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도다! 건원(乾元)이여!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하민(下民)에게 내려서 임금을 일어나게 하고 스승을 일어나게 하였으니 오직 상제를 도우라”고 하였다. 임금은 교화(敎化)와 예악(禮樂)으로 만민을 교화하고 법령과 형벌로 만민을 다스린다. 스승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으로 후진을 가르치며 인의예지(仁義禮智)로써 후진을 완성하게 하니 모두 상제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아아! 우리 도인들은 이 강서를 공경히 받으라.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때를 보존할지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늘을 공경하라는 것이다. 『맹자』에 이르기를,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늘을 믿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하늘에 죄를 짓지 말며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임금에게 죄를 짓지 말라. 만물의 생장함이여, 참으로 넓고 크도다. 화옹(化翁)의 거두고 간직함이여, 저절로 때가 있고 저절로 때가 있도다. 물의 깊고 깊음이여, 가물어도 또한 끊어지지 않도다. 나무의 뿌리가 견고함이여, 추위에도 죽지 않도다. 도깨비가 낮에 나오는구나. 저것들이 도대체 무슨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벌레가 구멍 속에 있구나. 저들이 또한 정말 앎이 있겠는가? 고목이 봄을 만났구나. 참으로 좋은 시절이로다. 부처가 견성(見性)하였구나. 정성스럽고 정성스럽도다. 이것을 알고 또 알지어다.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라. 간교하고 잡박하구나. 이것을 알고 또 알지어다. 주인되는 이가 어찌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상제를 도우라. 그때에 신사는 손병희・손천민과 함께 강서(降書)의 뜻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지에 인류가 있으면 저절로 도덕이 있어서 인류를 지켜서 편안케 합니다. 이 때문에 요순(堯舜) 우탕(禹湯)이 천명을 받아서 임금이 되어 도덕으로 천하의 만민을 다스렸고 공자(孔子)・맹자(孟子)・안자(顔子)・증자(曾子)가 가르침을 전하고 법을 베풀었으며, 또한 도덕으로 천하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며, 송나라에 이르러서 도학(道學)이 다시 떨쳐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가 중국을 그대로 본떠서 거문고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들리고 교육이 고을마다 번창했습니다. 의관 제도와 예악 문물이 눈부실 정도로 기술할만 하여 천하에 으뜸이어서 더 보탤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이것을 벗어나서 조용히 의리에 나아갔습니다. 아아, 어둡고 어두운 세월이 30년에 이르렀어도 큰 원통함을 풀지 못하니 우리들이 하나같이 섬긴 의리로 볼 때 뼈와 피에 사무친 그 원통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소장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우리들이 성심으로 수도하여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한 이유가 천하에 포덕하고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것 말고 결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소장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지금 합하(閤下)께서 북쪽의 임금과 근심을 나누고 남쪽의 땅에서 기풍을 보이니 신명 아래에서 윤리를 어그러뜨리는 무리들이 자연히 자취를 감추고 사도(邪徒)를 만드는 간신의 무리들이 자연히 두려워 복종하니 무엇 때문에 이 도를 의심하여 우리들에게 거짓 학문을 한다는 죄목을 씌웁니까? 우리들이 성스러운 스승의 훈도의 힘으로 아직도 경외심이 남아 있고, 의무를 복종하여 관청에 세금을 내는 것과 개인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을 잠시도 늦추지 아니했고, 지난 과실을 참회함에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두렵고 두려워 하면서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짊어졌으니 저희들의 근심이라면 이것뿐입니다. 밭을 가는 자는 밭을 갈고 글을 읽는 자는 글을 읽을 때에 더러운 옷과 거친 음식으로 단지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고 도를 닦는 것을 알 따름입니다. 어찌 소인배들이 합하에게 고자질하여 이와 같은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이 추운 겨울에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게 하면서 죽을 지경에 몰아넣어 사람의 지어미를 과부로 만들고 사람의 아비를 홀아비로 만들며 사람의 아들을 고아로 만드는 짓을 이렇게 저지른단 말입니까? 소장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단단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입니다. 만약 합하께서 밝게 정사를 펼치시는데도 필부필부(匹夫匹婦)가 그 살 곳을 얻지 못한다면 근심이 되는데, 하물며 많은 무고한 도인들이 홀로 합하의 은택을 입지 못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인자함을 베풀어서 바깥 고을에 갇혀있는 여러 도인을 모두 풀어주시고 임금에게 이를 알려서 선사의 지극 원통함을 풀어주십시오. 당시 관찰사는 조병식(趙秉式)이었는데, 전혀 돌보아 주거나 도와주지 않고 도리어 제사(題辭, 재결한 회답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계기로 창설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정학(正學)이 아니요, 곧 이단이다. 양자(揚子)도 아니요, 묵자(墨子)도 아니고 분명 사학(邪學)의 남은 무리이다. 양자와 묵자와 맞서는 말을 하면서 성인의 무리라고 말하고 있으니 법에서 어찌 금지하지 않겠는가? 너희들은 바름[正]을 버리고 사도(私道)에 물들어서 양민을 그르치기 때문에 조정에서 법을 만들어 금하는 것은 참으로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지금 감영에서 유배를 보내고 관문(關文)을 보내는 것은 실로 조정의 금영에 따른 것이요,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사도에 물든 무리로 혹은 금지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혹은 소장을 써서 올리니 기강이 풀어짐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어찌 통탄치 아니하겠는가? 금지하고 금지하지 아니함은 오직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감영 또한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받들어 행할 뿐이다. 실로 우리 감영에 와서 호소할 일이 아니니 너희들의 무엄함을 엄하게 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관에 호소하는 백성이어서 특별히 용서하노니 모두 알고 곧바로 물러가서 각각 생업에 편안하게 종사한다면 비단 너희들이 양민이 되는 것이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다행일 것이다. 그때에 수령이 된 자들이, 부자들을 무고해서 동학에 들어갔다고 말하면서 재물을 토색하였으며, 교예배(校隷輩)들이 관의 사주를 받고 금령을 빙자해서 도인들을 침학하고 양민에게 사납게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팔도가 시끄러워지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던 것이 참으로 일찍이 나라에 없었던 풍랑이었다. 동학에 대한 금지는 이미 엄한 감결(甘結, 지시 공문)에서 내린 바가 있다. 이것은 사전에 금지하고, 금령을 범한 자에게 죄를 주는 것은, 금지하여 양민으로 교화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그러지 못하여 심하면 수령이 된 자가 동학을 보기를 함정처럼 여겨서, 부자들에게는 거짓으로 얽어매어 재물을 토색질하고 뇌물을 받는다. 각 읍의 교예들은 금령(禁令)이라 이르고 백성들을 침탈하는 일들이 참으로 항상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잘못 걸려든 자들이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다. 참으로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그 죄를 어찌 다시 논할 수 있겠는가? 한번 이 죄목을 얻으면, 스스로 믿음을 회개하고자 하나 어찌 다시 되돌릴 수 있겠는가? 아아, 이 무리도 또한 우리 임금이 길러준 생명이다. 잘못 양심을 그르쳐서 이교(異敎)에 깊이 빠졌고 대중을 속이고 풍속을 어지럽히니 그 죄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살펴보면 태반이 산야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정상을 살펴보면 또한 애처롭기도 하다. 지금 이들이 낸 소장은 실로 어쩔 수 없는 실정에서 나온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먼저 그들을 편안케 할 방도에 힘써서 무고한 백성을 살려줌이 실로 오늘날의 온당한 대책이다. 지금부터는 교예들을 단단히 타이르고 경계하여 일절 백성들을 침탈하지 않도록 하여 생업에 편안하게 하고, 깨달아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오는 자는 마땅히 큰 상을 주고 끝내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는 또한 어찌 죄를 줄 날이 없겠는가? 하회를 기다리면 또한 고칠 길이 열릴 것이다. 이런 뜻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서 방방곡곡에 게시하여 한 지아비 한 지어미라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이 제사의 회답과 관문은 10월 22일과 24일에 낸 것이다. 우리 동방에서 도가 무너지고 문(文)의 폐단이 적지 않았는데, 황천이 돌보셔서 우리 대선생을 내려 보내 무극의 대도를 주셔서 천하에 포덕하게 하였다. 불행히 갑자년 봄에 사도라는 모함을 당하고 대구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제자가 된 자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신원의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일 신원을 하지 못한다면 저승에서 훈도(薰陶)의 반열에 있기를 소원하는 것이 제자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리이다. 아아! 화를 입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큰 원통함을 신원받지 못하였으며, 우리 도를 믿는 자 가운데에는 큰 의리를 버리고 작은 이익을 좇아가며 바라는 것은 자신을 살찌우고 재산을 불리는 것이오, 기도하는 것은 지병이 저절로 나아지라고 하는 것밖에는 없다. 무지하고 몽매함이 누가 이보다 심하겠으며, 충성스럽지 못하고 의롭지 아니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도우(道友)들은 신원의 방편을 꼭 생각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결코 게을리 하지 말라. 이 달 27일 밤에 신사는 손천민(孫天民)에게 명령하여 또 경통문을 지어 각 곳의 도유에게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하늘을 이고 땅에 서서 선사(先師)의 은덕을 받으면서 도유로 이름을 삼은 자 가운데 누가 신원을 하고 분한 마음을 풀 생각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껏 30여년 동안 관에서 우리를 지목한 일이 너무 엄해서 두려워 엎드려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면서 늘 죄가 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도 하늘의 운수다. 오늘의 억울함을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알리고 또 완부(完府, 전주부)에 호소하려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이다. 각 포의 여러 두령들은 포소 안의 도인들을 모아서 일제히 삼례(參禮)도회소(都會所)로 오라. 만약 이 통유문을 보고도 곧바로 모이지 않으면 이는 은덕을 저버려서 스스로 사문을 내치는 것이오,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니, 사심이 의리를 해치는 것을 깊이 반성하고 이간질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듣지 말라. 11월 초 2일에 각지의 두령이 포(包) 안의 도인들을 거느리고 전라도 삼례에 달려왔는데, 그때에 대회에 참석한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의논을 끝낸 뒤에 단자 우리들은 사문(師門)인 용담 최선생이 상제의 밝은 명을 받아,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하는 도로써 장차 천하의 큰 덕을 펴서 물에 빠진 창생을 구제하려고 했습니다. 불행히 몸이 사학(邪學)의 모함을 당하여 대구에서 순도(殉道)하셨습니다. 아아, 원통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최선생의 문하에서 훈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원하고자 하는 그 일념이 잘 때에는 꿈에 보이고, 먹을 때에는 목구멍에 막히니, 한번 숨쉬면서 아직도 살아있으니 이 뜻을 어찌 조금이라도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백이숙제(伯夷叔齊)를 탐했다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우리 스승을 서학(西學)이라고 의심한다면 우리들이 비록 주륙을 당하더라도 맹세코 억울함을 푼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단자의 내용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들이 한을 마시고 고통을 참은 지 3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 지극한 원통을 풀지 못하고 큰 도를 밝히지 못하니 이게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실로 우리들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민활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단자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세속의 사람들이 이 도가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하고 풍문에 따르고 소문을 좇아서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공자의 학이 아니면서 별도로 도를 삼는 자가 한둘이 아닌데도 전혀 문제삼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의 동학에 대해서는 온 힘을 다 하여 배척하여, 걸핏하면 ‘서학, 서학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동방에서 나서 동방에서 배웠으나, 학문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게 배우는 것이라, 동이 어찌 서가 되며 서가 어찌 동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단자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비록 이단으로 금지한다고 말하더라도 일찍이 듣건대 양자와 묵자에 맞서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 말한다고 했으니, 맞선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양자(楊子)와 묵자(墨子)에 맞서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탐하는 자가 성인의 무리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단자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우리들은 모두 열성조(列聖朝)가 길러준 백성으로 옛 성인의 글을 읽고 임금의 땅에서 밥을 먹어서 이 학문의 뜻을 세운 자는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로워져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할 뿐이니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단자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지금 서방의 학문이 꿈결처럼 서로 날뛰어서 역적의 무리들이 임금 밑에서 나쁜 짓을 하고 무뢰배들에 이르기까지 서학에 몸을 맡기고 산골짜기에 무리를 모아서 백주에 대도시에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갈취하는 자들이 왕왕 있습니다. 선사의 예언이 오늘날에 징험해서 우리들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심으로 수도할 때에 아침저녁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천하에 포덕하고자 하는 큰 바람뿐입니다. 단자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특별히 저희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셔서 임금에게 알려 선사의 지극한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죽음을 구제하여 주십시오. 감사 이헌직은 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른바 동학은 곧 조정에서 금지하는 것이다. 이미 떳떳한 성품을 갖추고 있는 데도 어찌 바름을 버리고 이단을 쫓아가서 스스로 범죄를 부르는가? 지금 소장의 말을 살펴보니, 오히려 그것을 널리 펴려고 하고 있으니 더군다나 어찌 말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즉시 물러가서 모두 스스로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 잡아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다시는 미혹하지 말라. 도유들이 소장을 낸 지 대엿새 만에 비로소 이 제사가 나오자 모임에 온 모든 사람들이 더욱 울분해서 또 다시 올리자고 의논을 하여 이 달 7일에 다시 다음과 같은 소를 올렸다. 우리들이 소장을 올린 지 이미 엿새가 지났습니다. 각하께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리라 기다리면서 도로에 머물러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여 주림과 추위가 피부를 찌르고 구렁텅이가 바로 앞에 놓여 있지만 날마다 바라는 소망은 오직 신원을 하고 폭압을 금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각하는 제사에서 도리어 바름을 버리고 이단을 쫓아 스스로 범죄를 불러온다고 말했으며, 곧바로 물러가 모두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 잡아 새로운 길에 들어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하고 땅을 내려 보며 크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무슨 연고로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잡으려는 의리는 선사의 지극한 원통을 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사에게 배운 바는 오직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 효도하고 지성으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며, 유불선(儒彿仙)의 도를 합하여 성경신(誠敬信)의 과목을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은 우매하여 이와 같은 이단을 알지 못하며 또 이와 같은 정학(正學)을 알지 못합니다. 소장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지금 각 고을에서 애써 우리 도인들을 지목하는 화가 물보다 더 깊고 불보다 더 맹렬하여 수령 이하로부터 이서와 군교와 향간(鄕奸)과 토호들에 이르기까지 가산을 수색하기를 자기 것처럼 여기고 구타하고 학대하면서 조금도 돌보거나 꺼림이 없으니 슬픈 이 중생들이 호소하고자 해도 할 곳이 없습니다. 각하는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소장을 임금에게 올리고 관문을 여러 고을에 보내 선사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아전들의 폭행을 그치게 하여 주십시오. 수만 명의 도유들이 물러가지 않고 전주부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동학은 조정에서 금한 것이다. 영읍(營邑)에서 마땅히 조정의 금지 지시를 따랐지만 지금 들으니 각 고을이 금단을 핑계대고 돈과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한다고 한다.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어찌 조정에서 내린 조목에 있겠는가? 범한 자는 금지하고 죄를 지은 자는 죄를 주며 작은 것은 고을에서 재결하며 큰 것은 감영에 보고하여 처리해 우러러 조정의 법률을 따르는 것이 옳거늘 하물며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야 어찌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금지의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토색질한다는 이름이 있으니 정법에 비추어보건대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 감결이 도착하는 즉시 경내에 지시를 내려서 만일 미혹해서 그르치는 백성이 있거던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서 정학을 닦게 하고, 관속배의 경우는 꼭 낱낱이 그릇된 행실을 막아 비록 적은 돈이라도 혹시 탈취하는 폐단이 없게 하며 감결이 도착하거든 그 형편을 즉시 보고하라. 그때에 도유들이 이 관문을 보고 도회소로부터 의견을 종합하여, 신사에게 법헌(法軒)이라는 호를 바치고, 지금부터 한결같이 법헌의 지휘를 따르라는 취지의 통문을 팔도의 도인들에게 보내고 곧바로 해산했다.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금영(錦營)과 완영(完營) 두 감영에 호소한 것은 실로 대선생 신원을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수(河水)가 맑을 운수가 아직도 더디어서 도(道)는 비록 드러났지만 원통함은 풀지 못했다. 무릇 우리 도를 닦는 선비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배가하고 하늘에 빌고 스승을 사모하여 다시 법헌의 지휘를 기다려서 신원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들의 당연한 도리이다. 또 감영의 제사에서 이와 같이 유시하니 선비된 도리로서 당연히 집에 돌아가 수도하면서 길가에서 방황하지 말라. 통문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도회소에서 몇 가지 약속을 정하여 도인들이 이 뒤로부터 좇아야 할 규정으로 삼겠다. 만일 이 약속을 어기면 마땅히 함께 모여서 종을 울려 죄를 묻겠다. 이 통문은 손천민이 지었다. 또 완영의 도회소와 의논하여 경통문을 지어 팔도에 반포했다. 지금 대의는 세상에 내놓아도 어그러짐이 없고,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늙은이가 각 접에 통문을 내어 모두가 연달아 한꺼번에 나오게 하고 추후에 의리의 길(신원의 일)로 나아가려다가 도중에 낙상을 하여 해묵은 빌미가 연달아 일어나서 끝내 정성을 얻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송구하도다. 아아! 큰 운이 장차 열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질 때, 중생들을 위험에서 구제하고 대의를 장차 붙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사의 지극한 원통함을 아직도 풀지 못했으니 이는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한 소치이다. 