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조용초와의 생활
풍기군(豊基郡) 조고리(助古里)에 사는 조병일(趙秉馹)의 자(字)는 희문(羲文)이요, 호(號)는 용초(蓉樵)이다. 시를 잘 지어 백일장중(白日場中)에나 과거장중(科擧場中)에 나가면 선수능작(先手能作)하여 천자축(千字????)에는 영락없기로 별호를 조일천(趙 一天)이라 하였다. 학초와는 외삼촌과 생질 사이로 즉 구생(舅甥) 간이다. 학초의 가세가 빈한하고 가정에나 동리에서 매양 동냥글로 배우기 곤란하여 풍기 외가에 가서 수학하니 조용초가 연치는 5년이 연상이다. 구생에 숙(叔)이 되어 매번 수학하면 글과 글씨를 배우는 것은 물론, 식즉동상(食則同床) 즉 밥을 먹어도 한 상에 먹고, 침즉동금(枕則同衾) 즉 잠을 자도 한 이불에서 자며, 행즉동행(行則同行) 즉 길을 가도 함께 갔다. 외가에 허다한 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외조부가 사랑하심과 외숙모 김씨가 자애하심이 남달라 음식에 수많은 과일이며 세세토록 역역하여 다 말할 수 없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외가보다 특별히 정이 있음은 사람으로서는 잊기 어려웠다.
부용산(芙蓉山)이라 하는 큰 산이 은풍현(殷豊縣) 동쪽에 있으니, 예부터 풍속이 매년 4월 초파일은 산 아래 각 동 사람들이 음식을 정결히 준비하고 무당을 불러 산에 올라 풍물을 치고 제사를 지내 왔다. 이날은 구경을 겸하여 소년 남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학초도 용초와 함께 한 번 구경삼아 등산하였는데, 천하 강산이 눈 아래로 보이고 봄철 끝과 여름 초입에 자라는 식물들의 기상이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다. 그 산 위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해 오는 말로는 임진왜란 당시 중원(中原) 장수 이여백(李如栢)의 묘라 하였다. 학초는 위양장(渭陽丈, 외삼촌의 높임말)에게 물었다.
“임란때 중원 명장 이여송(李如松), 이여백 형제는 우리 조선국을 구해 준 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사(古史)에 의하면 평양에서 전사하였는데, 어찌 중원 고향으로 옮겨 가지 아니하고 도리어 평양 동쪽으로 멀리 나와서 이곳에 장사하여
조용초가 답하였다.
“이 산 서북쪽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의 한 지맥이 부용산이 되었는데,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세계상 임군(任君) 시조인 단군(檀君)이 나시어 천고만인의 시조가 되었으나 뉘가 이제 전적을 보았다 할 수 있겠는가? 저 건너 서편에 있는 어림성(御臨城)은 고려 말 공민왕이 성을 쌓게 하고 그 성에서 잠시 피난을 하였다고 해서 어림성이라 하네. 어림성 남쪽에 선동촌(仙洞村)이 있고 그 뒤에 조월천(趙月川, 조목)의 묘가 있다 하지만, 왕고(往古)의 제왕, 영웅과 성현, 문장재사가인(文章才士佳人)이 예외 없이 모두 흐르는 물이나 뜬구름과 같이 덧없는 것이라. 사적에 매몰하여 오지 못하는 앞사람의 일이 너무 많아서 모두 셀 수 없을 지경이니라.”
“사람이 세상에 나서 벼슬길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거나, 강호에 숨어 있는 선비가 되는 것, 이 두 가지의 무엇이 극단하다 하리까?”
“사람이 기회를 만나 출세하여 때를 얻으면 임금이 알아주시는 동시에는 능력대로 임금을 섬기다가 가정이나 나라의 영화도 보아야지. 난시를 당하면 예양(豫讓)의 자취와 제갈량을 효칙하여 행할 마음을 지키고, 만일 임금이 간신을 등용하고 간언도 듣지 아니하며 써 주지 않으면 능력(能力)을 (발휘하여) 간신을 몰아내고 임금을 구해야지. 만일 그러하지 못할 시에는 강호에 몸을 의탁하여 초부니옹(蕉夫泥翁) 벗을 삼아 굴삼려(屈三閭, 초나라 굴원)를 노래하고 엄자릉을 효칙함이 가(可)할 듯하지. 공부자(孔夫子, 공자) 당시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다녀도 ‘도부득행(道不得行, 도를 행할 수 없다)’ 말도 있느니라. 동방의 성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이라 하였으니 세상에 나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혼자 즐기는 독락당이라고 하여도 가할 듯하지.”
이때 구생 간에 나눈 여차 담론을 지기구생(知己舅甥)이라 할 만한데, 피차 알 수 없는 백년 앞날의 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