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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제1편 수운대신사[第一編 水雲大神師]

대신사의 성은 최(崔)요 이름은 제우요 자는 성묵(性默)이요 호는 수운재(水雲齋)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그 먼 조상은 문창후(文侯昌) 최치원(崔致遠)이니 우리 동방의 문자(文字)의 시조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옥(鋈)이니최옥(崔鋈) 의기와 문장으로 한 도에서 이름을 떨쳤다.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지금부터 조선 개국(開國) 4157년 갑신년(甲申年, 1824년) 10월 28일에 신사(神師)는 경주의 서부 가정리에서 탄생하였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해와 달이 몸으로 들어오고, 태어났을 때에 하늘의 기운이 맑고 밝았으며, 상서로운 구름이 방을 둘러싸고 구미산(龜尾山)에서 사흘 동안이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랄 때에는 여느 아이들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용모와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는 크게 다르니 아버지께서 늘 사랑하였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영락하고 배우던 글도 마저 끝내지 못했다. 혹은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하며 혹은 장사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기개가 있고 뜻이 크며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으면서 분개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었으며, 혹은 불교와 술수에 젊어서부터 뜻을 두었으되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고을 안을 두루 돌아다닐 때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와 그윽한 암자와 옛 절과 훌륭한 스님과 기이한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눈으로 기꺼워하고 마음으로 얻는 일로 삼았으니, 이는 대신사의 나이 20세 무렵의 일이다.
대신사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나이가 점점 들어감을 탄식했다. 그리하여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가서 초가집 몇 칸을 마련하고는 오로지 유유자적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 다녔다.
포덕(布德)포덕(布德) 5년 전인 을묘년(1855년) 봄 2월에, 대신사가 초당에 있으면서 손에 책을 들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에 이상한 중이 와서 대신사에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빈도(貧道, 중이 스스로 낮추어 부른 말)가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부처에게 백일기도를 마치고 탑 아래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어떤 이상한 책 한 권이 탑 앞에 있었습니다. 이 책을 살펴보니 그 글자의 획수와 글의 뜻이 대개 세상에서 처음 본 것이어서 범상한 지식으로는 풀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찾으려고 온갖 곳을 가지 않은 데가 없었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공을 뵈오매 비로소 이 책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신령스런 지혜를 모아 그 참 내용을 알아서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을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받아들고 이를 보니 곧 유불선(儒佛仙)의 책에서 일찍이 읽어본 것이 아니었다. 스님에게 말했다. “저 서안에 놓아두십시요”라고 하였다. 스님이 대답하였다. “삼일 뒤에 다시 오겠으니 공께서는 그 이치를 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이 과연 약속한 기일에 오자 대신사가 이미 알아냈다고 말하였다. 스님이 기뻐서 사례하면서 말했다. “공께서는 곧 하늘에서 낸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치를 알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공께서는 보배입니다. 공께서는 보배입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뜰을 내려왔는데 곧바로 보이지 않았다. 이 책에 근거해보니 하늘의 책에 의심스러운 곳이 없음을 알았으며, 책 속에 49일 동안 하늘에 기도한다는 뜻이 있었으므로 대신사가 그 뜻에 따라 드디어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포덕 4년 전인 병진년(1856년) 여름에 대신사가 한 납자(衲子, 승려의 별칭)와 함께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서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47일을 지나서 대신사가 마음으로 징조를 느낀 것이 있어서 말했다. “지금 숙부가 죽어서 마음이 혼탁하니 공부를 마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산을 내려가니 일이 과연 징조대로 들어맞았다.
포덕 3년 전인 정사년(1857년)가을에 대신사가 하늘에 기도하는 일은 결말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경비가 모자라서 비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논 6마지기를 일곱 사람에게 팔아서 바깥으로는 철물점을 열고 안으로는 하늘에 기도하는 비품을 천성산에 마련하여 49일 동안 기도를 마쳤다.
포덕 2년 전인 무오년(1858년)에 토지를 판 일이 드러나서 일곱 사람이 번갈아 와서 질책을 하였다. 대신사가 스스로 소장(訴狀)을 만들어서 일곱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날 관청에 제출하게 했다. 공판날에 이르러 대신사가 말했다. “내가 스스로 먼저 잘못했으니 어찌 무죄를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관청의 판결에 따라 관례대로 먼저 산 사람이 주인이 되었다.
