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마정기(蓬麻亭記)
고종 39년(1902) 임인년 봄 정월에 나는 부계(缶溪)에 사는 친구 신경사(申敬士)를 찾아갔다. 부계는 곧 의흥(義興)의 옛 이름인데, 정자가 날듯이 시내가 위에 자리하여 동으로 향하였다. 규모와 배치의 대략은 볼 수 있었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그 편액이 없어서 물어보니,
“정자는 옛적 임진년에 지었는데, 우리 종조숙부(從祖叔父) 완신공(緩愼公)의 여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늘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덕을 향상시키고 업을 닦는 것이 오직 강습에 있고, 강습의 공(功)은 또 벗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서 나를 알아주는 지기(知己) 또한 드물다. 그대는 어찌 나를 위하여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남긴 일들을 기록하여 훗날 돌아보고 생각하는데 일조(一助)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아, 나는 졸렬하고 글이 부족하다. 그러나 일찍이 들으니 쑥대는 삼에 의지하기 때문에 곧다고 한다. 쑥과 삼은 화초로 볼 때는 별로 감상할 것은 없으나 붕우를 취하는 방도에는 크게 밝은 증험이 되니, 어찌 세속에서 숭상하는 종려나무나 작약(芍藥)과 똑같이 말하겠는가.”
라고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를 기록하였다.
달성(達城) 서한기(徐翰基)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