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군 구강동 이사
이때는 대한 광무 원년인 1897년(정유년) 2월 24일, 학초는 경주군 강서면 홍천동에 인접해 있는 구강동으로 이사하였다. 을미, 병신 두 해를 홍천서 직업을 의생 약국으로 인심을 헤아리니 신의도 없고 의리도 없는 부랑패류(浮浪悖類)는 갑오 흉년에 모두 떠나 상도(上途)로 가고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본심을 지키는 좋은 사람뿐이었다. 약 중에서 (감기와 식채를 다스리는)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은 지화(紙貨)로 양 7전 하고 흰 콩과 같은 염조 곡물은 한 섬에 90전에서 1원 하니 호구에 군속은 당치 아니하였다. 고향에서 장점석에게 가져온 소 두 마리가, 한 마리는 봉계의 동생을 주어 동생 살림 자본이 되게 하고, 한 마리가 학초의 살림살이에 보태어 답(畓)이 처음으로 아홉 두락이 되었다. 구강동으로 올 때는 전답이 63두락의 소유를 장만하고 정결한 다섯 칸 기와집을 사서 22명의 짐꾼을 영솔하고 오니, 1년 전 봉계를 떠날 적 천지에 뚜렷한 직업도 없이 걸인 행색으로 부모 동기가 돌아서며 한 말이 답답했었는데……, 이날 이사할 때에는 가고 오는 양동 짐꾼이 연락하고 타성 타인에 남녀노소가 전송을 하며, 남자는 매일은 못 보나 간간이는 볼 수 있음을 기약하지만, 다수 부녀들은 영영 작별이 되고 마는지라 차마 잊지 못할 이도 많았다. 구강동을 오니 동 중 호세(戶稅) 등급에 아주 2등은 되었다.
이때 구강에 와서 소유로 있는 집은 정결한 한 채의 기와집으로 해마다 이엉을 엮어 이어야 할 걱정이 없어졌다. (이때의 기상을 기록하니,)
어래산이 주산으로 뒤으로 내응하여
형제봉이 안대로서 안강들이 앞이되고
서으로 자옥봉은 백호밖에 솟아있고
동으로 설창산은 청룡낮아 멀리뵈고
구성이 앞에있어 촌명이 구강이요
나의집 볼작시면 장관을 뉘알소냐
뒤으로 죽림이요 앞으로 못이로다
십리안강 너른들은 농가일석 들어있고
영천흥해 통한앞길 상고매가 오락가락
사업에 벌린몸이 지취가 한가하니
산에올라 들구경은 날로소풍 잠깐하고
집에는 서책을위우하니 고금사적 흥망일다
부귀는 변복장이요 세월은 여몽경이라
처자에 낙을부쳐 화락담화 경계할제
명주비단 고운옷을 아주작정 부려말고
칠팔성 무명옷은 초야증민 직분이요
좋은고기 맛좋은음식 아주작정 생각말고
마음편코 몸편하면 이아니 낙일손가
청당을 수쇄하고 북창에 누웠으니
도연명은 안재재며 호중천지 어디런고
엄자릉의 남은뜻은 조대가 이아닌가
공명은 운유수요 부귀는 부운(浮雲)이라
창전(窓前)의 행화꽃은 봄소식이 가는구나
애석촌음으로 광음을 돌아보니
처자같이 내몸으로 어찌해야 늙지 않을까
이같이 세월을 보내니 부인 강(姜)씨가 주(主)가 되어 살림살이하는 범절이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평안함이 있었다. 규모가 있으나 없으나 걱정 근심을 말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소중하게 아끼며 넘칠까, 없을까 귀중을 지켰다. 청방(廳房, 대청)을 나날이 청소하여 심지어 간간이 발판을 놓고 집 서까래까지 걸레질을 하였다. 집 안의 백 가지 물건을 놓고 얹는 것이, 나고 드는 것이 허실 없었다. 규모에 변경이 없고 흘린 곡식과 밟히는 물건이 없었다. 원장(垣牆, 울타리) 안 채소밭은 가꿀 때를 찾아서 자주 매니 가는 비가 온 후에는 화초로 보였다. 불시에 손님이 오면 사람 보아 대접하는 범절이 바르고 알리지 않았는데도 곧 하여 두었던 것같이 들여왔다. 남자가 되어 간혹 말 못할 시장할 때가 있으면 어찌 그리 용케 아는지 양(量)도 허비 없이 부지중 별식이 거의 한 때가 많았다. 친구와 종유(從遊)하다가 밤이 깊어 돌아와서 침방 사처에 누워 있으면 손을 끌어내어 사람이 알 수 없는 암암 중 별식을 내어놓았다. 