갑자기 마을에 사는 어떤 노파가 대신사의 방으로 들어와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악을 썼다. 바로 지난번에 논을 산 노파였다. 대신사는 손으로 제지하면서 “그만 두어라”고 말했다. 노파는 갑자기 땅에 엎어져 죽었다. 노파의 세 아들과 두 사위가 대신사를 붙잡고 소리쳤다.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이들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반드시 살려주겠으니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문득 좌우를 물리치고 한 자쯤 되는 닭의 꼬리털로 노파의 목구멍을 휘저으니 조금 지나서 노파가 한입 가득 피를 토해냈다. 대신사가 그 아들들에게 입을 씻으라고 분부하자 노파가 곧바로 예전처럼 일어나 앉았다. 이로부터 대신사가 신명이 있다는 칭송이 일어났다.
포덕 1년 전인 기미년(1859년) 10월에 대신사가 울산에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용담정(龍潭亭)으로 돌아왔다.

살피건대 용담은 아버지가 노년에 책을 쌓아두고 공부하던 곳이다. 아버지가 젊은 날에 과거 공부에 깊이 빠져서 높은 벼슬을 바라고 부지런하게 학습하더니 시세의 운수가 어그러져서 마침내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낸 지 40년이 되었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구미봉(龜尾峰) 아래 용추(龍湫) 위에 집을 지으니 이것을 용담정(龍潭亭)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놀고 쉬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자식과 조카들을 가르쳤다. 꿋꿋하게 나아가면서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지조와 속세를 깨끗이 벗어나려는 생각이 진실로 한 지방의 사표가 되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자릉(子陵)의 맑은 기풍과 요부(堯夫)의 처신에 비유하였다.

대신사는 이때부터 옛집을 잘 수리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양하면서 족적(足跡)이 집 뜰에 나가지 않고 행적이 여기에 머물면서 샘물 소리와 산야의 광경과 구름, 노을, 물고기, 새를 감상하였다. 그 그윽한 취미와 참된 상념 덕분에 빈 집에 새로운 활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포덕 1년 경신년(1860년) 4월 5일은 곧 조카 최맹윤(崔孟倫)의 생일이었다. 최맹윤이 술과 밥을 갖추어서 대신사를 대접하였다. 대신사는 그 자리에 참석하였으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되어 몸이 편치 못함을 깨달았다. 이윽고 집에 돌아와서 대청에 오르기도 전에 갑자기 몸 기운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혼미했다. 병의 증세를 알지 못했고 말이 막혀서 나오지도 않을 때에 어떤 신선의 말이 갑자기 귀 속으로 들어와서 놀라 일어나서 탐문해 보았다.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고 말하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 소리였다.
대신사는 마음을 지켜서 기운을 바로잡고[[守心正氣])하고 신령을 접할 수 있는 강화(降話)의 이치를 물었다. 상제가 대답했다. “내 마음은 곧 너의 마음이다. 사람이 어찌 알리오? 천지를 알면서 귀신을 알지 못하니 귀신이란 것도 또한 나니라”고 하였다. 상제가 또 말했다. “너는 백지를 펴 놓고 나의 부적 그림을 받으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종이를 펴고 붓을 잡으니 자연스럽게 부적의 그림이 종이 위에 그려졌다. 대신사가 부적 그림을 가지고 아들에게 보였다. 아들이 말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너는 참으로 식견이 앝구나”라고 하였다.
상제는 말했다. “어리석고 어두운 자가 어찌 이를 볼 수 있으리오. 너는 스스로 그 글을 태워서 냉수에다 타서 마셔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그 말대로 연거푸 복용을 하였으나 아무런 맛이 없었다. 그 후부터 상제는 항상 대신사를 찾아와서 혹은 귀에 들려주기도 하며 혹은 직접 분부하기를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 같이 하였다.
