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신축년(辛丑年, 1901년)에 이용구 공은 의암 손병희와 함께 몰래 일본으로 가서 처음에는 나가사키(長崎)에 정박했다가 전전하여 오사카(大坂)에 이르러 몇 달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였다. 이 해 6월에 구암 김연국이 양구군(楊口郡) 사명산(四明山)에서 붙잡혀서 경사(京司)로 압송되었다. 이용구 공이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였으나 석방 받지 못하고 끝내 종신역(終身役)에 처해졌다.
10월에 이용구 공은 재차 일본에 가서 손병희를 만나 시천교(侍天敎)에 관한 일을 상의하고 몇 달 만에 귀국하여 각지를 돌며 포교하니, 교도들이 날로 달로 증가되었고, 이에 갹출한 돈이 20여만 환이나 되었다. 총명하고 준수한 청년 40명을 뽑아서 일본에 보내 유학시켜 후일의 수용에 대비하였다. 이때부터 이용구 공은 빈번히 도쿄(東京)를 왕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