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鶴樵傳 학초전
일러두기

경주군수 김윤란의 재산 탈취

당시 경주군수 김윤란(金允蘭)이라 하는 사람은 원래 의성군 관로의 천한 출신으로 대구 서문 밖으로 와서 소 잡아 베어 팔고, 그 처는 술장수 하고 혹 매음도 하여 내외가 재산을 많이 모았다. 일자무식으로서 당시 조정에 매관하는 길을 타서 경주군수로 (부임해) 왔다. 대구 본부 아전의 후손 정해붕이 책실로 데려와서 같이 탐관 학민을 하였다. 백성이 원통한 일이 있어 소지를 정하면 산더미처럼 쌓인 소지라도 모두 착오 없이 엄히 다스리기 위한 내사라고 하면서 나졸을 시켜 잡아왔다. 소위 족쇄가 그 잡힌 백성 살림을 털어 마지막까지 대체로 엽전으로 2∼3백 냥부터 천 냥까지 받아내었다. 문간(사령청)에 오면 문간 체면으로 몇 백 냥씩 떼이고 집장 채어 가두면 구류채로 몇 백 냥씩 받아 비밀리에 군수 책실과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있는 대로 그 백성의 재산을 다 떨어먹은 후에는 이번에는 소지를 정한 장민을 도로 얽어서 없는 일을 꾸며서 관정에 고소하였다고 잡아 털어먹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소지를 써서 준 사람, 심지어 같이 본 사람도 잡아 털어먹었다. 그리해도 부족하다 싶으면 동네 동임(洞任, 동장), 두민(頭民, 동네 유지), 지사인(知事人, 식견이 있는 사람)을 불러 지도(指導)를 못했다고 같이 잡아 빼앗아 먹었다. 그같이 하자니 부비(浮費)며 족쇄 등 금전으로 이 동네이니 저 동네 간에 관계가 자연 나서 각 동이 모두 잡혀 망하였다.
 기계면 화대동의 부녀가 8월에 목화를 따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웃 집 말 한마디로 세 동네가 망하고, 동해면 문 약국의 딸 처자가 겨울날 얼음 얼 때 미끄러져 우물에 빠져 죽고 두 동리가 망하고, 전촌(展村) 사람이 역졸이 토색하는 일을 관아에 보고하였다가 다섯 동네가 망하였다네. 가가 촌촌 면면의 돈은 죽어 가며 다 맡겨도 군방 구류를 면치 못하네. 말래에는 자부(子婦)가 원정 소지를 하다가 측실로 불러 두어 밤에 간통 후 방송하였다네. 토성(土城)의 김 참봉은 일동 빈민 구조와 빈가 자제 학비로 민휼(憫恤)과 과객 밥 많이 먹인 것을 무단히 화적와주(火賊窩主)라고 잡아 몇 달간 구류에 무수한 학정을 하여도 돈을 아니 주니 칼을 씌워 장시(場市)에 효시하였다네. 화적 와주라고 죄를 광고하니 장에 있던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통분하며 무법천지라 한들 그 뜻을 누가 알리오.’
 그 사람은 그같이 해도 돈을 아니 주니 화적접주로 얽어서 진위대에 포획하여 넘기니 무수한 곤란 후 만면이며, 허다 학정은 천지 인민이 생긴 후 수만 년 이래 학정으로 몹쓸 군수는 김윤란 이상(以上)이라 할 듯하였다.
 당시 군수의 처(妻)가 그 아들 혼인을 그 근읍 청송(靑松) 오사리(五士里)라 하는 데에서 하였다. 처자의 선을 본다 하고 가마를 타고 강서면 노당(魯塘)재를 넘으며 산유화(山有花) 노래를 불렀다. 조선의 속담으로 백정의 딸이 가마 타고 가며 버드나무를 보고 ‘고리상자 만들기 좋다.’ 하는 모양과 같았다.
 내동원이라 하는 데는 고기 냄새가 삐지 아니하니 성중의 개가 냄새를 맡고 자주 들어가면 모조리 잡아먹는다. 동헌방에 비밀 수작 소리가 나니 군수가 기생을 데리고 노는 소위 신래부인(新來婦人)인 줄 알고 들어가다가 볼을 치고 재떨이를 들고 자빠지니 기생은 없고 손님뿐이었다. 그 후에도 급창과 사령이 늘어서고 대상에서 형리, 아전을 데리고 공사를 하고 있는데 신래부인이 있는 줄 알고 담 구멍에 눈을 대고 기생이 있는가 하고 살펴보다가 급창 관로가 ‘이게 무엇이냐?’고 하며 책갱이로 콱 쑤시니 얼굴이 찔려 피가 낭자한들 차마 효상을 설원 못할 형편이었다.