어느 날 상제는 대신사를 시험해 말했다. “네가 정성이 가상하여 너를 내 원자(元子)로 삼겠으니 너는 나를 부르기를 늘 아버지라 하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그 가르침대로 따랐다. 상제는 말했다. “부적은 곧 5만년 동안 죽지 않는 약이다. 개인이 그것을 복용하면 개인이 큰 수명을 얻을 것이오, 세계가 그것을 복용하면 세계가 길이 죽지 않을 것이니, 너는 그것을 믿어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수백 장의 종이에 써서 태워서 복용했다. 8개월째 이르러서야 점점 몸이 윤택해지고 병이 낫는 것을 깨닫고, 옥 같은 얼굴과 신령스런 몸이 옛날의 상태로 돌아갔다. 대신사가 갑자기 시를 지으니 거기에 이르기를, “황하의 물이 맑아지고 봉황새가 우는 것을 누가 알리오. 운이 어느 곳으로부터 올 지 내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상제는 또 시험삼아 대신사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백의재상(白衣宰相)으로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 너는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상청(上淸)의 원곤(元昆)으로 백의재상을 어찌 좋아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제는 말했다. “네가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 조화(造化)를 받아서 이를 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이를 시험삼아 받으니 곧 세간(世間)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대신사가 이것을 즐겨하지 않자, 상제는 말했다. “저 조화를 행하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다시 이를 행하였지만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대신사가,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일부러 행하지 않았다.
상제는 또 말했다. “이 조화는 참으로 행할 수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해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억지로 이를 했지만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뒤에는 상제가 비록 이런 지시를 내리더라도 맹세코 따르지 않을 것이라 하고는, 드디어 밥을 끊은 지 11일이 되었다.
상제는 또 대신사에게 말했다. “아아! 너의 절개여, 내가 너에게 무궁한 조화를 내릴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천하에 포덕(布德)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사가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가지고 한 해 동안 수련을 하니 좌우의 모든 근원이 모두 자연의 이치 그대였다. 드디어 「용담가(龍潭歌)」, 「처사가(處士歌)」, 「교훈가(敎訓歌)」, 「안심가(安心歌)」를 지으니 이것들은 원고에 모두 실려 있다. 대신사가 성령의 주문 두 가지를 지어 하나는 스스로 외우고 하나는 제자에게 주었다.

삼가 살피건대 이 주문은 곧 인심을 붙들어 매는 기둥으로, 하늘에 올라 상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조화의 굴(窟)을 찾고 봉해진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할 때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마음의 싹을 찾아내고 하늘의 뿌리를 캐내게 되어 오래오래 생각할 때에 만 가지 지식이 저절로 밝혀지게 된다. 무형(無形)에 근거해서 신령이 자라고 성품이 완결되고, 유형(有形)에 근거해서 근육이 묶여지고 피부가 윤택해지며, 한 나라에 나갈 때에는 나라가 살아나고 백성이 풍부해지고, 세계에 나갈 때에는 화락함이 빚어지고 극락이 만들어질 것이다. 대개 이 가르침이 세상에 나온 이후부터 애송(愛誦)의 숫자를 염려할 것이 없고 사람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다. 주문의 소리가 미치는 곳에 사람이 자기나 다른 이의 분수가 융합되고 나라에는 전쟁이 일어날 염려가 없어서 토지의 분쟁이 사라지고 왕공(王公)이 이를 만날 때 그 귀함을 잃고, 무장이 이를 만날 때 그 용맹을 잃고, 부자가 이를 만날 때 그 부를 잃고, 지혜로운 사람이 이를 만날 때 그 꾀를 잃고, 문장가가 이를 만날 때 그 문장을 잃고, 시인이 이를 만날 때 그 시를 잃게 된다. 그리하여 병력으로 능히 막을 수 없으며 종족이 능히 다툴 수 없을 것이니 그 불교의 여섯 자 염불과 나교(羅敎)의 두 글자 문답과 견주어서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없다.

대신사가 「강령문(降靈文」) 여덟 자를 지었고 「검결(劍訣」)과 「고천문(告天文」)을 또 지었다.
