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감면 요구
고종 21년인 1884년(갑신년) 봄에 학초는 외가인 조용초의 집에서 각양각색의 종자와 우마(牛馬)의 양식까지 주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시절이 마침 풍년이 들었다. 그동안 50여 호 되던 동리가 계미 흉년으로 인하여 모두 이산(離散)하고 헐린 집과 빈집이 많았는데, 동 중에 (부과되는) 과중한 6〜7백 냥의 각종 공금을 학초 혼자 감당해야 할 지경이었다. 정부(政府)에서 탕감을 얻지 못하고 홀로 감당할 능력도 없고, 설사 혼자 감당하더라도 해마다 물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을이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도 같은 촌락이 많은지라, 부득이 관가에 제소하여도 탕감을 못 받았다.
이에 학초가 군수에게 스물 한 번이나 군수가 다스리는 군 남쪽 2면(面)을 통계하여 빈부를 (모두) 균일케 하고 다시 경장하도록 호소하였다. (이렇게 진행되니) 소위 부동(富洞)은 반대하고 장두(狀頭)가 나섰다. 방년 21세 된 박학초가 빈동(貧洞)을 통솔하는 장두라. 일군(一郡)에 풍설이 낭자하여 부유한 동네 백성도 면회(面會)를 여니 그 수가 2천여 명이었다. 다수의 인민들이 도회를 하여 각각 승세를 자랑하며 천지를 뒤흔들 듯하였다.
스무 살 겨우 되는 일개 소년을 2천여 명이 민력(民力)으로 맡기는 모양이 가히 여지가 없을 듯하였다. 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결정한 대로 소장을 지어 그 소장에 이름 연명하는 등장(等狀)을 정하고 군청으로 들어갔다.
부동 장두는 최금릉(崔金陵)이라 하는 사람이었다. 이때 학초가 수학하던 선생은 이맹선(李盟善)이라 하는 사람이었다. 선생을 모시고 산에 올라가 먼 경치를 바라보는데, 선생이 먼저 입을 떼었다.
“허다한 2천여 명의 백성이 너 하나 사람을 진멸(盡滅)하기로 주장하여 저같이 세력이 매우 크니 너의 마음이 두렵지 아니한가?”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불법에다 화적 강도 같으면 소자가 두려워할 게 아니며 자연 법에서 잡을 터이니, 일개 소자는 근심할 바 없습니다. 의리에 맞는지 길고 짧음을 분쟁하는 사족인민(士族人民)일진데, 2천이나 2만이나 다수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을 듯합니다. 불쌍한 가난한 동네 수천 명 인민이라, 다같이 살려 주려고 저같이 요동하니 감사하다 할 듯하여이다.”
“범어만사를 조심하여 하여라. 무리가 많으면 백족충(百足蟲)이라 하고 한 사람이 백인 천인을 이기면 일당백이라 하느니라.”
“한낱 의기(義氣)가 당당하면 지혜로운 자는 뜻을 굽히지 않사오니 그리하리다.”
이같이 문답을 하면서 구경하였다.
다시 민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빈동 장두인 학초가 관아를 찾아가니) 인민은 인산인해를 지어 오천강(洖川江)을 건너 20리에 뻗쳤으며, 몽대강변(蒙臺江邊)에서 우뚝하니 서 있는 백소는 세사무심(世事無心)으로 사람의 흥망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앞에 기록한 사실처럼 (부유한 동네에서도) 2천여 명의 인민이 일시에 성군작당(成群作黨)하여 의기양양하게 장두가 소장을 안고 각기 ‘원통하다’ 부르짖으면서 삼문을 드나들며 관청을 둘러싸듯 하였다. 마치 과거장중(科擧場中)에 시관(試官)을 우러러 쳐다보듯이, 백만 진중에 접전을 대한 듯이, 출출 난당(亂黨)으로 소장을 올린 후 구두로도 내 편이 되어 달라는 호소가 야단으로 일었다.
