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대구 손봉백 송사

대구에 손봉백이라 하는 사람은 감영이 있는 (대구)에 세력 있는 한 기관의 아들로 남문 안에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1898년(무술년) 학초가 추령시(秋令市)에 갔다. 당시에 행화(行貨)로 엽전은 흔하고 은전이 처음 나서 흔하지 아니하였는데 경성을 갈 요량으로 경편(輕便, 가볍고 편함)을 갖기 위하여 손봉백의 상점에 가서 은전으로 바꾸러 찾아갔다가 서울 박동 김종한, 김 판서의 조카 진사 기동을 만났다. 비록 초면이었으나 (김 진사는) 학초의 재종인 박 진사 영래가 친하여 김 판서의 집에 있기로, 인사 후 수일 알고 지내었다. 다녀온 후 (김 진사는) 원래 가정에서 난봉이나 부리고 부형에게 걱정을 끼쳐 왔는데 (학초가 대구를) 다녀온 후 대구에서 밀양군 상납 획을 위조하다가 영문에 적발되었다. (김 진사와) 가까이한 사람은 귀공자 유인죄로 (손봉백과) 같은 이가 경무청에서 경을 치고 객지 사세가 등루거제(登樓去梯)라. 학초가 경주 구강 집에서 김기동의 급한 편지를 받고 대구를 가니 김기동의 형편이, 대구 같은 수만 호 번화 인물 중에 오고 가지 못할 간두사세(竿頭事勢)로 차마 보지 못할 형편이었다. 학초가 상상하니 내 일가 영래가 저 집에 있어 신세를 많이 끼쳤는데, 저 사람이 저런 소조를 당해 당시 풍속으로 말하면 세록이다 양반이다 주장하는 때이다. 조선국에서 유명 공신으로나 충신 집 선원 종손 11대 판서 김종한 씨 조카이다. 본향이 장동으로, 쩡쩡하는 집 귀공자이다. 봉이 뭇닭 속에서 욕을 보니 하도 가엾어서 다소 식채를 갚아 주고 경주로 데리고 가려 하였다. 이때 대구 말방골 성초은이라는 사람이 그 전날 김 진사의 부친 김영한이 대구감영에 와 있을 때 수청으로 있던 사람이 있어 이날 소문을 듣고 그 이웃집 기생 안성 월향이에게 (은근히 권하였다.) 양반으로 말하면 약차약차하고 세도로 말하자면 대대 판서의 집 청년 귀공자이다. 오늘날에는 벼슬이 없는 백의 신세이지만 내일이면 군수나 관찰을 할 집의 귀공자이니 대구 만성 중에 구할 사람이 없어 경주에 사는 친구 사람이 달려간다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월향이라 하는 기생이 자신의 집에 데려다 비밀히 묻어 두고 정을 통해 지내오다가 결국은 경찰서에 문제가 되어 경성까지 가서 백 년 전정을 이루지 못하고 몇 해 후 폐귀하였다고 한다.
 손봉백이라 하는 사람이 김기동에게 그 당시 몇 천 냥 금전의 낭패를 당하고 경성 재상가에 가서는 돈을 달라고 문안도 못할 사세가 되었다. (잃은 돈을 메꾸려고) 1898년(무술년) 동짓달 18일에 박학초에게 1800냥을 빌려 주었다고 위조 증서를 써서 독봉하기로 작정하였다. 군과 영문을 통해 고등법원 같은 평리원(平理院)까지 제출하여 그 지령을 받았다. 당시 손봉백은 경상관찰사 이우인에게 관찰부 서무주사가 되어 남전복(藍戰服)을 입고 징청각에 드나들며 관찰부에서 세력이 대단타 할 만하였다. 항차 평리원 지령으로 ‘박학초를 어떻게 하여 보자, 회포에 두고 못하던 일을 성사시켜 보자.’ 하고 작정하여 영문 나졸을 풀어 경주로 와서 학초의 부친 통정공을 영문으로 압상하여 갔다. 영문과 경찰서가 합력(合力)이라. 당시 풍속이 영문에 압상 죄인이라 하면 유죄, 무죄 간에 살림은 아니 망하는 이 없고 가는 소경 각 문이 추풍낙엽같이 떨어졌다.