어느 날 상제는 대신사에게 분부하였다. “내일 부모의 무덤에 성묘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소낙비가 많이 내려 갈 수가 없어서 집에서 주저하고 있었더니 상제가 말했다. “너는 어찌 늦느냐?” 대신사는 최맹윤의 집 말을 불러서 길을 떠났는데, 왕복 50리길에 비가 옷을 적시지 않고 햇볕이 머리 위에 쏟아졌다.

삼가 이 일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다들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조화의 기틀을 주관하여 신령의 모음이 몸에 있고 하늘의 비호가 종적을 따라 와서, 비가 오지 않지만 능히 비가 오게 하고, 바람이 불지 않지만 능히 불게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하니, 세상에는 비가 뿌리지만 몸은 홀로 맑으니 어찌 신사를 의심할 것인가?

상제는 말했다. “너의 길흉화복은 내가 스스로 재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정자에 들어간 뒤로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또 내가 너의 춘첩시(春帖詩)를 보니 ‘도기(道氣)가 오래 있으니 사(邪)가 들어가지 못하며 세간(世間)에 뭇사람이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라는 구절이 있어서 심히 세상 사람들을 거스르니 네가 삼가할 일이다. 너는 지금 바깥에 나가서 포덕을 해서 나를 위해 지극한 일을 하라. 네가 장생(長生)하여 천하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제는 말했다. “너희 나라 운수가 지금 안타깝도다. 사람의 욕심이 하늘에 넘치고 도덕이 땅에 떨어져 떳떳한 인륜이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지아비는 지아비답고 지어미는 지어미다운 도는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어그러지고 있으며, 고을의 수령들이 바야흐로 백성을 학대하여, 3년 동안 난리가 일어날 때에 많이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네가 가르치고 네가 교화해서 나의 큰 덕을 따르라”고 하였다.
포덕 2년 신유년(1861년) 봄에 대신사가 「포덕문(布德文)」을 지었다. 그때에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선생의 풍모를 사모하여 찾아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다. 대신사가 정성스럽게 그들을 끌어들여, 전도와 포덕으로 가르쳤다. 그 입도(入道)의 요소는 스물 한 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든 법이 그 안에 갖추어져 있었다.
대신사는 도의 이름을 정하기를 천도(天道)라 하였다. 그날에 문도들이 나와서 물었다. “지금 하늘의 신령이 선생에게 강림하시니 이렇게 된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니, 대신사는 대답했다. “내가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치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또 제자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도로 이름을 지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대답했다. “천도니라. 도의 벼리는 수심정기(守心正氣)요, 도의 조목은 성경신(誠敬信)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본다. 주역의 지천(地天)의 단전(彖傳)을 보니 곧 “천지가 사귀어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며 군자의 도는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사라진다”라고 했다. 그 93의 효(爻)에구삼(九三)의 효 이르기를, “평평해서 언덕지지 않음이 없으며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고 하고, 그 상(象)에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천지가 사귐이라”고 했다.
대개 하늘이 땅 아래에 있고 땅이 하늘 위에 있어서 천지가 서로 사귄 뒤에야 만화(萬化)가 행해지고 만물이 태어나니 이로써 백성의 임금이 된 자가 이 상(象)을 보고서 천지의 도를 재단해 이루며 천지의 마땅함을 도와서 우리 백성들을 좌우에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대신사는 젊었을 때 역학에 깊이 빠져서 상사(象辭)를 두루 읽으면서 이 효(爻)를 통해서만 마땅히 이 도가 출세할 수 있다고 여겨서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또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이르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날 성인의 가르침이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오직 우리들이 다시 정한 것이다”라고 하니, 도의 강령이 이 ‘인의예지’ 넉 자에 나오지 않았음이요 또 좌잠(座箴)을 살펴보니 “우리 도는 넓지만 간략하니 많은 말이나 뜻을 쓸 필요가 없다. 별도로 다른 도리가 없이 성경신(誠敬信) 석 자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도가 넓고 넓음에 어디에 손을 대겠는가. 정성이 아니면 효험이 없고 공경이 아니면 공업이 없으며 믿음이 아니면 행할 수 없으니, 이 세 가지를 갖고 만사에 대처한다면 무슨 일인들 마땅치 않겠는가. 이로 보건대 우리 교문의 위치가 높고 보무(步武, 씩씩한 걸음)가 넓어 능히 무심한 바위(頑石)도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하물며 천성을 갖추고서 인간(圓顱)이 된 자들이겠는가?

