 시작하여 동학으로 창궐하였다.
당시 예천군(醴泉郡) 소야동(蘇野洞)에 최맹순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보은, 장안 이하의 관동포 동학에서 수접으로 대설 접주였다. 그 수하는 함경도 사람 고선달의 아들 고매함 형제로, 중간에 풍기, 은풍 등지 사람이었을 때 최맹순의 수하로 제일이 되었다. 다음 수하로는 상주 막골 사는 황방손 자손의 전(前) 참봉 황은묵이었다. 조령(鳥嶺), 죽령(竹嶺) 이하 각 접 수부(首府)로 연락이 되어 기세가 대단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당년 팔월 모일에 용궁을 거쳐 (소야에 모이라는) 도회 통자가 각 접에 도달하였다.
그 통장 요지에,
위에서 내려온 발문 비통에 의하면, 위국안민(爲國安民) 취지로 각 접 도인은 창과 총을 준비하되 총은 있는 대로 극력 준비하고 총 없는 이는 창이라도 각각 준비하며 각 접의 기호를 분명히 보기 좋게 하고 모여서 행진함에 항오를 정제히 하라. 우선 8월 모일로 용궁을 거쳐 (소야로 모이기 바라며) 무사히 모여서 앞에 적힌 내용을 서둘러 시행하시기 바람.
학초가 그 통장을 보고 헤아려 생각해 보니 요즈음 세상 형편, 하늘의 인심, 도탄에 빠진 생령들로 볼 때 필시 혁명은 일어나고 말 것 같았다. 비밀리에 들리는 말이 임금의 외통(外通)조도 있다, 대원군이 내응한다, 임진대적(臨陣對敵)하는 날에도 있는 남의 총 귀에 물 나기 하는 수도 있다느니, 조정의 간신 세록을 교혁하여 위국안민(爲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한다는 등 분분하였다. 각 항 들리는 말의 취지를 알 수 없고 각 군 수령은 민요(民擾)에 많이 쫓겨들 가고 동학 창궐 후 토색 강도 같은 행위는 저절로 금지되었고 각 관원의 횡령이 전혀 없는 때였다.
‘불입호혈(不入虎穴)이면 안득기자(安得其子)’임을 정말 이번이 구경할 때이다. 부하를 통솔하고 용궁읍으로 향할 때 길을 가다가 전후를 돌아보니 당당한 기호는 선진이 되어 있고, 후군을 굽어보니 수십 리에 나열하여 가히 기구가 강산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만일 무슨 영을 내리면 세상에 누구도 항거할 자가 없을 듯하였다. 최선두와 최후진에 일러 연로 촌민에 도인 이름으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을 일절 엄금한다는 (영을 내렸다.) 혹시 타 접 도인이 인민을 잡아 내왕하는 일이 있으면 하나같이 무사히 해방하도록 하였다. 용궁을 못 미쳐 성조라 하는 주점촌(酒店村)이 있는데, 그 동리 백성이 몇 동이의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길을 막고 먹고 가기를 청하였다. 선두 기찰이 아니 먹는다 하였지만, 백성의 권주에 길을 못 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촌로(村老)를 대동하여 말머리에 와서 인사를 하였다. 학초는 말에서 내려 그 촌민을 대하여 말하였다.
“어찌하여 청하지 아니한 음식을 권하오? 우리 접은 남에게 폐를 일절 금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먹을 의무가 없으니 물러가시오.”
하지만 그 점촌 촌민이 지성코 간하였다.
“얼마 전 세계에는 각 관리의 탐학에 도탄에 빠진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지냈는데, 동학이 포덕한 후로 관리의 탐학이 정지되었습니다. 도중(道中)으로 인해 혹 불평이 있었던 것이 직곡접 창설 후로 도중 불법도 일절 엄금되게 하여 주시니 들려오는 소문으로도 덕화(德話)가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늘이 직곡접을 내신 것인지, 우리 정부가 내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천우신조입니다. 이에 백성이 그 덕을 잊지 못해 (이렇게 권합니다.) 옛적에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어령왕사(御令王師) 격으로, 송덕주(頌德酒)를 약간의 정성으로 드러냅니다.” 하고 (한사코 권하였다.)
학초가 “부득이하여 토색하는 것이 아니오. 정으로 이같이 하기를 원하니, 마치고는 길을 정지하지 않고 속히 떠날 것입니다.” 하였다. 즉시 용궁읍을 들어서니 벌써 소야 상접과 각처 당합하여 (온 사람들이) 군수가 있는 동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진을 헤치고 대상에 들어가니, 소야접 고접주가 군수를 대하여 군기를 내어달라고 힐난 중이었다.