 1901년(신축년) 4월 24일에 (학초는) 봉계에서 부친이 손봉백 일로 영문에 압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떠났다. 떠나면서 가는 길에 족인인 신령군수 박준성을 영천군 오종동 조진사 집에 가서 만났다. 영문에 호소할 때 중간에 막힌 길을 열기 위해 편지를 얻어 대구로 갔다. 사일당 김 진사에게 전하고 소장을 지어 당시의 절차를 따라 사송과에 접수하니 5일 만에 지령이 왔는데,

‘사실귀정사(査實歸正事) 세부과(稅簿課)에 맡겼다.’

학초가 소장을 찾아 지령을 보고 생각하니 함정에 빠진 부모를 구하고, 자기 신분을 상상하니 초개 같은 향촌 일개 한사(寒士)로 영문은 당시 염라국이다. 세부주사 김재익(金在益)은 상주(尙州) 사람으로 당시 분명하기로 유명하지만 (손봉백과는) 같은 감영의 서무주사이고 세부주사이다 보니 동임지사정(同任之事情)에 조화가 없다 할 수 없을 터였다. 만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손 주사가 허점 있어 낙송(落訟, 패소)하면 서로 간에 험무가 없을 수 없을 터였다. (만일) 내가 낙송하면 천지가 망망아득이라, 사생을 절벽에 이마 치기로 하고는 볼 것이다. 재판이 열리는 백화당(百花堂)으로 갔다. 당시 풍속으로 소민(小民)은 마당에 세웠는데 그래도 불과에 세우는 것은 대민의 대우였다. 손 주사는 대상에 (재판을 집행하는 김 주사와) 함께 앉고 나졸이 좌우에 벌려 서 있었다. 학초가 대상을 쳐다보니 주란화각(朱欄畫閣)의 위엄이 장하였다. 학초는 대상을 쳐다보면서 말하길 “지금은 관직의 유무를 떠나 같은 송민으로서 법률상 구별이 없을 터에 원고가 대상에 앉았으니 피고도 같이합시다. 만일 이같이 아주 구별을 짓는다면 사실(査實)에 대해 아주 한마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원고도 (여기에 대해서는) 제소(提訴) 못할 것이니 원고와 피고가 함께 앉읍시다.” 하고 층계를 덩성덩성 도도히 밟아 올라가 앉으니 김 주사도 사세에 밀려 “그리하라.” 하고 사실을 묻는다. (서로가) 대답하는 것이, 원고는 ‘돈 주었다.’ 하고 피고는 ‘알지 못한다.’로 일관하였다. 다소 언단이 오전 9시부터 시작하여 날이 석양에 이르자 학초가 소리 높여 큰 소리로 말하길 “당장 이 자리에서 두 사람 중에 도적을 적발할 계책이 있으니 들어 주시오.” 하니 재판서리(裁判署理) 김 주사가 “어찌한 말인가?” 하고 물어 왔다.
 학초가 “피고가 넉넉지 못한 문필일망정 실제로 써 준 포기 (문서) 같으면 남의 손을 찾아 쓸 이유가 없으니 필적 재판으로 글씨를 써서 포기와 대조합시다. 영락없는 도적이 지적의 이 두 사람 중에 있습니다.” 김 주사가 말을 정지하고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학초가 말하길 “이약상판지심으로 공부자의 글씨를 시켜 도필을 하고 서울 양반 대접으로 왜감자(귤) 피륙 등속을 주고는 시골의 무관부지인(無冠不知人)에게 횡증을 하자고 국록을 먹고 비기할 욕심을 이같이 하니 경상도 백성이 모두 손봉백의 식장이 안 되리다.” 하고 붓과 벼루와 종이를 당겨 놓고 글씨를 썼다.
 그러고는 학초가 다시 고하였다.
 “피고의 지극 원하는 바는 손봉백의 소위며 부정재판(府庭裁判, 관부의 뜰에서 여는 공개재판)을 하여 주소.”
