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군 어촌 양반 신동건
이때 경북 용궁군 어촌에 사는 신동건은 양반이요, 장절공의 종손(宗孫)이라고 하였다. 그 조부, 증조부 이상까지도 거부라 할 만하였다. 속설에 경북 부자를 이르자면 경주 교촌의 최 부자와 순흥의 김자인과 용궁의 ‘신버벌’이라 하는데, ‘버벌’이란 위호는 말도 못할 부자란 말이라 한다. 택호는 ‘보은집’이라 하였다.
조선 풍속에 부자라 하면 남에게 공으로 주지 아니하고 받을 때는 독봉하니 남과는 원수가 되었다. 신동건 부자 대에 와서는 가산이 조금 군축하다 보니 양반임을 내세워 인민을 잡아다 돈을 꾸어 쓰고 갚지 아니하였다. 당당한 양반이 아니고 중서(中庶) 이하이면 그 집 당상(堂上)에 감히 오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동구까지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고는 들어가지 못하던 집이었다.
이때에 동학이 구름 일듯 하는 승세를 이용하여 한편으로 옛날의 전횡을 풀어 보자거나 빼앗긴 돈을 찾아보자고 각처 사방에서 붙잡아갔다. 아니 가면 수백 명 혹은 4~50명씩 와서 집을 도륙하고 칠십 노인, 오십 노인 부자 조손을 결박하여 그 집 당하에 꿇리고 당상 당하 좌우로 둘러서서 공갈 위협하는 것이 세상에 당할 자 없는 모양이었다. 그 집안 노소부녀가 들려주는 소문을 들으니 “직곡이라 하는 동학 접주 박모는 허다 곤박(困薄)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잘 구제해 준다.” 하므로 자식 동건을 시켜 비밀리에 급히 달려와서 구원을 청하여 말하였다. 급급한 모양으로 와서 초면 인사를 파하고는 사실 전말을 이야기하는데 그 치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곤란 형용을 말하고는 신명을 구하여 적선을 하여 달라 하였다.
학초는 그 사람을 먼저 보내고 수하 기찰 3인을 대동하고 그 집을 갔다. 우선 바라보니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로 둘러싸고 간혹 호령하는 소리도 나는 것이 야단이 기구하였다.
학초 기찰이 먼저 들어가며 씨명을 통지하였다. 그 뒤에 학초가 이내 들어서며 불수 인사하고 결박한 사람부터 결박을 풀어 준 뒤 단상으로 오르지 아니하고 마당에 좌석을 포진한 채 좌우를 둘러보며,
“각처 여러분은 들어 주시오. 보아 하니 이분은 동학에서 수도한 도인이신데, 동포 형제간에 가사 문제 다룰 일이 있으면 한두 사람이 개인으로 말씀하여도 못할 말, 못할 일 없을 듯합니다. 수백 명 다수인이 성군작당하여 인가에 돌입하여 인민을 공갈 결박하고 이같이 하는 것이 도중(道中) 규칙 어느 조목에 있으며 어느 상접의 명령이시오? 자세한 사실을 듣기 바라나이다.” 하니 한 사람이 나섰다.
“이왕 선생 (이름은) 익히 들었으되 뵙기는 처음이올시다. 초면 인사도 하기 전에 문죄부터 하시니 그 죄목을 알지 못하나이다.”
학초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먼저 들어올 때 기찰에 통자(通刺)하였거늘 영접하는 도리가 일절 없었소. 보아 하니 당상에 앉으신 이는 두목에 장수라, 하등 영접이 없으니 그 아래 서 있는 일반 첨위(諸位)들은 묻지 않아도 그 아랫사람임을 알 수 있소. 장수가 어른을 인사치 아니하고 지하 하졸부터 인사할 이치는 없을 것이오. 당상에 앉으신 이는 수인사의 거동도 모르시는 이가 어찌 사람을 결박하고 호령을 하는 것이오? 이 사람 보기에 죽으려 하는 헛소리 같으니, 설사 죽더라도 생전에 인사 없었기에 죽어도 조문할 필요 없을 듯하고, 인류 예법을 모를진대 예법 행하는 자리에 단단히 저 결박하였던 사람보다 더한 곤욕이 닥칠 듯하오.”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앞에 나서서 “다수인회중(多數人會中)에 비접(鄙接)이 실례올시다. 용서하시오. 이 주인이 옛날에 빼앗아 먹은 돈을 찾아야 하고, 결박한 일은 이 사람 등도 옛날에 이 마당에서 결박, 태장(笞杖)을 많이 당한 데에 대한 갚음이라 할 듯하외이다.” 하였다.
