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군 현동 이매와 동행
풍기군(豊基郡) 현동(縣洞)에 진성 이씨 이매(李邁)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세는 청빈(淸貧)하고 문학(文學)하는 선비였다. 그의 아들 형제가 동네 안에 있는 서당에 가서 학초를 비롯한 여러 동무들과 글을 짓다가 낮에 밥 먹을 때가 되면, 그 아이 형제들은 집에 밥 먹으러 가는 듯이 하면서 남의 밥 먹는 데를 피해 중간에 머물러 있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별도로 호를 지어 부르기를 “모퉁이 입시동”이라 불렀다.
이매는 초시(初試)를 일곱 번이나 (할 정도로) 넉넉한 문장이었으나 돈이 없어 진사 합격 명단인 방목(榜目)에도 참여하지를 못하고 공명낙척(空名落拓)한 선비였다. 1878년(무인년) 봄의 청명(淸明)한 시절이었다. 이때 학초 나이 15세이었다. 이매와 (함께) 풍기에서 예천까지 하루 동행을 하여 오는데, 시절은 춘풍세우(春風細雨, 봄바람 가는 비) 후에 만산초목이 각각 생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길가에 있는 인민의 전답에는 보리 싹이 포릇포릇하게 골을 에어 생기를 머금었는데,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간혹 돌에 걸치어 길가의 보리 싹이 짓눌려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노인(老人)이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약간 멀리 있는 것조차 낱낱이 막대기를 끌어 치인 보리 싹을 구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길가 주점을 지나갈 때마다 미주가희(美酒佳姬)의 자리에 문사(文士) 친구가 환영을 하여 매양 술을 권하면, 이매는 항상 노소를 불문하고 술잔을 못 이겨 받는 일이 없었다. 또한 한자리에서 일절 두 잔 거듭 드는 일도 없었다. 또 길을 오다가 매번 인민의 보리밭을 찾아 대소변을 보았다.
학초의 소견으로는 세 가지가 모두 사소한 일이기는 하나 사람의 마음에 적잖이 착한 규범으로 보였다. 세상에 자기 소유지는 입추의 여지도 없는데도 남의 곡식에 침해가 없게 도와주는 것과 세상 사람 모두가 공술이라 하면 체면도 없이 어찌해서라도 한 잔 더 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이 노인은 항차 술을 잘 먹는 사람이요, 집이 가난한 처지로 한자리에서 한 잔을 받는 것 외에는 한사코 금하니 그 이유나 물어보리라 작정하였다.
“오늘 동행하여 존장을 모시고 보니 타인 전답의 곡식 싹을 사랑하시고, 구제하시는 뜻을 짐작할 수 있어 후일에 본을 받을 만하옵니다. 그러나 다정한 여러 친구와 술자리에 있는 젊은 미녀가 술잔을 들고 팔이 아프도록 권하여도 한 잔 외에는 다시 아니 드시니, 이는 인정 간에 차마 못할 일인데 어떠한 이치입니까?”
이매가 대답하였다.
“장하다, 이렇게 묻는 말이여. 나는 나이 50이 지나도록 매양 이같이 하였으되, 군같이 유심히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세인(世人)들이 모두 나의 뜻을 모른 것이다. 군이 이 질문을 한 것은 나의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남의 상한 곡식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구할 따름이며, 세인들이 각각 직업을 가져 무리하게 탐심하지 말고, 경자(耕者)는 밭갈이하고, 독자(讀者)는 책을 읽으며 오고 가며 서로 인사하여 공경하며 지내면 그게 바로 요순의 백성이다. 술이라 하는 것은 술이 술을 더 먹게 하고 결국에는 사람의 흥망이 한 잔 술잔에 있다 할 수 있지. 마흔이 넘은 사람이 되어 전혀 접배(接盃)를 못하면 남을 응대하는 일에 일평생을 이같이 하여 한자리에 한 잔으로 작정하였으니, 술잔을 먼저 받으면 나중에 권하는 힘을 덜고자 함이네. 뭇사람이 권하는 대로 조종을 못하거나 다정미색의 아양함이 장부의 중심을 용서할 양이면 가국(家國) 간에 입신(立身)할 곳이 없으리라.
화호불성(畵虎不成)에 유의구(惟爲狗) 하더라도 평사의 백구는 뭇 떼에 들지 아니하고, 부춘산(富春山)의 엄자릉(嚴子凌)의 취지야 어느 사대인들 없겠는가. 장부 뜻이 이중에 있느니라.”
학초가 감복하여 당당하게 본받을 효칙(效則)으로 삼고자 하여, 서른 전 불음주(不飮酒), 불끽연(不喫煙), 한평생 부잡기(不雜技) 하기로 (작심하였으며) 서른 후에는 (여기에) 칠 년을 더하여 37〜8세가 되어서야 좋은 좌석에 참여할 때면 주위 사람들에게 몰풍정이 될 수 있으므로 음주와 끽연은 약간 하였다. (요즈음은) 당국에서 남초(南草, 담배) 전매국이 설시되고 남초를 집이나 자기 소유지에서 경작하면 감정비와 지세와 농회비와 단으로 그 땅에 만관한 세금을 합하여 대조(對照)하니, 갈고 매고 거두고 지은 공은 차치하고도 부족함이 생기니 가히 살아가는 정도 계산상 정신없으면 자손까지 못사는 지경이 생길 것이다.
대정(大正) 11년인 1922년(임술년) 3월 초일부터는 새로 심상에 정한 바 있어 연초는 끊되, 혹 친구와 마주 앉아 초인사에 연초에 불을 붙여 권하는데도 받지 않으면 너무 몰인정하다는 시비가 있을 듯하여 받아 태운 연후에는 그만두었다. 이매를 두고 말하면 그 정훈(正訓)의 규모로 인해, 만년에는 아들 형제가 문필로 이름이 났고 가세 또한 넉넉하여 남에게 빌 것이 없는 성세일민(聖世逸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