 김 주사의 생각에 자기의 처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 ‘그리하라.’ 하고 일어서서 징청각에 들어갔다. 계하의 나졸이 대하에 섰다가 뒤에 서고 3인이 앞에 섰다. 사일당 앞 징청각으로 들어가는 문 안에 들어섰다. 학초가 손봉백 손 주사의 두루막과 남전복 자락을 잡아 쥐고 김 주사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손 주사는 오늘은 송민이라. 징청각이라 하는 징(澄) 자가 어떠한 징 자인데, 같은 송민으로 한 백성은 대상에 올라가고 한 백성은 문외에 있을 이치가 없을 듯하오. 만일 손 주사가 독으로 갈 권리가 있다 하면 이 백성의 성명을 떼고 들어가소.”
 차시 손 주사가 “변괴라” 하니 좌우 나졸이 학초를 해코져 들어서니 점점 손 주사의 고운 전복이 상할 지경이다. 김 주사가 돌아서며 말하길 “그 사람의 동시 송민이란 말이 그럴듯하고, 같이 들어가서야 별 필요 없으니 밖에서 기다리라.” 하였다.
 부득이 나졸은 다 물러가고 두 사람이 사일당 문간청에 조금 반선(더위를 식힘)을 하다가 소식이 없기에 손 주사 관방 처소로 같이 갔다. 돋음 보료 안석에 질로 되는 산수병 치고 문방제구 능란하고 백통장죽에 담배를 불 달아 통인이 올린다. 학초도 같이 보료 상에 앉아서 “이 자리가 좋소. 산진도 갈분식이라. 담배 한 대 같이 붙여내오.” 하였다.
 통인이 눈치 보고 같이 장죽에 불을 붙여 드린다. 학초는 “손 주사의 벼슬이며 좌석 위치가 대단히 좋소. 차좌 장구하면 치하를 하리다.” 하였다.
 손 주사가 “어찌한 말이오?”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정말 좋은 수가 있소. 허공의 1800냥 받으려 말고 6500냥 들인 주사 벼슬을 앞으로 장구히 가지소. 양소실대(養小失大, 적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음)는 장부 처사의 오점입니다.” 하였다.
 손 주사가 “댁이 내 주사 벼슬을 떠 잡수실 터요?” 하니, 학초가 “국법이며 체통이 있지. 체통을 돌아보시지 아니하고 묻나이까? 이 사람은 들으니 위치가 높을수록 사사로운 욕심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하였다.
 이때 통인이 저녁상을 들였다. 학초가 “송사에 의무는 의무대로 재미있게 하려니와 한 솥의 밥과 한 상의 밥을 먹는데 정분이 좋으니 같이 먹읍시다.” 하고 숟가락을 먼저 당겨 들고 통인을 돌아보며 “너의 나리에게는 속히 다른 숟가락을 드려라.” 하였다.
 손 주사가 ‘헤헤’ 웃으며 “그리하라.” 하니 통인이 수저를 다시 드려 같이 먹는데, 뉘가 보면 서로 송민이라 할 수 없고 정다운 듯해 보였다.
 상을 막 물리자마자 징청각의 집사가 전갈을 하였다. “징청각의 사또 명령이, 경주의 박민과 부정재판을 할 터이면 주사 관직 사직장을 쓰고 취판(재판에 임함)하시라 합디다.” 하고 들어갔다. 학초가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서늘하고 일은 영락없는 터라, 학초가 많은 말 하기 너무 미안하여 “부득이 나는 주인(여관) 정한 곳으로 가니 손 주사는 스스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취판하리라 하였다. 학초는 “사직하고 취판하면 다시 환직(還職)은 못 될 듯한데 충곡(衷曲)으로 하는 말이니 자세히 살피시오.” 하고 황혼에 숙소로 돌아왔다.
 당시에 부정재판(府庭裁判)이라 하면 선화당이나 징청각 재판이라 불리었다. 여간한 일로 좀처럼 부정재판은 없었다. 송민이 각각 자기 말을 하자면 양반 사족은 ‘생(生)’이라 하고, 아전과 평민은 ‘소인(小人)’이라 할 때였다. 부정재판이라 하면 구경꾼이 많이 있는데, 항차 영문시임 주사인 손 주사하고 경주 어떤 사람과 재판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하기 위하여 재판 날을 서로 물어 알고자 하였다. 다음 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영문(營門) 사령(使令)이 학초가 머무는 숙소에 찾아와 취판하라는 통지를 전하였다.