1901년(신축년) 가을에 학초의 친구 최세인(崔世仁)이라 하는 사람의 가세가 부유하여 경성으로 벼슬자리를 구하러 가면서 경주군 강서면 반월샘[半月井]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팔아 서울로 보내달라는 위탁을 받았는데, 불량한 군수 김윤란이 (이것을 알고) 학초를 잡아다가 그 논 값을 관에 바치고, 만일 못 팔았으면 토지문서를 바치라 하였다. 관정에서 학초가 대답하였다.
 “최가의 물건을 최가의 명령 없이 무슨 이유로 관정에 바치리까?” 하고 일거에 거역하니 장방에 구류해 놓고 한 5일마다 곤욕 엄독하였다. 학초는 죽어도 아귀 같은 군수를 반대하고 견디어 갔다. 사상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되어서 신용이 명맥(命脈)이라. 최세인이 자수성가로 모은 재산을 나 같은 사람에게 맡긴 것을 까닭 없이 강도 같은 군수에게 주고 보면, 주는 나의 처사야말로 명맥 없는 모양이 될 것이다.’ 하고 견디어 갔다. (장방에 갇혀서) 수금(囚禁) 중에 있는 죄수의 형편을 살펴보니 매일 들어오는 죄수가 20∼30명이오. 나가는 죄수는 군로나 사령들이 밖에 불러 수군수군하거나 형리, 아전이나 아로(衙奴)가 때로는 책실 통인이 불러 수군수군하면 돈을 바쳐 풀려 나갔다. 대항하는 사람은 관정에서 형지장지하고 수금 중에도 항시 족쇄를 채워 달아 놓고 쳤다.
 당시 관리(官吏)의 처리하는 법이 형법대전과 같은 대전회통(大典會通)은 얻어 보지를 못했는지 행할 줄을 전혀 모르고 무죄, 유죄를 벼슬만 하면 인민을 위령으로 강제로 재산 빼앗아 먹기만 전부이었다.
 설령 죽을죄를 범해도 돈을 써서 세도 편지나 중전 전교나 군수의 친한 길만 찾아 돈만 쓰면 살아가고 사행을 바꾸어냈다. 심지어 군수나 책실 수청기생까지도 (군수와) 친면만 있으면 세도하였다. 성중의 여관에는 아객이라 하고 밖으로 민ㆍ형사를 착수하여 근자의 변호사같이 승세하여 가며 착수를 하여 밤이면 군수 아중에 입문하였다. 간혹은 군수나 책실은 만나 보지도 못하고 아객이라 하여 공으로 돈을 먹는 일도 있었다. 죄수 중에도 양반(兩班) 조사(朝仕)다, 유세 아전이다 하면 옥중에도 보관청이라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폐지되었다. 그래도 죄수 대우에는 분별이 조금 있었다. 밖에서 문옥(죄수를 면회함)하는 사람이면 수력대로 음식을 사서 가지고 들어가 보기도 하고 친구의 거래가 수력대로 있는 때라 들어오는 죄수며 나가는 죄수를 학초가 역력히 기록(記錄)하였다. 돈 쓰고 나가는 것을 아는 대로 일기를 하며 억울한 인민에게 앞길을 말로 타일러 주기도 하였다. 때로는 백절부절 당당하게 대처하라 하기도 하였다. 군로 사령 등 사장리배가 구타 학민하는 것을 보고 ‘너희도 사람이라.’ 하면서 못하게 하기도 하고, 상하 남녀노소 분별없는 대우를 용단으로 말하여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원통한 죄로 본군이나 영문에 원정 소장을 비는 사람이 많이 있어 날로 써서 인민의 억울함을 설명해 주자 그런 사람들이 별별 기이한 음식을 갖다 주니 방구석에 쌓여 있어 다수 죄수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혹 여비에 기부(寄附)같이 주는 돈도 있어 실상 (구류채는) 넉넉할 정도이었다.
 학초 자신의 일은 군수에게 아니 될 줄 짐작하고 앉아서 대구 영문에 우편으로 전해서 방소지령을 얻어 군수에게 도부해도 방송을 못 얻어 지냈다.