이때 군수는 이용태(李容泰)라 하는 사람이었다. (부유한 동네의) 소장을 접수하고는 “장두 이금릉(李金陵)을 가수(枷囚)하고 남은 백성은 물러 있으라 명령하고, 장교를 보내 빈동 장두 박학래를 급히 붙잡아 오라.” 하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학초는 집에서 관청 호출을 고대하더니 장교 둘, 나졸 하나가 일시에 도착하여 내린 창을 출시하고 취착(就捉)하거늘, 학초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옷을 입고 일어서서 떠나 길을 재촉하여 읍으로 들어왔다. 오는 연로에서 빈동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우리 장두가 잡혀 들어가니 우리도 가자, 너도 가자.” 하니 인정상과 사실상으로 무슨 걱정이 있으리오. 이 동네도 가자, 저 동네도 가자 하며 다수 빈민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같이 동참하였다. 외로이 홀로 지내던 사람과 과부들까지 모두 뒤를 따라오는지라, 이때 민란이 일어났다 할 만한 소동이었다.
장교가 군청 대상에 올라 백성을 잡아온 설유를 고하니 군수가 (학초를 잡아온 장교에게) 물었다. “네가 금번 출사에 그 백성을 잡아오면서 오는 길이나 피착한 백성의 동정과 그 외 빈동 백성의 형편이 어떠하더냐?”
장교가 대답하였다. “박모(朴某)는 붙잡으러 올 것을 알고 고대하였던 모양으로 연소한 백성이 의심 없이 출두하는 모양이고, 오는 길에 빈동 백성이 저희 장두가 만일에 피했다 하면 어찌 될런지 모르되, 장두의 취착한 소문을 각각 듣고 뒤를 따라오는데 그 수효는 다 알지 못하나이다.”
듣고 난 군수는 “물러나서 명령을 기다리라. 내일 사관 후 다시 생각하리라.” 하였다. 장교가 나와서 “명일 사관 후 첫 공사에 붙인다.” 하였다.
(모인 사람들은) 주막을 정하여 기다렸는데, 이때 (채수되어 있던 학초가) 부동(富洞)도소(都所)에서 (나온) 풍문을 들으니 당시 한 돈씩 정한 밥이 한 끼에 합이 2백여 냥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동 장두가 가수(枷囚)됨을 걱정하여 부자, 형제, 원근 내외 척당이 모두 오고, 또 장두를 새로 택출(擇出)하였다고 한다. 기개가 있고 황금이 조화를 내리기도 하고, 양편 조화 계제로 말하면 될 만하기가 하룻밤 동안 간 변동으로 사람이 예측하기 곤란할 지경이었다. (부동도소에서는) 비밀리에 금전 2백 냥에 흥정하고, 부동도회소(富洞都會所) 상좌(上座)에 새로 오신 장두는 학초의 선생님 이맹선 씨라 하였다. 부유한 동네 백성의 수단에 소견은, 인물로 말해도 이 선생은 일향리 유지 만사요, 큰일도 많이 해 보신 분이었다.
(예전의 일화로는) 신석우(申錫愚) 경상감사의 일가 사람이 오천 서당 뒤에 장사를 지내러 오는데, 하늘을 찌를 듯한 사명기(司命旗)로 몰래 장례 지냄을 내쫓았던 능대능소(能大能小)하는 수단이 있는데다, 위치로 말하여도 한낱 연소 제자를 아무 일 없이 자복(自服)케 할 터요. 설혹 일이 장대하더라도 제자가 선생을 항거하지 못하리라 하는 계교를 부린 것 같았다.
이때 학초가 부유한 동네에 새 장두가 들어왔단 말을 듣고 장교를 불러서 이른 말이,
“내가 달리 도주할 사람이 아니라. 내가 잠깐 부동도소에 다녀올 터이니 용서하여, 나를 잠깐 따라갑시다.” 하였다.
장교는 “잠시 다녀옴이 무관하니 그리하라.” 하고 허락하였다.
학초는 장교를 데리고 부동도소에 가니 그곳은 김 약방 객주집이었다. 인민이 다 모인 것이 인산인해로 겹겹이 둘러섰고, 당상(堂上)에는 초석 자리 정결히 한 위에 장죽(長竹)에 연초를 피워 물고 앉아서 다수한 백성을 지휘하시는 이는 바로 이 선생이었다. 학초는 분잡한 길을 헤치고 일개 소년의 맵시로 두려운 스승을 대하여 재배하고 시립하여 선생의 행차에 대한 안녕을 먼저 문안하였다. 연이어 말을 이어 본 사건 목적사(目的事)를 말하였다.