바라건대 공경과 정성을 다해 잠시도 잠자리에서라도 해이하지 말고, 마음을 바르고 몸을 바르게 해서 신과 하늘에 죄를 짓지 말며, 어버이를 섬겨 효도하고, 법도에 따라 집을 다스리며, 때맞추어 부세를 내고, 이웃과 화합하게 사귀며, 반드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생업을 행하고, 반드시 주색잡기를 금하며, 국가를 위해서 만세무궁하라고 하늘에 기도하고, 성스러운 도를 붙들어서 하늘의 순리를 받드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통문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두 감영의 관문과 제사는 모두 읽어 봤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니, 한 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키고, 도를 따르는 마음은 죽음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경통문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복합(伏閤) 상소의 일은 지금 다시 도모하려고 논의하고 있으니 마땅히 하회를 기다려서 내가 지휘함이 있을 것이다. 경통문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지난번 대의의 길로 나갈 때 가산을 탕진한 자 이미 불쌍하고 가엾은 형편이 되었다. 집에 있으면서 사태를 관망하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잔 자들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있는 것 없는 것을 서로 도와서 집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게 하지 말게 하며, 멀고 가까운 지역에서 마음을 합해 이단에 이르지 않도록 하여 이 늙은이가 밤낮으로 근심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준다면 병도 나을 것이다. 이 통유문이 이르는 곳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멀리 법헌에 절하면서 감복하는 마음이 마치 신명이 곁에 있는 것 같이 하였다. 무릇 천하의 수도하는 선비들이 크고 작은 사사로움과 공정함을 가리지 않고 도가 도다운 바대로 해서 그 스승을 높이고 그 학을 숭배하는 것은 그 마음이 한가지이다. 세간의 한가한 무리들이 애매하고 어리석은 말로 사학이라고 지목하고 고을의 수령과 토호들이 돈과 재물을 토색질할 생각으로 도유들을 보고 재물의 샘으로 여겨서 각지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도를 닦는 선비를 일망타진하여 모조리 없애려고 하고 있다. 우리들이 두 감영에 소장을 보내서 장차 화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풀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만 명의 도유들이 두 번이나 도회소에 나가서 오로지 인의와 자비로 서로 돕고 지나는 곳에 한 터럭이라도 해친 바가 없었다. 근래에 들으니 서학을 믿는 사람들이 이치도 닿지 않고 근거도 없는 말로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장차 공중에 누각을 만들고 도당들을 불러 모아서 우리 도유를 섬멸한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기이다. 그러나 황천(皇天)이 위에 계셔서 하토(下土)를 내려다보시니 선악의 구분에 길흉이 따르는 것이다. 저네들이 비록 대포와 날카로운 칼이 수풀이나 산처럼 많이 있다 한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선을 닦고 우리의 도를 행할 뿐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저들을 두려워하겠는가? 서학이라 하는 것도 하늘이 낸 본연의 착함이 있을 것이니 어찌 근거 없는 말을 조작해서 공연히 동서의 교를 서로 해쳐야 하겠는가. 이것은 무뢰배들이 거짓말을 만들어 퍼뜨려서 스스로 제동(齊東)의 야인(野人)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코 믿을 것이 못되니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스스로 굳건히 해서 망동하지 말라. 그때에 (동학에 대한) 지목이 날로 심하고 각지의 탐관오리와 간향(奸鄕, 간악한 좌수와 별감)들이 침학하고 토색질하는 일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다. 전주 관찰사 이헌직(이경직의 오기)이 도유를 편안하게 살게 하려는 일로 또 여러 고을에 관문을 보냈다. 그 관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을 편안하게 살피는 일로 이미 감결의 지시를 보냈으니 편안하게 살지 못해서 그런가? 또는 처음부터 효유하지 못해서 그런가? 비록 사도에 물들었으나 이들을 양민으로 만들면 또한 우리의 적자다. 듣건대 각 고을의 교예들이 진짜 가짜를 가릴 것 없이 가렴주구에만 골똘하여 무리를 모아 시끄러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낱낱이 효유해서 그들을 안도하게 하고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토색질 하는 것을 금지한다. 관찰사가 포악한 행위를 금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관문으로 보냈지만 끝내 그치지 않았으며, 혹은 바람을 불어 불을 끄려는 자도 있으며 혹은 물길을 일으켜 파도를 도우려는 자가 있다. 원근의 인정이 더욱 시끄럽고 도유가 된 자들은 모조리 짐을 싸고 서 있어서 편하게 살 계책이 없었다. 우리 무리들이 근래에 두 감영으로부터 돌아와서 한결같이 법헌의 지시를 준수하여 팔도의 선비들을 모으고 육임의 이름을 가려내서 도소를 이 땅에 정한 것은 대선생을 신원하고자 하는 한 가지 때문이었다. 이 일은 시각을 늦출 수 없기 때문에 장차 상소를 하려고 널리 대중의 의논을 모아서 일을 논의하는 것이다. 각 곳에 사는 여러 사람이 풍문을 듣고 모여들어서 일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복잡해질 우려가 많았는데, 종일토록 맞이하고 보낼 때에 거의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이로부터 해당 두령의 수결(手決, 서명)을 얻지 못하면 마음대로 도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한결같이 약속을 따르라. 도회소에서 각지의 사정을 살펴서 정부(政府)에 장서(長書)를 만들어 보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도라는 것은 사람이 여기에 이름을 지은 것이니 같고 다름을 따지지 말고 모두 심지에 따라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것이요 헛된 이름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맹의 도를 행하는 자는 양자와 묵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요, 양자와 묵자의 도를 따르는 자는 공자와 맹자를 보고 다른 학이라 합니다. 이것은 공자나 맹자가 사도(邪道)이며 양자와 묵자가 바르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이단은 당시의 세상이 숭상하는 도와 같지 않다는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유교의 이름을 가지고 묵자의 행동을 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유교를 숭상하는 세상에서 그 숭상하는 바를 가리는 것으로 세상을 따라 이름을 좇는 자가 하는 짓입니다. 진실로 여러 사람들의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이름이 다르고 같은 것으로 그 마음이 사하고 정직한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유가를 따르는 자들과 불가를 따르는 자들과 도가를 따르는 자들이 각각 한 가닥으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그 폐단은 또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포덕 34년 계사년(1893년) 2월에 각지의 도유들이 다수가 모여서 대신사의 신원을 복합(伏閤)하자는 뜻으로 신사에게 알렸다. 신사는 이 일이 장차 잘 되지 못할 것을 미리 알았지만 대중들이 이미 모여 있는 것을 돌아보고 또한 곧바로 해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허락하였다. 이에 도유 수 만 여명이 상소문을 싸들고 상경하여 11일에 광화문(光化門) 앞에 나아가 엎드렸으니 그때의 소수(疏首)는 박광호(朴光浩)이며 제소(製疏)는 손천민(孫天民)이고 사소(寫疏)는 남홍원(南弘源)이었다. 각 도의 유학(幼學) 신 박광호 등은 머리를 조아려서 주상 전하에게 상언(上言)을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아플 때에 부모를 부르고 죽을 때 하늘을 부르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며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지금 이 신들은 모두 성상(聖上)과 천지와 부모가 길러준 적자(赤子)입니다. 이 질통(疾痛)으로 죽음에 임할 지경에 즈음하여 참람(僭濫)된 죄를 무릅쓰고 저희를 덮어준 하늘과 같은 임금에 호소하면서 이 지극 원통한 정상을 알립니다. 대개 군부(君父)의 앞은 실로 망언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삼가 빌건대 천지 부모는 특별히 살펴 주셔서 그 정을 알아서 그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면 이것은 신들이 장차 죽을 때에 다시 살려 주는 은혜입니다. 옛부터 성스럽고 밝은 제왕이 네 문을 열고 사방의 말을 들으셔서 사물로 하여금 그 성품을 이루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단 한 명의 지아비라도 그 살 곳을 얻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기 때문이며,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유행(儒行)으로 도에 두드러진 행적을 나타낸 자들이 혹 조금 형식을 밟고 성의를 세운 행실을 가지고서, 경적(經籍)을 표절하고 오로지 겉만 꾸며서 명리를 낚는 무리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선비라는 것은 국가의 원기이거늘 선비의 습성이 이와 같으니 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 하늘의 운행이 순환할 때에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대개 하늘이 한 종교를 내어 한 세계를 개량한다면 반드시 비상한 행동과 비상한 변화가 있는 것이다. 대신사가 이미 살아계시지 않으니 어찌 그 원통함을 풀 수 있으리오. 지금 이처럼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곧 여러 제자들이 구구하게 상정(常情)이 움직였기 때문이요 습속(習俗)에 이끌렸기 때문으로, 비록 어쩔 수 없이 일이 여기까지 밀려왔지만, 실로 신사의 본 뜻은 아니었다. 지금 상소의 거동은 사람의 상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대의 조치에 마땅하고 대의에 부합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만세에 도를 크게 펴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때의 세속적인 생각으로 신원(伸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옛 스승에게 절대로 거론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팔도가 뜻을 함께 하여 모든 사람들이 상소에 뜻을 같이 하였으니 이 또한 하늘의 명령이다. 상소를 한 뒤 3일 만에 조용히 물러가서 각자 생업에 종사하라는 분부를 받들었으니 임금의 타이름을 생각할 때에 마음 속으로 감격했기 때문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으리오, 고치는 것이 귀하다”라고 했으니, 여러 도인들에게 깊이 바라는 것은 사문께서 죄가 없지만 죄가 있는 것처럼 한다는 지극한 교훈을 항상 생각하여 악을 징계해서 선으로 옮기고 잘못을 후회해서 스스로 새롭게 하며 천명을 공경해서 우리 몸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함께 배우고 생각하고, 생각함을 같이하는 진전(眞詮)과 묘지(妙旨)가 또한 그 가운데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개 상서로움과 화난의 싹이 오로지 이 마음이 바르거나 바르지 못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니 열심히 힘써 부지런히 하여 원초(元初)의 적자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무위화기(無爲化氣)하는 자연의 이치에서 그 요령의 방법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거친 말을 비루하게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스스로 반성하여 무궁의 진리를 투시하고 무극의 대운(大運)에 참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때에 무뢰한 자제들이 혹 교도라 핑계대고 들어와서 백성을 흔들고 야료를 부리는 폐단이 있었고 본래 종도(宗徒)로 종사하는 자도 도를 믿는 것이 돈독하지 않고 도를 닦는 것이 정성스럽지 못한 근심이 없지 않아서 세인들의 지목을 불러 왔다. 신사는 글 한편을 지어서 문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효유하였다. 대개 나무의 뿌리가 굳건하지 못하면 바람을 만나서 쓰러짐을 면치 못할 것이요. 물의 근원이 깊지 못하면 가득 차서 앞으로 나갈 수 없으니 사람의 마음이 또한 이와 같다. 반드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반신반의해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업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필연의 일이다. 비유컨대 시골 사람이 서울로 갈 때에 짐을 꾸려 길에 올라서, 물을 만나서는 도망하기 어려우며, 마루를 만나서는 넘기가 어려우며, 갈래길을 볼 때에는 의심이 생기고, 험한 관문 앞에서는 공포심이 생겨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가는 것은, 마음이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물에 다다라서 건너며 마루를 만나서 넘으며 갈림길을 만나서 나아가며 관문에 당도해서 들어가는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일이 지체됨을 견디지 못하여 중간에 돌아가는 자는 그 의지가 성실하지 못한 것이다. 중간에 시일이 지체됨을 꺼리지 않으며 노고에 구애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또 가서 마침내 서울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견고하고 뜻이 독실해야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어찌 얄팍한 마음과 느슨한 행동으로 이 무극대도와 끝없는 진리의 참 경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 종도(宗徒)는 부지런히 힘쓰고 한결같이 받들고 섬겨서 오랜 공로가 한번의 실수나 부족함으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3월에 신사는 청산군(靑山郡)으로 가서 향례를 행하였다. 그때에 참례한 자는 손병희(孫秉熙)・박용호(朴龍浩)・이관영(李觀永)・권재조(權在朝)・임정준(任貞準)・이원팔(李元八) 등이었다. 향례가 끝날 때 여러 도유들이 틈을 타서 고하였다. “선사의 지극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각 지방에서 도유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조리 도탄(塗炭)에 빠졌으니 원컨대 선생은 보호할 계책을 지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사는 대답했다. “내가 지금 장내마을로 갈 것이니 제군들은 각 처에 글을 보내서 팔도의 도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장내마을로 모이게 하라”고 하였다. 〈번역 : 이이화〉
내가 또한 천도교(天道敎) 원조(元祖)이신 대신사(大神師)를 찾아 뵈었다. 대신사가 하늘이 맨처음 낸 신성한 분이다. 상제의 강화(降話)를 받들어 무위화기(無爲化氣)와 무극대도(无極大道)
그 계통을 이은 해월신사가 그 무덕(武德)을 밟고 그 정통을 받으셔서 밝게 소술(紹述)
신사(神師)의 성은 최(崔) 씨(氏)요, 이름은 시형
나이 겨우 다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열두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렵게 살아갈 때에 계모에 의지해서 목숨을 이어갔다. 또 가세가 아주 가난해서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로는 동쪽에서 심부름하고 서쪽에서 머슴 노릇을 하였으며, 때로는 아침에 방아 찧고 저녁에는 돼지나 소를 먹이면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했고 식사를 하며 찌꺼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 기질과 성품이 아름답고 용모와 행동이 빼어나서 사람들이 칭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열일곱 살에 조지소(造紙所)에 일을 나가서 생업으로 삼았다. 경주부에 사는 오씨의 딸이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가산이 매우 넉넉하였다. 어느 날 신사를 맞이하여 혼인을 하자고 청하자 신사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지조의 고결함과 기개의 뛰어남은 하늘이 내려준 넉넉한 여유에서 나온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신사는 흥해손씨(興海孫氏)의 문중에서 부인을 맞아들였다. 비록 둘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났으나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도 스스로 즐겨하면서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포덕 6년 전인 갑인년(1854년)에 신사는 식구들을 데리고 흥해에서 경주의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을 사람들이 신사의 공평하고 청렴하고 위엄이 있음을 보고 풍강(風綱)의 소임을 맡아달라고 신사에게 매달렸다. 신사는 사람들의 여망을 생각하여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그 소임을 맡았다. 전후 6, 7년 동안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 사람들의 아름다운 행동을 포창하여 온 마을이 그 덕을 보고 칭송하는 소리로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이 잘못된 정사를 펼치는데 오래 서로 교제하면 자신의 과오가 많을 것이라고 하여 드디어 그 소임을 그만두고 기미년(1859년)가을에 검곡동(劍谷洞)으로 집을 옮기니 마복동과는 거리가 5리가 넘었다.
포덕 2년 신유년(1861년) 6월에 신사는 용담대신사(龍潭大神師)에게 도를 받았다. 대신사는 신사와 동족(同族)으로, 상제(上帝)의 강화(降誥)를 받아서 무극의 참 도로 교문을 세우시니 원근에서 교를 받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신사는 이를 듣고 백지 세 묶음으로 예물을 대신해 용담정사(龍潭精舍)에 찾아가서 뵙고 절을 하고 입도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신사가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매달 서너 차례씩 사문에 가서 뵙고, 바깥으로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이로움을 얻고, 안으로는 마음을 전해 주는 비법을 받았다. 이와 같이 일곱 여덟 달 공부한 끝에 갑자기 마음이 깨끗해지고 신령을 깨달아서 곧바로 이기(理氣)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신사는 입도한 뒤 오로지 신앙에 정진하여 집안의 생업을 돌보지 않고 세속의 영리를 살피지 않으면서 문을 닫고 깊숙하게 앉아서, 때로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지성으로 주문을 외었다. 늘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공부를 돈독히 하는 자는 항상 하늘의 말을 듣는다고 하니, 나는 다른 기능이 없고 오직 정성의 힘으로 하늘을 움직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문 앞에 대나무 숲이 몇 뙤기 있고, 대나무밭 아래에 연못이 있는데, 그 깊이가 한 발 쯤 되었다. 그때에 한겨울이어서 연못이 꽁꽁 얼어붙었다. 신사는 항상 밤이 깊은 때와 사람들이 조용한 때를 틈타서 연못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목욕을 하였다. 처음에는 한기가 피부를 찌르는 듯하였다가 참고 견뎌내기를 두세 달 하자, 찬 얼음과 깊은 밤이 이미 신사의 정성으로 물러나서 항상 물이 따뜻하고 밤에 빛이 났다. 어느 날 밤에 신사가 연못 위로 올라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몸이 해를 입는 것은 차가운 샘물에 급히 앉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매우 놀라고 괴이해서 드디어 얼음물 속에서 목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포덕 3년 임술년(1862년) 정월에 신사는 늘 밤새도록 등불을 켜 놓았으나 남은 기름이 반 종지나 되었다. 다시 스무하룻날을 지냈지만 기름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마침 영덕(盈德)에 사는 사람 이경중(李敬仲)이 기름 한 병을 가지고 와서 바쳤는데, 시험 삼아 한 종지기에 담았으나 밤이 다하기도 전에 다 타서 없어졌다. 하늘이 나에게 주신 조화에 실로 자연의 이치가 있음을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신사가 전라도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신사가 가서 문후를 드리러 가고자 했지만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알지 못하여 뜻만 있고 실천하지 못했다. 이 해 3월에 이르러서야 묵묵히 마음이 맑아지고 대신사가 계신 곳을 생각하니, 대신사가 분명히 용담정자 위에 돌아오셨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서 두 마리의 닭을 사가지고 곧바로 가정리 최맹윤(崔孟倫)의 집에 가서 대신사가 돌아오셨냐고 묻자, 최맹윤이 대답하였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주부 아래에 사는 이무중(李武仲)에게 가서 물어보니, 이무중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북어 한 꾸미를 더 사서 백사길(白士吉)에게 다시 물어보자, 그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마음이 무척 상쾌하지 못해서 돌아오는 길에 언덕 위에 우두커니 앉았는데, 마음속으로 대신사가 분명히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박대여의 집으로 가면서 몇 리를 갔을 때 백사길이 뒤따라와 물었다. “공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였다. 신사는 대답했다. “선생이 박대여의 집에 오셨기에 내가 지금 그 집에 간다”라고 하였다. 백사길은 말했다. “누구에게서 들었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마음으로 느낀바 있어서 자연스럽게 알았다. 어디에서 들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백사길과 함께 박대여의 집으로 가서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대신사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방 밖으로 들렸다. 놀라고 기뻐서 들어가 뵙자 대신사가 말했다. “경오(敬悟)가 어디에서 듣고 여기에 왔는가?”라고 하니, 신사는 대답했다. “소자(小子)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느끼는 바가 있어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 도의 사람들 중에 누구를 막론하고 이곳에 오려고 하여 내가 지금 그 공부의 진취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네가 오는 것이 가상하도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또 말했다. “소자가 성의가 별로 없어서 공부가 부실했지만 선생님을 떠난 뒤 두 차례 이상스러운 일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자세히 말해 보라”고 하였다. 신사는 손을 맞잡고 일어나서, 등잔 기름이 없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얼음물이 차갑지 않은 이유를 낱낱이 말씀드렸다. 대신사가 기뻐서 말했다. “천문(天門)의 조화에 이치가 갖추여져 있지 않음이 없으니 네가 이미 천리(天理)와 자연의 큰 징험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도수사(道修辭)」와 「권학가(勸學歌)」 2편을 주었다. 신사가 이를 공경히 받고 돌아오니 이로부터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차츰차츰 몰려들었다.