 하루는 군수가 착입 공정하면서 하는 말이 “네가 최세인의 땅값을 아니 바치고 견디겠나?” 하며 엄명으로 하니, 학초 분노한 소리로 대답하기를 “최가의 돈을 박가에게 바치라 하는 것은 불법이오. 이교노령(吏校奴令)의 위엄으로 화적공사를 하니 영감이 천지 불변한 것을 하고 있소. 득성(得性) 이후 67대에 63세 잠영고족(簪纓高族)을 이같이 하고 못하리다. 하고 싶은 대로 하오.” 하였다.
 군수가 진노하여 “양반을 자세하여 관정을 능욕하는구나.” 하면서 영문에 보하여 영천(永川)으로 이수(移囚)하였다.
 이때가 1902년(임인년) 정월 10일이었다. 학초가 경주에서 영천으로 이수한다 하니 함께 체수(滯囚)해 있던 윤사과, 김 참봉, 김익서 등 십여 인들은 불길한 이별을 보고 연연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절절 탄식으로 하는 말이 “천지도 무심하지, 저 같은 의기 남자를 하늘이 알지 못한다.” 하였다.
 당시 각 관아의 문간 노령 풍속이 죄인 학대와 토색이 심함을 저희들도 서로 알고 있었다. 경주 장방에 소위 방장사령이나 도 사령 등이 “영천 장방으로 이수(移囚)를 가려 하는 박반(朴班)은 당시의 의리가 괄세할 형편이 못 되는, 만인에 모범이 될 만한 자격이라. 비청(裨廳)에서도 대단 두호(斗護)하였으니 귀 군에 가거든 동아관속 일체 선대 필요 행심”과 같은 선문을 영천에 보내었다.
 경주 형방청에서 안 형방이라 칭하는 경주 질청사통(迭請私通)이다, 형리청사통이다 하여 사령들이 사통으로 영천에 선문(先聞)을 보내었다. 영거 장교를 따라 경주 남문을 나서니 이교노령들이 전송을 하였다. 친구인 이시구(李時久)를 비롯한 몇몇 사람과 기생에 금홍(錦紅), 죽림(竹林) 등이 모두 전별을 하였다. 서진장을 지나서 김각간(金角干) 하마비 근처에 와서 영거 장교가 학초에게 물었다.
 “정말로 알지 못할 일을 보겠나이다. 자기의 재물이라도 욕을 볼 지경이면 돈을 주고 면하는데, 항차 남의 재물을 위민부모인 군수가 바치라 하는데 장방 구류에 과세까지 하시고 관장을 화적공사(火賊公事)라 말하면서, 이교(吏校) 양청과 군장(軍將) 양방이 두호 선통을 보낸다 하며, 전별(餞別)에 다수 인원 중에 동도(東都)에 당시 일등이라 칭하는 기생까지 전별하러 오니 호걸 죄수라도 별인이라 하겠나이다.”
 학초가 답하길 “그렇지 아니하다. 재산을 재산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오륜이 있는 친구의 신자(信字) 일자(一字)가 없으면 부모의 효(孝)도 없고 임금의 충(忠)도 없고, 친구의 원수가 되는 것이오. 신(信)이 있어야 급하고 위태로운 곳에 충효정절이 모두 서니, 최세인이 나를 사람으로 믿는 터이오. ‘능욕 관장’이 아니라 ‘충언’이지 어찌 능욕이라 하리오. 이 충언을 역이로 잘못 알면 (나중에) 삽짝을 태워 ‘너화너화’를 부르면서 이 길로 올 때 나는 이 걸음에서 호걸 의사가 되어 있으리라.” 하였다.
 이같이 말을 하며 알마르 고개를 넘었다. 그 고개 끝에 돌이 약간 얼멍얼멍하여 발찜이 험한데 군수 김윤란이 석수를 시켜 잔돌을 한 소쿠리쯤 닦았다 한다. 그것도 선정이라고 사람을 시켜 그 아래에 선정비를 세웠거늘 학초가 웃으면서 말하길 “이것을 자공하고 싶어 천추에 전하자고 비를 세웠으니 가소 요절이다. 착산통도(鑿山通道, 산을 뚫고 길을 냄)하였던 진 시황도 덕이 없으니 여산릉(진 시황의 능)에 굴총이 났다 하는데, 물극필반(物極必反)으로 이 같은 군수가 어찌 장구하리오. 착한 문명세계가 되면 이 길이 이대로 있지 아니할 터라. 악행을 깨닫지 못하고 없는 덕을 전하고자 하니, 눈에다 한 터럭으로 막고 못 본다 하여 ‘아웅’ 하는 격이다. 후세에는 소위 ‘요절비’라 할 것이니 어찌 장구하리오.” 하였다.