군수의 말이 “도인의 접과 정부 상관의 명령과 같다 할 수 없으니, 삼영(三營)의 영지(令旨) 없이는 못 낸다.” (하고 거절하였다.) 이 지경을 한편으로 바라보니 벌써 군기고(軍器庫)에 소야 도인이 달려들어 (총을) 모두 내어 흩어 놓았는데, 한 정도 가히 쓸 것은 없고 모두 폐건(敝件)으로 보였다. 모두 군기를 들고 소야로 향하여 한들이라 하는 동네 앞을 지나갔다. 가는 도중 이날 해는 일락서산하고 황혼이 되었다. 학초도 구경을 같이 하고 수하 도인에 명하여 쓰지 못하는 군기는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좋든 싫든 설사 가져간다 해도 주지 아니할 사람이라 같이 따라가기만 하였다. 전후좌우에서 횃불을 들었으니 밝기는 백주 대낮 같고, 각 도인의 등등한 의기는 용궁에서부터 소야까지 천지를 희롱하는 듯하였다.
소야로 들어가서 대장도소(大將都所), 중군도소, 좌우익도소, 급량도소, 서기 후보 정탐 등의 이목을 각각 정하고, 용궁 군기를 한꺼번에 받아 한쪽에 쌓아 놓았다. 그 이튿날 백 명씩 작대하여 교련장에서 연습을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출반하여 영솔하고 진을 돈다.
학초가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몸은 굵고 나이는 근 오십 미만 정도인데, 상상하니 어느 고을 장청(將廳) 장교 출신으로 짐작되었다.
소야 지형과 거민의 마을 모습을 살펴보니, 동은 예천이요 서는 문경이라. 북은 단양인데, 북쪽에서 물이 남으로 상주를 향하여 흘러 산양으로 나오며, 태산이 동ㆍ서ㆍ북을 둘러 있고 사람 다니는 고개가 사방으로 있는 산중이었다. 인가 뒤 원에는 토석으로 단을 반 키 되게 쌓아 놓고 시천주(侍天主)를 (모시고) 가까이 기도한다 하였다.
각 접이 각각 떠나면서 용궁 군기(軍器)를 분급하여 달라 하는데 안 준다 하여 불평이 일어났다. 이때 직곡접 기찰 김종수가 학초에게 (소야접에서) 군기 분급을 아니하는 문제를 꺼내었다.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길 “나는 어제 용궁에서부터 아니 줄 줄 알라고 말하였거니와, 군기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있으니…” 하고 말을 마치지 않은 채 대장소에 들러 하직하고 그곳을 떠나 돌아왔다.
잠시 유진(留陣)하여 같이 쉬고 있을 때 김종수가 다시 물었다.
“본접 도인들이 용궁의 군기를 못 얻어 온 분설이 접장의 명령이 없음에 ‘우어우어’ 하며 말이 많으니 접장께서 소야에서 하시던 말에 ‘군기보다 더 좋은 것이 각기 내게 있다.’는 말씀이 어찌 된 곡절인지 밝혀 듣기 원하나이다.”
학초가 답하여 말하길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 하는 것은 성인의 밝은 이치와 같은 심구이다. 일언 폐지하고, 재주와 덕행이 있어야 하며 험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나? 험으로 말하면 병기보다 더 위험한 것이 다시없으리라. 그 병기는 쓰지도 못하고 설사 고친다 하여도 못 쓰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선 정부가 바로 그 군기와 같은 폐건(敝件)이다.
우선 그 병기로 하여 강병을 소야에서 불렀으니 쓰지 못할 것이라도 약간 몇 개를 각 접에 돌렸으면, 쓰고 못 쓰고 간에 다음 소야에 일이 일어나면 구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아주 금번에 심상(心上)으로 끊었으니 일우고성(一宇孤城)도 없는 토수 짝골 속에 법제 있게 제조한 대포 몇 방이 못해야 제갈량인들 소용 있겠나? 참, 제갈량 같았으면 각 접의 도인을 면면 위로도 하고 우리 떠날 때 전송도 하지 않았겠는가? 범교자패(凡驕者敗)라고 무릇 교만한 자는 스스로 망한다는 말이 평시 행동에 있으니 급할 때 독부가 된다.
다음 용궁 폐문루 앞에 뉘 머리가 달릴 것인지 보라. 공연히 쓰지 못하는 군기 몇 개 가지고 집에 가서 남의 이목에 띄어 모조리 멸종을 당하지 말고 속히 돌아가 각안 기업하고 위부모(爲父母) 보처자(保妻子)나 하여라. 조선에 혁명 북이 울어도 몇 십만이 죽은 후에야 일어날 것이요, 아직은 안 될 터. 초한(楚漢)의 진승(陳勝)이 꼭 될 줄 알면 어찌 장검으로 출세할까 보냐. 거세게 탁아독청(濁雅獨淸)을 못한 굴원(屈原)도 충신이요, 부귀를 마다하고 부춘산에서 산나물이나 뜯는 사람도 각기 자기 처사에 영웅이라. 지금 이후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남은 행복을 (누리길) 바라노라.” 하니, 모두 듣고 그렇다고 하면서 돌아 웃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