공손히 하는 말이지만 분명한 어조로 “소자 금번 일에 잡히어온 줄은 아실 바이오니, 다시 아뢸 필요는 없을 듯하옵고 사제지분(師弟之分)도 사람에게 부모와 같으며 관가(官家)로는 위민부모(爲民父母)입니다. 두 가지 의무는 역시 아실 터옵니다. 소자는 이미 관청에 잡힌 백성이라 불가불 입정(入廷)해야 할 터이옵고 자퇴(自退)할 수는 없습니다. 당초에 없던 선생님께서 사제지간(師弟之間)에 함께 소송하여 법정에 같이 들어가는 것은 만고에 통틀어도 대의가 아닐 듯합니다. 평소에 배운 부자지도(父子之道)로 도리어 부자께 고하나이다.” 하고 이내 하직을 고하고 물러섰다. 다시 돌아보는 일이 없이 갔다. 이때 좌우에 빽빽이 앉은 인물과 승승(乘勝)한 기분에 들떠 있던 좌석에서 한 사람도 말을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이 선생은 하인을 불렀다. “나귀(靑驢)를 등대하라. 방금 빈동 장두의 하는 말을 뉘 아니 들었으랴. 내가 시각(時刻)을 지체하면 광대한 세상에 고개를 들지 못하리라.” 하고 나귀 등 위에 높이 앉아 채를 재촉하여 떠났다.
이때 좌우에서 구경하던 사람과 성중 다수 인민이 낭자히 하는 말이 “당당한 의무(義務)에 일월쟁광(日月爭光)하는 연소 장두의 언변(言辯) 한 번에 2천여 명 중에 노련한 수단을 가진 대장(大將)을 꺾었다. 필경 저 소년의 청산유수(靑山流水) 같은 구변과 여유롭고 당당한 모습을 내일 관정 재판에서 구경하여야겠다.” 하고 서로들 약속하였다.
다음 날 군수가 오전 9시나 되어 공사를 개정하는데 좌우 나졸이 수십 명이었다. 중간 계단에 급창(及唱) 관로 십여 명이 서고, 대(臺) 위에는 장교와 아전, 통인 등이 무수히 서 있었다. 나졸 등이 권장주장을 각각 짚어 시위하며 엄숙하게 하고 관방에는 군수가 앉고 그 문 앞에 서기, 형리들이 좌우로 엎드려 있었다. (군수가) 청령(廳令)을 내렸다.
“박학래를 올려라.” 하니, 옛날 방식이 이 같은 것이다.
학초가 청령에 의하여 공사 마당에 들어가니, 군수의 엄숙한 호령이 떨어졌다.
“너 한 백성 때문에 빈ㆍ부동 양편 6〜7천 다수 인민이 민요(民擾)를 지으니, 너의 죄를 당장 영문에 보하여 엄치정배(嚴治定配)할 것이다. 막중한 공금이 철판대장(鐵板臺帳)에 변경이 없는 것을 너로 인해 국법에 없는 변복을 하게 하였다. 백성이 다소간 주선하여 바칠 것도 너로 인해서 지완불납(遲緩不納)되고 있는 형편이다. 너는 나이 불과 20살 된 어린 백성이 나날이 송사를 일삼아 관정을 분란케 하니 너의 죄를 용서치 못하리라.”
군수의 호령이 떨어지자 대 위와 대 아래에서도 야단이 일었다.
학초가 엎드린 채 말하기를 “성주는 백성을 위한 부모와 같은지라 20여 살 되는 이 백성이 이렇게 원통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위로는 나라의 백성이 되고, 아래로는 부모처자를 거느리고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살게 해 주시는 것이 의무인 것은, 일신에서 열 손가락에 한 손가락이 상하면 어찌 아픔이 없겠습니까? 성주는 백성의 부모가 되니, 빈한 백성은 모두 죽어라 하고, 부한 백성만 부익부로 (계속) 부자가 되게 할 이치는 없을 줄로 압니다.” 하였다.
