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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청송 기우제 제단 투장

광무 5년인 1901년(신축년) 6월이었다. 이때는 농사가 한창 바쁜 철인데 가뭄이 매우 심하여 각처 인민이 하늘만 우러러보며 날마다 비를 바랐다. 이날저날 점점 한재 소동이 나는데, 청송군 현남면 보현산 전주봉이라 하는 산봉우리는 예로부터 비가 아니 오면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祭壇) 터가 있었다. 혹시 인민이 산에 각항 치성 기도를 드리는 천주봉의 제단으로 이용하는 땅에 어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복을 빌기 위해 부모의 시신을 투장하는 탈 때문이라 하여, 그 묘를 파고 치성을 해야 비가 온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법률상 묘를 임의로 파헤치지 못하고, 법관에 등장을 하자니 장두가 있어야 할 터이었다.
 각 면, 각 동 인민이 청송군 천별리 장터에 모여 (장두를 택출하려 하였으나) 장두 할 자가 없어 보현산 아래 월매촌 고적동의 박학초가 아니면 아니 된다 하여 그 다음 날부터는 고적동 반석에 인민도회를 하고 청하였다. 학초가 사양하다 마지못해 다중한 인민을 위로해 출석하여 다중 인민을 대동하고 만수정 앞으로 천별리 장터를 지내 선음령(삼자현재)을 넘어 청송읍을 향하였다. 전후를 돌아보니 (비록) 산촌의 인민일지언정 일동일정을 학초의 지휘하에 세력이 가위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학초가 각 동 인민을 대하여 “만일 금번 비용을 징수하게 되면 후일에 사소한 분란이 날 것이니 각자 부담하고, 일동일정을 속히 다녀오기로 합시다.” 하고 떠났다. 청송읍 관문 앞의 황주일의 집에 임시 도소를 정하고 소장을 지어 타인을 시켜 관에 전하였다. (소장을 가지고 군청에 가니) 문간에 사령들이 ‘기다리고 있으라.’ (라는 말만 하였다.) 다시 가니 매양 한가지이었다. 그 까닭은 군수가 동헌에서 손님을 대하여 도박하며 ‘조금 있거라, 조금 있거라.’ 하는 때문이었다.
 각 동 인민이 학초에게 와서 이 같은 사유를 말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백성이 어찌 관원에게 소지(所志)를 못 전하며 관원이 어찌 국록 먹으며 정당에서 도박하면서 인민의 청송(聽訟)을 아니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허다한 인민이 하루를 까닭 없이 머물며 객비(客費) 손해를 어찌하잔 말이냐? 뒤를 따르라.” 하고 삼문 안에 들어서니 담 모퉁이에 사령 등속이 막아서며 못 들어가게 엄금하였다.
 학초가 큰 소리로 호령하기를 “다수한 사민의 등소에 대해 원님이 국록을 자시며 막중한 정당에서 도박하자고 소송 수리를 아니한단 말이냐?” 하며 한 발 물러서며 오른 발길로 그 사령의 가슴을 차며 “장민아, 들어가라.” 하니 수십 명 사령 등으로 더불어 일시 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어떠한 중노인 되는 신수 좋은 사람이 탕건을 쓰고 안경을 차고 나와 사령들에게 “그만두어라. 그같이 의무 당당하게 하시는 양반을 어찌 막느냐? 그만두어라.” 하고 (말린 후) “뉘시오니까?” 하고 급한 인사를 건넨다. 학초가 “나는 경주 살다가 고적동에 와 있는 박모라하오. 누구시오?” 하니, 그 사람 왈 “저는 이 고을 아전인 박충서(朴忠瑞)라 하는 자이오니 말씀을 낮추어 하시오. 청송에서는 그같이 높으신 호령이 당당한 이 없습니다.” 하며 사령 등을 꾸짖으니, 당시 구법에 사령은 이방, 호방 등 아전의 하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학초와 이끌어 온 많은 장민이 물밀듯이 입정하자 급창이 뜰에 나서며 일편 큰 소리로 ‘형리’ 하고 부르니, 형리, 아전이 추입하여 대상 목항 밖에 엎드리며 좌우에 사령이 나립하고 군수는 대상 평상에서 도박을 놓고 내려앉았다.