대신사는 하늘에 기도하는 절도를 지었는데, 그 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맑은 물을 소반 위에 올리고 공손하게 꿇어앉아서 하늘을 생각하며 주문을 외고, 혹은 소원하고 행하는 것이 있으면 다음으로 묵묵히 기도하고, 밥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고하며(食告), 들어왔을 때에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며, 나갈 때에도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되, 악이 없고 탐욕이 없고 음탕함이 없는 것을 원부(元符, 으뜸의 신조)로 삼게 했다.
대신사는 남원(南原)의 은적암(隱寂庵)에 가서 「도수사(道修詞, 도를 닦는 기본)」와 「초학가(初學歌, 처음 배울 때의 가사)」를 지어 문도들에게 반포하며 보여주었다. 그때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새로 입도한 자가 점점 많았는데, 항상 견식이 몽매함을 탄식하고 수도하는 길이 요원하여 참 경지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 인도하는 책임을 “상제가 나에게 짐을 지우시니 내가 감히 힘쓰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남쪽으로 가서 힘써 도를 함께 하게 도와주리라”고 하고 드디어 성주(星州)에 이르러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 묘에 참배하고 그대로 남원에 이르니 지나는 곳의 산수와 풍토가 모두 사람의 뜻에 맞았다.
여러 곳을 거쳐 은적암에 이르니 은적암이 맑고 시원한 경계에 있어서 떠도는 티끌이 올라오지 못하고 온갖 인연이 모조리 비어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매 중들이 모여서 법을 강하고 경을 설하니 그 공양(供養)의 기쁨과 위의(威儀)의 성대함에 사람들이 크게 흥겨워 하고 탄복하였다. 그때에 마침 궁색한 12월, 새해가 멀지 않을 때, 객지 생활의 차가운 등잔불에 집 식구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벗들이 멀리 있으니, 객지 생활의 불안한 회포를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건의 가사를 지어서 보냈다.
포덕 3년인 임술년(1862년) 3월에 대신사가 은적암에서 경주로 돌아왔다. 이때에 대신사가 종적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벗의 집에서 거처하면서 시험삼아 문도의 제자로 하여금 마음의 징험을 서로 비춰서 때때로 스스로 오게 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최경상이 스스로 찾아와서 절을 하였다. 대신사가 물었다. “너에게 묻노니 내가 있는 곳을 들어서 알고 왔느냐?”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대답하였다.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또 물었다. “너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아느냐?”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대답하였다. “저절로 마음이 움직여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네 말이 과연 참 말인가?”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대답했다. “그러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최경상은 대신사를 모시면서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무릎을 꿇고 대신사에게 물었다. “반 종지기의 기름으로 스무 하루 밤을 지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대답하였다. “이는 조화의 큰 징험이니라”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또 물었다. “전도와 포덕을 지금부터 시작합니까?”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최경상이 온 이후 사방에 어진 선비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대신사가 그들에게 「논학문(論學文)」을 지어서 보여 주었다. 그 글이 「포덕문(布德文)」에 견주어서 더욱 상세하고 세밀하였다. 또 「수덕문(修德文)」과 「몽중가(夢中歌)」를 지었다. 수덕문은 병려체(운문 형식)로 지었는데 먼저 가족 세대(世代)에 대해서 짓고 다음으로 득도에 대해서 짓고 다음으로 교인들이 입도하는 요체에 대해서 지은 것이다. 「몽중가」는 국어(언문)로 지었는데, 8편이 『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대신사가 집으로 돌아올 때 회곡(回谷)에 이르자 길 아래에 언덕이 있었는데 높이가 일곱여덟 발이나 되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어 나가지 않자 시종이 힘껏 채찍을 쳐서 앞으로 나가게 했지만 말이 그대로 서서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조금 지나서 언덕이 갑자기 무너졌는데 그 소리가 큰 우레와 같았다.