이 해 6월에 「수덕문(修德文)」과 「몽중가(夢中歌)」 두 편을 대신사로부터 받고 이어 강원보(姜元甫)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머물렀다. 7월에 신사는 강원보의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신사는 포덕(布德)에 전념하기로 작정하여, 대신사가 맡긴 중책을 드러내며 상천(上天)이 내린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물이 없어서 살아가기가 군색스러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에 신사는 김이서(金伊瑞)가 있는 곳에 가서 포덕할 한 가지 일을 의논하고 곡식 수백 포를 밑천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김이서는 어려운 기색도 없이 말이 떨어지자 곧바로 허락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120석의 어음을 보내주어 신사가 마음대로 쓰게 하였다. 김이서가 의리를 즐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기풍과 도를 보위하고 덕을 높이는 정성은 실로 보통 사람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 이에 신사를 따라 교를 받고 입덕(入德)한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영덕(盈德)에는 오명철(吳明哲)・유성운(劉聖云)・박춘서(朴春瑞)가 있었으며, 상주(尙州)에는 전문여(全文汝)가 있었으며, 흥해(興海)에는 박춘언(朴春彦)이 있었으며, 예천(醴泉)에는 황성백(黃聖伯)이 있었으며, 청도(淸道)에는 김경화(金敬和)가 있었으며, 울진(蔚珍)에는 김욱생(金旭生) 등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현인들이 몰려들어 검동(劍洞)의 포덕이 널리 퍼져서 모두 외우니 김이서가 앞뒤로 도와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신사의 벗인 아무개가 마복동(馬伏洞)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신사가 하늘을 생각하고 묵묵히 앉아 있으려니 벗의 집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고 돈을 훔쳐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신사는 매우 기이하게 여겨 곧바로 가서 살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결국 도둑은 물건을 훔치지 못하고 달아났다.
신사가 조카집에 있으면서 묵묵히 앉아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때에 조카며느리가 바야흐로 병에 걸려서 더 심하기도 하고 조금 낫기도 하였는데 신숭동통(神崇疼痛)의 증세와 흡사하였다. 신사는 이를 괴이하게 여겼는데, 갑자기 눈앞에 어느 젊은 부인네가 어린애를 안고 중문에 들어와서 병풍 사이에 숨자 조카며느리의 병이 갑자기 지독하게 심해졌다. 신사는 집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본 것이 이와 같이 기이하니 무슨 연고인가?”라고 하니, 조카며느리가 말했다. “우리 형부가 일찍 죽고 젖먹이 아이도 죽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드디어 마음을 바로잡고 주문을 외우니 귀신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였다.
경주부에 윤변(尹弁)이란 자가 있어서 영장(營將)과 배짱이 맞아서 대신사가 잡혀가 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신사는 교도 십여 명과 함께 말을 타고 대신사를 모시고 갔다. 그때에 교인 6, 7백 명이 일제히 경주부 아래 모여들었다. 대신사가 곧바로 군영으로 들어가서 영장을 보고 큰 소리로 또렷하게 말하였다.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거느리는 것을 도(道)라고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이르니 내가 가르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이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영장이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곧바로 위로하면서 보내주었다. 신사는 대신사를 모시고 용담으로 돌아왔다.
10월 초에 관예(官隷) 30여명이 몰려와서 거짓말로 신사를 가리켜 힐문하였지만 신사는 그것이 관의 지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생마(生麻)한 묶음으로 그 무리들을 묶고 그 사사로운 악습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질책하였다. 관예의 무리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있다고 간절히 빌자, 신사는 그들의 결박을 풀고 잘 타일러 보내주었다. 이로부터 원근 사람들이 검곡(劍谷)에 장사가 있다고 칭송하였다.
11월 초 9일에 대신사를 모시고 손봉조(孫鳳祚)의 집에 이르러서 자리를 마련하자, 이튿날 각처의 교도들이 번갈아 와서 도(道)를 물었다. 대신사가 어린애들과 함께 처음으로 글자 획 쓰기를 하면서 두터운 종이 한 묶음을 다 사용하였지만 글자가 써지지 않았다. 대신사가 천옹(天翁)과 함께 비결의 시를 화답하여 ‘송송백백(松松栢栢)’의 글을 만들었다.
12월 그믐날에 대신사를 모시고 의논하여 각지의 포덕(布德) 접주(接主)를 정하였으며, 대신사를 모시고 설을 지냈다.
포덕 4년 계해년(1863년) 정월 6일에 대신사가 신사에게 말했다. “각 지방의 교우들이 규칙을 어길 염려가 있으니 네가 한번 순회를 하여 그들의 근면함과 게으름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흥해(興海) 용정(龍井)에 사는 박춘언(朴春彦)이 신사를 찾아 와 말했다. “내가 주문을 외웠는데 신령이 내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비록 목침이라도 강령을 할 수 있으니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음으로 강령 주문을 염송하니 박춘언에게 곧바로 신령이 내렸다. 이에 신사는 소리를 내서 주문을 외자 박춘언이 의관을 모조리 벗고 문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큰 강령(降靈)이 그치지 않아 입으로 부르짖었다. “하늘의 신령과 지극한 기운이 과연 이와 같지 아니하니 원컨대 선생은 이를 그만 두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사가 하늘에 고하자 강령이 곧바로 그쳤다.
6월에 대신사가 특별히 현판에 큰 글자를 써서 각처에 나누어 주고 또 도수사(道修詞)를 지어서 신사에게 보였다. 또 시를 지으니 시에 이르기를, “용담에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구악(龜岳)에 봄이 돌아와 한 세상의 꽃이로다”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도의 근원이 밝게 나와서 천지가 마음을 세우고 만세상이 태평을 열게 되는 그 조짐이 이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대신사가 신사를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삼고 신사에게 말했다. “천운(天運)이 마땅히 그대의 몸에 있으니 뒷일은 그대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잘 거두어들이고 보살펴서 나의 비밀스런 부탁을 본받고 나의 큰 도를 밝혀라”고 하였다. 신사는 놀랍고 두려워서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이 말을 하셨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말했다. “이것은 실로 천운이다. 나 또한 이 같은 운수를 어찌할 수 없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마음에 새겨 잊지 말라”고 하였다. 신사가 엎드려 또 말했다. “소자는 자질이 모자라고 재주가 없습니다. 분에 넘치는 교훈은 끝내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일은 하늘이 시킨 대로 나오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번거로워 하지도 마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좌우에 있던 여러 문도들은 묵묵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사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뒤로부터 각처의 교우들이 먼저 반드시 검곡 주인을 찾아가 만난 뒤에 용담으로 오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감히 다시 고하지 못하고 절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영해에 사는 이 아무개 진사(進士)가 대신사의 지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곧바로 용담으로 왔다. 대신사가 물었다. “그대는 검악에서 왔는가?”라고 하니, 그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그대가 문한(文翰)과 지벌(地閥)을 믿고 이곳에 와서 주인을 보지 아니하니 도리에 크게 부당하다. 곧바로 검곡으로 가서 사과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이진사가 황공해서 곧바로 검곡으로 가서 신사를 찾아 뵙자, 신사가 말했다. “내가 실로 신분이 한미하니 공께서 찾아오신 것은 실로 지나친 예절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진사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규약을 어기고 체면을 잃었으니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사가 그 까닭을 묻자 이 진사는 대답했다. “먼저 용담에 갔더니 대신사가 분명하게 경계하는 말을 하셨기에 곧바로 찾아뵙고자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더욱 겸손하고 바르게 이 진사를 대접했다.
8월에 대신사가 「흥비가(興比歌)」를 지어 신사에게 보여주었다.
이달 14일에 신사가 대신사를 뵈러 가자 대신사가 기뻐하더니 밤 자정쯤에 이르러서 좌우를 물리치고 신사를 불렀다. 신사는 곧바로 대답하고 들어갔다. 대신사가 말했다. “경상은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으라”고 하였다. 신사는 분부한 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신사가 묵묵히 한참 생각하더니 담뱃대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 “경상은 불을 붙여서 가져오라”라고 하였다. 신사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갑자기 혼미해서 두렵고 두려웠으며 깨는 듯하고 당황스러워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신체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대신사가 이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경상은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신사는 듣고나서 곧 깨어나자 대신사가 말했다. “그대의 수족이 전에는 어찌 구부리고 펼 수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구부리고 펴는가?”라고 하니, 신사는 말했다. “지난 일은 그 누가 시킨 것인지, 내가 스스로 한 일이지만 내가 정말 한 짓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이는 실로 우리 도의 조화로써 무위(無爲) 지위(至爲)의 큰 중심이 되고 큰 징험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잘 간직하여 사용한다면 세상이 불평함을 어찌 걱정할 것이며 덕이 펴지지 아니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신을 잡는 기회와 하늘이 행하는 조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삼가 비밀히 간직할 것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교문에서 8월 14일을 지통(地統) 기념일로 삼았다.
15일 새벽에 대신사는 신사에게 말했다. “우리 도는 유불선(儒佛仙) 세 도를 겸했느니라”고 하니, 신사는 말했다. “원컨대 그 종지(宗旨)를 듣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강령을 세우고 인륜을 밝힐 때에는 인(仁)에 근거해 의리를 행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할 때에는 자기 몸에서부터 시작하여 세상에 미치게 하니, 이는 대개 유교(儒敎)에서 취한다. 자비로 마음을 삼을 때에는 몸을 던져 세상을 구하고, 도량(道場)을 청정할 때에는 입으로 주문을 외우고 손으로 염주를 굴리니, 이는 대개 불교(佛敎)에서 취한다. 현묘함을 탐구하고 무위를 밝혀낼 때에는 영욕을 없애버리고, 청정으로 몸을 수양할 때에는 수련을 하여 탈태(脫胎)를 하니, 이것은 대개 선교(仙敎)에서 취한다. 이 3도가 그 근원을 탐구해내고 그 참을 알아내면 천도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새벽에 “수심정기(守心正氣)” 넉 자를 크게 써서 주면서 말했다. “이 뒤로 병에 걸릴 때에 이것을 쓰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또 부적 도면을 내려 주었다. 또 시동 김춘발(金春發)에게 분부하여 먹을 갈게 하고, 대신사가 붓을 잡아 분부를 내렸다. 대신사가 비결의 시를 쓰기를, “용담에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에 사람이 있어 일편단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수 신사에게 시를 주면서 말했다. “이 시는 그대를 위하는 강화의 구절이니 길이 지켜 잊지 말라”고 하였다. 그때에 곁에 있는 도제들 중에 문학하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마땅치 않은 사람에게 전수를 하였다고 이론을 많이 제기하였다. 신사가 글에 능통하지 못하고 또 문지가 한미하기 때문에 이런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11월에 대신사가 신사에게 말했다. “북방에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뒤에 반드시 인재가 있어 그 방향에서 많이 나올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북접(北接)에 주의를 기울일 터이니 제군은 이 뜻을 아는 게 좋겠다”라고 하였다.
12월에 신사는 대신사에게 말했다. “제석(除夕)이 멀지 않으니 곧바로 여기에서 머물면서 모시고 지내겠습니다”라고 하니, 대신사가 말했다. “이는 진실로 좋은 일이다. 다만 여기에 교우들이 많이 있으니 그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아라”고 하였다. 신사가 두세 번 간청하였으나 대신사가 끝내 들어주지 않자, 신사는 부득이 절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왕명을 받들어 사학(邪學)이라는 이유로 대신사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선전관(宣傳官) 정구룡(鄭龜龍)이 왕명을 받들고 경주부에 이르러서 장수와 나졸들을 많이 거느리고 용담으로 몰려와서 큰 소리로 어명이라 부르자, 대신사가 왕명을 받들고 경주부로 들어갔다. 그때 함께 잡힌 자가 열 명 쯤 되었다. 이튿날 서울로 길을 떠나 일행이 과천(果川)에 이르렀을 때 철종(哲宗)이 승하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지시에 따라서 다시 대구감영에 갇혔다. 당시 감사(監司)는 서헌순(徐憲淳)이었다.
포덕 5년 갑자년(1864년) 2월에 감영과 경주부의 교졸(校卒, 군교와 포졸) 30여명이 검곡으로 쳐들어 와서 신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신사는 의관을 정제하고 방안에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묵념으로 성스러운 주문을 외고 있었다. 경주부의 교졸이 문을 열고 찾았지만 신사를 보지 못하였으며, 신사가 느린 걸음으로 포위를 벗어나 나오는 데도 알지 못하니 마치 신명이 보호하는 것 같았다. 대신사가 대구 감옥에 다시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신사는 곧바로 감영으로 갔다. 옥졸처럼 꾸미고 밥을 받들고 감옥으로 들어가니 대신사가 담뱃대 하나를 주었다. 나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담뱃대 속에 심지 한 개가 있었다. 이것을 펼쳐서 보니 시 한 구절이 있었고(시는 대신사의 역사에 보인다) 그 아래에 또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었다. 3월 초 열흘에 대신사가 대구에서 사형을 받으니 천지가 참담하고 해와 달이 빛이 없었다. 차마 이를 참을 것인가.
신사는 낮에 숨었다가 밤에는 길을 가고, 동쪽에 숨고 서쪽에 숨어서 천지를 집으로 삼고 생사를 하늘이 명한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무중(李武仲)은 본교의 사람이다. 도중에 이무중을 만나자 신사는 이무중을 따라가 그 집에 숨었다. 이내 수색이 시작되어 종적을 감추기 어려웠다. 신사는 다른 곳으로 피하려고 하였는데, 안동(安東)의 포교가 이무중의 집으로 와서 이무중을 협박 공갈하며 말했다. “최아무개가 공의 집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소?”라고 하였다. 이무중은 ‘내가 이미 죄인을 숨겨주었으니 은닉죄를 범하였다’라고 생각하고, 하는 수 없이 즉시 토지를 팔아서 마련한 백금을 중간에 몰래 전달하여 교졸들을 물러가게 했다. 사람이 급할 때에 어진 이를 숭상하는 기품과 재산을 덜어 어려움을 풀어준 이무중의 뜻이 또한 유념할 만하다. 신사는 평해(平海)의 황주일(黃周一) 집으로 잠행하여 숨어서 살 방법을 상의하였다. 황주일이 정성껏 준비를 하여 신사는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살면서 짚신삼기로 생업을 삼았다.
포덕 6년 을축년(1865년)에 신사는 가족들을 데리고 울진군(蔚珍郡) 죽병리(竹屛里)로 옮겨가서 사모(師母) 박부인을 모시고 이곳에서 함께 살았다.
이로부터 전일에 입교하여 도인으로 이름을 올린 자가 죽기도 하고 또는 흩어져서 서로 만날 수가 없었고, 그때에 서로 만나더라도 같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대했다. 상주(尙州)의 교인 아무개(그 이름을 잃었다)만 그때에 도움을 베풀면서 은근한 뜻을 전하였다.
포덕 7년 병인년(1866년) 3월 초 열흘은 대신사의 대상(大祥)이었다. 상주의 교우(敎友)인 황문규(黃文奎)・한진오(韓振五)・황여장(黃汝章)・전문여(全文汝) 등 여러 사람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옛 일을 생각하고 지금의 처지에 상심하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로부터 사문의 집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때때로 이어졌다.
같은 해 가을 8월에 서양 군함이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니 온 나라가 소란스러워서 마치 물고기가 놀라고 짐승이 울부짖는 것과 같아서 소굴이 안정되지 못했다. 그때에 도인으로 그 연원을 잃어버린 자들이 신사의 소재를 찾아서 묻기도 하였지만 끝내 그 거처를 알지 못했다.
10월 28일은 대신사의 생신일이었다. 향례(享禮)를 베풀어 행하니 마침 박춘서(朴春瑞), 강수(姜洙) 여러 사람이 참석하였다. 향례가 끝난 뒤에 신사가 제의하였다. “각지의 교우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생신에 와서 이와 같이 모였으니 명년 3월부터 선생을 위한 계를 만들고자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하니, 강수가 말했다. “존사를 추념하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다. 신사가 말했다. “매년 생일과 기일, 두 차례에 걸쳐 우리 도인들이 각자 4전씩을 내 봄 가을에 향사의 비용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어 계첩(契牒)을 만들어 각지에 알리며 또 계안(契案)의 조목을 만들었다. 그때 계안에 입록된 자는 김경화(金慶化)・김사현(金士顯)・이팔원(李八元)・유성원(劉聖元)・김용여(金用汝)・임만조(林蔓祚)・구일선(具日善)・신성우(申聖祐)・정창국(鄭昌國)・배(裴) 아무개(그 이름을 잃음) 등 여러 사람이었으며, 강정(姜錠)을 계장(禊長)으로 삼았는데 강수의 생부였다.
포덕 8년 정묘년(1867년)에 신사는 울진(蔚珍) 죽병리(竹屛里)에서 예천군(醴泉郡) 수산리(水山里)로 옮겨가 살았다. 이보다 앞서 사모 박씨를 모시고 함께 거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모는 상주 동관암(東關巖)에 따로 거처하였다.
포덕 9년 무진년(1868년) 3월에 또 예천에서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죽현(竹峴)으로 이사하여 나무로 집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도를 이행하는 고통의 절차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포덕 10년 기사년(1869년) 2월에 양양(襄陽)의 도인 최희경(崔喜慶)・김경서(金慶瑞)가 찾아왔다. 신사가 여기에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고 묻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입교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도를 닦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선생께서 여기에 숨어 계신다는 말을 듣고 길을 멀지 않다 하고 이곳까지 찾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그들의 연원
3월에 신사가 양양으로 가니 박춘서(朴春瑞)가 모시고 따라갔다. 최서경(崔瑞慶)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의 도인들은 30호 미만이었다.