 형리의 소장고과를 대강 듣더니 당장 제사(題辭)를 불렀다. 상사, 도형을 보내 향사 각 동 동임을 매겼다. 이때 학초가 앞의 4∼5인 인민 뒤에 섰다가 앞의 사람을 좌우로 밀치고 나서서 대상을 쳐다보면서 “형리는 붓을 잠깐 멈추어라. 군수 영감이 막중 국록을 자시고 나라의 명리로서 공당(公堂)에 도박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혐의를 민소에다 끼쳐 대민의 등소에 묻는 말 하나 없이 당장에 부당한 제사를 쓰시니 어찌한 연고시오?” 하였다.
 그러자 군수가 “어찌하잔 말이냐?” 하니, 학초가 말하길 “영감 공사를 생(生)들에게 하문하시니, 백성의 공사를 백성이 하란 말씀이오니까?” 하였다.
 군수가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인민의 도리상에 관장의 허물을 잡고 소송을 임의대로 하여 달라 하느냐.”
 학초가 말하길 “군수 영감이 국록을 아니 자시면 청송군에 어찌 오셨겠습니까? 동헌은 인민의 원불원(願不願)을 밝혀 주시는 공당입니다. 여기에서 도박하시면 다른 백성의 도박은 어찌 금하시렵니까? 이렇게 하늘이 가물어 억조창생이 농사에 비를 빌어 시급한 터에 인민의 대표로 기우제(祈雨祭)는 아니하시고 도박이 무슨 의무이십니까? 옛날 은나라의 성탕(成湯)은 임금으로서 상임들에 비를 비셨고, 현시 국가에서도 가뭄이 심하면 비를 비는데 도박으로 비를 구한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민총굴도 가지가지 법률이 있는데, 어찌 도형을 아니하고 당장 백골적원을 한단 말이냐?” 하니, 학초가 말하길 “실제 도형을 하느라 오고 가고 한다면 그 기간에 백성의 농사를 위해 제천(祭天)할 시기가 아마 금년은 없을 것입니다. 생들이 군수 영감의 가마채를 모시고 실지에 나가 친심(親審)을 하여 속히 처분하여 주시면 도박은 못하시고 인민의 공사에 공평으로 하시리니, 그러하시길 바라나이다.” 하였다.
 군수가 말하길 “(그럼) 대강 도형을 말로 하라.” 하니, 학초가 말하길 “청송군 보현산은 청송 일군에 남(南)으로 안대주산(主山)이요, 그 산 서(西)에 신령군이오, 남(南)으로는 영천의 주산입니다. 그 산의 물이 사방으로 흘러 세 고을 백성의 전답에 관개하니, 각 동 택지로 말하면 청송군에 수구(水口)요, 각 동의 주산도 되고 안산도 되고, 청룡도 되고, 백호도 되고, 뇌후(腦後, 뒤통수)도 됩니다. 이 동헌에 비하면 이편 둘러 적에 저 산같이 되고, 자고로 날이 가물면 그 산 위에서 하늘에 비니 고래로 천주봉이라 하였습니다. 획지위옥(畫地爲獄)이라도 지명이 분간 있고, 실제건 미신이건 간에 막중한 천주봉의 인민 투장은 마땅히 파내야 하고, 만일 무덤을 파내면 이후에라도 오비이락(烏飛梨落)처럼 곧 비가 온다면 창생의 송성이 모두 군수의 명결하회로 알 것입니다.” 하였다.
 군수가 지령을 불러 형리가 소장에 썼다.

옛날부터 존숭되어 내려온 막중한 곳에 투장하니 민심이 매우 놀랐다. 당장 무덤을 파서 옮기고 산 아래 동민들은 해골을 보관하되, 앞으로 무덤을 쓰는 자는 결박하여 납상하여 엄치할 뿐 아니라 삼군 인민에 부지호소 할 것.

형리와 장교에게 맡겨 발송하고 퇴정하였다.