경주에 윤씨 성을 가진 어떤 무인(武人)이 영장(營將)과 함께 서로 알고 지냈다. 어느 날 영장을 설득하여 말했다. “이 고을에 최선생이 있는데 좌도(左道)를 행하고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을 꾀어서 그 도제가 수천 명을 헤아립니다. 먼저 최선생을 잡아들이면 그 무리가 반드시 돈을 가지고 와서 바칠 것이니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영장이 그 말대로 신사를 불러들였다. 대신사는 영졸이 오는 것을 보고 몹시 성이 나서 문초에 응하지 않다가 영장이 관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핑계대는 것을 보고서 만약 응대하지 않으면 먼저 우리의 도를 잃을 것이라 하고, 제자들 몇 사람을 데리고 걸어서 서쪽 냇물에 이르렀다.
이때에 동쪽 언덕에 빨래하는 여자 수백 명이 있었는데, 일시에 일어나서 대신사를 우러러 쳐다보았다. 시종이 그 까닭을 물어보자 빨래하는 여자가 말했다. “서쪽 하늘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는데 마치 구름과 노을이 처음 일어난 것 같아서 수 리에 걸쳐서 몰려왔다. 일제히 일어나서 바라보다가 지금 이 행렬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부영(府營)에 들어가자 영장이 물었다. “너는 한낱 서생으로 무슨 도덕이 있기에 도제를 불러들여 수천 명에 이르게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꼿꼿이 서서 똑바로 바라보고 천천히 말했다. “천명을 성품이라 이르고 성품 거느리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 닦는 것을 교(敎)라고 이르므로, 사람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좌도로 백성을 속이는 자는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영장은 대신사가 위의가 엄숙하고 말 기운이 엄정함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서 실색을 하여 한 마디의 힐문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경주부윤(慶州府尹)이 아내에게 병이 있어서 예방(禮房)을 시켜 대신사에게 말을 전했다. “공에게 병을 고치는 선약이 있다고 하니 청컨대 그 의술을 베풀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묵묵히 있다가 잠시 뒤에 예방에게 말했다. “병이 나았다. 너는 갈지어다”라고 하였다. 예방이 관아에 돌아와 보고했다.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부윤이 말했다. “병이 지금 과연 나았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통유문을 여러 문인에게 보내 수심정기(守心正氣)의 교훈을 지키게 하였다.
대신사가 밤에 독서를 할 때에 갑자기 이상스런 기운이 휘황찬란하여 문과 뜰에 달처럼 비치는 것을 보고 지게를 열고 보니 어두운 밤 중천에 채색 구름이 영롱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명랑하여 용담의 한 마을이 한낮과 같이 환하였다. 집사람이 물었다. “아름다운 미인이 푸른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동구나무 위에 앉아 있으니 이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니, 대신사는 말을 막으면서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여가를 틈타 글씨를 연습하면서 종이 여러 권을 소비했지만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마음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상제가 분부하였다. “너는 잠시 그만두거라. 뒤에 마땅히 너에게 좋은 붓을 내려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때에 여러 도인이 각지에 흩어져 있으면서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면서 자신의 인격을 더욱 수양했지만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이에 대신사가 각 처에 접소(接所)를 친히 정하고 그곳에 명망이 조금 높은 자를 불러서 그들에게 주된 업무를 보게 하였다.
포덕 4년 계해년(1863년) 정월 설날에 상제가 대신사를 불러 비결을 내려 주니 그 글에 이르기를, “도를 물으니 오늘날 아는 바가 무엇이냐? 뜻이 새해인 계해년에 있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상제는 대신사에게 분부하였다. “너는 붓을 잡고 종이에 써라. 내가 일러주리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붓통을 잡고 붓털에 먹물을 찍고 종이를 당겨서 글씨를 쓸 적에 자연스럽게 필법이 입신의 경계에 들어가서 용과 뱀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았다. 이때에 문도의 제자들이 날마다 더욱 늘어나서 집안이 꽉 들어차고, 문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가깝고 먼 곳에서 날마다 시끄러웠다. 영남 지방은 옛부터 유교가 깊이 뿌리내린 곳이어서, 말세에 이르러서 한갓 틀에 박히기를 좋아하고 오로지 껍데기만 숭상하더니, 대신사가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이 별도로 문정(門庭)을 세우는 것을 보고 유가의 답습과는 특별히 달랐기 때문에 (대신사를) 지목하는 일이 곧바로 일어나고 미워하는 것이 더욱 번성하였다.