군수가 내려다보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삼문을 열게 하여 빈ㆍ부동 양편 백성을 모두 입정(入廷)하라 하였다. (사령들이) 빈ㆍ부동 사람들을 각각 중간에 구분이 있게 앉혔다. 모두 5〜6천여 명의 빈·부동 백성과 방청인이 원장(垣墻) 내외에 걸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군수가) 대 위에서 호령하였다.
“최금릉을 올려보내라.”
이때 안반 같은 칼을 쓴 부동 장두 최금릉을 법정에 앉히고는 칼을 벗긴다.
군수가 다시 호령을 내렸다.
“너희 두 백성이 여러 백성을 모아 민요를 지어 관청과 민간을 요란케 하니 죄는 당연히 감영에 보하여 죽음에 이를 정도로 엄하게 다스리게 한사엄치(限死嚴治)하리라.”
최금릉이 대답하였다.
“철판대장에 각각 정해져 있는 공금을 어찌 남의 동리 공금까지 원중(怨衆)하라 합니까. 억울하옵니다. 본시 정한 대로 바치게 하고 위법에 분란을 지은 백성은 징계하여 주옵소서.”
“오늘 공사는 양편 사이에 이치(理致)를 들어 정당한 쪽으로 결정할 것이다. 부동 장두의 말에 대하여 빈동 장두 아뢰라.”
군수의 말에 학초가 아뢰었다.
“철판대장에 있는 정식대로 내자고 주장하는데 철판대장도 당초에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고금에 없는 흉년을 겪은 뒤에, 흉년도 하늘이 내리신 바이거늘 하늘이 내리신 변복을 경장치 아니하고 백성이 없는 동네에 철판대장만 지키면 공금을 어디로부터 받아 지방에 상납하오리까? 이것은 속설에 부자가 빈자의 사정을 모른다 함이고 조정의 백성 된 자로서 가치가 없는 반적(叛賊)과 같은 입에 발린 말이라 하겠습니다.”
군수가 말하되 “최금릉은 아뢰라.” 하니,
최금릉이 말을 꺼내었다.
“일도(一道)도 아니고 일군(一郡)도 아니고, 유독히 민(民)의 두 면(面)만 경장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한 해 흉년은 다시 풍년이 되면 그 자리가 메꾸어질 것입니다. 예전의 방식대로 시행을 바라나이다.”
군수가 다시 학초에게 “학초는 아뢰라.” 하니,
“빈동 백성이 부동으로 가면 혹 고공(雇工, 머슴)이나 부역을 하며 세금 없이 살아갑니다. (반면 남아 있는) 빈동 백성은 예전 세금에다 새로운 세금을 낼 능력이 아주 없습니다. 가망 없는 백성이 어찌 빈동에 살러 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경장하는 일도 일군이 아니하는데 (우리만) 못한단 말이 한 사람이 그 같은 것을 견디지 못하여 죽는 것을 만인 중에서 보고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면, 만인 중에 불량한 괴수(魁首)는 부동의 장두로 인증하겠습니다.”
군수가 이번에는 최금릉을 보고 “최민은 아뢰라.” 하니, 최금릉이 말을 못하였다. 이윽고 군수는 “말 없는 백성은 따로 한쪽에 앉히고, 원정을 말할 백성 있거든 들어와서 말을 하라.” 하였다.
이때 한 백성이 나섰다.
“빈부는 각각 하늘이 정한 바라, 부동 백성이 빈한 동리 백성의 재산을 강탈한 일도 없어 상관이 없는 터에 어찌 남의 동리 공금을 같지 않게 담당하오리까?”
“빈동 장두 그 이치의 가부를 답하여라.”
(군수의 재촉에) 학초가 답하였다.