일이 있어 출타하면 밤중마다 정결 목욕하고 샘물을 길러 반에 받쳐 놓고 우리 바깥주인이 만사여의 태평으로 하여 달라고 하늘께 축원을 한 번도 아니할 때가 없었다. 어찌 그러하던지 차시에 학초가 마음 내어 출타해 보는 일이 안 되어 본 일이 없었다. 학초가 성내로 관재(官災, 관아의 착취)가 많아 영읍(營邑) 간에 가서 근심으로 지내다가, 만일 꿈에 강씨가 밤중 전에 보이면 그 다음 날 오전에 영락없이 해결되고, 밤중 후 새벽 전에 꿈속에서 만나면 그 다음 날 오후에 영락없이 일이 되었다.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에 땔감과 식량을 바깥주인이 주선해 주는 요량보다 안주인이 항상 여유가 있었으니 그 여지에 저축은 당연지사라. 주색잡기 안 하는 남자라면 불가불 토지도 사고 으리으리한 집도 가지게 되는 바라.
여혹 알지 못하는 일에 학초가 걱정을 하면 따뜻한 위로의 말로 대답을 하며, 잘못함을 겸해 따뜻한 말로 웃으며 대답하니 집안 가득 화기는 그 가운데 있지 않을 수 없었다. 바깥주인의 명령이라 하면 못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때를 찾아서 자식 병일이 글 읽으라는 지성스러운 권유는 기출에도 더할 수 없고, 찾아 없으면 일일이 불러 손을 이끌고 들어오며 독서하라는 경계가 옛날 역사 속의 모범 부인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홍천동 회계사에 있는 전정국이라 하는 사람에게 집에 땔감으로 때는 찬목을 단골로 값을 지정하고 이어 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식전에 찬목을 져다 부엌에 쌓아 주고 마당에서 부엌에 불 때는 것을 보기 위해 아니 가고 장구히 서서 보고 있었다. 이때 학초가 외당(外堂)에서 그 거동을 보고 불러 연고를 물었다.
전정국이 말하기를 “탄복하고 모범할 일이 있나이다.” 하니, 학초가 “무엇을 보았는가?” 하였다. (전)정국이 말했다.
“부엌에 나무를 때자면 상농군(上農軍) 하나 부족이요, 두 개의 방에 불을 때자면 상머슴 둘이라야 당한다 하니 상머슴 둘이면 일 년에 곡식 15석은 해야 그 둘을 먹이고 또 의복과 돈을 엽전으로 계산하여 섭섭하지 않게 주고, 전곡은 계산 밖에 두고라도 열닷 섬 곡식을 안강들 논으로 말하면 열 마지기 사서 남을 주어 반분하여도 넉넉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살림살이가 금년에 이같이 하고 후년에 그같이 하고 보면 자수농업 아니하는 집은 못 배겨 납니다. 우리 조모가 생전에 하신 말씀이 ‘가모(家母)가 되어 부엌에 불을 땔 때 나무를 꺾어 부엌에 던지기만 하거나 불을 다 때고 부스러기 등속을 뒤로 쓸어 비질하고 부엌으로 몰아 아니하거든 그 집안이 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오늘 댁에서 불 때는 것을 보니 깊은 부엌 바닥을 돌로 구들같이 높게 놓고 그 위에 불을 부지깽이로 들고 넣으니 필경 다 넣고 비질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필연 저같이 하시는 이가 비질을 그 부엌 돌 밑으로 할 듯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댁에서 본 것은 (탄복할 일입니다.) 이 한 가지를 보더라도 만복지원(萬福之源)이 불문가지요, 속설에 조그마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는데 부엌 하나가 한 소실 생사문이올시다. 이 같은 생각이 나서 연락으로 대는 촌목에 혹시 화도 남아 있게 이상도 하더니, 주(主)가 되신 부인이 인수 중에 어래산 같은 나무가리와 안강들 논이 소유가 타처까지 범할 것입니다.”
