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한신조어성하’
고종 12년인 1875년(을해년) 춘삼월 그믐날, 이때 학초 나이 열두 살이었다. 예천군 선몽대(仙夢臺)에 가서 70여 명의 학생과 작반(作伴)하여 시를 지을 때 선생이 글제를 내걸기를 ‘한신조어성하(韓信釣漁城下)’라 하였다. 모든 학도가 선생의 오전 출타를 틈타서 글제의 어려움을 원망하며 (글을) 완성하지 못하여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선몽대 아래 맑은 강에 목욕도 하고 층암괴석을 좇아 놀기도 하며 경치 구경만 소일로 삼았다. 학초는 홀로 대상 헌함(軒檻)에 비껴 앉아 글제를 생각하였다.
항우는 대대로 장군으로 내려온 집 자손인데, 8년 풍진 초패왕(楚霸王, 항우)을 잡을 영웅은 일개 한신이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여 회음현에 있을 당시 소년들로부터 더러운 일도 겪고 빨래하는 여자에게 걸식도 하다가 성 아래에서 낚시질하는 모양이 당시 완연한 걸인이건만, 후일 흥망을 세상에서 누가 알리오. 적송자(赤松子) 장자방(張子房, 장량)의 못 미친다는 한탄을 섞어 생각하였다. 그러던 차에 선생이 돌아오시어 여러 학생의 글을 독책(督責)하고 불시에 작축(作軸)하여 골라 장원을 빼어 놓고 글 한 귀(句)를 큰 소리로 읽었다.
마음은 박랑사 장자방의 철퇴를 따르고 心隨博浪子房槌
뜻은 반계 강태공의 낚싯대에 널었도다 意活盤溪太公機
선생이 글을 지은 임자를 찾으니 학초가 일어서서 재배 후 시립하였다. 이 선생은 본래 글을 보는 안목이 고명하여 글을 한 번 보면 평생 사주 길흉을 짐작하는 수단이 있었다. 주필(朱筆)을 당에 놓고 둘러선 사람들과 학생들 백여 명 좌중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장부의 기상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금일부터는 곤궁도 한탄 말고 이같이 뜻을 길러라. 백만 진중에도 전화위복이 될 것이요, 인해(人海) 풍파에 고등한 구변으로 만인을 지휘하는 사람도 되고, 박낭퇴(博浪槌)에 태공기(太公機)를 대하였으니, 허다한 환란 시절을 당해도 자기 처지를 알고 분수에 만족하여 강호에 산수를 취하는 날도 마음대로 하리라.”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