강수(姜洙)가 도를 닦는 절차를 묻자 대신사가 대답하였다. “성경신(誠敬信) 석 자로 이미 충분하니, 석 자를 열심히 공부하면 바야흐로 수도의 요체를 알 것이다. 이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손으로 ‘민제(敏齋)’ 두 글자를 써서 강수에게 주면서 말했다. “너는 ‘재편(齋扁)’의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다.
8월에 전광(全晄)이 찾아와서 뵙자, 대신사가 ‘이행(利行, 온 것이 이롭다는 뜻)’ 두 글자를 써서 주시면서 멀리서 찾아 온 정성을 드러내 칭찬하였다.
대신사가 최경상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삼고 한참 동안 탄식하매 대략 성난 기색이 있더니 조금 뒤에 다시 기운을 내어 스스로 말했다. “공을 이룰 만한 사람은 가거라”라고 하였다. 또 최경상을 돌아보면서 분부하였다. “이제부터 도의 일을 확장하는 것과 교무를 발전하는 일은 네가 힘써서 이 교훈을 어기지 말라.” 최경상이 놀라서 일어나 말했다. “이 교훈을 왜 내리십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말했다. “이 또한 운명이다. 너는 명심하고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대답하였다. “소자는 배운 것이 모자라니 분수에 넘치는 소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대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일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고 의심하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8월 13일에 대신사가 「흥비가(興比歌)흥비가(興比歌)」를 지었다. 마침 최경상이 찾아와서 뵙자, 대신사가 말했다. “추석 명절이 멀지 않았는데 그대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왔는가?”라고 하니, 최경상이 대답했다. “생각컨대 선생이 홀로 명절을 지내기 때문에 모시고 명절을 쉬려고 해서 명절날을 헤아려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영험으로 최경상을 시험하였다. 대신사는 최경상을 불러 말했다. “너는 꿇어앉지 말고 편안히 앉으라”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그 분부대로 하였다. 대신사는 말했다. “너는 수족을 네 마음대로 굽히고 펼 수 있는가?”라고 하니, 최경상이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여 입으로 말할 수 없었고 수족을 굽히고 펼 수 없었다. 대신사는 말했다. “네가 왜 이러느냐?”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이 분부를 듣고서야 깨달아서 비로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최경상이 물었다. “저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도 하고 또 마음대로 움직이게도 하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대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조화의 자취가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최경상에게 말했다. “우리 도는 유불선(儒佛仙)을 하나로 합친 것이니 유교의 떳떳한 윤리를 담은 대경(大經)과 선교의 한가하고 고요함인 무위(無爲)와 불교의 널리 중생을 구제함이 모두 우리 도의 범위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14일에 대신사는 수심정기 넉 자를 써서 최경상에게 주고 또 부적의 도면도 베풀었다. 이로부터 교문에서 8월 14일을 지통(地統) 기념일로지통기념일 삼았다.
어느 날 대신사는 최경상에게 붓을 잡으라 명하시고 상제의 비결을 받게 하면서 그에게 말하기를, “용담수유사해원(龍潭水流四海源) 검악인재(劒岳人在) 일편심(一片心)”이라 했다. 대신사가 말했다. “이는 군의 장래의 일이니 길이 지켜서 바꾸지 말라”고 하였다. 검악은 최경상이 살던 곳의 산 이름이었다.