포덕 11년 1870년(경오년) 10월에 공생(孔生)이라는 자가 와서 대신사의 맏아들 최세정(崔世貞)에게 말했다. “지금 양양의 여러 도인들이 대부분 사문의 집을 보호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동관암에서 영월로 이사와서 사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도 이곳이 훨씬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세정은 그 말에 넘어가서 신사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곧바로 영월(寧越) 소밀원(蘇密院)으로 이사했다.
포덕 12년 신미년(1871년) 정월에 이필(李弼)
몇 달이 지나 약을 캐는 사람으로 위장하고 사모 박부인을 찾아서 소밀원에 갔다. 박부인은 신사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그대의 행색이 왜 이 모양인가?”라고 하니, 신사는 묵묵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강수가 옆에 있다가 대답하였다. “지금 문경(聞慶)의 소란은 우리들이 결코 저지르지 않았습니다만, 이필의 일에서 시작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 죄를 뒤집어써서 화를 당할 염려가 있어서 이곳으로 도망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세정(崔世貞) 형제가 그 말을 듣고 발끈 얼굴색이 변하며 말했다. “우리 형제가 내일 있을 초례(醮禮, 혼인을 지내는 예식)를 지내러 지금 양양으로 갈 예정이어서 집안에 주인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잠시도 이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하였다. 강수가 말했다. “그대 형제가 이미 초례의 행사를 치르게 되었으니 우리 두 사람이 거짓으로 시종이 되어서 한 사람은 고삐를 잡고 한 사람은 폐백함을 지면 그 누가 알겠는가? 이와 같은 난리 속에서 이와 같은 변통을 하는 것에 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최세정은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대략 의사가 있었고, 최세청(崔世淸)은 성낸 기색이 풀리지 않다가 밤중에 갑자기 밥을 지어서 빨리 먹자고 부탁하였다.
강수가 말했다. “오늘밤이 아직 새지도 않았습니다. 닭이 울지도 않았는데 밥을 왜 이렇게 일찍 먹습니까?”라고 하니, 최세청이 말했다. “우리 가족은 오로지 장기서(張基瑞)에 의지하여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문경의 변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은 속히 짐을 꾸려서 다시는 우리 집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밥을 일찍 지었으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강수가 소리를 내어 말했다. “일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내일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대가 있는 곳에서 죽을 것이다. 대개 일의 완급(緩急)은 사람에게 그 때가 있으며, 공간의 넓고 좁음은 그대들이 마땅히 결정할 일이다. 우리가 지금 화급한 형편에 있는데, 그대들이 이처럼 야박하게 쫓아내는가? 사문이 일찍 우의가 두터웠는데, 주인이 손님을 대접하는 도리가 이와 같이 부당하니, 어찌 인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르게 대접하지 않는 밥을 옛사람이 받지 아니했거늘, 하물며 쫓아내려고 주는 밥이야 말할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밥을 담은 광주리를 그대로 들어서 최세청에게 던지려고 하였다.
신사가 이를 만류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재난을 당하여 몹시 궁색한 형편에 처했는데, 이것은 하늘이 준 것이니 그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우리 주머니 속에 약간의 돈이 있으니 초례 일행의 행렬에 끼어서 며칠을 지내고 나면 오래지 않아 체포령이 철폐될 것이다. 그대는 널리 양해하라”고 하였다. 최세정은 연연해 하면서 차마 정을 버리지 못해서 그 동생을 타일렀지만 최세청은 강경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 형제는 짐을 꾸려 떠났다.
신사가 강수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이 걸음이 바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이다. 도무지 산에 들어가 숨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사모 박부인에게 절을 하고 태백산중을 향해서 가니 이때 곤궁하고 어려운 형상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외로운 학처럼 삐쩍 말랐고 발은 퉁퉁 부었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이와 같은 일을 내려주었다. 산 속으로 몇 리 더 들어가자 그때에 황재민이 바야흐로 바위 아래에서 불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가 마침 신사와 강수가 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기뻐서 일어나 맞이하면서 말했다. “어디에서 여기에 오십니까?”라고 하니, 신사가 대답했다. “소밀원 사모님 댁에서 왔다”라고 하였다. 황재민이 말했다. “지금 세 사람이 동행했으니 생사고락을 모두 함께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푸르고 푸른 태백산이 골골마다 사람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푸른 소나무를 우리의 울타리로 삼고 흰 구름을 우리의 기둥으로 삼고 먹는 물로 오장육부를 깨끗이 할 것이오, 도토리를 주워서 주린 배를 채울 것입니다. 사슴을 벗 삼아 세상을 잊고 초목과 함께 같이 살아가면 산 밖의 더러운 먼지와 험악한 재앙과 나라가 가혹하고 사람이 재앙이 됨을 알지 못하고 우리의 은둔으로 살이 찔 것이오, 우리의 집이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사는 석현(碩鉉, 그 성은 잊어버림)의 집에 계시고 강수는 권가(權家)의 집에 머물면서 성명을 바꾸고 몸은 머슴이 되었다. 어느 날 강수는 신사가 계신 곳에 가서 신사가 지독하게 고생하고 허름하게 옷을 입은 것을 보았다. 강수는 신사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비록 사람이 저지른 재앙에 몰려 이곳까지 밀려와 은둔하고 있지만 첩첩히 겹친 구름산에서 자취를 감추지 못할 곳이 어디에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우울하게 여기에 오래 살겠습니까? 선생이 만약 가실 뜻이 있으시면 제가 당장에 채찍을 잡고 앞으로 말을 달려 몸을 온전히 하는 계책을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사는 강수와 함께 영월군에 있는 정진일(鄭進一)의 집에 가서 몸을 의탁하여 강수와 함께 ‘도원의 결의(桃園之誼)
신사는 강수, 황재민 두 벗과 함께 산중의 여러 곳을 찾아서 편안히 살 곳으로 삼았다. 어느 날에 손을 잡고 절벽에 오르니 큰 암자가 공중에 가로질러 있고 그 아래에 깊은 동굴이 있어서 세 사람의 무릎을 담을 만했다. 그래서 오래 머물 계책을 의논했다.
9월에 황재민을 영남에 보냈는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는 강수와 함께 외진 곳에 살면서 사방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하나도 없어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또 추운 절기를 맞이하여 낙엽으로 몸을 가릴 수 없었으며, 산채로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강수와 항상 함께 잎사귀
그때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위가 매섭고 굶주림이 심하여 잠시도 버티기 어려웠다. 마침 한 소년이 새끼망태
신사는 소년에게 말했다. “사람이 곤란할 때 도와주는 것이 가장 착한 선이다. 덕을 베풀 때에는 끝까지 해야 하니 지금부터 계속 구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년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갔다. 다음날 그 소년이 과연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왔다. 신사는 물었다. “자네는 어느 땅에 살며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저는 영월 직곡리(稷谷里)에 사는데 성은 박(朴)가요 이름은 용걸(龍傑)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물었다. “여기에서 그곳까지 몇 리나 되는가?”라고 하니, 박용걸이 대답했다. “십 리가 조금 넘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며칠 뒤에 자네가 사는 곳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라고 하니, 박용걸은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내려갔다.
며칠이 지나 신사와 강수가 산을 내려가서 직곡리로 가서 박군이 사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밤이 깊어 이미 삼경이었다. 마침 박용걸은 집에 없었고 늙은 주인이 나와 방으로 안내하여 추위에 몸이 괜찮은지 간곡히 물었다. 이어 저녁밥을 내왔는데 모두 정결하여 입에 꼭 맞았다. 조금 지나 주인이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자기 아내가 한 말을 이렇게 전했다. “제가 창틈으로 엿보았더니 손님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오, 시대를 잘못 만난 군자입니다. 당신은 예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내가 죽고나서 몇 년 뒤에 밤에 거지 행색의 손님이 찾아올 것이다. 이 손님들은 하늘이 낸 뛰어난 성인이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도와준다면 자손들이 반드시 창성하고 복되고 영화로운 삶을 더욱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늘밤 오신 손님이 바로 그 손님이라는 것을 어찌 모릅니까? 시아버지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당신은 벌써 잊었습니까? 정말 벌써 잊었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인은〉 “저는 아내의 말을 듣고나서야 갑자기 아버지가 임종할 때에 남기신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밤 객성(客星)이 우리 집을 비추는 것은 진실로 하늘이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손님과 더불어 결의형제를 맺어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는지요?”라고 하였다. 신사는 주인의 말에 감동을 받아 말을 마치자마자 곧 허락하고 이날 밤 청수 한 그릇을 떠서 서로 하늘에 맹세하고 형제의 관계를 맺었다. 다음날 아침에 주인이 신사를 맞이해 내실로 들어가서 닭을 잡아 바치면서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였다. 신사는 그곳에서 49일의 제계를 베풀었는데 이미 세밑이 다 되었다.
그때 영월군 포청(捕廳)의 행수(行首)에 박씨 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평소에 성품이 모질어서 아무 탈이 없는데도 일을 벌일 생각으로 포교에게 고자질을 하였다. “듣자하니 조정에서 체포령이 내린 죄인 최가와 강가 두 사람이 직곡마을의 박아무개 집에 숨어있다고 합니다. 내일 체포하여 감영에 보고합시다”라고 하였다. 수리(首吏, 우두머리 향리) 지달중(池達仲)이 그 일을 듣고 행수를 불러서 문책하였다. “문경의 일은 지금 체포하기를 그만두었는데, 아무 일이 없는 고을에서 망령되이 스스로 소란을 일으키니 극히 당돌한 일이다. 또한 죄가 없는 어진 이들을 간곡하게 보호할 생각을 해야 마땅한데, 자네가 나쁜 마음을 먹고 분란의 꼬투리를 일으키니 무슨 심보인가?”라고 하였다. 박은 지달중의 말을 듣고 일을 그만두었다. 이로 인하여 신사는 화를 입지 않았다.
이달 초에 소밀원의 장기서(張基瑞)는 대신사의 꿈을 꿨다. 꿈에서 장기서는 대신사의 거룩한 거동을 보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장기서는 말했다. “지금 선생께서 어느 곳에 가 계십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대답했다. “내가 읍리 지달중(池達仲)에게 부탁한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집으로 가겠다”라고 하였다. 장기서가 밥을 준비해서 바치려고 했더니 대신사가 이미 떠나간 뒤였다. 신사는 장기서의 꿈 얘기를 듣고 그때에 화를 면한 것이 오로지 대신사가 몰래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또 들으니 지달중의 꿈에 신선 한 분이 와서 손에 옥과 지팡이를 잡고 그 집에 내려왔는데, 의관이 학과 같았고 풍도가 옥과 같았다. 지달중은 매우 놀라서 절을 하고 물었다. “대인께서 이 누추한 곳에 행차하셨으니 저희들은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선이 말했다. “나의 문중 제자인 최경상과 강수가 죄가 없는데도 지목을 받아서 지금 너희 고을 직곡리의 박용걸 집에 숨어 있다. 갑자기 나타난 자취가 보이거든 자네가 성의를 다해 도와주어라. 내가 두텁게 보답하겠다”라고 하였다. 지달중이 꿈에서 깨어나 몹시 이상하게 여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행수가 두 사람을 잡아들이려는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신사는 강수와 함께 북어 한 꾸미를 준비하여 지달중에게 가서 사례를 하였다. 지달중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두 분이 어찌 몸을 굽혀 사례하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달중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헤어질 때에 돈 200문과 붓 두 자루, 중국 먹 한 자루를 신사에게 바쳐 여비로 쓰게 하였다. 신사는 이를 감사하게 받고 돌아왔다. 훗날 지달중이 아전으로 승급을 하여 삼척(三陟)의 영장(營將)이 되었다. 실로 뜻밖의 승진이었다. 대신사가 후하게 보답하겠다는 말이 이 때에 와서 증험이 된 것이다.
포덕 13년 임신년(1872년) 정월 5일에 신사는 화를 풀 뜻으로 축문을 지어서 천주(天主)에게 고하였다.
6월에 신사는 강수에게 말했다. “최세정과 최세청이 비록 나를 저버렸으나 선사께서 옛날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결코 저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강수와 함께 사모를 찾아 뵙자 박부인이 말했다. “그 사이에 어느 곳에 계셔서 생명을 보존했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지난 일은 인정 있는 행동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대들은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지나친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어찌 섭섭해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런 유감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은 오늘 찾아뵙는 것으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사모는 병석에 누워 있었고 양식은 다 떨어져 있었다. 신사는 최세정의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쌀 약간을 사 둔 것이 순흥(順興)에 있다. 아무 날에 사람을 그곳에 보내면 반드시 쌀을 보내주어 병환 중에 며칠 동안 죽을 끓일 양식이 될 터이니 절대로 기일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직곡으로 돌아왔다가 또 순흥으로 가서 직접 기다렸다. 약속한 날이 되자 임생(林生)이라는 자가 과연 소밀원에서 오자 몇 말의 쌀을 지워서 보내주었다. 며칠이 지나 임생원이 또 왔는데 얼굴에 근심스러운 안색이 가득했다. 신사는 물었다. “그대가 여기를 떠난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다시 급하게 왔는가?”라고 하였다. 임생은 묵묵히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 “세정이 며칠 전에 양양군에 잡혀갔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사는 강수와 함께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계속 탄식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곧 최세정의 집으로 가니 사모가 놀라고 두려워서 편안치 못한 안색과 최세청이 황망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형상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그때 전성문(全聖文)도 곁에 있었다. 사모는 말했다. “재난의 조짐이 코앞에 닥쳤다. 몸을 피하는 방법이 그대들에게 달려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니, 강수는 말했다. “먼저 집안 식구들을 박용걸의 집에 옮겨서 서서히 멀리 도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저녁에 출발하기로 약속했다. 마침 정선(旌善)의 도인(道人) 유인상(劉寅常)이 왔으므로 그와 함께 의논하여 최세청에게 말했다. “동쪽으로 가거나 서쪽으로 가거나 네 마음대로이지만 갑자기 정선에는 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최세청이 아무 말이 없자 유인상이 말했다. “일이 급하니 내가 빨리 우리 집으로 가서 사모님 집을 보호하는 계책을 먼저 주선하겠습니다. 도인들 중에 아무개를 우리 집에 보내면 내가 변통을 하여 한때의 위급함을 도와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돌아갔다.
다음날 저녁 무렵에 집안의 물건을 수습하여 앞뒤로 길을 나섰다. 사모는 남자로 분장하고 두 딸은 어린 남자의 옷을 입혀 임생원이 업고 따라갔다. 신사는 강수와 전성문과 함께 사모를 앞에서 인도하여 박용걸의 집에 왔다. 박용걸은 정말 의인이었다. 온 집안의 식구들이 나서서 손님들을 영접할 때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정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신사는 강수, 전성문, 유인상 등과 함께 서로 오가면서 상의를 하여 사모의 집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때 함께 도와준 사람들은 홍석범(洪錫範)・안시묵(安時默)・김경순(金敬淳) 등이었다.
3월 10일은 대신사의 생신이었다. 유인상이 와서 향례에 참석하자 신사는 허물을 뉘우치는 글을 지어서 대신사에게 고하였다.
신사는 임생원과 최세청에게 몰래 양양에 가서 최세정의 일을 살펴보라고 했으나 계속 문초 중이어서 언제 처단이 내려질지 알지 못했다.
23일에 신사는 최세청과 임생을 데리고 곧바로 큰 고개를 넘어서 인제(麟蹄) 남면(南面) 무의매(舞依梅)에 사는 김병내(金秉鼐)의 집에 갔다. 마침 김병내・김연순(金演淳)이 이사갈 준비를 하느라 세간을 묶고 있었다. 김병내는 말했다. “바로 이때 서로 만나니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는 소백산과 태백산이 십승(十勝)의 땅으로십승(十勝)의 땅 온 나라에 소문이 났는데 어떻게 하면 그곳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어렵지 않다.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르쳐 주겠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신사는 김병내・김인순(金寅淳)・김용진(金龍鎭) 등 세 숙질과 그 집 식구 남녀 10여 명을 데리고 홍천(洪川)・동사둔(東沙屯)・영춘(永春)・의풍(義豐) 등 여러 곳에 도착할 때마다 길을 알려주며 그들을 전송하였다.
이날에 대신사의 셋째 딸과 최세정의 부인이 모두 인제(麟蹄) 감옥에 갇혔다. 교인 김덕중(金德仲)이 포졸을 부추겨서 장춘보(張春甫)의 집에 쳐들어가 이들을 잡아간 것이다. 사문(師門)의 화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물며 도인이 도인을 해치는 일은 유대(猶大, 예수의 제자 유다를 가리키는 듯함)가 스승을 팔아먹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에게 양심이 없음이 이처럼 심할 수는 없다.
4월 5일에 신사는 박용걸의 집에서 향례를 베풀었다. 사모 박부인이 아들 최세청을 기다렸으나 저녁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 사모는 마음이 불안하여 문에 기대었다가 계속 왔다갔다했다. 신사는 사모에게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향례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사모님께서 마음을 편하게 갖고 진정하셔야 우리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향례를 지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모는 끝내 말을 듣지 않았으며 화가 나 있었다. 신사는 백방으로 위로하고 향례를 행하였다.
이튿날 최세청이 아내를 얻고 돌아와서 처음으로 시어머니에게 인사하는 의식을 치렀다. 객지에서 예식을 치르는 것이어서 유달리 어려웠다. 게다가 최세정은 그때 양양에 잡혀 있어서 생사를 모르는 형편이었다. 사문(師門)의 후사를 생각하면 재난의 그물이 풀어지지 않음이 한탄스러웠고 가족이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이 가슴아픈 일이었다.