“부자 사람이 빈자의 집 고운 딸도 데려다가 (자신이) 낳은 자녀에게 호강도 하게 하고, 부자가 빈자에게 낚시 미끼같이 금전을 빌려 주고는 마지막에 빈자의 살림을 모조리 털어 가기도 합니다. 부자가 빈자를 대하여 큰 덕이나 보일 듯이 하면서 (실제로는) 종같이 부리기도 합니다. 가난한 백성은 입에 풀칠하듯 살아가니 여가 없이 주야로 노동을 하지만, 부자는 장기, 바둑, 도박 등으로 신선을 자칭하고 남의 재산을 다소를 막론하고 탈취합니다. 탕자, 패자, 역적이 모두 고금 역사상에 부자의 집에서 나니 빈자의 것에서 많이 빼앗아서 모은 돈으로 동포지의와 국민 의연(義捐)으로 넓은 바다에 좁쌀 한 알처럼, 아홉 마리 소에 터럭 하나 뽑듯이 하여, 빈동이 부담할 공금이나 같이 아니하려는 백성은 후일 난신적자가 될 자이오니, 엄히 다스리어 나중에 올 폐단을 막아 주옵소서.”
군수가 “부동 백성 대답하라.” 하니, 다시 말을 못하였다.
말 못하는 백성은 또 한쪽에 모아 놓고 “원통한 백성이 있거든 들어와서 말하라.” 하였다.
또 한 백성이 나섰다.
“차차 있으면 빈동에도 백성이 모여들어 일체가 될 터이오니, 잠시 일 년 흉년을 빙자하여 철판대장의 변경 없을 공금을 한 백성의 말로 인하여 번복함이 부당하여이다.”
군수가 “빈동 장두 아뢰라.” 하였다.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길 “세계상 사람이 사는 도리가 현금에 이르러 공사채 할 것 없이 한 번 빚을 지면 십 년, 이십 년, 생전에도 못 갚으면 아들 손자 친척까지 족징(族徵)을 당합니다. 궁한 백성은 전에 짊어진 채무에 눌리어 생전에 자신할 도리 없고, (세금을) 피해 달아난 사람이 살던 터에는 나중에 오는 이에게도 징출(徵出)을 하니 부동 백성의 말은 무형적(無形跡)한 말이올시다. 정녕 그러할 것 같으면 빈동이 마을이 이루어지기 전에 빈동이 매년 내는 일동 공금 칠백여 금씩과 내년과 내후년에 마을이 이루어지기 전 공금을 저 아뢰는 백성이 홀로 담당하겠다는 다짐을 받으시면 금일 (저 백성에게) 송덕을 하고 퇴거할 터이옵니다. 만일 독당한다는 다짐을 못한다면, 그 백성의 행위가 막중한 관청 공정(公庭)에 와서 관민 간 대송(對訟)에 대해 향촌 주막에서 체면도 모르고 술이나 먹고 제가 잘난 듯이 자칭 난민(自稱難民)에다 주먹장군이라 하는 자이옵니다. 미리 엄치하여 이치에 없는 낭설의 폐단을 금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였다.
군수는 “부동 측에서 말했던 백성은 빈동이 성촌되기 전 공금을 네가 담당하겠는가?” 하고 물어보니 묵묵부답이라 또 한편에 몰아 앉히고는 “원통한 자 들어와서 아뢰라.” 하였다.
또 한 백성이 나섰다.
“일군을 통기하고 경장을 하면 민 등의 원통함이 없으려니와, 민이 사는 두 면만 경장하기는 한 백성의 못된 이웃이 되어 해를 독당하는 것이 억울하오이다.”
“빈동 장두 답을 하여 아뢰라.”
군수의 말에 학초가 답하였다.
“민이 들으니, 태산(泰山)을 옆에 끼고 북해(北海)를 뛴다 함은 할 수 없는 일에 비유하는 말이옵니다. 장자(長子)를 위하여 낱가지 하나를 꺾어 오라 할 때 못한다는 말을 하면 힘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나태한 사람이 쓰지 못할 간교를 칭탁한다 할 것입니다. 한 그릇 밥을 가지고 한두 손님이 나누어 먹는다 함은 말이 되지만 한 그릇 밥을 가지고 일천(一千) 손님을 청한다는 말은 되지 못하는 말입니다. 못된 이웃이란 말은 가정에서 부형의 말은 반대하며 한낱 이웃을 돌보지 않는 자이오니, 국민의 동포지의(義)는 모르는 백성이니 치세에 난민(亂民)으로 엄히 다스리기 바라나이다.”
군수가 말하기를 “부동 편 백성이 아뢰라.” 하니 다시 말이 없었다.
