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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김영훈을 만나 재산을 되찾음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면, 예천읍(醴泉邑) 삼문(三門) 밖 나서면 오른편에 ‘안동집’이라고 부르는 (술집이 있었다.) 본래 안동에서 살 때 죽산(竹山)이라 하는 집 계집이 있었으니, 그 내력은 죽산에서 살 때 도적의 계집이었다. 그 도적이 안동에서 영장에게 잡히게 되었다. 감옥에 있을 때 남편을 따라 안동에 와서 당시 안동 영장 도군뢰(都軍牢) 하면 그들의 세도이다. 도적을 잡아와 감독함에 관계한 도군뢰인 석대흥(石大興)과 친근히 지내더니 그 도적은 죽고 석대흥의 첩이 되었다. 안동에서 주식영업(酒食營業)을 하는데 자색이 절등이라고 할 듯도 하고 언어 수작의 조화가 능청하여 족히 피차 청년 장부의 오장을 낚을 만하였다.
 안동군(安東郡) 신성동(申城洞) 김영훈(金永勳)이라 하는 사람의 칭호는 석여이다. 그 아비는 변변치 못한 목수(木手)이었으며 솔미장(松美場)이라 하는 장에서 자물쇠[鎖鑰] 장수로 (생활하였다.) (김영훈은) 가정의 빈한을 견디지 못하여 약간 배운 문필은 있었으나 과거를 볼 자력이 없어 전전걸식으로 서울에 가서 각 대신의 집 청지기도 하고 귀인 자제의 글 사장도 되어 차차 경성에 발연이 늘어갔다.
 당시 풍속에 시골의 각 군 관아 중에 출입을 하면서 서울의 사환가(대대로 벼슬한 집안)나 대신 세도 집을 출입하면, 관원을 아는 친구 조관의 두호(斗護, 청탁) 편지를 얻어 부치고, 이같이 지면을 연락하여 협잡하여 해인비기(害人肥己)함에 많은 돈도 비밀히 얻기도 하였다. 심지어 매관매직의 소개도 하고, 엽전 당시라 환전의 소개비도 크게 먹고, 벼슬에 공명첩지(空名帖紙) 매매 등의 일에도 관여하였다. 없는 자는 인연하여 그 족척에 족징(族徵)하기, 각 군 이속의 소임개차(所任改差) 청탁하는 금전이며 사문사 존문에 밀고 빼기에도 관여하였다.
 능청스럽고 교활한 수단이 어찌나 굉장하던지 서울에서 조정에 벼슬 나는 관보를 보고 그 아비와 이름 같은 자인 전라도 사람 감찰하는 걸 보고 함창 사람 김무경으로 손을 빌려 감찰 교지며 국보를 위조하여 그 부친을 감찰로 행사시키니 집에는 부모를 속이고 나라의 임금을 속인 자라 그 외 제반 행장을 어찌 다 드러내 말하리오.
 (김영훈이) 경향 각 군을 드나들 때 안동부사 오주경과 경상어사 김사철(金思轍)도 각기 다 김영훈을 잡아 엄장 가수(枷囚)하여 놓고 죽이려 하다가, 경성 각 대신의 편지가 매일 답지하여 김영훈의 세력을 막지 못하고 남겨 두었다.
 김영훈이 안동을 오면 석대흥의 집에 단골 식주인으로 있어 죽산집과 통하였다. 석대흥은 진영 군뢰로 관문에 (몸을 담고 있으므로), 낮에는 집에 들어오기 드물고 밤이면 집에 들어오는 날이 간혹 있었다. 집에 들어와 자는 날도 새벽 미명(未明)에 입번(入番)을 가는 터라. 그간 빈틈은 오로지 김영훈의 차지가 되었다. 간통에 점점 정이 깊어 가끔 보는 석대흥을 남편으로 대우할 마음이 없어 두 사람의 눈에 갈이 끼던 차에 하루는 석대흥이 감기가 들었다. 약을 지어 먹을 제 사약을 겸하여 복용하게 하여 죽여 없애고 그 집 석대흥의 가산집물과 계집까지 몰수해 가졌다.
 예천읍에 이사해 색주가(色酒家) 영업을 하니 이것을 안동집이라 하였다. 김영훈의 본집은 간실이라는 촌에 이사해 있고 서울에는 첩도 있다고 하였다. (김영훈이) 출몰하고 없을 때는 죽산집이라 하는 사람은 자태 아양에 청춘을 농락하는데 예천 한 읍에 유수한 세력 아전을 제각기 통간의 정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민·형사 청촉(請囑)에도 비밀 세력가와 통할 만하니 각 군수 대신 체결 좋은 김영훈의 첩이라. 겸해 비밀인 듯 완연으로 유수한 관리의 정합실(情合室)이라. 간부 중에도 특별히 말주변과 교태뿐 아니라, 동란 때 집강리의 장문건과도 정분이 적지 아니한 친구이다.