신사는 강수와 함께 정선의 무은담(霧隱潭)에 이르러서 유인상의 집을 찾아갔다. 유인상이 기쁘게 맞이하자 신사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주모자로 지목을 받아 갈 곳이 없이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그대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여기에 오래 머무른다면 그대의 집에도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유인상은 의인이었다.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신사에게 말했다. “설령 주모자로 지목을 받아 종적이 드러난다면 그때 두 분이 멀리 피해 있더라도 내 죄는 유배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선생은 한 점의 의심도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여기에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사는 강수, 전성문과 함께 유씨의 뒷방에 들어가서 49일의 재계를 베풀고 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었다. 유인상은 공손함과 예절을 다하여 신사를 대접하였다. 또 강씨와 전씨 두 사람은 신사와 함께 기거하였지만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고 옷을 빨고 음식을 대접하는 절차가 신사와 똑같았으니, 어진 이를 숭상하는 기풍과 위급한 사람을 도와주는 의리는 세상에서 드문 일이라 할 만하였다. 우국지사들을 함부로 반대당으로 몰아서 잡아들이는 어려운 시국에 한 사람을 감추어 주는 것도 실로 어려운 일일진대 두 사람 세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박봉한(朴鳳漢) 또한 의인이었다. 항상 사모 박부인의 정경을 안타깝게 여겨서 재물을 내어 위급한 처지를 도와주었으니 그 의리 또한 기록해 둘만하다. 이때 정선의 신정언(辛定彦)・신치서(辛致瑞)・홍문여(洪文汝)・유계홍(劉啓弘)・최영하(崔永夏)・김해성(金海成)・방자일(房子一)・안순일(安順一)・장기서(張基瑞)・김내병(金鼐秉)・박용걸(朴龍傑) 등은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도를 믿고 신사가 머무는 곳에 왕래하면서 서로 따랐다.
5월 12일에 최세정이 양양에서 매맞아 죽고 김덕중(金德仲)・이일여(李逸汝)・최희경(崔禧慶)은 유배형을 받았다. 신사는 이 소식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강수에게 말했다. “도를 아는 자는 천명을 말하지 않지만, 지금 이 소식은 참으로 사람의 심정으로서는 참아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포덕 14년 계유년(1873년) 8월에 신사는 박용걸의 집에 있을 때 강수와 유인상을 태백산에 보내 그윽하고 조용한 곳을 골라 기도하는 곳으로 정하게 했다. 얼마 뒤에 두 사람이 와서 말했다. “우리들이 선생님의 분부를 받들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찾아보다가 갈천사(葛川寺) 적조암(寂照庵)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어떤 늙은 중이 문 앞에 나와 기쁘게 맞이하면서 자기가 거처하는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차를 마신 뒤에 우리들이 암자에 나가서 기도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스님이 흔쾌히 응낙하면서 말했습니다. ‘이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원컨대 여러분이 기일을 정해서 다시 온다면 산승(山僧)이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상인(上人, 중을 높이는 말)의 정성에 감탄하여 10월 20일에 다시 오겠다고 신신당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봉서암(鳳捿庵) 아래로 와서 살펴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이 말을 듣고 웃었다. 기일이 와서 신사가 강수와 함께 유인상의 집에 이르자, 전성문이 신사가 입산한다는 말을 듣고 동행하기를 청하였다. 신사는 이를 허락하였다.
신사는 강수・유인상・전성문・김해성(金海成) 등과 함께 양식을 메고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적조암 아래에 이르자 지난번에 약속한 주지승 철수(哲秀)가 동구에 나와서 영접하였다. 신사는 그의 손을 잡고 암자에 올라서 좌정하였다. 스님은 삶은 버섯을 불에 굽고 산중의 별미를 바쳐서 극진하게 손님을 접대했다.
이날 저녁 신사는 스님에게 말했다. “산에 살면서 예불을 드리고 고요함 속에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스님이나 속인이나 다 같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오직 하늘을 생각하며 주문을 외우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물었다. “주문은 무슨 글입니까?”라고 하니, 신사는 대답하였다. “상인(上人)은 혹 동학(東學)의 말을 들었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이 대답하였다. “전에 이미 들은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신사는 말했다. “지금부터 고성으로 낭송하겠습니다. 상인께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이 대답하였다. “괜찮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사가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스님은 들을 때마다 항상 찬탄을 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앉을 자리를 정하여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손으로는 염주를 잡고 하룻밤에 3만 번이나 외우기로 정하여 이것을 제도로 삼았다.
이 해 12월 5일은 기도를 마치는 날이었다. 신사는 한문에 별로 익숙지 못하였는데, 이날 새벽에 갑자기 운자를 내여 연시(聯詩) 몇 구절을 지었다. “태백산에서 49일간 공부했다[太白山工四十九]”라 했고, 또 “우리가 봉팔(鳳八)을 받아 각각 주인을 정했다[受我鳳八各主定]”라 했고, 또 “하늘이 봉우리 위에 꽃을 피우는 하늘이다[天宜峯上開花天]”라 했고, 또 “오늘 오현금을 탁마한다[今日琢磨五絃琴]”라 했고, 또 “적멸궁전
유씨와 전씨 두 사람은 먼저 내려가고 신사는 강수와 함께 다시 며칠을 머무르면서 부적의 그림을 익혔다. 스님이 이것을 자세히 보면서 말했다. “이것은 조화의 자취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물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말했다. “조화가 부적에 있으니, 소승이 비록 견식이 얇지만 신령스러운 부적을 대할 때 저절로 마음으로 깨닫는 증험이 있습니다. 원컨대 선생께서는 신중하게 간직하여 누설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신사는 그 말을 듣고 그가 비범한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님이 또 말했다 “소승이 본디 계룡산에 있으면서 풀을 맺어 암자를 짓고 오로지 정성으로 염불하였습니다. 꿈에 세존(世尊)이 나타나 소승에게 이르기를, ‘너는 소백산으로 가라’고 하여서 마음으로 늘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올해 4월에 계룡산에서 나와 소백산에 머물렀는데 꿈에 세존이 또 이르기를, ‘너는 태백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꿈대로 처음에 여기에 이르니 암자의 당우(堂宇)가 텅텅 비어있고 도량이 황폐하였습니다. 곡식 몇 뙈기를 심고 나무를 베어 가져와 겨울을 넘기는 도구로 삼았는데 꿈에 또 두 사람이 와서 단정하게 불상 앞에 앉았습니다. 깨어서 생각하니 꿈에서 본 얼굴 모습이 마치 이 두 분의 얼굴 모습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강수가 말했다 “입산하던 날 밤에 나도 꿈을 꾸었습니다. 신선 한 분이 오셔서 벽 위에 앉으시므로 우리들이 나아가 절을 했습니다. 지금 불상을 보니 분명히 꿈속의 모습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나도 처음 입산할 때 꿈을 꾸었다. 상서로운 봉황 여덟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차례로 나란히 앉았다. 내가 세 마리를 끌어안고 옆 사람도 각각 한 마리씩 끌어안았는데 공중에서 다음과 같이 들리는 말이 있었다. ‘이 다섯 마리 봉황은 각각 그 주인이 있으니 너희들은 반드시 깊이 간직했다가 뒷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서 신사에게 말했다. “후세에는 반드시 선과 불이 하나로 돌아갈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은 또 말했다. “소승이 나이가 많아서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감히 공의 앞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신사는 말했다 “이 몸이 구름처럼 놀면서 동쪽 서쪽으로 떠돌아다녀서 아직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상인(上人)께서 나를 위해 주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이 말했다 “단양(丹陽)도솔봉(道率峯) 아래가 그윽하고 조용한 곳이어서 기거할만 합니다. 공께서 그리로 가서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신사가 드디어 스님과 이별을 하고 무은담(霧隱潭)의 유인상(劉寅常) 집에 왔다. 유인상이 기뻐 웃으면서 맞이했다.
이에 앞서 스승의 집 식구가 미천(米川)으로 옮겨가 살았다. 신사는 유인상에게 물었다. “사모님은 요사이 어떠하신가?”라고 하니 유인상은 대답했다. “이달 9일에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애통함을 이기지 못해 곧바로 사모의 집에 가서 김계악(金啓岳)과 함께 몸소 시신을 수습하고 상례를 치루는 절차를 낱낱이 점검하였다. 그리고 각처의 도인에게 부고를 보냈다.
그때에 박용걸이 영월의 직곡에서 영춘(永春) 남면(南面) 사항리(獅項里)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신사는 박씨 집에 가서 그곳에서 설을 쇠었다.
포덕 15년 갑술년(1874년) 정월에 신사는 몸소 순흥에 가서, 윤우(倫友)에 사는 박봉한(朴鳳漢)의 집에 이르러서 철수 스님의 상하 옷 한 벌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정선의 유인상 집에 찾아가서 며칠 머물며 말을 나누었다.
2월에 신사는 적조암에 올라가 철수 스님을 방문하였다. 철수 스님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운 지가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났다. 신사는 병석에 나아가 문병하고 의복을 건넸다. 그때에 스님의 병은 이미 깊어서 겨우 눈을 들어 말했다. “공의 신의에 사람들이 감복하고 있습니다. 소승이 명이 짧아서 두터운 덕을 갚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죽기는 하지만 어찌 공의 덕을 잊겠습니까? 주신 의복은 죽은 뒤에 몸을 덮는 물건으로 사용하면 만족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스님이 입적하였다. 신사는 몸소 시신을 수습하면서 여러 스님들과 함께 절간의 예를 따라 화장을 하였다. 그리고는 천의봉(天依峯)을 바라보며 한참을 보낸 뒤에야 돌아왔다.
이달 19일에 신사는 사모의 집에 가서 사모의 양례(襄禮)를 행하였는데, 바로 정선 땅이었다. 그때에 함께 장례를 치른 자는 홍순일(洪舜一)・전성문(全聖文)・유인상(劉寅常)・최진섭(崔振燮)・신석현(辛錫鉉)・박봉한(朴鳳漢)・홍석범(洪錫範)・김두원(金斗元)・홍석도(洪錫道)・유택진(劉澤鎭) 등 여러 사람이었다.
신사는 김연순(金演順)・김용진(金龍鎭)을 단양(丹陽) 도솔봉(道率峯) 아래에 보내서 먼저 그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지난날 철수 스님이 부탁한 말을 따른 것이다.
신사가 당시 나이가 50이 되었지만 아직 혈육이 없었다. 3월에 다시 김씨가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내의 본관은 안동이었다.
4월에 도솔봉 아래에 집을 짓고 아내를 맞이했다. 김연순도 그곳에서 함께 살았다.
신사는 홍순일, 김용진과 함께 천주(天主) 님을 생각하며 주문을 외워서 49일의 공부를 잘 마쳤다. 그때에 먹을 것을 마련하며 도와 준 사람 중에 안동 권기하(權奇夏)의 힘이 제일 컸다.
12월 10일은 즉 사모 박부인의 연기(練期)였다. 신사는 강수와 김용진을 보내 소상(小祥)을 거행하도록 했다.
포덕 16년 을해년(1875년) 년정월 22일에 최세청이 장기서의 집에 있다가 우연히 병을 얻어서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아! 사모 집의 액운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사모의 소상 기일을 마치지 못하고 최세정 형제가 모두 죽고 세 딸과 한 청상과부(최세청의 아내)가 마음을 의탁할 곳이 없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2월에 신사는 송부(松阜)로 이사하였는데 바로 도솔봉 근처였다. 신사는 농사를 지어 생업으로 삼고 식구들의 생계를 도왔다. 신사는 집에 살면서 검소하고 근면하여 심지어 머슴들이 하는 노동을 먼저 수고로이 하지 않음이 없었고 궁색한 곳간과 싸늘한 부엌에는 군색한 게 많아서 나물과 물을 대지 못했지만 분수에 따라 도를 즐겨서 온 집안이 봄처럼 따뜻하였다.
8월 15일에 정선의 여러 도인들이 특별히 치성을 올리자며 의견을 나누고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쇠고기를 제사 물품으로 쓰려고 하였다. 제사를 지낼 즈음에 신사가 고기와 채소를 쓰지말라고 하며, 하늘이 내린 강화(話之)의 가르침을 받아서 여러 가지 제수 물품을 모두 물리치고 청수 한 그릇만 정성껏 올렸다. 이로부터 제사를 지낼 때 어육(魚肉)을 일체 금지했다.
9월에 신사는 강수, 전성문과 함께 신영(新寧)에 이르러서 하치욱(河致旭)을 찾아보고 곧바로 경주로 향해서 용담(龍潭)가정리(稼亭里) 최맹윤(崔孟倫)의 집에 도착했다. 최맹윤이 신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말했다. “오늘 뜻밖에 죽은 사람을 다시 보았습니다. 바다를 덮는 풍상에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라고 하였다. 다시 경주부에 이르러서 최경화(崔慶華)를 만나자 그는 신사의 소매를 잡아 펼치고 서로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이렇게 서로 만나는 것이 마치 꿈속의 일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청하(淸河)를 경유하여 이군강(李君綱)과 이준덕(李俊德)을 만나고 그대로 단양 본집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박용걸이 영월 직곡에서 영춘(永春) 장항리(獐項里)로 이사하자 신사는 박용걸의 집으로 가서 그해를 보냈다.
포덕 15년 갑술년(1874년)에 신사는 홍순일(洪舜一)・김용진과 함께 49일의 공부를 하였다. 이때에 양식을 마련하여 보낸 자는 안동의 권기하(權奇夏)이다. 신사는 박봉한의 집으로 가서 철수 스님의 위아래 옷을 마련하고 적조암에 올라가 철수 스님을 방문하였다. 철수 스님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신사가 병석에 나아가 문병을 하고 의복을 주었다. 그때에 철수스님의 병은 이미 깊어서 겨우 눈을 들어 말했다. “공의 신의에 사람들이 감복하고 있습니다. 소승이 명이 짧아서 두터운 덕을 갚지 못지 못합니다. 주신 의복은 죽은 뒤에 몸에 덮어주면 만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스님이 입적하였다. 신사가 몸소 염습을 하여 화장을 했다.
19일에 신사는 사모의 집에 가서 박부인의 양례(襄禮)를 행하였는데, 그때 함께 장사를 치른 자는 홍순일(洪舜一)・전성문(全聖文)・유인상(劉寅常)・최진섭(崔振燮)・신석현(辛錫鉉)・박봉한(朴鳳漢)・홍석범(洪錫範)・김두원(金斗元)・홍석도(洪錫道)・유택진(劉澤鎭) 등 여러 사람이었다.
신사는 김연순・김용진을 단양 도솔봉 아래에 보내서 먼저 그 터를 돌아보게 했다.
3월에 신사는 안동 김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4월에 아내를 맞이하여 도솔봉 아래의 집에서 살았다. 김연순도 그곳에서 함께 살았다.
12월에 신사는 강수와 김용진을 보내 부인의 연기에 참석하도록 했다.
포덕 16년 을해년(1875년) 8월 15일에 신사는 기도할 때 고기와 채소를 쓰지 말라는 강화의 가르침을 얻어서 청수 한 그릇만으로 치성을 올렸다. 신사는 아들을 낳아 솔봉(率峯)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신사가 송부(松阜)에 옮겨가 살았는데 도솔봉에 가까운 곳이었다. 농사를 지어서 생업으로 삼았다.
9월에 신사는 강수・전성문과 함께 신녕(新寧)에 이르러서 하치욱(河致旭)을 찾아 보고, 이어서 가정리(柯亭里) 최맹윤(崔孟倫)의 집에 도착했다. 최맹윤이 선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말했다. “오늘 뜻밖에 죽은 사람을 다시 보았습니다. 바다를 덮는 풍상에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라고 하였다. 다시 경주부 안에 이르러서 최경화(崔慶華)를 만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오늘 이렇게 서로 만나는 것이 마치 꿈속의 일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10월에 신사는 법회를 열어 제사를 지낼 뜻을 정선의 도인에게 알려주었다. 18일에 이르러서 여러 사람들이 신사의 집에 모였다. 신사는 관복을 짓고 축문을 지어서 천주에게 제사를 지내며 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우리 도가 그간 발전해 온 일이었다. 이날 제사에 참석한 자는 강수・전성문・유인상・김용진 등 여러 사람이었다. 신사는 강화의 가르침을 도제들에게 말했다 “내가 12의 시(時) 자와 12의 활(活) 자가 있으니
포덕 17년 병자년(1876년) 4월에 신사는 법제(法祭)를 행하였는데, 의식이 전과 다름이 없었고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봉향(奉香), 봉로(奉爐), 집사(執事) 등 여러 임무를 두었다. 이때에 신사는 송부(松阜)의 본집에 있으면서 한 마음으로 하늘을 받들었다.
포덕 18년 정축년(1877년) 10월 3일에 신사는 구성제(九星祭, 음양가가 아홉 별에 길흉을 판단하는 제사)를 지낼 때 9명 헌관(獻官)과 12명의 집사를 두었으며 예폐(禮幣)와 제수 물품을 많이 마련하였으며, 촛불은 남쪽에 두고 잔은 북쪽에 두어서 이명(離明) 감실(坎實)의 뜻
이 달(곧 포덕 18년) 16일에 신사는 정선의 유시헌의 집에 가서 다시 구성제를 지냈는데 제사에 참석한 자는 40여 명이었다.
이날 신사는 말했다. “구성이라는 것은 구주(九州, 중국 고대 행정구역)의 상(象)에 상응하는 것이니, 구성의 이치로 구성의 제사를 만든 것은 대게 내 한 몸의 응함을 취한 것이다. 천문 지리가 이미 서로 합하여졌으므로 사람이 그 사이에 나서 실로 삼재(三才, 하늘 땅 사람)를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승은 후천개벽 5만년의 신인(神人)이며, 또한 지금 세상 삼재의 주인이다. 우리들이 오늘 구성제를 지내는 것은 오로지 스승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 계의 일을 공손히 닦아서 한쪽으로는 뒷날 참고할 바탕으로 삼고, 또 한쪽으로는 스승을 위한 우리들의 정성을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응규(金應奎)・유시헌(劉時憲)・신시영(辛時永)・방시학(房時學)・신시일(辛時一)・최창식(崔昌植)・유택진(劉澤鎭)・최창익(崔昌翼)・김석두(金錫斗)・홍시래(洪時來)・최기동(崔箕東)・홍석도(洪錫道)・안교강(安敎綱)・김원중(金源中)・안교일(安敎一)・윤종현(尹宗鉉)・안교백(安敎伯)・안교상(安敎常)・홍상의(洪尙義)・신용한(辛龍漢)・안교흥(安敎興)・홍봉의(洪鳳儀)・안교룡(安敎龍)・이득룡(李得龍)・최진섭(崔振燮)・유인형(劉寅亨)・유경식(劉慶植)・허찬(許燦)・김두원(金斗元)・최익섭(崔益燮)・전세필(全世弼)・김세숙(金世淑)・전세인(全世仁)・박영근(朴永根)・노정식(盧貞植)・최재구(崔在九)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계안(契案)에 들어갔다.