또 한편에 모아 놓고 “또 원통한 백성 있거든 아뢰라.” 하니 또 한 백성이 나섰다.
“민 등 수천 명이 삼문 밖 나서면 한낱 박 민(朴民)을 당장 타살하고 (군수) 치하(治下) 백성이 모두 떠나면 어느 백성의 손에 죽은 줄 알아 신설(伸泄)하겠습니까? 허다히 떠나는 백성을 성주께서 어찌 다 만류하시며, 민 등의 동네도 비고 빈터만 있고 보면 어디에 가서 공금을 받아 상납하시리까?”
군수가 노하여 “너 같은 백성은 가세를 믿고 남을 능시하여 되지 못하는 당유를 짓는구나. 사람이 많으면 능사로 알고 사리(事理)에 당당하지 못하고 가국(家國)에 도움이 되는 점은 없으니 불량한 패류요, 가히 쓸 수 없도다. 다시 사리에 적당치 못한 백성은 죄를 당연히 엄히 다스리리라.” 하고 나섰던 백성을 쫓아 먼 곳에 앉히도록 하였다.
“정당한 사리에 억울한 백성은 들어서서 말하라.”
잠시 후 또 한 백성이 나섰다.
“저 연소한 박 민이 관청의 일정한 법률을 고치는 데에 무슨 성심이 있기에 청산유수 같은 말을 꾸며 각 면 각 동을 분란케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러지 말고 민의 동네로 이사를 오면 같이 살아 무사태평할까 하나이다.”
군수가 “저 백성의 말에 대답하라.” 하였다.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민의 빈동에 기왕 배정된 공금과 앞으로 해마다 나오는 공금을 그 백성이 대신 갚을 방침이 있으면, 하필 민을 저의 동으로 오라 할 필요 없사옵니다. 빈동 백성이 낱낱으로 부동에 가면 그 동시에 이왕에 빈동에서 지고 온 공금을 관청에서 독봉하는 때에 그 백성이 담당하여 상납할 지경 같으면 다짐을 받아 주기 바라옵니다. 그렇지 아니할진대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우선으로 무리하기 한낱 털을 눈에 막고 ‘나는 세상을 못 본다 아웅’ 하는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민에 동포지의가 없고 오늘 관민을 모두 속이는 이치가 없는 간사로운 계책이로소이다.”
군수가 부동 백성을 돌아보며 “그리하겠느냐? 다짐을 써 올리라.” 하자 대답이 없거늘,
군수가 사령에게 분부하여 주장(朱杖)대로 볼을 으깨 문지르니 아무도 말이 없고 그저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조금조금 옆으로만 피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백성은 일 열 한편에 따로 모아 놓으니 그 중에 대답 한 번 못한 자도 하나씩 둘씩 그쪽으로 가서 앉는다. 부동 편 백성이 앉은 줄을 잡아서 “원통하고 정당한 말할 자 있거든 곧 들어서서 말하라.”
하며 사령이 차차로 모조리 주장대로 옆구리를 쿡 찌르며 “네가 말하라.” 혹은 볼을 짚으며 “네가 말을 할래?” 하고 낱낱이 지나가며 하여도 한 사람도 말을 못하거늘 사령이 주장을 들고 사람마다 다니며 “너 아뢰라. 네가 아뢰라.” 하며 쿡쿡 찔러도 모두 할 말이 없다 하였다.
군수가 대청으로 나서며 높은 목소리로 대질하여 말하기를 “정당(正當)한 말에 대하여 말이 없으면 정당한 대로 시행하지 너희 등이 무슨 의무로 성군작당하여 민간을 요란케 하고 관청을 분란케 하여 타군 풍성(風聲)이 민란 소동을 하느냐? 빨리 나가 경장(更張)한 공금을 성화같이 독납하라.” 하였다.
(관정이 파하자) 양편 백성이 모두 물러나갔다.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조수가 미는 듯 물러나갔다. 학초는 물러가지 아니하고 다시 들어서서 말하기를 “오늘 이같이 명결(明決)하신 것은 공문이 있어야 후일 또 분란이 없을 터이옵니다. 부동의 지사인 동장에게 성명 납고를 일일이 받아 완문(完文)을 내어주시옵소서.” 하였다.