 학초는 삼문을 나와 형리와 장교 및 각 동 구장을 대동하여 현장에 무덤을 파러 보내고, 그 외 다소 인민은 각자 객비를 물고 귀가하도록 지휘한 후 폐문루에 잠깐 올랐다. 극한 더위도 식히고 소풍 겸 읍 중을 두루 구경하였다. 오고 가는 읍 중 다소 사람의 변화도 구경하고, 찬경루에 올라 옛날의 현인들이 쓴 현판 글도 보았다. 해가 넘어가니 주인을 정한 곳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홀로 평상에 누워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읍촌 간 인민이 그 주인집에 다수가 모여 제각기 말을 하는데 “오늘날 현남 현서면 등장 장두가 관정에 출도하였다지?” 하니, 말하기를 “원님의 실수가 무안도 해라.” 하였다. 한 사람이 말을 꺼내되 “늦었지, 늦었지. 산군 백성이라고 등시하다가 따끔하게 곤욕을 보았지.” 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나서서 말하길 “그 민소 장두가 누구인지 아는가? 경주 달대평 사에 5천 7백여 명을 영솔하고 대구 진위대 영문과 경주 원님도 면 파직과 면 징계를 시켰다네. 칼날과 탄알이 오고 가는 진중에도 그저 백의척행(白衣隻行)으로 옛날의 소진이나 장의 같은 청산유수 같은 구변(口辯)으로 적국 대장을 돌려세우기도 하고, 타군 군수를 명사로 나게 하였다네. (어디 그뿐인가?) 새 군수 행차를 경주 아화 길에서 노정할 제, 일월쟁광 같은 호변으로 사지(死地)의 16인을 구해 내고, 5천 7백여 명이 일시에 춤을 추게 하고, 진퇴를 임의로 하는 사람이 오늘 그만 일이야 더 말할 게 있나? 세사 번요(煩擾)를 마다하고 보현산 중에 은사 될 말인가? 눈에 걸렸으면 목하에 주먹이 자연 뽐내나니….” 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듣고 “옳지, 옳지. 그만하거든 일찍부터 알았더라면 답을 보았지.”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학초에게) 초인사와 함께 시명을 상통하였다. “나는 이국보라 하는 사람이오.” 하니, 학초가 말하길 “노형이 전일(前日) 청송 의병 당시에 소모대장이시오? 선성은 익히 들었으되, 노형이 그 당시 조정의 변화를 몰라 독 속의 쥐며, 이불 밑의 장군이시오?” 하였다.
 이국보가 말하길 “노형이 뉘시기에 초면에 사람을 쥐니 이불 밑의 장군이니 하오? 이불 밑의 장군이면 아이 만드는 자지란 말이오?”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나는 청송 보현산 중에 잠시 우거하여 역려풍상에 은적을 마음대로 못하고, 오늘 군정에 미친 광인(狂人)으로 출두하였던 박학래올시다.” 하였다.
 이국보가 (반갑게) 손을 잡고서 “어찌 상견하지 못하였는지? 들으니 피차 동갑으로 어찌하여 그다지 고명하신가? 독중지서(纛中之鼠)와 금하지장(衾下之將)이란 말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이유나 듣고자 하오.”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옛날에 예양(豫讓)은 두 임금을 섬기는데, 어찌하여 전의 임금은 망해도 사절치 아니하고 후의 임금 지백(智伯)을 위하여 입절을 하였겠는가? 다름이 아니라 임금이 알아주시고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사절이니, 거절이니 하는 것이 마땅하오. 병신(丙申), 정유년(丁酉年) 조선의 의병은 정부가 먼저 취발양복으로 백성을 위하여 솔선하여 타국과 같이 문명 독립을 하자 하시는데, 머리 깎고 양복 입은 자를 먼저 목을 벤다고 창의하는 것이 바로 독중지서요 정저지와이라. 그만함이 바로 그 징조가 아닌가?” 하였다.
 (학초의 설명에) 이국보가 “옳지, 옳지.” 하며 그날 밤은 밤새도록 담화에 백년지교를 트고 다음 날 돌아왔다.

주석
소지(所志) 소지(所志):관청에 청원을 하는 서류.
청송(聽訟) 청송(聽訟):재판을 위해 송사를 들음.
제사(題辭) 제사(題辭):백성이 제출한 소장에 대한 판결.
성탕(成湯) 성탕(成湯):중국 은나라를 세운 탕왕을 가리킴.
획지위옥(畫地爲獄) 획지위옥(畫地爲獄):‘땅에 금을 긋고 옥이라고 하여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畫地爲獄 議不入]’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서는 실제는 없고 이름만 있는 것을 뜻한다.
예양(豫讓) 예양(豫讓):중국 진(晉)나라의 의사(義士). 자신이 섬기던 지백(智伯)이 조양자(趙襄子)에게 피살되자 복수를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자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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