포덕 19년 무인년(1878년) 7월 25일에 신사는 도인들이 서로 모이는 것을 개접(開接)이라 부르게 했다.
이때에 신사는 여러 도제에게 유시(諭示)의 글을 보내서, 유시헌(劉時憲)의 집에서 개접하도록 했다. 신사가 말했다. “우리 도중(道中)에서 개접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근래 문사와 과거응시자들이 시부를 짓는 따위의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들이 서로 모여서 개연(開硯)하는 날을 개접이라 이른 것이다. 대신사가 살아 계실 적에 기수(氣數)가 성쇠를 번갈아 바꾸는 이치를 미루어서 이미 개접과 파접(罷接)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글을 보내 모임을 갖는 것을 특별히 개접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뜻을 모두 알아야 한다. 무릇 천지의 도는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어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
포덕 20년 기묘년(1879년) 2월에 신사는 꿈에 대신사를 뵙고 큰 도를 창명하는 징조를 경험했다. 신사가 강시원과 함께 청송(靑松)에 도착하였는데, 대신사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도인 심시정(沈時貞)이 신사에게 말했다. “대신사의 기일이 가까이 닥쳐오니 제사 물품을 대략 마련하여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제사를 지낼만한 정결한 곳이 없으며, 또 여러날 계속하여 비가 많이 내려 물이 이렇게 크게 불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즉시 걸어서 물을 건너 90리를 갔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다. 집에 도착할 수 없다고 헤아리고 어쩔 수 없이 사위집에 들어갔다. 이튿날이 곧 대신사의 제삿날이었다. 심시정에게 제사 물품을 갖추어서 사위집에서 향사를 지내게 하고 이튿날 집으로 돌아왔다.
3월 26일에 신사가 영남 서쪽으로 출발할 때 강시원과 김용진(金龍鎭)이 따라갔다. 윤(閏) 3월 1일에 영월(寧越) 거성리(巨石里)의 노정식(盧貞植) 집에 도착하여 잠을 잤다. 꿈에 대신사가 검은 관과 푸른 옷을 입고 3층 누대에 앉아있었다. 대신사가 신사의 옷이 매우 남루한 것을 보고 곁의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의 옷은 정말 화려하고 저 사람의 옷은 정말 조잡하고 남루하다. 입고 먹는 것이 각각 분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서로 구해주는 도리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머리를 숙였는데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조금 지나서 대신사가 누대 위에서 걸어다녔다. 신사가 대신사의 허리띠를 우러러보니 세 단으로 서로 이어지게 만들어져 있었다. 신사는 물었다. “의대를 세 단으로 만들어 입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대답했다. “갑자기 만들어서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띠를 끌러 대신사에게 바쳤다. 대신사는 “이것도 좋구나”라고 말하며 세 단으로 된 띠를 풀어서 올려놓았다. 그 좌우에는 동자 네댓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으며 등 뒤에는 백발노인이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늙은 스님이 가사를 입고 주장자를 짚고 그 옆에 엄숙하게 서 있었다. 신사가 누대 앞에서 대신사에게 절을 하자, 대신사가 신사를 불러 누대에 올라오게 하였다. 10여 명이 그 아래에 또 있었는데, 대신사가 모두 누대로 올라오라고 불렀다. 대신사가 다시 허리띠를 두르자 신사가 일어나서 받으려고 하였다. 대신사는 “그만둬라”고 말했다. 대신사는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무개 별은 이와 같고, 아무개 조화는 이와 같고, 또 아무개 별이 이와 같으매 아무개 사람이 아무개 조화가 이와 같고, 또 아무 해 아무 조화가 아무개 사람과 더불어 이와 같으니 세 사람이 특별히 상재(上才)가 되고 그 나머지 다섯 사람이 아무 해 아무 달에 이와 같이 될 것이다. 그 나머지 20인은 후일을 기다려 차례로 정해 주겠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드디어 일어나서 누대를 내려가자 4대문이 활짝 열렸다. 이때에 윗 누대에 올라간 자는 20여 명이고, 중간 누대에 들어간 자는 백여 명이며, 아래 누대에 들어간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대신사가 북문에 이르러서 크게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 일곱 자를 문 위에 써서 세 번 입으로 외우고 또 세 번 북문을 치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신사도 손으로 북문을 쳤지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사가 그 까닭을 묻자 대신사가 “뒤에 반드시 소리가 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대신사가 일어나자 신사는 “왜 이렇게 빨리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대신사가 말했다. “내가 상제와 의논을 다 끝내지 못하여 속히 가야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바깥에서 들어와서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대신사를 뵈었다. 신사가, “어찌 이렇게 무례한가?”라고 말하자 대신사가, “꾸짖지 말라. 이 사람은 성이 아무개이다”라고 말했다. 대신사가 차가울 한(寒), 따뜻할 온(溫), 배부를 포(飽) 석 자를 써서 신사에게 주며 말했다. “추우면 따뜻할 온 자를 쓰고 따뜻하면 추울 한 자를 써라”고 말했다. 대신사가 또 말했다. “혹은 왕평(王平)으로 줄 것이며 혹은 팔지(八智)로 줄 것이며 혹은 석씨(石氏)로 줄 것이다”
신사가 깨어나 보니 곧 한바탕 꿈이었다. 이날 밤에 강시원・김용진이 함께 잠을 잤다. 신사가 두 사람을 불러 일어나 앉게 해서 꿈 얘기를 상세하게 말하였다. 강시원이 말했다. “이것은 큰 꿈입니다. 실로 큰 도가 창명할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신사가 인제 김현수(金現洙)의 집에 가자 가까운 지역의 도인들이 치성제를 지내자고 요청했다. 신사가 그 성의를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자, 김계원(金啓元)・장춘보(張春甫)・김경식(金卿植)・김윤희(金允喜) 등 여러 사람이 제사에 참석했다.
4일에 신사는 강시원에게 말했다. “옛날에, 꿈에 내가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뜻이 있어도 이루지 못했다. 장차 등불을 밝히고 설법하려고 하는데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강시원은 대답했다. “오직 선생님이 뜻을 정하여 굳게 마음을 먹고 행할 뿐이니 어찌 물으십니까? 도의 전통이 선생님에게 있고 도의 발전도 선생님에게 달려 있으니 우리들은 단지 가르침을 받들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지금 도인의 상황을 보니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 많다. 큰 인등식(引燈式)은 지금으로서는 행할 수 없고 먼저 작은 인등식을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유시헌의 집에 가서 첫 번째 인등식을 거행하고 홍시래(洪時來)의 집에 가서 두 번째 인등식을 거행하고 최시경(崔時敬) 집에 가서 세 번째 인등식을 거행하였다.
정선의 도인이 앞장서서 대신사의 위령제를 지내자고 하면서 의관을 갖추고 의복을 만들어 기도의 축수를 하였다. 신사는 한결같이 섬기는 그의 정성을 생각하여 그 아름다운 뜻을 헛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행하도록 허락하였다.
7일에 신사가 경주로 길을 떠나자 김용진이 따라갔다.
신사의 재종제 최경화(崔慶華)가 인등제(引燈祭)를 거행하려고 하였다. 신사는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때에 인등제에 참석한 자는 김필상(金弼商)・박언순(朴彦淳)・정기중(鄭基重)・김영순(金永淳)・김재문(金載文)・황재민(黃在民)・권성옥(權成玉)・정상중(鄭尙重) 등 여러 사람이었다.
신사는 청송(靑松)에 사는 조시철(趙時哲)의 집에서 인등제를 거행했다.
신사는 홍석범(洪錫範)의 집에서 대신사의 생신제를 거행했다.
11월 12일에 신사는 홍석범의 집에서 인등제를 거행했다.
신사는 강시원・유시헌과 함께 의논하였다. “옛적에 대신사가 늘 포덕에 뜻을 기울여서 일찍이 우리에게 말했다. ‘천도의 운이 북방에 있으니 만약 남접(南接)과 북접(北接)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북접이라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 도가 발전하는 운수는 곧 옹치(雍齒)가 임금의 격이니
포덕 21년 경진년(1880년)에 신사는 『동경대전』을 간행하라고 명했다.
정월에 인제의 접(接)이 인등제를 행하려고 신사에게 고하자 신사는 강시원(姜時元)・김시황(金時晃)・김용진(金龍鎭)과 함께 김연석(金演錫)의 집에 가서 이를 거행하였다.
3월 10일에 대신사의 기제를 신사의 본집에서 거행하였다. 4월 5일에 처음으로 각 접에서 대신사의 향례를 거행하였다.
5월에 『동경대전』의 개간소(開刊所)를 인제의 갑둔리(甲遁里)에서 열었으며, 6월 14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작업을 끝냈다. 15일 아침에 치성제를 별도로 베풀어서 사유를 갖추어 대신사에게 고했다. 이때에 도청(都廳)은 신사가 맡았으며, 감동(監董)의 여러 유사(有司)는 강시원(姜時元)・김시황(金時晃)・심시정(沈時貞)・전시봉(全時奉)・유시헌(劉時憲)・장도형(張道亨)・김문수(金文洙)・장병규(張炳奎)・이보경(李普慶)・김정호(金錠浩)・신시영(辛時永)・황맹춘(黃孟春)・조시철(趙時哲)・한봉진(韓鳳振)・홍시래(洪時來)・신시일(辛時一)・김진하(金鎭河)・이정봉(李廷鳳)・김관호(金館浩)・심원우(沈遠友)・최석하(崔錫夏)・전윤권(全允權)・장흥길(張興吉)・김인상(金寅相)・김효흥(金孝興)・이천길(李千吉)・전세인(全世仁)・이귀록(李貴祿)・강기영(姜基永) 등 여러 사람이 맡았다.
포덕 22년 신사년(1881년) 6월에 신사는 대신사의 8편 가사를 인쇄하여 도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에 개간소를 인제 천동(泉洞) 여규덕(呂奎德)의 집에 설치하였다.
8월에 유경순(柳敬順)・윤상오(尹相五)・김영식(金榮植)・김은경(金殷卿)・김성지(金成之) 등이 신사를 뵙고 수도의 절차를 물었다.
포덕 23년 임오년(1882년) 6월에 신사가 49일의 기천식(祈天式)을 갈천(葛川)의 본집에서 거행했다.
그때에 서울에서 군란(軍亂)이 일어났다. 이민하(李敏夏)가 시국에 대한 방침을 묻자 신사는 망령되게 행동하지 말고, 와언을 전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포덕 24년 계미년(1883년) 3월에 손병희(孫秉熙)・손천민(孫天民)・박인호(朴寅浩)・황하일(黃河一)・서인주(徐仁周) 등이 차례로 신사에게 와서 절을 했다.
그때에 다섯 사람이 도에 대하여 묻자 신사는 천도의 깊은 뜻을 자세히 말하고 손병희와 손천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
포덕 25년 1884년(갑신년) 10월에 신사는 강서(降書)를 얻어서 도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에 손병희와 손천민이 신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신사께서 강서(降書)를 받았다. 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고의 조화여, 끝이 없으면서 다함이 없도다. 아아! 이 세상의 우리 도여! 어두움이 있고 밝음이 있도다. 경신년의 포덕(布德)이여, 어찌 운(運)이 아니고 어찌 명(命)이 아니겠는가?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화를 당함이여, 또한 운이 아니고 명이 아니겠는가? 주인의 한 마음이여, 처음 있고 끝이 있도다. 두 글자로 가리킴이여, 어찌 서양 사람들이 먼저 행하리오? 큰 운이 장차 열릴 것이다. 이 새로운 명을 받들어서 개척하여 이룰 것이다. 아아, 우리 주인은 공경히 받고 공경히 받으라.
신사는 강서를 고쳐 다음과 같이 주문을 지었다. “상제(上帝)를 섬기는 것이 한 조각 마음이요, 상제를 한 조각 마음으로 섬겨서 조화가 정해지고 만사를 알 수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신사가 강서하였다. “아아 슬프다. 이 세상 사람의 무지함이여. 이제 새와 짐승으로 비유하여 말하겠다. 닭이 우는 밤중이여, 개가 짖고 사람이 돌아가도다. 맷돼지가 칡을 놓고 다투고 있다. 창고의 쥐들은 제자리를 찾았다. 제나라의 소들은 연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 호랑이는 오나라로 갔다. 산에 있는 토끼는 성에 자리를 잡고, 용은 연못에 깃들어 있도다. 한수(漢水)의 다섯 마리 뱀이 대신할 수 없음이여, 아홉 마리 말이 길에 버티고 있도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또 강서하였다. “아아! 밝은 것은 어두움으로 변한다. 날이 밝음이여, 사람이 볼 것이다. 도의 밝음이여, 홀로 알 것이다. 이것이 운명의 짝이다. 하늘의 명이여, 사람의 명을 불러올 수 없음이여, 도를 어긴 자는 성경(誠敬)을 다하여 우리 도인이 덕으로 돌아가도록 행할 것이요, 도에 있는 자는 마치 어린애를 보호하듯이 대자대비로 수련하여 도를 이루도록 한결같이 하리라. 성(誠)은 마음의 주인이며 일의 몸이다. 마음을 닦아 일을 행하는 것이니 성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 경(敬)이라는 것은 도의 주인이며 몸의 쓰임이니, 수도하고 행신하여 오직 경으로 종사하라.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 경계하는 것이니, 하늘의 위엄과 귀신의 지목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다. 마음은 허령(虛靈)의 그릇이며 화복의 근원이니, 공사(公私) 간에 그 득실을 따져 보라”고 하였다.
신사는 강서를 가지고 육임(六任)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교장(敎長)은 충실하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삼고, 교수(敎授)는 성심으로 도를 닦아 전수할 사람으로 삼고, 도집(都執)은 풍력(風力)이 있고 기강을 바로잡고 경계를 아는 사람으로 삼고, 집강(執綱)은 시비를 밝혀서 기강을 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삼고, 대정(大正)은 공평하여 근실한 사람으로 삼고, 중정(中正)은 바른 말을 잘하는 강직한 사람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포덕 26년 을유년(1885년) 6월에 대신사의 영험이 나타나서 신사가 화를 피했다.
그때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심상훈(沈相薰)과 단양군수(丹陽郡守) 최희진(崔喜鎭)이 신사를 잡으려고 하였다. 신사는 꿈에 대신사의 신령스런 가르침을 받아서 잠시 보은(報恩) 장안(長安) 마을에 몸을 피했다. 장한주(蔣漢柱)와 김연국(金演局)이 신사가 있는 곳에 와서 급하게 보고하였다. “강시원(姜時元)・이경교(李敬敎)・김성집(金成集)이 잡혀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장한주와 함께 공주(公州) 마곡(麻谷)으로 가서 바깥사람과의 교섭을 끊었다. 8월에 신사는 보은으로 돌아왔다가 영천(永川)에서 화계동(花溪洞)에 이르렀다.
9월에 신사는 가족을 데리고 상주(尙州) 전성촌(前城村)으로 가서 살았다. 그때에 서인주(徐仁周)와 황하일(黃河一)이 생활을 도와주었다.
추운 계절이 왔지만 신사의 식구들은 입을 솜옷이 없었다. 도인 이치흥(李致興)이 백목 7필을 바쳤다.
포덕 27년 병술년(1886년)에 신사는 강화의 가르침으로 도인들에게 성심으로 수도에 힘쓰라고 하여 악질을 면하게 했다.
신사는 조용히 도제들에게 말했다. “금년에 악질이 반드시 크게 일어나서 많은 인명이 줄어들 것이니 그대들은 섭생(攝生)을 잘하여 여기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각 도의 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지난날보다 수도를 배가하되 수심정기하며 정성껏 주문을 외우고, 지성으로 청수를 받들어서 하늘이 행하는 것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과연 악질이 크게 유행하여 감염이 된 자가 백에 하나라도 없으면 다행이었는데, 도인의 집만은 하나도 걸리지 않았으며, 신사가 사는 마을 40여 호 가운데 하나도 걸린 자가 없었다.
신사는 그때에 전성촌(前城村)에 있으면서 스스로 야인으로 행세하였다. 손천민(孫天民)・박인호(朴寅浩)・이영영(李榮永)・권병일(權秉一)・권병덕(權秉德)・임덕현(林德賢)・서치길(徐致吉)・박치경(朴致敬)・송여길(宋呂吉)・박시요(朴時堯) 등이 차츰차츰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
포덕 28년 정해년(1887년)에 봄과 가을에 각각 한 번씩 49일간 하늘에 비는 정성을 다하였다.
정월 1일에 신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내렸다. “무극대도(无極大道)는 마음의 정성에 있고, 원통봉(圓通峯) 아래가 뚫리고 또 뚫리며 뜻밖에 4월 4일이 와서 금사(金士) 옥사(玉士) 또 옥사로다. 금일 명일 또 명일이로다. 무엇 무엇을 알고 알며 또 무엇을 알리요? 해가 가고 달이 오고 새 날이 오도다. 천지의 정신이 나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도다”라고 하였다. 이 달에 신사의 아들 최솔봉(崔率峯)이 청주에 사는 음선량(陰善良)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24일에 신사의 부인 김씨가 죽자 상주(尙州) 봉산(鳳山)에 장사지냈다.
3월 21일은 신사의 회갑이었다. 원근에서 도인들이 많이 모였다.
이달에 신사는 장안 마을에 돌아와 살았다.
포덕 29년 무자년(1888년)에 몸을 피해 숨어서 오직 성심으로 하늘에 기도했다.