판결장이라. (판결장을 원하는 학초의 말에) 군수가 다시 분부하며,
“그리하라.” 하고 다시 지사 두 사람을 불러들여 씨명 날인한 납고를 받아 판결된 완문을 지어 주었다. 학초가 배수하고 퇴정하니 빈동 중에 특별 30여 명이 폐문루(閉門樓) 문밖에 결진하고 있다가 춤을 추며 “세원도 하여라. 공결(公決, 공정한 판결)도 하신다. 어진 임 어진 우리 소년 장두를 만나 다시 양춘(陽春, 살기 좋은 날)을 얻어 살겠다.” 하는 노래를 부른 뒤 만세를 (외치며) 송덕의 뜻으로 제각기 무수히 절을 하였다. 이때 읍 중 백성이 구경하고 나와 소년 장두의 의기(義氣) 구변(口辯)에 청산유수, 호걸남자 (등으로) 무수히 치하하며 분분하게 칭찬하였다.
당시 각 군의 관속이 백성에게 거두는 세곡으로 정해진 것이 있으니 관노청(官奴廳)의 노방(奴房) 세곡(稅穀)을 비롯하여 문간(門間)의 사령(使令) 세곡, 각 면(面)의 면주인 세곡, 정식에서 삼가 이름이라도 3청 세록을 도합하면 춘추로 각 1기, 2기로 하여 한 마을이 부담해야 할 세곡을 도합하면 6〜7석이 되었다. 한 번 정해진 후에는 동민은 이거이래(移去移來) 변복이 있어도 정식은 고치기 어려웠다.
각 동 인민이 각 청을 찾아 소위 방장수석을 보고 감해 달라고 누누이 애걸을 해도 모두 마지막에는 주먹으로 볼을 맞고 쫓겨 나왔다.
학초는 이 이야기를 듣고 각 면 빈동 인민을 읍저(邑底)에 머물게 해 놓고, 혼자 직방청에 가서 수석방장과 마주하여 앉아 있은 후 세곡 전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들으니, 동민으로 전에 하던 규정을 그 부녀나 자손이 같은 땅에 살면서 어찌 덜 내려 하느냐고 따귀를 쳐 축출하였다고 하니, 그렇지 아니한 말을 추상적으로 들어 보시오. ‘산통졸붕하야 천택위능’은 천지도 변천 변복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진황(秦皇)의 아방궁도, 한무(漢武)의 동작대도 빈터만 남아 있고, 조선 땅 송도(松都)의 만월대와 신라국(新羅國) 반월성도 왕손 방초가 석양에 비견할 터인데, 항차 여염집 촌민의 변복은 하루아침에 조취모산(朝聚暮散)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항차 작년 계미년 같은 흉년은 다니는 길에 시체가 나뒹굴고 금옥 같은 동자와 금지옥엽 사대부집 일등 부녀도 염치 불구하고 문전에 밥을 비는 실정이었습니다. 군방장 방수곡이 (인민들을) 내어쫓는 데만 요란하였지, 강남풍월이 차경(借耕)에 쓸데 있쏘냐? 실제상으로 말하면 세금 세곡이 점점 인민을 살지 못하게 쫓는 셈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면서[鑿井而飮 耕田而食] 집에서는 제사를 받들고 관청의 세금을 달라 하는 대로 주면서 살기를 누가 원치 아니하리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선 살 형편을 볼라 하는데 태산 같은 세금 세곡이 앞을 못 보게 눈을 가려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살지 못하여 배가 주리니 남효재랑(男效才良) 여모정열(女慕貞烈)은 자연적으로 없어지고 우선 인명도생(人命圖生)으로 남에게 구차투심(苟且偸心)으로 사정을 간청하다가 그도 안 되면 도적질도 못할 리 없습니다. 해당 집의 세금·세곡이 아버지의 것이 자식에게 전가되니 이는 아니 되어야지요.
