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과 장인의 부탁
학초 나이 13세인 1876년(병자년) 9월 26일에 용궁군에 사는 해주 최씨에게 장가를 드니 최씨 나이 18세이었다. 다음 해인 1877년(정축년) 정월 초에 처가에 다니러 갔다. 처갓집이 동네 골짜기에 위치하여 동쪽 산기슭에 층층으로 집이 되고, 앞산으로 넘어 들어오는 마을 입구 중간에 우물이 있었다. 매일 석양이 되면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모이는데) 이때 마침 정초 명절이라 젊은 부녀들이 각각 청ㆍ홍 물색의 옷차림을 모양 내어 물을 길으러 와서 약야계변(若耶溪邊) 같이 잠시 그림 속의 인물이 모인 것이라 해도 거짓이 아니었다.
학초가 필연 보았을 터인데 보아도 못 본 듯이 돌아보는 일 없이 집을 찾아 들어오니 빙장인 최공이 높은 당에서 오는 걸 보고 있었다. 영접 인사와 첫인사 예절이 끝난 후 이내 저녁을 마쳤다. 장인과 사위 간에 마주 앉아 있으니 그 아래 최기준의 마당에서 오구새남굿을 하는데 처음으로 풍물 소리가, 장구는 둥둥, 징은 왱왱 하니 온 마을 남녀노소가 동분서주하여 사방으로 운집하여 앞다투어 구경하러 갔다. 이때에 처갓집 처남 삼 형제를 비롯하여 남녀노소가 모두 나가서 마당 담을 의지하여 차가운 밤바람을 무릅쓰고 밤새도록 구경하였다.
빙장 최공이 학초를 돌아보면서 말을 건네었다.
“박 서방도 가서 저런 구경을 하여라. 어찌 심상히 노인을 대좌하여 가고 싶지 아니할까?” 하거늘, 학초가 답하여 말하길 “구경은 마음에 없사옵고, 밤의 차가운 바람이 불가하여이다.”
최공이 심상히 듣고 다시 구경을 권하지 아니하였다. 대신 자기가 마흔까지 노동하여 물려받은 세간도 없이 빈손으로 가산을 일으킨 이야기를 꺼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서울을 다니며 쉴 때에 술 먹을 참을 (피하기 위해) 주점을 지나쳐서 쉬고, 허리끈을 졸라매어 남이 먹는 술을 먹는 것도 참을 인(忍) 자로 대신하였다고 하였다. 이같이 참아 가며 지낸 덕분으로 돈을 전전 푼푼이 모아 남전북답과 재택을 장만하고 남은 여가에 삼백 석 추수를 하니 근처 동네에서 상호(上戶)라고 하였다는 말과 작년 1876년(병자년) 흉년에 굶주린 사람에게 주었다는 말이며, 다소간 듣는 말이 소년의 모범이 될 만한 말이었다.
밤이 깊어 구경을 마치니 온 집안 식구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로 각기 방을 찾아들었다. 이튿날 밝은 아침에 부부, 처자, 장인과 사위(翁婿)가 모두 한 방에서 조반을 들었다. 조반을 마치자 최공이 가족을 돌아보면서 말을 꺼내었다.
“지난밤 구경이 배를 불리지 아니하고, 추위를 견뎠건만 하나도 사람됨은 없으니 어찌 되잔 말인가?”
막무가내로 아들 삼 형제를 특별히 꾸중하였다.