이해 봄에 신사는 밀양손씨(密陽孫氏)에게 장가들었다. 신사가 도유 10여 명과 함께 전주(全州) 참의리(參議里)에 이르렀는데, 그 집에는 밥을 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두 사람이 먹을 정도였다. 밥을 짓는 부녀자가 열 사람을 먹이기에는 밥이 모자란다고 걱정하였다. 그 지아비가 말했다. “먼저 신사에게 드리고 그 나머지는 다시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먼저 신사에게 밥을 드렸지만 밥이 아직도 남아서 열 사람에게 먹이고도 오히려 밥이 남았다.
포덕 30년 기축년(1889년) 7월에 시대의 형상을 살펴보니 지목이 급박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사는 더욱 숨어 지냈다.
그때 신사는 육임(六任)의 접소를 파하고 괴산(槐山)의 신양동(新陽洞)에 옮겨가 살았다. 10월에 손천민이 신사에게 와서 보고하였다. “서인주(徐仁周)가 왕명으로 체포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가 인제(麟蹄)의 김연호(金演鎬)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때에 포졸들이 사방을 구석구석 수색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대로 간성(杆城) 왕곡(旺谷)에 있는 김아무개(그 이름을 잃었다) 집으로 가서 잠시 살았다.
포덕 31년 경인년(1890년)에 신사는 손수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 지어서 도인에게 반포했다.
정월에 신사의 아들 최동희(崔東曦)가 태어났다. 신사는 손병흠(孫秉欽)을 시켜 비밀의 글을 손병희에게 보냈다. “내가 여기에서 오래 살 수 없으니 반드시 네가 있는 곳으로 옮겨가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손병희와 손병흠이 스스로 교자를 지고 모시고 와서 공주(公州) 외서천(外西村) 보평(洑坪)에서 살았다.
5월에 이르러 비로소 체포령이 조금 풀어졌다는 보고를 들었다.
7월에 신사는 새소리를 듣고 도제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니, 도제들은 모두 대답이 없었다. 신사는 말했다. “이것은 하늘을 모시는 소리이니라”라고 하였다. 또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산왕(山王, 호랑이)과 성황신(성황당신)과 조왕신(부엌신)의 모양을 많이 그려 한마음으로 받들면서 복을 많이 받기를 구하고 있으나, 이것은 정말 말할 거리가 못된다. 어찌 이처럼 신의 이름이 많은가? 일괄하여 말한다면 곧 천지 음양의 기운이다. 우리들은 수심정기하여 오로지 한결같이 천주를 믿을 뿐이니, 무슨 다른 신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연국(金演局)은 말했다. “새가 우는 소리만이 아닙니다. 오직 천주(天主)를 모실 뿐입니다. 무릇 천하에 날고 헤엄치는 동물과 식물이 천주를 모시지 않는 것들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때에 도에 닥친 화가 조금 잠잠하였다. 장희주(張希周)와 윤상호(尹相五)가 바깥에서 와서 고하였다. “서인주가 지금 보석을 얻었으나, 보석금을 납부한 뒤라야 온전히 살 길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즉시 김연호(金演鎬)의 접소에 지시하여 돈 500을 마련하여 보내고 여러 도제에게 말했다. “서인주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생사를 알지 못했었다. 나는 식사 뒤에는 항상 서인주를 위해 하늘에 빌었다. 자네들도 식사할 때마다 이와 같이 하라”고 하였다.
어느 날 신사는 도제를 시켜 강화의 이치를 풀게 하였으나, 여러 도제들이 진술한 의견이 신사의 뜻에 맞지 않았다. 손병희가 말했다. “사람의 이치는 곧 하늘의 이치가 준 것입니다. 하늘이 사람에 있으니 사람이 곧 신령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사람과 하늘이 둘이 되면 어두움 속에서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곧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어찌 하늘의 신령이 감화한 바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신사는 서택순(徐垞淳)의 집을 지나갈 때 베 짜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 “이것은 천주가 베 짜는 소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신사의 생활은 대부분 서택순이 주선하였다.
포덕 32년 신묘년(1891년)에 신사는 하늘을 가리키며 손병희에게 말했다. “이는 홀로 하늘이 아니다. 사람이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매 곧 천지가 혼원(混元)하는 기운이니 사람이 하늘을 본 뒤에야 이기(理氣)의 참모습이 더욱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손병희가 하늘의 이기에 대하여 신사에 묻자 신사가 이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3월에 호남의 도인 김영조(金永祚)・김낙철(金洛喆)・김낙봉(金洛葑)・김낙삼(金洛三)・남계천(南啓天)・손화중(孫和中)이 찾아오자 신사는 말했다. “오늘 도의 운수는 곧 동방(東方)의 목운(木運)이다. 목(木)이 서로 부딪치면 불을 내는 것은 필연의 형세이니, 인심이 화순하면 하늘이 반드시 감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또 말했다. “재덕이 있는 자를 골라서 두령을 삼을 것이오, 두령이 지휘하는 대로 한결같이 따르고 서로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면 도는 반드시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5월에 신사는 부안(扶安)에 있는 윤상오(尹相五)의 집을 방문했다. 이때에 윤상오는 호남 우도의 두령이요, 남계천은 좌도의 두령이었다. 문지(門地)가 크게 달라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해서 분쟁이 일어났다. 신사가 남계천을 호남좌우도편의장(湖南左右道便義長)으로편의장(便義長) 임명하자 호남의 인심이 좋지 않았다. 김낙삼(金洛三)이 호남 좌우도에 설치된 16포의 도인 백여 명을 거느리고 신사가 계신 곳에 도착하여 신사에게 보고하였다. “호남 편의장을 남계천으로 정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여론에 맞지 않습니다.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사람을 시켜 타일렀다. “우리 도는 5만 년 개벽의 운수를 타서 무극의 큰 도를 창설했다. 이에 따라 문벌의 높고 낮음과 노소의 등급과 구분이 사라졌다. 어찌 논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문벌이 낮고 한미하더라도 두령의 자격이 있으면 한결같이 그 지휘를 따라서 도를 밝히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김낙삼과 여러 도인들은, “알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신사는 태인(泰仁)의 김낙삼의 집에 도착하여 육임을 선임하였다.
6월에 신사는 직면곡(織綿谷)에 있는 김기범(金基範)의 집에
신사는 호남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참으로 도를 아는 자가 매우 드물다”라고 항상 한탄하였다. 전주부 최찬규(崔燦奎)의 집을 방문했는데, 배행한 자는 남계천(南啓天)・허내원(許乃元)・서영도(徐永道)・장경원(張敬元) 등 여러 사람이었다.
7월에 신사는 신평(薪坪)의 본집에 돌아와서 한편의 연시(聯詩)를 얻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기운을 꿰뚫어보아 마음을 바르게 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각처의 도인에게 보여주고 대구를 짓게 하였다. 김연국은 다음과 같은 대구를 지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理)가 사람이 이를 법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12월에 신사는 충청도 충주 아촌(亞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모든게 오로지 신재연(辛在淵)의 도움 덕택이었다.
포덕 33년 임진년(1892년) 정월에 조병식(趙秉式)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도학을 금지한다고 포고하고 신사의 동정을 살폈다. 신사는 손연도(孫延導)를 따라서 다시 진천(鎭川) 부창리(扶昌里)로 옮겨갔다.
5월에 김주원(金周元)의 노력에 힘입어 신사는 다시 상주의 왕실촌(旺實村)에 옮겨가 살았다.
7월에 서인주(徐仁周)・서병학(徐丙鶴) 두 사람이 와서 신사를 뵙고 말했다. “지금 우리들이 당장 급한 일은 오직 대신사를 신원(伸寃)하는 일 한 가지입니다. 원하옵건대 선생은 각지의 도유들을 효유하시어 상소를 가지고 대궐로 나아가서 우리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고, 사문이 옛 성인의 권성징악하는 정사에서 나왔음과, 어진 재상과 큰 선비들을 배양하는 은택이 미치는 바를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근래에 성현의 학이 폐지되고 오랑캐의 풍습이 마구 퍼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법이 사라지매 대륙이 홍수가 되고 인류는 맹수로 바뀌었습니다. 다행히 봄이 동쪽으로 돌아와서 해와 달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지난 경신년(庚申年, 1860년) 4월 5일에 상제께서 몸소 오셔서 강화를 하여 무극의 대도를 경주의 수운 대선생 최제우에게 주시니 우뚝한 큰 도는 생민에게는 없던 종교요, 참되고 참된 성학은 우리나라의 끝없는 포덕을 넓혔습니다. 세 교를 합하여 하나로 하니 유불선(儒佛仙)이 본래 그 범위 안에 있었고, 세 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쳤으니 성경신(誠敬信)이 공부의 방도임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또 말했다. “선생은 서학(西學)이 만연할 것을 미리 알았으며, 장차 큰 도가 핍박을 받을 것을 예견하고 독선적으로 처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리를 베풀어 도를 강의하고 문인과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의 바른 도리를 굳게 지키고 참 성품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갑자년(甲子年, 1864년) 3월에 도리어 사학(邪學)으로 모함을 당했으니 선생께서 진실로 만고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였다. 신사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성을 내서 말하였지만 신사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에 원근의 여러 도인들이 공주부(公州府)에서 도회(都會)를 열었는데, 서인주와 서병학 두 사람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연 것이다. 그 회의의 대강은 각 고을의 수령들이 도유(道儒)를 침학하고 백성들을 해치고 그 재물을 빼앗으니 관문(關文, 위 기관에서 보내는 지시의 공문)을 보내 엄금하라는 뜻으로 감영에 알리는 행동이었다. 그 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병식이 제사를 이와 같이 내렸지만, 또한 관문을 여러 고을수령에게 보내 이렇게 말했다
이 달 신사는 문인에게 명령하여 입의문(立義文)을 지어 각지의 도인에게 널리 효유하였다.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우리를 서학의 남은 무리로 지목하여 잡아들여 가두고 돈과 재물을 토색질하여 사상자가 연달아 나왔고 고을의 호민(豪民, 토호)들이 들리는대로 침학을 하여, 집은 헐리고 재산은 빼앗기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도유라고 이름을 삼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떠돌아다니며 머물러 정해 살 곳이 없어서 구렁텅이가 앞에 놓여있습니다.
단자의 내용은 또 계속 이어진다.
초 9일에 감사 이헌직이 이미 과거의 소장에 내린 제사를 다시 제사로 내리고 부득이 관문을 여러 고을에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보다 앞서 신사가 삼례의 도회소에 나가다가, 도중에 낙상을 해서 빌미가 잡힌 일이 있었다. 형세가 어쩔 수 없어서 도회소에 갈 기약을 어기고 손천민에게 부탁하여 도회소에 발의하여 이 경통문을 내게 된 것이다. 경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때에 서학으로 이름을 걸어놓은 자들이 거짓말을 만들어 내서 동학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서도(西道)에 저절로 신통 묘술이 있으니 장차 공중에 누각을 만들고 여기에 맞추어서 하늘이 울리는 대포로 모든 도인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언이 마구 퍼지고 여론이 비등하였다. 신사가 또 경통문을 만들어서 도유에게 말했다
12월 초6일에 신사는 대신사를 신원하는 일이 가장 급하다고 하여 장차 상소의 글을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리려 하였다. 이 때에 먼저 장내(帳內)에 도소를 정하여 도유가 왕래하는 것을 영접하려고 했다. 그 때에 사방의 도유(道儒)들이 나날이 폭주하여 영접이 복잡하고 일이 두서가 없었다. 도소(都所)에서 또 경통의 글을 다음과 같이 도유에게 보냈다.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돌보시어 지난 경신년(1860년) 4월 5일에 경주 용담의 최제우 선생이 친히 상제의 강화를 받아 처음으로 무극의 대도를 세웠습니다. 그 도의 원리와 원칙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이로부터 하늘에 근원을 두어 성품을 가졌습니다. 몸에 걸린 것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하늘로 돌아간다면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니, 이것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종지(宗旨)입니다. 또 유불선이 각각 문호를 세워서 서로 배척하고 있지만, 그 근원을 캐 보면 또한 모두 하늘에 뿌리를 박아서 도를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3도에 서 그 지나친 것은 덜고 그 부족한 것은 더해 주는 한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 유문의 인륜대강(人倫大綱)과 도가의 청정자수(淸淨自守)와 부처의 보제중생(普濟衆生)이 모두 우리 도의 세 과목의 안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 도는 수심정기(守心正氣)로 다시 문호를 정하고 포덕광제(布德廣濟)로 스스로 목적을 삼았습니다. 이것은 그 잡은 바가 지극히 간략하지만 안으로 포용하고 있는 것이 지극히 넓기 때문입니다. 다만 법을 세우고 교를 베풂은 이 세상이 숭상하는 바와 다름과 같음이 없지 않으니 평일에 삼칠(三七) 글자의 성스러운 주문을 외울 때 천주(天主) 두 글자가 있어서 한 시대가 지목하는 큰 사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극 정성으로 하늘을 모시는 행실과 교화로 신을 받드는 묘미는 실로 상정(常情)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나치는 땅과 사는 곳에서 따르는 자가 구름과 같아서 산골마다 가득 차고 땅마다 가득 찼습니다. 문도의 제자들이 되어서 친히 교화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그 습관을 고치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하늘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이 하고 사람에게 절하기를 하늘에 절하는 것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공덕이 사람에 있다고 한다면, 말세에 살면서 옛 것에 짝하고 옛 하늘을 고쳐서 새로운 하늘을 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이 이룬 것을 아름답게 여기지 아니하려는 자들이 고루하게 옛 것을 지키고 허위 날조로 그 근원을 배척하고 또 돌을 던진 것입니다.
마침내 갑자년(1864년) 3월 10일에 대신사께서 대구에서 순도하시니 그 지극 원통함으로 말하면 사람의 영혼이 처절하고 천지가 참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눈물을 삼키고 한을 품은 지 30년이 되었지만 선사의 지극 원통함을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금영(錦營)에서 원통함을 풀어주고 완부(完府)에서 호소를 받아준 것은 오로지 원통을 풀어주고 폭압을 금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야박한 세상 풍속이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동학으로 지목하며, 당파의 무리라고 해서,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이득을 꾀하면서 돈과 재물을 토색질하고 아버지와 자식을 잡아들이며 가산을 탕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학으로 이름을 삼는 자는 모조리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다만 선사께서 생존해 계실 때 동쪽에 살면서 동쪽에서 배웠으므로 동학의 이름을 창도해서 서쪽에서 온 학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뜻하지 않게 다시 당파의 무리를 일으켰다고 해서 도리어 서교의 잘못된 것을 돕고 있으니, 유유한 창천(蒼天)아,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이겠는가?
충청감사는 제사를 내려, 동학은 조정에서 금하는 바요 우리가 함부로 편리를 봐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조정의 명령이 있다면 8도가 모두 같아야 할 것이거늘 어찌 유독 충청감영 만이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전라감영은 다만 순천부사(順天府使) 윤영기(尹榮起)의 말을 믿고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침학을 일삼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수령들이 더욱 날뛰고 향호들이 마음대로 패악질을 하여 호서에서는 영동(永同)・옥천(沃川)・청산(靑山)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가산을 빼앗고 있으며, 호남에서는 김제(金堤)・만경(萬頃)・정읍(井邑)・여산(礪山)의 아전들이 인명을 해치고 상함이 더욱 극성스럽고 참혹하였습니다. 슬프고 슬프지만 하소연할 길이 없어서 원성이 하늘을 넘치고 흐르는 눈물이 땅을 적십니다. 대개 한 지아비가 그 살 곳을 얻지 못하면 묘당(廟堂, 의정부의 별칭)이 아파하는 것이요 지극한 원통이 그것을 풀지 못하면 조정의 흠이 되는 것이니, 이 정상을 가지고 임금에게 알리려 합니다.
그 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경신년(1860년) 4월 5일에 상천(上天)이 하민(下民)을 몰래 도우셔서 경주 고(故) 학생 신(臣) 최제우(崔濟愚)가 천제의 강화를 받아서 사람을 가르쳐 포덕을 하니 세상에서 나지 못할 참된 선비요 처음으로 연 종교의 학이라 할 만합니다. 최제우는 곧 병자호란 때의 공신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6세손이며 영남의 큰 선비 최옥(崔鋈)의 아들로, 도를 행하며 포교할 때 3년이 지나지 않아 서학으로 지목을 받고 무고의 화를 입어서 목숨을 경상감영에서 마쳤습니다. 그때의 광경은 천지에 한탄스럽고 서운한 마음이 있었고 일월에 빛이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진실로 추호라도 부정의 죄과를 범하면 법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원통함을 풀고자 하겠습니까마는, 사람의 모함을 당하여 이처럼 흰 구슬에 티 하나 없는 지극한 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던 큰 죽임을 잘못 당하였습니다. 신들이 모두 최제우의 연원(淵源) 사숙(私淑)입니다. 뼈를 쑤시는 고통과 가슴이 막히는 한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이 그 들은 바를 감히 숨기지 못하고 임금님께 낱낱이 드러냅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 성인의 가르침이며,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이르기를, “깨우쳐 주신 부자(夫子, 공자의 별칭)의 도는 한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는 것이며, 오직 우리의 도로 논할 것 같으면 크게는 같으면서 작게는 다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이르기를, “우리의 도가 넓으면서 간략하지만 오직 성경신(信敬信) 석 자에 있으니 이 석자를 낱낱이 터득한 뒤에야 바야흐로 알 수 있는 도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 이르기를, “유불선(儒佛仙)이 오직 말류의 폐단이 있으나 그 근원을 캐 보면 모두 하늘에 의지한 것이다. 우리의 도는 유불선을 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가 지은 『동경대전』의 몇 편을 살펴보면,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함께하는 근원을 반복했고 성품과 몸이 함께 나가는 공부를 치밀하게 하여 참 지혜와 오묘한 풀이가 홀로 밝게 비추니 천지의 사이에 헤아림이 있는 문자라고 말할 만합니다. 그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 오로지 기질을 변화하고 습관을 제거하며 정성스럽게 몸소 하늘을 받들면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한번 가르침을 겪을 적에 사람이 그 덕을 자신(自新)하지 아니함이 없고 스스로 그 기질을 변화하여, 곧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교를 베푸는 방편이 지금 세상이 숭상하는 바와는 적지 않게 다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이르기를, “동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까닭이 있으니, 도는 비록 하늘에서 나왔지만 동방으로부터 만들어져서 동쪽 사람이 배웠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 스승의 뜻에 근본해서 말하면, 서교(西敎)의 형세가 차츰 만연하므로 동학이라고 이름을 붙여 그 실제의 이치가 같지 않음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세의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하여 동학으로 배척하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양심이 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신의 스승이 일찍이 문인에게 이르기를, “도는 비록 천도이지만 학은 동학이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니 서쪽을 어찌 동쪽이라 할 것이며 동쪽을 어찌 서쪽이라 하겠는가? 공자가 노나라에 태어나서 추나라에서 기풍을 일으켜서 추로의 바람이 이 세상에 전해졌는데, 우리 도는 동쪽에서 받아 동쪽에서 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서쪽 이름으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동학이란 이름을 얻은 까닭이며, 신들이 이에 종사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동학을 지목하여 서교라고 공격하고, 동포를 몰아서 이단으로 거절하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한 일입니다.