또 귀 청중으로 말하면 밝은 정치와 선한 정치를 하는 군수이다, 신출 명감하는 어사이다, 관풍찰속(觀風察俗)하는 감사이다 하여 백성의 원통함을 밝혀 살게 해 주신 이의 선정비가 거리거리에 (세워져) 오가는 행인들이 천추(千秋)로 송덕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백성이 살지 못하는 것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해서 구해 줄 능력을 가지고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고 가는 것은 소위 위거재두량(爲車載斗量)이요, 국록도적(國祿盜賊)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요. 항차 선악 간에 그 도도 장구항상(長久恒常)으로 될 리 없지요. 항차 본청 중방장 수석은 십 세 남짓하여 사십, 오십, 육십까지 지금껏 고생하여 이제 방장이 되시었는데, 자손에까지 사령 관속만 영광으로 할 줄 바라지 말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서인(士庶人)과 성현군자 재주가인이라도 끝에는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나중에 성분(成墳) 후 객산(客散) 후에 산이 적적하고 달 밝을 때 생전에 착한 적선한 인민에게 할 선심하여 주소. 백성 없는 동네의 세곡(稅穀) 독촉이 (소용이 없어) 어진 군수의 선정으로 공금도 경장(更張)을 하고, 장방세곡(長房稅穀)도 군수와 같은 선심을 바랍니다. 오래 있어 보았자 임기를 마치고 육 년을 살고 가는 군수도 선정하시는데, 자자손손 세가할 우리 같은 일향(一鄕)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학초의 긴 설득이 끝나자 이 일청 중 좌상의 수석방장이 손을 들어 자기 무릎을 치며 “참, 장하고 착하시오. 소년 호걸이며 변사로다. 같은 말 같은 사실이라도 이같이 말씀을 하니 동정호 악양루 북창에 앉은 듯이 흉금이 적당하기 세원하오.” 하고 세곡을 전의 십분의 팔분을 탕감하는 증서를 써 주었다.
읍저에 머물러 있던 각 동 동민들은 다같이 일도 안 되고 날만 저물어 감을 한탄하고 말하는 듯이 탕감했다는 말을 먼저 보올까 하고자 아픈 데를 움켜쥐고 수색에 잠겨 있던 김중길에게 뻘건 방위말만 한 인이 찍힌 탕감 증서를 보이니, 다수 인민이 일제히 일어나 손을 모아 축수(祝手) 칭송하며 절을 무수히 하였다.
이때 당시 각 군 관청에서 (거두는) 호세(戶稅)는 호포(戶布)라고도 하고 또 변포라고도 하는데, 일, 이, 삼, 사, 육, 칠 번까지 춘추로 각 영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동 중으로 나오고, 사령청에서 거두는 곡식과 관노청에서 거두는 곡식도 모두 동 중으로 해마다 나오는데, 인민이 흉풍 연삭에 살다가 타처로 이사를 가더라도 동에서 존위 구장이 동에 분배해서 바치는 법이었다. 지세는 결곡이라고 하고, 토지 명으로 바치는데, 전답상에 삼십여 두락을 한 먹이라 하는데, 원결(原結)이니, 상전이니, 포량(砲粮)이니, 관수(官需)이니 합하여 엽전으로 110냥이나 되었다. 이를 원으로 (환산하면) 22원가량인데, 각처 인민이 곤란으로 한 달 육장하고 관속이 독봉하여 잡아간다.
또 잡아가는데 족쇄가 있다. 모두 살지 못한다고 하소연을 많이 하는데, 학초가 양 면의 각 동 빈민의 호세(戶稅), 지세(地稅)를 담당하여 추책없이 주선을 시켜 관대하게 바치게 하였다. 혹시 관청에 잡혀가는 도중의 인민이라도 통지로 ‘용서하라 담당한다’ 하면 일일이 무사득방하여 송덕이 자자하였다. 설혹 잡히어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거나 채수 중이라도 학초가 말을 하면 무사히 풀려 나왔다.
만일 혹시 시장에 가서 지부지간에 시비를 하는 백성을 보면 사실을 들은 후에 가부를 판단하여 타이르든지, 여의치 않는 자는 호통을 치면 그대로 아니 되는 일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원근 간 ‘소년 분명’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만일 혹시 관청에 송사하는 사람이 학초의 손으로 소장을 써서 정하면, 언제나 소송에 이기는 것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