학초가 웃어 보내고 늦은 시각에 부엌을 살펴보니 과연 전정국의 말과 같이 하였으니, 이 같은 부녀의 규모를 자랑할 수는 없고 심독히 보고 지냈다.
이때 학초가 을미, 병신, 정유 이 3년간은 타향에서 지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의 근본과 재능도 서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 동란 후에 또 의병 난리로 상하도(上下道, 경기 및 충청도, 경상도) 및 각 군 내왕이 막히었다. 경주 사람으로 말하면 대부분 가정이나 지키고 있었고, 시절이 연풍(年豐)하고 학초의 객중 생계가 잘못되었다 할 수 없었다. 세상만사를 운외청산으로 던져두고 한가하고 정결한 집에 젊은 처자로 벗을 삼아 의식에 얽매임이 없었다. 초로인생이 분수를 지키는 것이 낙일 듯하여 다음과 같이 낙빈가(樂貧歌)를 지었다.
시절은 태평하고 이몸은 한가하니
재미는 무엇이며 소업은 무엇인고
신롱여읍 설약하여 거세인정 촌탁하며
내인거인(來人去人)허다인을 거취수접 제중후에
한가한 그가운데 옛글을 구경하고
산에올라 들구경은 장관으로 들어보니
이때는 칠월이라 농사가 한창일세
농당 일서석에 칠우성이 상반하고
옆의남교 에서나는 농가를 들어보고
앞길에 내거(來去)행인 채질하는 말꾼들
마상에 길로앉아 소리를 부르며간다
농상에 그재미가 제각기 낙이로다
집으로 돌아오니 청풍지 북창하니
한가로이 누웠다앉았다가 연소처자 낙을부쳐
두어말식 경계하되 천석만석 부러워말고
마음편코 몸편하면 이아니 낙일손가
싫은소리 하지말고 싫은일 하지말며
부귀를 부러워말고 빈천을 낙을삼아
길삼않고 옷을입고 농사않고 밥을먹고
초부없이 섶을띄고 와가(瓦家)라 개초않고
양처를 둔뜻은 셋몸을 편케할제
괴로운일 인내하고 급한일 같이하며
병들제 서로수발 생산적일 서로수발
어린자식 길러낼제 승가하니 정구지역
이상어이 태평하리 환란상구 이중이라
한임금 조정이라 한가장을 수발하고
일천하에 비가오니 가지가지 있으리라
형제동기 있다한들 이같이 활짝손가
비복이 있다한들 이같이 살뜰할손가
호구가 일락새니 이몸하나 있은후에
곤액(困厄)도 운수이고 영귀(榮貴)도 운수이니
믿는바 하늘이라 백년광객 이몸이니
부디부디 잊지마소 부디부디 잊지마소
하물며 타관이라 조심할일 많으리라
평사에 백로같이 찬물에 기름같이
몸은 평초같이 뜻은 죽절같이
홀연히 생각하니 세사는 편몽이라
반평생 넘었으니 이같이 한번가면
다늙는다 다늙는다 절로절로 늙어보세
사람이 세상에 처하여 무슨 이치가 그러한지 편하면 걱정이 생기고 먹을 것이 있으면 도적이 생기고, 친할 만하면 해할 마음을 먹는다. 이때에 의병 난리가 평정되고 시절이 풍년이 드니, 각 곳에 가깝고 먼 곳이 모두 서로 상통이 되었다. 간교한 인심이 새로 나서 각 영문 각 군수와 친하고 친하지 않고를 떠나 아는 면을 통해 무단으로 수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