 학초가 사령을 따라 들어가며 보니 포정사 안에서 내외 삼문을 열어 놓고 군로 80여 명, 사령 80여 명이 좌우에 벌려 서고 중계에 상영 관로가 둘러서고, 권장 태장을 와장창 소리 내며 뜰에 세우고 사령 군로들은 주장을 모두 짚고 서고, 대상 위에는 팔비장 각 방 영리가 기세 등등 옹립하고, 유세한 관속 좌우 대상에 빈틈없이 서 있었다. 포정사 안부터 심지어 담 위와 지붕 위까지 구경꾼이 인산인해로 모였는데도 바다가 자는 듯 고요하였다. 그 중에 두 백성을 징청각 마당에 앉히고, 고개를 못 들게 하고, 위령으로 청령 문답을 하였다.
 “바로 아뢰라.” 하면 지붕의 기왓장까지 울려 내린다. 수노령이 일시에 “바로 아뢰라.” 하였다. 손 주사가 말을 할 때는 노령(奴令)이 사정을 보아 야단이 덜하고, 학초가 말을 할 때는 ‘바로 아뢰라.’라는 소리가 야단을 인다.
 학초가 말이 없이 있으니 “아뢰라.” 다수가 청령을 하였다.
 짐짓 말이 없으니 남 보기에는 기가 질려서 그런 것도 같고 천연스러워서 그런 것도 같았다. 대상에서는 “네가 어찌 말을 아니하는가? 아뢰라.” 야단이 일었다.
 학초는 그제야 천연한 음성으로 “이 백성의 11대조도 이 자리에 관찰사를 지냈나이다. 관찰 합하께서 일찍 포의한사(布衣寒士) 때 일을 생각하시면 후손에 이 백성 같은 사람이 다시없을는지요. 차마 ‘소인’이라 하기에는 원통해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던 관찰사가 말하길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생은 무술년 추령 때에 은전 바꾸자고 엽전 100냥을 손봉백에게 주고 받지 못한 일은 있어도 손가의 돈을 쓴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손봉백이 “소인이 1,800냥 주었으니 받아 줍시사.” 하였다. 학초가 말하길 “생이 이전에 손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손가가 (안면도 없는 사이에) 다액한 돈을 주었단 말은 이치에 없는 억설입니다.” 하였다.
 손봉백이 말하길 “소인이 경거하는 김 진사 보기 적실이 준 포기가 소장에 있습니다.” 하니, 학초가 말하길 “생의 전후 소장 글씨가 자필이오니 손가가 주장하는 포의 글씨를 대조하면 위조 포기인지를 판명할 줄로 압니다.” 하였다.
 이와 같이 양편의 말이 누가 옳고 그른지 분명하지 아니하면서, 오시(午時)부터 시작한 재판이 석양이 되어도 심리를 다 못하였다. 어사 강용구(姜容九)가 마침 내려와 관찰사를 만나려고 통자를 하다가 대상에 서서 보고 있었다. 대상 청령이 학초에게 “속히 단출하게 아뢰어라.”하는 소리가 추상같았다.
 학초는 개의치 않고 “나라에서 백성을 위하여 군수 이상에 외방은 관찰부와 어사또가 있으니, 생의 일은 자세히 심리하시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아무리 급하여도 오늘, 내일, 저 내일까지라도 자세히 들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고는 말을 아니하고 묵묵히 짐짓 있었다. ‘아뢰라’는 소리가 추상같이 청령을 하는데도 짐짓 묵묵히 있었다.
 어사가 관찰사에게 조용히 하던 공사를 계속 하시라고 전갈을 하고 방청을 하였다. 그 다음에야 말을 이어서 하니 양편 말이 (오고 가는데) 손가의 수단도 측량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청산유수로 꾸며 대고 나졸의 위풍은 손가가 말할 때는 덜하였다.