다음 이야기로는, 개명(開明)한 세계는 재판소에서 개인의 사형선고를 제일 두렵게 생각하지만 이왕조(李王朝) 당시는 어사의 출도이다. 그 다음 영문관지라 하면 그 사건에 대하여 비단 군수 관속뿐 아니라 산천초목도 덜덜 떨며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이다. 이때에 박학초의 일로 감영 관지(官旨)가 거듭 두 번이나 도달하니 관정과 각 관청이며 소위 집강소와 수근수근 의논한 끝에 죽산집에 모두 모여 걱정을 하던 차에 김영훈(金永勳)도 서울에서 와 함께 모인 때였다. 제각기 아는 대로 좋은 형편을 생각하니 박학초의 부친이 서울서 충훈부 도사 벼슬이라 이비사과로 이력할 때 서울 주인이 김영훈의 소가(小家) 주객 지점에 남다르고, 학초의 재종 박춘래(朴春來)와 김영훈은 모두 경상감사 집과 친근한 사이인데 그 사이가 언층 계종(繼蹤)할 만하였다.
 죽산집의 조화로 집강소 재산 뜻대로 많이 받아 놓고 김영훈이 무사하게 박모를 누이고 영문에 소를 그만 내게 하기로 담당하고 그 청촉(請囑)의 (대가로 받은) 재산은 평생 최상으로 받아 놓고 의기양양하게 대구에 와서 감사에게 말하였다. 박모의 물건을 관지(官旨)대로 다 내어주었으되, 박모의 종적을 아직 만나 보지 못하여 영수증을 못 받아 기다리는 중이라 하고 학초가 영문에 오기를 기다렸다.
 1895년(을미년) 2월 13일에 대구 징청각 뒤 소리재에서 만났다. 학초가 김영훈을 대하여 먼저 말을 꺼내었다.
 “예천 집강 사람의 일을 전부 영훈 씨가 일일이 찾아 담당하였다 하니 그 전말(顚末)을 묻습니다.”
 김영훈은 “들으니 난리를 피하여 경주에 가서 우접(寓接)하였다니 다행한 일입니다. 예천의 일이야 우리 정분 세교(世交)에 범연할 일 없으니 가산집물이야 여의하게 찾을 수 있었다마는 찾은 걸사 어찌 경주까지 멀어서 가져갈 수 없고 토지는 매매 못하고, 또 돌돌 말아서 지고 가지도 못하고 보관하여 줄 것이니 염려 마시오.”
 하거늘 학초가 대답하여 말하길 “당연히 그럴 터이지요. 토지는 매년 추수 날 때 반분(半分)하여 감독 수고하여 주시고, 집은 신태성이 보관하도록 해 주시오.” 하고 피차 신신으로 분수작별하였다.