 그날 석양에 영천에 도착하여 군수 이장용의 명령으로 장방에 체수되었다. 방장사령 이명천이 1, 2, 3번 도사령을 대동하고 주안상을 받들며 문안을 왔다. 날이 어두워지니 영천의 이방 황수(黃綬)가 형리 이평숙을 데리고 또 주안상을 받들고 와서 문안을 하였다. 그때에 기생 금란 모녀가 동기 둘을 데리고 와서 문안을 왔다.
 학초가 “이 망한 사람을 위하여 각처에 점잖으신 이들이 와 주시니 감사도 하여 어떻다 말할 수 없고, 또는 기생까지 와서 찾아보니 대단히 불안불안하여 장차 이 일을 어찌할지 모르겠노라.” 하였다.
 이방 이만석이며, 방장사령 이명천 등이 말하길 “당시 경주 사또의 위령지하에 ‘화적공사’한다는 네 글자가 정말 어려운 말이올시다. 이수(移囚) 오시기 전에 영천으로 올 줄은 뜻하지 못할 때 소문이 오기를, ‘장방 죄수 아무씨가 의기별인(義氣別人)이다.’라는 소문도 진작 들었습니다. 참 이날을 당해 경주 각 청에서 사통이며 선문을 보냈는데 대단히 감사하오나 부득이 고생은 되오나 필연 멀지 아니할 터입니다.” 하였다.
 안녕하게 보낼 수 있도록 부하들에게 분부할 즈음, 기생 금란의 모(母)가 옛날 조양각(朝陽閣) 아래에서 어사 이도재를 전화위복으로 하던 언사로 화용(花容)을 들어 말하길 “경주는 소녀의 선대부터 살았던 정든 고향이올시다. 경주 동원 일송각 앞에 이교노령의 청령하에 나오는 위엄에 인민의 생사지권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올시다. 그 뜰에서 기백이 당당하시게 백절부절로 ‘사또가 화적공사한다.’고 충곡 발고하시는 이가 있어야 세상에 저희 같은 기생도 보전하게 할 터이옵고, 경주 남문 밖 떠날 때 동도 명기들이 전송하더라는 소문이 각 청 통문 올 때 함께 들었으니, 영천 오실 때 소군 기생들이 환영 못한 것이 죄송하여이다. 뵈오니 황송한 말로 ‘장하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당시 유수한 죄인 두 사람이 영천으로 이수 와서 처음으로 학초와 인사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대구 성중에 거주하는 영리(營吏) 아전이었다. 경상 일도에 어사가 오거나 감영도에서 대대로 집권을 하여 세력이 대단하였던 사람이었다. 각 군수의 포제를 작성할 당시, 누워서 벽상에 걸어 놓은 각 군수의 명단을 보고 ‘요놈을 지울까? 저놈을 지울까?’ 하며 고삐를 쥐고 있는 대구 성중의 진골목 사는 최 대감(崔大監)의 조카 최달임(崔達淋)이라 하는 사람이었다.
 수금 중에 각 사람을 둘러보며 물었다.
 “당세에 각 군에 군수라 하면 그 군에서 변동 왕(王)이라 할 듯한데, 항차 경주 같은 웅도 일등 군수로 있는 김윤란을 인민의 확정은 질문 말할 수 없이 대단한 중에 누구도 그 기봉을 꺾어 말할 사람이 없는데, 대구서부터 들으니, 관정에서 화적공사한다 직언 용단을 하고 이곳 영천으로 이수 오신 이가 이중에 뉘시오니까?”
 좌중이 모두 눈을 학초에게 돌리고 말이 없었다. 학초가 말하길 “어찌 그 사람을 찾아 물으시며 알고자 하나이까?” 하니, 최달임이 말하길 “설만 궁항(窮巷)의 고송이 특입은 장부기안이라. 자고로 사람이 부귀에 아첨을 안 드리고 부월(斧鉞, 도끼)이 당전(當前, 당면)해도 백절부절로 당당한 의무를 짚고 굴하지 아니하는 사람 드무니라. 경주 같은 웅도 대읍에, 모조리 인피를 벗긴다 하여 털린 재산을 천리나 만리나 강산을 변동할 자 몇몇이나 있나? 군방장방에 죄수가 사오백 명씩이며 한 사람도 영문에 의송 하나도 못하는 세계에 그같이 하시는 이가 없지요. 보아 하니 귀하인가? 들어보니 장하도다.” 하며 손을 잡고 무척 반겨 인사를 하였다. 백년지교가 이에서 더할 수가 없었다.