 이렇게 하다 보니 밤이 되어 당상에는 등롱이, 대하에는 황톳불을 놓아 화광이 사람들을 밝힌다. 학초의 말은 손가의 변명에 대해 일일이 의기가 있게 반대로 깨었다. 하는 말마다 이치를 붙여 깨었다. 손봉백은 이같이 말을 지루하게 하는 동안에 자신도 상상하니 학초의 말이 조화운동을 하는데 자신의 말은 덜 미치니 아무거나 잇고 보자 하는 말로 “박가의 조화 수단은 양반을 자세하고 능청한 수단도 많고 글씨도 여러 가지를 잘 쓰고 술법이 풍운조화(風雲造化)를 일으키는 모양이라. 목버선 짝을 던지면 비둘기가 되어 날아가는 걸 보았으니 믿을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학초는 이 말을 듣는 즉시 대상에서 말 내리기 전에 강두에 악성 같은 음성으로 늠름한 호령같이 손가를 돌아보며 “요놈이 당당한 본건의 목적에 해당하는 말은 아니하고, 이게 비둘기 재판이냐? 네가 군속하니 건공으로 꾸미느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당상 당하 좌우 나졸까지 ‘비둘기 재판이냐’는 이 말에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모두 입을 막고 돌아서 웃었다. 허다한 구경 방청군이 막중한 자리에서 웃음 천지가 되었다. 학초는 천연히 있었다.
 잠잠해지자 당상에서 담뱃대 터는 소리가 ‘땅땅’ 나더니 “손봉백을 잡아 올려라.” 하는 청령이 내렸다. 영이 내려와서 차차 급창의 청령 끝에 사령이 손가에게 달려들어 갓 벗기고 ‘아쐬’ 하며 둘러업었다.
 관찰사가 말하길 “너의 죄가 비둘기 이치를 모를 사람이 없으니 우거무리(愚擧無理)를 이차에 버리라. 또한 막중 벼슬을 사양하고 인민과 재판을 하니 본시 악인이라. 박민의 돈과 손해와 비용을 물어 주라.” 하고 안반 같은 칼을 씌워 하옥하였다. ‘물러서라.’ 청령 소리에 당상 당하의 사람들이 조수같이 물러나왔다. 이때 학초는 나졸이 물러나오는 속에 싸여 나오다가 잊은 말이 있어 다시 들어가고자 하니 나졸이 막아서서 금하였다.
 학초는 다른 어떤 방법이 없을 줄 알고 한 발 얼른 물러서며 한 발로 사령의 가슴을 차며 소리 질렀다. “이 사령아, 이 법정을 다시 들어가기 어려운데, 아주 할 말을 하고 가려 하니 네가 무슨 원수로 이같이 길을 막느냐?” 하니, 대상에서 그 광경을 보고 “두어라, 불러라.” 하였다. 학초가 다시 들어서서 대상을 보고 “황송합니다만 이 법정에 다시 들어오기가, 백성 되어서 천상의 옥경(玉京,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을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 범금(犯禁, 규정을 범함)을 했습니다.” 하였다.
 “무슨 말이 또 있는가?”
 학초가 말하길 “이날 관찰 합하께서 명감 처결하신 일은 일월같이 명명(明明)하오되, 합하께서 다음 날 내직(內職) 대관으로 이직하신 후일 일월도 영측이 있어 밤 될 때 없을 수 없으니, 손가는 대구 성중에 장구히 있어, 또다시 구미호 꼬리 흔들어 포히 한 장만 없애면 외군 백성에 생 같은 인명과 살림은 왔다 갔다 하니, 아주 훗날의 폐단을 막도록 완문(完文, 관아에서 내는 증명서)을 내어주시던지, 손가의 전후 소장을 소화하던지, 생을 주던지, 오늘 하신 자취가 후일까지 명명케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였다.
 관찰사가 “그리하라.” 하고 사송주사를 불러 “손가의 전후 소장을 저 박민에게 낱낱이 주어 훗날의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니, (학초가) 물러나왔다.