“아비 된 내가 할 말이 아니다마는 ‘지자에 막여부[知子莫如父]’라고 하여 아들의 됨됨이를 아비만큼 아는 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나의 한 집 지킬 자손이 셋 중에 한 놈도 없어 보인다. 차후 박 서방 앉은 자리에 감히 우러러볼 여지도 없으니 본을 보아 사람 좀 되어라. 박 서방이 어제 올 적에 내가 당에 비껴 서서 바라보니, 앞산 길로 해서 우물 곁을 지나오는데 그 우물에 모여 있는 형형색색 다수의 부녀들을 필연코 보았을 터이지만, 한 번도 보는 것같이 아니하고 14세 일개 초립동이 정정행보로 앞만 보고 오는데 하도 대범하게 보이더라. 필시 지나간 후에는 한 번 돌아볼까 하여 유심히 보니 전후에라도 보는 일이 없이 들어오더구나. 지난밤 (굿) 구경을 내가 권하여도 어른의 명령을 들을 듯하건만 불가한 사유를 말하더구나. 너희들 부류에도 들지 아니하니 이것이 설만궁항(雪滿躬港, 눈 쌓인 외딴곳)에 고송이 서 있는 격이요, 봉비천인(鳳飛千仞)에 기불탁숙(飢不啄粟) 격이며, 십 리 사장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백구가 뭇새와 벗을 아니하고 청강수성에서 세월을 보내는 기상이다. 보통 세상으로 말하면 못된 사람이 더 많아서 장을 가서는 쓸데없는 방갓을 친구의 말을 듣고 산다 하는 것은 단절코 본을 받지 말아야 하는데, 너희들은 후일을 생각하니 일러야 쓸데없다. 목전에 보기 싫다.”
하고 문밖으로 내쫓으며 박 서방을 돌아보면서 “내가 너에게 간절히 부탁할 말이 있으니 아직은 어린 마음에 뜻밖으로 알리라마는 머지 아니한 일이다. 속설에 장부가 열 계집 아니 버린단 말도 있고, 부모를 보아도 후손을 괄시 못하는 일도 있으니 훗날에 네가 일처(一妻)로 늙을 사람이 아니고, 일처이첩(一妻二妾)은 장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수의 처실(妻室, 처와 측실)을 두더라도 나의 여식을 버리는 지경은 이르지 말거라. 배움이 전혀 없고 백 가지 중 하나도 취할 게 없으나, 있지만 없는 것같이 두고 비록 양실(兩室)을 둘지라도 백 허물을 용서하라.”
하였다. 이때 학초의 소견에 어찌하는 말씀인지 황공하여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지냈는데, (후에 생각해 보니) 차청하문(次請下問)이었음을 알았다.
최공(崔公)의 장자 최장수의 사람됨이, 모습은 장부의 기상으로 잘났다고 하여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심상은 남에게 욕심 없고 유순하다 할 것이로되 부모의 명령으로 글을 배우러 서당을 가면 중간에서 하루해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전에 배운 글로 헛소리하기, 시장에 보내면 올 때 갈 때 주막에서 유련하기, 부모의 재산은 바닷물과 같이 항상 있는 줄 믿고 있었다. 빈한한 사람 사정 모르고 업신여기기, 칠 푼짜리 비빔밥에 서 돈어치 고기 먹기, 도박은 아니하나 술 먹기는 좋아하였다. 스무 살에 최공이 세상을 떠나니 실즉 다 사람의 변복이다. 인가삼년상(人家三年喪)을 불과 두 해에 마쳤다. 만년반석(萬年盤石) 같은 가산이 두 해 전에 풍파에 구름이 된 사실을 말하면 능라주속(綾羅珠屬)의 의복 사치는 아니해도 주막 출입을 주로 하고, 우마(牛馬)를 팔고 사기 위한 소관으로 매일 시장을 갔다. 화류 기생의 문안은 하나도 받지 못해 보고 남전북답과 세전가택(世傳家宅)이 한순간에 타인의 소유가 되었다. (끝내는) 형제까지 의지를 못하게 하고, 모친과 형제를 반대하고, 언청계용(言聽計用) 하다 상처(喪妻)까지 하였다. 그 부친 영혼이 죄를 주셨는지 천지에 의탁할 데 없는 걸인으로 정처 없이 다니며 구걸하던 중에 회복할 수 없는 대풍병(大風病)으로 경주 동문 밖에서 무주객사(無住客死)하였으니, 세간에 자식이 된 자가 정신을 차려 이 사람을 두고 선악의 거울로 삼을 만한 것이 분명하니 징계하여 사람 노릇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