 최달임은 먼저 대구 남문 밖에서 대상점(大商店)을 볼 때 경주의 전 군수 조의현의 상납외획 돈을 많이 쓰고 장사에 이(利)가 없어 낭패하였다. 경주 외획 상납을 못하여 난봉(難捧) 독책으로 이수가 되었었다. 영천에 와서 학초와 정겹게 지내는 궁곤한 친구가 되어 서로 자신에 관한 사실을 의논하였다.
 영천에 오니 학초가 소지를 잘 쓴다는 풍성을 듣고 인민의 대송 소장 쓰기를 부탁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최달임이 학초를 찾아와서 “귀하의 사건을 영문에 의송장을 잘 지어 내 편지와 동봉하여 우편으로 대구로 보내면 귀하를 위하여 석방을 주선해 줄 것이다.” 하여 (학초가) 소장을 지어 그 사람 편지와 동봉하여 우편에 부쳤다.
 당시 경상관찰사는 김해 사람 이우인이었다. 일찍이 마흔 살까지 포외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로 때를 만나지 못하여 당시 과객으로 대구 칠성정의 양 주사 집에 신세를 끼쳐 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이우인은) 경상관찰사가 되어 양 주사는 그 공으로 사송주사가 되었다. 바로 이 양 주사가 최달임의 매부이었다. 이우인이 경상관찰사를 제임하고 떠날 때 양 주사가 박학초의 소장을 들고 떠나는 교전에서 ‘원통한 백성 하나 구제하시고 떠나시기’를 고하니 특위 방송(放送) 지령을 하고 떠났다.
 (방송 지령이) 즉시 영천에 도달하여 학초는 방송을 얻어 최달임과 연연한 이별이 되었다. (나올 때) 최달임의 부탁이 “필야 귀하가 그저 있지 아니하시고 대구를 가실 터, 가거든 장동에 가서 자기 집을 찾아….” 여차여차 하는 전갈이 있었다.
 이때 학초가 새장 안의 수조(囚鳥)로 있다가 무사득방(無事得放)하니 날개를 펼치는 날에 억울한 친구를 구제하고 학민 강도가 심한 경주군수 김윤란은 영문에서 꼭지를 친다. 백성이 군수를 삽짝을 태워 너화 소리를 내게 하는 학초의 수단을 다음 권에서 살펴보시오.

박학초 실기(朴鶴焦 實記) 권지이(卷之二)

(번역:박종두)

주석
부비(浮費) 부비(浮費):어떤 일을 하는데 써서 없어지는 돈.
민휼(憫恤) 민휼(憫恤):불쌍한 사람을 도와줌.
신래부인(新來婦人) 신래부인(新來婦人):지방 수령이 홀로 임지에 있을 동안 부인의 역할을 대신하는 기생.
대전회통(大典會通) 대전회통(大典會通):고종 2년에 대전통편 다음에 나온 법령집.
이수(移囚) 이수(移囚):죄수를 다른 감옥으로 옮김.
비청(裨廳) 비청(裨廳):자신의 관청을 낮추어 부르는 말.
동도(東都) 동도(東都):경주의 이칭(異稱).
삽짝 삽짝:탐학하는 지방 수령을 지역민이 경계 밖으로 내침을 말한다.
물극필반(物極必反) 물극필반(物極必反):‘사물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뜻으로 흥망성쇠는 반복하므로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
황수(黃綬) 황수(黃綬):복색에 누런 끈을 단 낮은 지방 관아의 구실아치.
조양각(朝陽閣) 조양각(朝陽閣):영천시 창구동에 위치한 누각으로 정몽주를 비롯한 많은 성현들의 시액이 걸려 있다.
포제 포제:각 도의 감사(監司)가 관하 수령의 치적(治績)을 조사하여 임금에게 알리는 글.
난봉(難捧) 난봉(難捧):빚으로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함.
『학초전』 2권의 마지막 구절로 보아 3권을 저술하였으나 불행히도 지금은 찾지 못하였다. 3권에는 경주군수 김윤란을 몰아내는 이야기와 이후 학초의 활동, 그리고 여생을 보낸 영양군 영양읍 감천2리 학초정 자택으로 이사한 과정이 기술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