도신(道臣, 감사의 별칭)과 수령들은 민족(民族)을 토개(土芥)와 같이 보고 간향(奸鄕)과 토호들은 도유(道儒)를 제물 만드는 원천으로 보아서 얽어서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며,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토색질함이 끝 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통함을 고할 데가 없음에 하늘이 색을 변하고 임금이 어여삐 여기는 적자(赤子)는 이상스런 물건이 되었습니다. 대저 이 도는 수심정기(守心正氣)로 근본을 삼아서 천명(天命)을 공경하며 두려워하고 사람의 기강을 성실하게 닦아서, 선을 따르고 악을 물리침에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로 하여금 하늘 이치의 근본을 알게 하고 인도(人道)의 정의를 지키게 해서, 끝내 성스러운 자는 성스러움을 이루게 하고 밝은 자는 밝음을 이루게 하고, 어진 자는 어짐을 이루게 하니, 부자(夫子, 공자)의 도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 동학을 편벽된 이름이라고 하여 서인(西人)들의 사교로 지목할 수 있습니까? 동학은 과연 만세에 폐단이 없고 천하에 다함이 없는 큰 도입니다. 또 신들이 만약 부정의 도와 근거 없는 일로 전하에게 잘못 고했다면 이는 결국 스스로 임금을 속이고 위를 속이며 스승을 배반해 윤리를 능멸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천지 부모는 이 길러주어야 할 적자를 불쌍히 여기사 선사의 지극한 원통을 풀어주시며 신들의 목숨을 구제해 주소서.
13일에 사알(司謁)이 임금의 전교를 구전으로 전하여, “상소의 격식은 사마소(司馬所)에서 표를 받은 뒤에야 올릴 수 있다”라고 하자, 표를 얻으려고 의논하였다. 임금으로부터 또 전교가 내리기를, “너희들이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한다면 소원대로 베풀어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분부를 듣고 일반 도유들은 곧바로 물러 나와서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관리들이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교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달 20일에 신사는 다시 경통문을 각지에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일에 신사가 장내마을로 돌아오자 모인 자가 수 만명이었다. 도유들이 참혹하게 죽고 약탈을 입은 형상을 가지고 다시 상소를 올리자고 의논하였다. 이때 각각 포내(包內)에 장대를 세워 표시를 하고 돌을 쌓아 보루를 만들어서 서로 인사하는 절차가 매우 질서가 있어서 볼 만 했다. 어떤 이는 소리를 내서 주문을 외우며 시대의 의리를 토론하면서 거의 한달 보름을 지냈다.
그때에 소문이 떠들썩하게 온나라에 일어나서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께서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로 삼아서 각각 해산해서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선무사가 보은군에 이르렀으나 기세에 눌려 도회소에 들어오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탐지하였는데, 도유들이 다른 꼬투리를 잡는 것은 아니고, 다시 상소하려고 의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4월 2일에 어윤중이 본 고을 군수 이규백(李圭白)과 함께 임금의 윤음을 받들고 도회소에 들어 와서 임금의 뜻을 선포하고 교도들을 타이르며 깨우쳤다. “벼슬아치들의 탐학과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행위는 반드시 엄하게 징벌하겠으니, 너희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각각 생업에 안정하라”고 하였다. 위로와 타이름이 지극하자, 말이 끝난 뒤에 도유들은 북쪽을 향해 임금의 은혜에 절을 하였다. 3월이 지나서 곧바로 해산했으나 각 지역 포의 두령들은 후환이 있지 않을까 염려해서 각각 피신했다.
신사는 또 인동(仁同)에서 김산(金山)의 편겸(片謙)의 집으로 나아갔는데, 손병희・김연국 두 사람이 모시고 뒤를 따랐다. 그때에 서병학이 와서 다시 신원의 일을 말하고 또 이관영(李觀永)과 이해관(李海觀)이 부화뇌동하여 신사에게 지극히 불손한 말을 했지만 신사는 응연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10월에 신사는 덕기(德基)를 대동하고 황간(黃磵)을 경유해서 상주의 왕실 별장으로 돌아왔다. 조재벽(趙在璧)이 다시 주선을 해서 식구들을 청산(靑山) 문암리(文巖里)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덕기가 묵은 병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점점 심해져서 그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신사는 도학(道學)에 미친 화로 인하여 동쪽으로 서쪽으로 떠돌아다니며 자리가 불안하였다. 지금 또 이 참극을 만나니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려줄 때에 먼저 곤궁한 일로 시험하는 것이리라. 신사는 자연의 운명에 따라 하늘이 명한 바를 들을 뿐이었다.
포덕 35년 갑오년(1894년) 12월 27일에 신사는 세상의 형편이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몸을 드러내어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드디어 동쪽 골짜기에 있는 홍천(洪川) 등지로 몸을 피해 살면서 그 해를 보냈다. 그때에 모시고 따라간 자는 손병희(孫秉熙)・김연국(金演局)・손병흠(孫秉欽)・손천민(孫天民)・임학선(林鶴仙)이다.
포덕 36년 을미년(1895년)에 도학에 미친 화와 당인의 지목이 나날이 더욱 심하여 도학의 수령으로 지명이 된 자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정월 1일에 신사는 인제군으로 가서 잠시 최영서(崔永瑞)의 집에 기거하였다. 또 포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시종 몇 사람을 부득이 각지로 피신시켰다.
4월에 손병희・손천민・손병흠・김연국이 최영서의 집에서 신사를 뵈었다.
5월에 호남 사람 김숙여(金淑汝)와 경기 사람 이종옥(李鍾玉)이 와서 절했다. 그 때에 곤궁한 기색이 역력했던 김연국은 성난 기색으로 말했다 “오늘 이른바 수도하는 자들이 그 하는 짓과 마음씀이 하늘의 이치에 합당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마음을 따르지 아니하니 『용담유사』에 이른 바 문장군(蚊將軍, 모기)이 바로 너희들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 무리가 하는 짓을 가리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그를 위로하며 타일렀다. “군자가 환란에 처했을 때엔 환란의 도를 행하며, 곤궁에 있을 때엔 곤궁의 도를 행하는 것이니, 우리들은 마땅히 하늘의 이치를 따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짓과 마음씀이 나에게 매우 심하더라도 스스로 돌이켜 반성한다면 사소한 객기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연국의 기색이 가라앉았다.
포덕 37년 병신년(1896년) 정월 6일에 손병희는 신사의 비밀스런 뜻을 받고 충주로 갔다. 도가 화를 당하였는데 인심이 어떤지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그때에 허진(許鎭)・장경하(張敬夏)・조동현(趙東賢)・양기용(梁奇容) 등 여러 사람이 신사를 찾아와서 뵈었다. 이달 11일 오시에 신사는 시 한 구절을 지어서 손천민을 시켜 써서 문인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훈도와 전발(傳鉢, 전수해 주는 것)의 은혜를 입었으며 마음을 지켜 훈도를 하면서 전발의 은혜를 생각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13일에 손천민이 남쪽으로 돌아갔다. 나그네 생활의 곤궁함이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사는 일찍 일어나서 문도 제자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운수가 하늘이 내린 것을 아는가. 이 운수에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상지(上智) 같으면 요순 공맹과 같은 이가 몇 사람이요 염락(濂洛)의 어진 선비들 같은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인들이 물었다 “어느때 인재가 나옵니까?”라고 하였다. 신사가 대답했다. “너희들이 안심하고 수도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2월에 손병희가 사람을 시켜 글을 전하여, “이미 선생님의 식구들을 충주(忠州) 외서촌(外西村)으로 옮겼습니다”라고 알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병희와 손천민 두 사람이 와서 식구들을 옮겨 정돈한 사유와 도에 닥친 화가 조금 풀어진 일을 낱낱이 고하였다. 신사가 의암(義菴)이란 도호를 손병희에게 주고 송암(松菴)이란 도호를 손천민에게 주었다. 신사는 각지 두령의 임첩(任帖)을 차정하고 임첩 안에 해월(海月)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이달 17일에 신사는 충주로 가다가 말루촌(秣樓村)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신의 본집이 여기에 옮겨와 있는 것을 알고 안식구와 더불어 단란하게 모였다. 이로부터 원근의 도유들이 풍문을 듣고 알아서 비밀스럽게 서로 왕래하였다.
3월 10일에 신사는 대신사의 향례를 말루촌 본 집에서 거행하였다.
4월 초에 신사는 충주로부터 안식구들을 데리고 음성(陰城)의 창곡(倉谷)으로 옮겨가 살았다.
6월에 신사는 체포령이 또 내릴 것을 알고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창곡에서 다시 청주의 산막으로 옮기니 그 근처에 살던 신재섬(辛在暹)이 자금을 내어 주선했다. 그 때에 권병덕(權秉悳)과 신형모(辛瀅模)가 산막으로 찾아와서 신사를 뵈웠다.
7월에 신사는 상주로 가서 높은 지대에 있는 이자성(李子成)의 집에 잠시 살았는데 김연국이 수행하였다.
8월에 신택우(申澤雨)를 따라서 안식구들을 상주 은천(銀天)에 옮겨가 살게 했다.
9월에 각지의 두령이 차츰차츰 찾아와서 인사를 했다. 호남 사람 손병규(孫炳奎)・홍계관(洪桂寬)・최익서(崔益瑞) 등 여덞 사람이 은천에 와서 머무르면서 포를 만들 일로 신사를 뵙고자 하였다. 신사는 김낙철(金洛喆)에게 분부하였다. “이 때에 포를 설치하는 것은 묵은 불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니 너희들이 내 뜻을 알려 타일러 보내라”고 하였다. 김낙철은 신사의 효유를 받들어서 그들을 보냈다.
신사는 은천에 산 뒤로 더욱 군색해서 미음과 죽을 계속 먹지 못하고 몸에는 성한 옷이 없었지만 마음은 평안하였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큰 하늘이요 큰 성품이었으며, 몸으로 행하는 것은 신(神)과 도(道)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영고와 화복을 보기를 실오라기 하나도 가슴 속에 걸림이 없는 것과 같았는데 이렇게 그 해를 보냈다.
포덕 38년 1897년(정유년) 정월에 권병덕(權秉悳) 등이 와서 신사를 뵈었다. 그 때에 비로소 각지 두령의 임첩(任帖)을 차정하였다.
2월에 신사는 임첩을 차정하는 일을 정지하고 음죽(陰竹)의 앵산(鸚山)에 옮겨가 살려고 하였다. 신사는 이때 먼저 안식구를 보내고 손병희・손천민・김연국 세 사람을 데리고 앵산동에 머무르자 빈객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신사는 지목이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문인에게 말했다. “임첩을 차정하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다시 시행하지 말고 지금부터 농사짓는 것으로 생업을 삼아서 하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4월 5일에 신사가 여러 제자에게 말했다. “오늘은 대신사의 득도일(得道日)이다. 우리 교문에 이를 기념하는 향례 절차가 있으니 사람마다 각각 한 자리를 마련하여 나를 향해 제물을 진설하여
마침 일이 있어서 원주(原州) 등지에 나와서 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거리에 사는 도인 임순호(林淳顥)의 집에 들어가니 임순호가 제물을 갖추어서 예를 행하고자 하였다. 손병희가 임순호에게 말했다. “나는 천연의 사상이 있어서 마음 가운데에 움직임이 있으니 오늘 저녁 향례는 내 말대로 거행하고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며, 일이 스스로 드러남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임순호는 이 말을 따라서 각각 제수를 진설하였다. 그 사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곧 내 마음이 추상하는 것이요 향례는 또한 내 마음이 기념하는 것이다, 나로부터 비롯되며 나로부터 주인이 되는 것으로 벽을 향해서 진설하는 것이 특별한 의의가 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에 신사는 제례를 행하였는데 또한 나를 향해 진설하는 것으로 절차를 삼았다. 이상하도다. 서로 거리가 90리나 멀리 있으면서 사상이나 행사가 서로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았으니 사제 간의 두 마음이 부합됨이 이와 같았다.
신사는 김연국(金演局)・손천민(孫天民)・조재벽(趙在璧) 등 제자들에게 말했다. “경
5월 1일에 신사는 특별히 심신회수(心信回水, 마음의 믿음이 물을 돌린다는 뜻) 넉 자를 써서 문인으로 하여금 각지의 두령들에게 보내주게 했다.
7월에 관서포(關西包)의 두령이 사람을 보내 신사에게 말했다. “임첩이 있은 뒤에야 인심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부득이 이를 허락하고 문도에게 말했다. “지금의 임첩은 마땅히 북접 법헌(法軒) 넉자로 고쳐서 서명할 것이니 너희들은 온당한 글자를 찾아서 교정을 해보라”고 하였다. 손병희는 ‘지존천황(至尊天皇)’이라고 했고 손천민은 ‘해월선생(海月先生)’이라고 했고 김연국은 “용담(龍潭) 두 글자를 쓰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말했다 “또한 넘치지 아니하겠는가, 내 뜻은 용담연원(龍潭淵源) 넉 자가 옳을 듯하니 이대로 고쳐서 후일의 정해진 규칙으로 삼아라”고 했다. 이로부터 각지에서 임첩의 청원이 연달아 이어졌다.
8월에 신사는 원주의 전거리(田巨里)로 옮겨가 살았다.
9월 14일에 아들 최성운(崔聖運)이 태어났다.
10일에 신사는 손병희・김연국・손병흠・김낙철・신현경(申賢敬) 등 여러 제자들과 함께 겨울을 보냈다.
11월에 신사는 김낙봉(金洛葑)에게 말했다. “어린애의 천연두는 곧 심장에서 갈려 나온 경락이 불을 숨겨서 발작했기 때문에 그 신을 알 적에 말이 맞는 것이 많고 결코 서쪽 신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12월 24일에 신사는 도통을 의암 손병희에게 전해주고 손천민, 김연국에게 단단히 부탁하였다. “너희들 세 사람이 나를 따라 여러 해 동안 함께 도학을 배우고 재앙과 경사를 함께 했으니 공으로 말하면 한 몸이라 말할 만하다. 그러나 도의 발전과 일의 종리(綜理, 빈 틈이 없고 조리가 정연함)는 주장하는 자가 있은 뒤에야 여러 일이 잘 풀릴 것이니 지금부터는 너희들이 의암을 북접 대도주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삼아라”라고 하였다.
포덕 39년 무술년(1898년)에 신사가 순도(殉道)하였다.
정월에 북접대도주가 여러 사람과 함께 신사를 남여에 싣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때에 밤은 이미 어두웠고 눈이 도로를 메워서 갈 곳을 알지 못했다. 북접대도주는 작은 불이 산 위에서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호랑이라 여겼다. 손병흠이 풀을 태우면서 곧바로 그곳으로 가니 곧 큰 호랑이가 눈에서 빛을 낸 것이었다. 호랑이를 보고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호랑이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가 앉았던 곳은 곧 산길이었다. 곧바로 이 길을 따라서 몇 리를 가다가 자리를 잡고 쉬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지평(砥平) 갈현(葛峴)의 이강수(李康洙) 집에 가서 며칠을 머물렀다.
신사는 홍천(洪川)에 있는 오창섭(吳昌燮)의 집에 가서 한 달쯤 머물다가 2월 그믐에 임학선(林學善)의 주선으로 원주(原州) 송동(松洞)의 원진여(元鎭汝) 집으로 옮겼다.
4월 5일에 신사의 아들 최동희(崔東曦)가 다른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아이들을 보고 말했다. “병정이 우리 집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신사는 이 말을 듣고 집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는 하늘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북접대도주와 임순호(林淳顥)・김연국이 신사의 옆에 있었다. 신사는 말했다. “너희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향례를 베풀라”고 하였다. 북접대도주가 말했다. “비록 먼 곳에 있더라도 지금은 반드시 모여서 함께 향례를 베풀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스승의 집에 모인 자들이 어찌 흩어져 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사가 “내 말을 어기지 말라”고 말하자, 북접대도주는 곧바로 돌아갔다. 6일 새벽에 송경인(宋敬仁)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신사의 집에 들어가서 신사를 잡아 서울로 향했다.
이때 박인호(朴寅浩)가 김명배(金蓂培)를 시켜서 앞서 내포(內浦) 접중에 가서 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홍주(洪州)에 사는 김주열(金周烈)이 벼 포기가 자라고 있는 논 10 두락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신사가 갇혀 있을 때에 이종훈(李鍾勳)이 옥졸 김준식(金俊植)과 형제를 맺어서 몰래 신사의 동정을 탐지했다. 또 신사가 병에 걸리자 이종훈이 신사의 옷과 인삼 녹용탕을 바쳤다.
6월 2일에 신사가 교수형을 받았다. 이종훈이 김준식과 함께 모의하여 신사의 시신을 찾았으며, 그 시신을 수습하여 운구가 광주(廣州)이상하(李相夏)의 집에 이르렀다. 그때에 북접대도주 및 김연국이 함께 장례를 모셨다. 그리고 신사를 이상하의 산소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