학초가 답하여 말하되 “귀 접의 실수를 단단히 용서 못할 일이 있으니 들어 주시오. 동시 도인에 수인사와 애정이 없으니 어찌 도인이라 하겠습니까? 이런 도인으로 말하면 공맹지문(孔孟之門)의 난신적자요, 유불선 동학지문에 난신적자라. 난신적자를 양성하여 필경 화용도(華容道) 군사가 되는 날에 미리 마초(馬超)·한수(韓遂)를 지키러 가는 영웅을 효칙(曉飭)할 것이오. 항차 동석에서 같은 도인 대위를 모르고 인민을 결박 공갈하는 것은 법가에서 용서치 못할 것이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변복이 허다하여 귀천으로 바꾸어 내니 구름 정자와 물레바퀴는 오히려 더딘 모양이라 할 듯하오. 언제는 첨위들이 이 당하에서 결박당하고 꿇리어서 아픈 매를 맞아 견디지 못하여 돈을 바쳐 축신하고, 오늘은 도리어 바뀌게 되어 주인 마루에 객이 앉고, 마당에 주인을 꿇려 호령하니, 이 사람의 소견에는 예전에 빼앗긴 돈이 (설혹) 아니 빼앗겼다 하더라도 그 재물이 항상 있어 더 나올지 알지 못하겠소. 없어도 오늘날 다시 꿇려 놓은 형세 되었으니 분풀이는 재차 하였다 할 듯하오. 도리어 감사하다고 주인께 사죄하고 각각 물러가면 후일 복이 오래갈 듯하여이다. 만일 이 말을 신청치 못하시면 도중에서 할안명고 당하고 밝은 법 마당에 뜨거운 형벌을 받으리라.” 하였다.
군중이 모두 묵묵무언이었다. 학초는 다시 연이어 연설하여 말하기를 “각 첨위들은 각각 돌아가서 농사짓는 이 농사짓고, 장사하는 이는 장사하며, 동학 도인이라 칭탁하고 남에게 술 한 잔, 밥 한 그릇 공으로 먹지 말고 각기 편안히 자기 업을 닦게 하여 주소. 만일 이 같은 행위를 하여 이 사람 귀에 들리는 날, 보은도소로 불법한 도인을 낱낱이 보고하여 명령을 받은 후 (문죄하겠소.) 만일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비접 수하에 오천 칠백여 명을 영솔하여 낱낱이 문죄하는 날이 곧 불법으로 통하는 날로 아시오.” 하고 좌우 기찰을 명하여 파회(破會)를 고하고 (지체하여) 더디 가는 자는 책갱이로 등을 쳐서 낱낱이 쫓아내었다.
제각기 달아나며 하는 말이 “우리 접주 인사의 실례로 인하여 낭패 망신을 당하고, 다음에 박 접장을 보거든 불가불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잘하여라.” 하고 혹은 하는 말이 “어법 경계가 털끝같이 작은 실수로 근본을 삼아 태산 같은 다수인을 정말 화용도 군사가 되게 하니 부끄럽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나는 일후 무슨 일이 있거든 직곡접으로 가서 배워 복종하리라.” 하더라.
그 후에도 신동건의 집에 불법 도인이 수차 전같이 야단하기에 수차 가서 전같이 축출하였다. 다음에도 혹여나 하여 신동건 부자를 아예 학초의 집에 와서 피난시켰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내왕할 때, 한 사람이 신동건 조부 칠십 노인 앞에 담배를 피우며 언사가 불공하자, 학초가 호통을 쳤다.
“연치로 말해도 부집조항이며, 전일이나 금일이나 사람의 도리가 공근(恭謹)하면 복이 오고 인정(人情)이 전정(前程)이라. 항차 도인으로 말하면 어린 소년에게도 공손하고 공경히 대함이 옳은데, 항차 칠팔순 노인에게 공경히 대할 줄을 모르니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그대들의 나이가 저 어른 같이 되고 소년이 그대 같은 이 있으면 통곡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극진히 공경으로 대하여도 서산에 가까운 노인을 볼 날이 많지 아니한데, 사람 간 뒤는 영웅 열사도 통곡한다. 다시 이후부터는 노소를 막론하고 공경히 대하여 꿈같은 세상에 죄를 짓지 말라.”
그때부터 감히 말을 다시 못하고 물러간 뒤에 이 말이 전파되어 보은 장안까지 알려지니, 사리가 당연하다고 아니한 이가 없더라.
이때 안동군(安東郡) 구담동(九譚洞)에 김종원(金鍾元)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선인 김경도가 자수성업한 부자로 조정의 세록가에게 친밀한 길을 얻어 (과거) 급제도 하였고, 사방에 전곡을 풀었다가 추심할 때 세력을 부려 독하게 받았다. 자연 받을 걸 받은 것이지만 각 인의 원성이 많더니 죽고, 그 아들 종원이 집안일을 맡았다. 이때 동학이 봉기하여 ‘전일에 불법으로 빼앗긴 돈을 찾자’ 하고 4∼50명, 때로는 근 백 명씩 나날이 와서 곤욕을 주고 도륙함이 무쌍한지라, 김치홍(金致弘)을 통하여 박학초 접에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학초가 기찰 2인을 대동하고 김종원의 집을 찾아갔다.
