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포 박현성 직곡접에 입도
이때 1894년(갑오년) 2월 8일은 왕세자 전하 생일이었다. 매년 해마다 과거를 보아 일국의 선비를 모아 (대과 급제는) 세록에 양반 고가(高家) 사색이 있어서 문호(門戶) 별임으로 우선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초시, 진사 급제를 매매하는 습관으로 과거 볼 때이었다. 박학래의 재종 아우 박영래가 도령으로 인물 절묘하여 경성 삼청동 심(沈) 판서 심상훈(沈相薰) 씨 집에 있어, 재종 간 두 이름으로 과거 보아 동반 진사(進士) 양장이 되었다. 국가가 일이 있고, 동학란으로 인하여 과거 창방(唱榜)을 일찍 하지 못하고 6월이 되어서야 창방을 하였다. 전 같으면 백패(白牌)와 유서통을 앞세우고 금의화동의 쌍저(雙笛)를 울리고 장안대로부터 위군 열 읍을 돌아다니며, 선산에 과거 급제의 영을 전하고 각 촌이 환영하며 앞에 놓인 주육(酒肉)이 풍성하였겠지만 동학이 횡행하여 정치를 하는 풍성(風聲)으로 과거한 자 역시 세록 행세하여 백성을 털어먹는 괴수라 하여 불알 까는 욕을 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때에 과거에 급제한 행사를 어찌하리오. 하물며 방백 수령도 군졸들로 하여금 삼문을 지키게 하고 자기 신명 보존을 하자고 사면을 지키고서는 각처의 동정만 살피고 지낼 따름이었다.
당시 경상감사는 나라의 원로이신 조병호(趙秉鎬)이었다. 위국 안민 계책을 생각하되, 동학의 속내를 속속히 알지 못하니 일일 정탐하는 중에 세계를 정리(正理)하여도 동학 중에 있는 사람이라야 동학의 야단을 침식할 말이 있으니, ‘불입호혈(不入虎穴)이면 안득기자(安得其子)’란 생각이 들었다. 박학초는 이 말을 심중에 새기고 세상 형편을 둘러보니 동학 입도한 사람이 아니면 세상에 용신(容身)할 곳이 없어 보였다. 애애창생(哀哀蒼生)은 오백 년 사족(士族)이 죽어라라고 하니 (이를) 구제할 도리가 없는지라. ‘불입호혈이면 안득기자’의 이(理)가 정령하고 부친 통정공의 명령도 또한 그러하니, 사족대가로서 뜻을 가진 사람 4〜5인이 같은 마음먹고 학초가 먼저 입도하는데, 관동포(關東布) 최맹순(崔孟淳)의 접 박현성(朴賢聲)의 직곡포(稷谷布)에 (입도하였다.)
입도하던 날부터 불과 수십 일 내에 (학초의) 휘하에 입도한 이가 5,772인이었다. 각 군(郡), 각 접(接)에 피착되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모두 다 와서 옛날 원통한 일을 해결해 주기를 호소하는데, 어떠한 접은 가 보니 4~50명 또는 근 백 명씩 열을 지어 앉아서 그 중에 민장(民狀, 민간의 소장)을 받아 쌓아 놓고 공사(公事)를 처리하고 있었다. 학초포가 들어갈 때 먼저 선통을 하고 좌우에 기찰(譏察) 수삼 명을 대동하고 일변 들어가면서, 잡아 꿇린 자, 갓 벗기고 결박(結縛)하여 꿇린 자를 일제히 결박을 풀고 갓 찾아 쓰이고 좌석을 비키라 하여 같이 열석에 앉혔다. 연후에 다수한 인원에게 인사말에 겸하여 한꺼번에 사유를 연설하였다.
“도중 주지(道中主旨)로 말하면, 유불선 삼도가 예의, 염치, 오륜 등속을 각자 마음을 닦는 데 쓰는 것이 옳습니다. 가정을 다스림과 나라를 다스림에서 인류방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포 형제입니다. 이왕 과실이 있다 해도 죄를 뉘우치면 모두 허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설혹 개과를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관청 관리가 아니고 백성을 다스리는 법은 유불선 도(道) 중에도 없고, 법률상에도 없습니다. 어찌하자고 동포 형제를 모두 잡아 사형(私刑)을 설치코자 합니까. 천지에 상제라 하든지 가정의 부형이라 하든지, 위민부모 관장이라 하더라도 모두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지 못하면 도리어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찌하여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단 말이오. 다시는 그리 맙시다. 만일 이 중에 이 사람의 말을 불가(不可)하다 하시든지, 은밀히 싫어하시고 의심하시거든 심중에 쌓아 병 되게 하지 마시고 끝나거든 함께 보은의 장안도소에 가서 알아봅시다. 만일 상접에 가서 물어보지 못하거든, 아주 앉아서 의논하고 다시 그리 마시오.”
좌중이 아무 말 없이 조용하고, 혹 들리는 소리로는 ‘옳다’ 하는지라, 좌중의 민소 장축을 당겨 놓고 일일이 열람하였다. 도중에 들어온 민소는 “이 사람도 못할 바 아니오니 여러분이 미처 못한 일을 이 사람이 한다.” 하고 제사(題辭)를 쓰기 시작하였다.
일, 원총(寃塚)굴은 이미 팠건 다시 팠건 간에 백골적원(白骨積怨)은 본 도중(道中)의 일이 아닌지라 폐문갱사(閉門更思)하고 다시 생각하니, 바로 법관에게 가서 소장을 올리는 것이 가(可)하고 도중에서는 담당할 일이 아닐 일.
일, 채무에 관한 소송이 당연히 독봉(督捧)인지의 사실 여부를 알아본 후 도중에서 관여할 일임.
일, 횡탈금(橫奪金)에 대해 조사하는 문제는 재판할 때에 사문과 곡절을 도인이 어떻게 알 수 있으리오. 형세상 어쩔 수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횡탈 이후에 자수하여 안번하면 식역수도사.
일, 빼앗긴 곳에 가서 다시 찾아오는 일은 인륜으로써 할 일이 아님. 백주 고분이 정사 억울하되, 빼앗은 일에 대해 중요하고 확실한 내용이 없으면 다시 받기는 불가하니 환추 지역으로 갱고(更考). 금실하면 확남신정이 리불구승호아.
이와 같이 모든 작축한 송안을 삽시간에 처결하고 떠났다. 그 중 소장에 걸렸던 사람은 각기 모두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진심으로 송덕의 말을 하며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와서 또한 입도한 이가 그 뒤로 풍성하였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이 더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