각설(却說) 새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면, 1894년(갑오년) 동짓달에 대구를 내왕하며 세상에 처신할 곳을 정하지 못하고 학초의 재종제 박진사 영래(英來)로 인하여 실인(室人, 측실) 강씨 부인(姜氏夫人)을 데리고, 우선 피난하여 상주군(尙州郡) 주암동(珠岩洞)에 같은 족인인 선준의 집에 한 칸 방을 얻어 잠적하듯 살면서 세상 동정을 경력할 때였다. 하루는 재종제 박 진사가 바깥소식을 들고 들어왔다.
 “정기 통문에 의하면 이달 20일로 각 읍 동학이 상주에서 대도회를 연다 하니, 형님이 다시 한 번 가서 구경을 하시고 다가올 일을 정하여 예천 집강을 잡아 친히 문죄하여 보십시오.”
 학초가 대답하였다.
 “그대가 앞으로 다가올 내두세사(來頭世事)를 알지 못한 것이다. 설혹 한번 신설(伸雪)하더라도 그 뒤에 또 일어날 일의 득실을 예산하는 지사(智士)의 처세가 결국 아니 될 이유를 들어 보게. 내가 본시 참 동학에 탁적(託迹)한 것이 아니라 진부(眞否) 간에 이미 의무가 있으면 농가성진(弄假成眞)됨도 있었네. 하지만 동학의 본 취지가 유불선(儒佛仙) 삼도인데 고금 천하에 선비나 부처나 신선이 어디에 다중 취당하여 인민 간에 어디 서로 공격을 하는 데가 있으리오. 일점 선비가 인민을 대표하여 혹 취당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부 명령 없이 난동하면 인인이 주지를 얻어 들은 법에 용서가 없을 터. 설혹 나라가 무법하여 도탄에 빠진 생령이 창의를 하더라도 초한(楚漢) 시절에 한패공(漢沛公)이 의제(義帝)를 발상 거병하는 일이나 삼국(三國) 때 조조는 심중의 의중은 달라도 천자(天子)를 옆에 끼고 말할 때마다 천자 영(令)이라 하였느니라. 항변하는 사람에게 망망한 기호를 세우거니와, 현시 동학은 패망 후 다시 타국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아직은 정부가 반대하며, 서쪽의 청국과 동남의 일본의 정부와 동심(同心)하니 만일 다시 동학에 탁적(託迹)한다면 일이십 년 내에 조선 땅에 신명을 보존 못할 것이다. 중간에 하도 동학이 작폐하기에 그때는 우선 제어할 사람이 없을 때에 한 번 장부의 용단으로 생민을 구제하고 오천 칠백 칠십여 인은 실심(實心)으로 나와 같이 귀화한 결심 이상에 다시 어찌 반복하리오. 금번 상주 대도회가 자연 무효되어 귀가되리라.” 하였더니 그 후 소문이 과연 처음과 끝이 같지 아니하였다.

박학초실기(朴鶴樵實記) 권지일(券之一)

(번역:박종두)

주석
해인비기(害人肥己) 해인비기(害人肥己):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롭게 함.
공명첩지(空名帖紙) 공명첩지(空名帖紙):성명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으로 부족한 국고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 관서에서 발행된 첩지.
소임개차(所任改差) 소임개차(所任改差):관아의 하급 관리인 구실아치의 업무를 정하거나 바꾸는 일.
김사철(金思轍) 김사철(金思轍):184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유(子由),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1878년(고종1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882년 홍문관응교,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당시 활발해지기 시작한 외교 사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이어 용강현령(龍岡縣令)을 거쳐서 1890년 외무참의(外務參議), 1890년 9월 13일 경상도 선산부사겸 경상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1893년 일본 주재 변리공사(辨理公使)로 있다가 귀국 후 형조참판을 거쳐 1894년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계종(繼蹤) 계종(繼蹤):뒤를 잇다.
소리재 소리재:원문의 ‘素理齋’는 ‘素履齋’의 오기이다. 경상감영과 대구부 부속 건물인 호막(戶幕)을 소리재라고도 한다. 호방의 막사이며 4칸이다.
우접(寓接) 우접(寓接):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삶.
농가성진(弄假成眞) 농가성진(弄假成眞):장난삼아 한 것이 진심으로 한 것같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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