미리 명자(名字)를 선통하니 그 동학도가 하는 말이 “큰일 났다. 직곡 접주가 오면 누가 능히 대항하리오. (전일) 어촌(漁村) 신동건의 집에 팔십 명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연설함에 당당한 벼락이 두상을 치며, 여의치 않으면 오천 칠백 명이 (온다 하는데) 이 성세를 누가 감당하리오. 우리 면목을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고 도망을 가 청당이 고요하였다. 찾아가면 흩어지고 돌아오면 모여들고, 누차 이같이 하기에 이르니, 아예 기찰을 파송(派送)하여 그 집을 보호하여 주었다.
의성군(義城郡) 소직골에 신태관(申泰寬) 신 승지라 하는 늙어서 퇴임한 조관(朝官)이 있으니, 예전에 급제하여 찰방(察訪), 옥당, 한림, 승지로 벼슬하고 산수 좋은 곳에 내려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재산은 없고 자기 스스로 농사는 못하고, 장사는 더 못하니 자연 군색하게 지내었다.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사사로이 백성을 불러다가 전곡과 같은 것을 빌려 쓰고는 갚지는 아니하고 항상 새로이 달라 하는 식의 토색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의성 등지의 동학도들이 성군작당하여 연로한 예전 옥당을 무수히 괴롭히고 침탈하며 심지어 잡아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신태관 집에서 듣기로 직곡접은 당시의 의용접(義勇接)으로 인민의 구제를 매우 잘한다는 말을 듣고, 거리가 멂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급히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학초가 사실 정황을 들은 후 근처에 여차여차한 사건이 매일 답시하여 몸을 빼서 나가질 못하므로, 기찰 2인을 시켜 통문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 글에,
통문
우(右) 통고사
땅은 천지와 인물이 출생 후로, 단기(檀箕)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왕(帝王)과 성현(聖賢)이 인민을 보호하는 위무로 예락법도(禮樂法道)를 정하여 준행(遵行)하니 차차 연구의 치례 단청에 혹 문호(門戶)도 각각 다르고 취지도 각각 다르더라도 도(道)의 의무는 똑같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유불선 삼도는 보통 인류상의 대경법(大經法)과 같다. 성군작당하고 돌입일가(突入一家)하여 인민을 공갈하는 것은 유불선 삼도 중의 죄인이요, 국가 인민에는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난신적자는 사람들이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귀접은 하등 도인으로 이같이 다시 하면 비접은 당당한 인도 정의로서 위국안민(爲國安民)을 위하여 의용원 5,700여 인을 대동하고 귀접이 신 승지 집에 가서 하는 행위를 문제 삼아 난도(亂道)의 접을 하나같이 세상에 없게 하기로 통고하니 회답을 직접 행하시기 바람.
갑오 칠월 이십구일
직곡 접장 씨명(氏名)
의성 각 접중
직곡접 기찰이 통문을 가지고 신 승지 집으로 가서 다수 무리 속에 우두머리를 찾아 인사 후 통문을 전하였다. 면면이 둘러보고 모두 말이 없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하는 말이,
“문법상에 우리를 난신적자에, 사람마다 죽일 수 있다는 말뿐인데, 같은 도인의 체면상 이같이 박절들 하시오?”
(직곡접) 기찰로 간 김종수가 대답하였다.
“이 도제는 본접 도주의 본접장의 명령을 받아 말씀합니다. 근자에 동학 도인을 빙자하고 탁란(濁亂)을 무수히 일으키니 나라에는 걱정이요, 도중에는 난적입니다. 이같이 불법 난동이 창궐하면 ‘정의(正義) 인도(人道)’라는 도중의 목적이 없어지게 됩니다. 세상이 편할 날이 없을 듯하여 비접 접장은 장안도소로부터 관동포의 일대 의용접으로서 국가 법률에 상당하도록 난동을 부리는 동학인들에게 다같이 귀화안접(歸化安接)을 권고하다가 만일 아니 들으면, 5,772인 의용도원(義勇道員)을 귀솔하여 난도인(亂道人)을 잡아 동학에서 제명할까 합니다. 지방 근처 영장도(營將都)에 낱낱이 잡아 처리, 특별 징치해서 없이 할 작정이오니 단단히 대답하시오. 오늘 기찰만 확실히 하심은 비접장께서 같은 도인의 의로 우선 호의로 하는 뜻이올시다. 만일 비접 의용기(義勇旗)가 남으로 행진하면 각 군 호민은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거리마다 영송(迎送)은 할 것이로되, 비접 접장의 명령 규칙은 남의 한 잔 술, 한 그릇 밥도 값없이 아니 먹소. 당당한 우리 의용기하에 선봉을 대적하실 사람이 있거든 아주 이 자리에 뵈옵시다.”
그 접 각 도인이 ‘우리는 접전 싫소.’ 하며 차차 흩어져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