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 503년 갑오년(甲午, 1894) 당시 나라에서는 세록(世祿)을 주장하고 인재를 선택하여 쓰는 인재택용(人才擇用)을 과환(科宦)이라 하였지만, 정부에서부터 방백 수령, 심지어 주사(主事), 참봉(參奉)까지 모두 돈으로 매매하였다. 참봉, 군수 자리는 한 달에도 바뀌고, 아침에 내었다가 저녁에 갈리었다. 부임하다 갈린 자, 가다가 갈린 자, 세력이 없는 수령은 한 달에 두 번도 갈리니 벼슬을 구할 때 백성의 폐단질고(弊端疾苦)는 전혀 생각지 아니하였다.
누가 군수나 방백(方伯)으로 나가든지 심지어 그 족속, 친구까지 명색이 아객(雅客, 관아에 묵던 손님)이라 하고, 읍저 여관 도소를 정하고 관청의 정사를 간섭하였다. 인민들의 채무에 관한 소송을 비롯하여 원총늑굴(怨塚勒掘)과 사문사에나 존문에도 관여하여 생피, 능욕양반(凌辱兩班) 등사로 오로지 백성 잡아 털어먹었다. 군수가 되어 내려오면 삼공형(三公兄)은 물론 각 항 이목노령까지, 심지어는 면주인(面主人)까지 돈을 받고 매매하였다. 이번에는 이들 관속들이 세력을 빙자하며 백성을 잡아 속여 털어먹으니 촌가(村家)에 몸을 담고 있는 백성은 동 입구에 팔을 젓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잡혔노?’ 하며 마음을 평안히 놓지 못하고 기운이 죽어 피하기 마련이었다. 그 중에 잡힌 백성이면 잡힌 대로 족쇄에다 문간(사령청)에 돈을 뇌물로 바쳐야 하며, 집장채 갇히며, 옥사장의 구류채 등속으로 죄의 유를 막론하고 한가지에 천 냥으로 하루에 살림 털어 딱 맞게 다 뺏는다.
그 중에도 크다고 할 것은 감사다, 통영의 통제사다. 영장(營將) 등 각 군(各郡)의 세력이 없는 부자는 ‘사문사 존문’에 아주 털어 간다. 백성의 세금은 지세(地稅)에 해당하는 것이 열한 가지 명색으로 동포 호세는 1, 2, 3, 4 …, 7번까지 한 번에 엽전 닷 냥, 일곱 냥까지 나날이 독봉하고, 사령(使令), 관노(官奴), 면주인까지 봄과 가을로 세곡을 받아 가니 사실 곧 즉 다 백성이 어찌 살기를 바라며, 원통한 자 어디에 가서 호소할 곳이 있을소냐?
관청이 인민의 부모란 말은 거짓말이요, ‘맑은 하늘이 죄 지은 자 벼락 친다.’는 말도 날로 벼락 치는 것 보지 못하였다. 오창강이 자연으로부터 물이 굴러 넘듯이 전라도 고부군으로부터 경상도까지 각 군에 민란이 나서 각기 군수를 매어다 쫓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경북의 영변 칠읍은 지독한 흉년이, 갑오년 하면 유명한 고설이 될 만치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서 경기, 충청도로 개걸(丐乞) 가는 길을 떠나지만 어디에도 빌 데가 없고 각처에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나 세상에 혁명의 북소리를 진동시켰다. 동학에 대한 사실은 이 이하에 회고하였다.
각설하고, 조선 순조대왕 24년인 1824년(갑신년) 10월 28일 경상북도 경주군 가정리(柯亭里)에서 하늘이 세계에 유렴으로 특출한 선생이 났으니 성명은 최제우(崔齊愚)요, 호는 수운(水雲)이다. 나이 37세인 1860년(경신년) 4월 5일에 비몽사몽 간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유불선(儒彿仙) 삼도를 함께하여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13자 주문으로 조선에 포덕하였다. 제자가 구름같이 모이니 이름하여 동학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원군 세도 당시에 예수교 등속과 같이 이단(異端)이라 하여 독하게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수운 선생은) 1864년(갑자년) 3월 10일 경상감사 서현순에게 포착되어 대구 관덕당(觀德堂) 앞에서 우회(迂廻)당하였다.
그 제자 이름은 최시형(崔時亨)이요, 호는 법헌(法軒)이라고 한다. 충청도 보은 장안동에 거주하면서 1893년(계사년)과 1894년(갑오년)에 동학을 포덕하여 각 도 각 군 면면 촌촌이 일제히 입도하니 (그동안 서슬 퍼렇던) 각 영문과 군수의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각처의 동학 접에서 연락을 상통하고 기호를 높이 세우고, 각 접주 기찰들이 앉고 섬이 엄숙하며 원통한 백성의 민소(民訴)가 동학 접에서 처리되었다. 주의(周衣, 바지) 입고 지팡이 짚고 서슬 퍼렇게 사방으로 횡행(橫行)하며 인민을 잡아간다, 들어간다, 결박하여 돌을 짓이겨 놓는다. ‘아이고 지고’ 하는 소리, 이 사람들은 모두 누구냐 하면, 예전의 양반이거나 아전, 사환으로 세력을 부리던 사람이었다.
자기의 부녀 조죽 척간이 폐가하고 욕본 원수며, 다소는 재물을 뺏기고 찾으려 하기, 원총늑굴(怨塚勒掘)이다. 유부녀(有夫女) 강탈당한 사람, 사문사 존문에 빼앗아 먹은 것이며,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영을 취하여 불법으로 뺏긴 사람이며, 무단히 생피불목으로 뺏긴 사람 등 죽을 자는 구기소실(舊紀消失, 세력을 잃은)하면 죽을 양반이신 것이라. 이 같은 세월을 좇아 욕을 면하기 위하여 입도도 하고, 세력을 쓰려고 입도도 하고, 가정을 보존하려고 입도도 하여 마침내는 동학 중에도 부정당한 사람이 자연 많으니, 유불선 삼도(三道)가 어찌 된 것인 의무(義務)인지도 모르고 공멸지문(攻滅之門)의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듯이 동학의 불법자도 적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