 학초가 그 익일에 부친을 구하여 집에 돌아오시게 하고, 14일 만에 손봉백에게 돈을 물려가지고 돌아올 때, 날이 저물어 경산군 노실 주막에 들어 숙소를 정하였다. (숙소에서) 가운데 미닫이문을 열어 놓고 윗방에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대구감영 생긴 후로 처음 보는 이야기 들어 보소.” 하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전자 영문에서 세도하던 손기관의 아들이 6,500냥 들여서 관찰부 주사를 하였는데, 1,800냥 받으려 하다가 돈도 못 받고 주사 떨어지고 부옥에 체수(滯囚)되어 있거니와 경주에 산다는 그 피고 되는 사람이 일전에 징청각에 재판을 하는데, 일약 외군(外郡)에서 온 연소한 사람으로 담대도 하고 경우도 밝고, 법정 말로는 옛날의 소진, 장의가 보지는 못하였으되 그보다 낫지 못할 것이오. 척척 구절이 격에도 맞고, 남 보기 체면도 있고 한 사람 웃기기도 정말 어렵다 하는데 공사하던 관원과 수천만 방청 구경꾼이 요절하게 웃기고, 득송(得訟)하고 나오는 길에 다시 들어가 할 말 있다 하고 들어가는 것을 금단하니 돌아서서 차는 발길이 염라부 귀졸 같은 사령의 가슴을 차고 다시 들어가서 훗날의 폐단까지 막도록 하고 돈을 도로 물리고, 부친을 구하고 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좌중에도 그 같은 이가 다시 있으리까?”
 듣는 제객이 모두 그 일 구절에 문답 요절을 하였다. 학초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그 사람을 보고 “뉘시오?” 하니 그 사람이 자세히 보며 깨닫고는 “황송합니다. 저는 대구 영문 사령에 김종한(金宗漢)이올시다. 각 군에 영문을 오가는 영주인이 있는데 저는 흥해군 주인이온데, 풍속으로 유래에 춘말하초(春末夏初)가 되면 대구에서 나는 부채자루[扇子]나 가지고 군(郡)에 가면 괄시하지 아니하고 돈을 줍니다. 가는 길에 마침 이같이 되어서 다시 뵈오니 부정(府庭)에서 보던 존안이올시다. 참으로 처음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시조를 자랑하여 사또의 마음을 감격케 하고, ‘소인’ 자(字)를 아니하고 생(生)을 특별히 허락케 하시며 구절구절이 듣는 자의 이목(耳目)에 분명하더니 한낮부터 황혼까지 엄중 심문에 일언도 차착이 없다가 점점 끝을 꾸려 ‘비둘기 재판’ 구절에, 그 자리에서 고성 호령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고저장단 북소리에 춤추기는 쉬워도 그 자리에 그 모양은 못합니다.” 하였다.
 그 후로 대구 만성노소(萬姓老少) 간에 사람들이 학초를 보면 구재판장(鳩裁判長, 비둘기 재판장)이라 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도 지나가면 서로 가르치며 ‘경주의 구재판장이 간다.’ 하였다.

주석
추령시(秋令市) 추령시(秋令市):해마다 음력 10월 3일에 대구에서 열리는 약령시.
등루거제(登樓去梯) 등루거제(登樓去梯):다락에 오르게 하고 사다리를 치운다는 뜻으로, 사람을 꾀어서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함을 뜻함.
평리원(平理院) 평리원(平理院):대한제국 때 재판을 맡아 보던 최고 법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광무 3년(1899)에 고등 재판소를 고쳐 두었다가 융희 1년(1907)에 없앰.
무관부지인(無冠不知人) 무관부지인(無冠不知人):관직도 없이 만만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
충곡(衷曲) 충곡(衷曲):애틋한 마음.
11대조 11대조:1567년 경상관찰사를 지낸 박계현을 이름.
포의한사(布衣寒士) 포의한사(布衣寒士):벼슬이 없는 가난한 선비.
우거무리(愚擧無理) 우거무리(愚擧無理):어리석고 무리한 행동.
체수(滯囚) 체수(滯囚):죄가 결정되지 않아 갇혀 있는 죄수.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