대신사는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뒷사람들이 장차 나를 천황씨라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오심극사묘연간(吾心極思杳然間) 의수태양유조영(疑隨太陽流照影)”이라 하였는데, 말의 뜻과 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상제는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내렸다. 어느 날 대신사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너희 무리들이 지난날 시의 뜻을 아는가?” 강수는 자리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억측으로 대답하였다. 대신사는 말했다. “헛된 말을 하지 말라. 내가 이것을 뒤에 볼 것이니라. 옛날 꿈에 태양의 살기가 나의 왼쪽 겨드랑이에 붙어서 한 점의 불빛이 밤새도록 사람 인(人) 자로 변하였다. 깨어나서 살펴보니 겨드랑이에 붉은 흔적이 있어서 3일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아니하여, 내가 마음으로 사람의 화가 장차 이르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뒤로부터 상제께서 강화의 말이 그쳤다”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문도에게 말했다. “일후에 법으로 삼는 것은 하나에 있고 둘에 있지 아니하며, 셋에 있고 넷에 있지 아니하며, 다섯에 있고 여섯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종(宗)에는 두 계통이 없으니 이것은 양의 홀수로 임금을 삼고 음의 짝수로 따르는 신하의 뜻이다. 만약 종교에 종사하는 자가 계통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문호를 세우며 별도로 유파를 짓는다면 장차 제도와 규칙이 번잡해서 순서가 없고 찢어져서 빛남이 없음을 보게 되어 세도의 큰 환란을 불러올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용담유사』에 이르기를, “비록 스승과 스승이 서로 전수한다고 말하나 진실로 연원이 저절로 있다”라고 하니, 우리 교에 들어오는 자들은 먼저 이 뜻을 알아서 신사의 큰 교훈을 어그러뜨려서는 안된다.

대신사는 말했다. “상제께서 5만년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나에게 내려주셨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도에게 말했다. “예전에 혹 상제와 더불어 문답한 자가 있느냐? 우리 도는 예전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했으며 예전에도 비교할 바가 없었고, 지금도 비교할 바가 없으니, 사람들이 나에게 이 같은 말을 듣고도 혹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운명이 다름이 있음이니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말했다. “우리 도에 들어온 자는 한번 하늘에 제사지낼 때에 길이 모시는 맹세를 하여 곧바로 개과천선을 하니, 이는 실로 하늘이 인심을 감동케 하여 분발하게 해서 덮어주고 실어주는 깊은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말했다. “포덕이 매우 간소하여 다만 스물한자의 주문으로 족하거늘 어떤 사람은 억지로 갖다 붙여서 어지럽게 외치는 자가 있으니 하늘의 도를 공경하게 전하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말씀을 지었고 또 팔절사(八節詞)를 지었다.
문인 김황응(金晃應)이 대신사가 지은 8절을 가지고 별도로 자기의 뜻으로 댓구를 지어서 바치자 대신사가 이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도에서 사람을 얻기가 참으로 어렵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교인들 중에 풍습(風濕)이 마구 번져서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그 병에 걸렸다. 대신사가 교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소장(訴狀)을 써서 상제의 앞에 바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동자를 시켜 붓을 잡아 강서(降書)를 받게 하였다. 거기에는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니 실로 어려운 것이 아니오, 마음이 화하고 기가 화하니 봄의 화기를 기다린다”는 열 여섯 자가 적혀 있었다. 그 뒤 풍습이 드디어 그쳤다.
12월에 대신사는 각 접(接)을 두루 돌보고 곧바로 집에 돌아와서 침실에 깊숙이 앉아서 밤이 새도록 촛불을 밝히고 마치 사람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이튿날 문하생 한 사람이 바깥에서 와서 대신사에게 말했다. “원근에서 선생을 서학(西學, 천주교)으로 지목하여 조정에서 이를 듣고 선생을 잡아들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선생은 미리 몸을 피해서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도는 나로부터 나오니 내가 스스로 감당하리라. 어찌 도피하여 모든 제자들을 연루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따르지 아니하였다.
포덕 5년 갑자년(1864년) 3월 10일에 대신사가 대구에서 운명하였다. 지난 해 12월 10일 밤에 대신사가 홀로 내당에 앉았는데, 밤이 깊어도 잠이 들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선전관(宣傳官) 정구룡(鄭龜龍)이 와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
이에 대신사는 임금의 명을 받고 체포되었다. 경관(京官)이 포졸에게 지시하여 곧바로 길을 떠나도록 하였다. 행렬이 영천(永川)에 이르러 포졸배들이 대신사에게 하는 말이 불손하였다. 갑자기 대신사가 탄 말이 길에서 발을 멈추고 채찍질을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포졸들이 크게 놀라서 대신사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죄가 있음을 믿으니 원하옵건대 선생은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머리를 끄덕이자 말이 마침내 발걸음을 떼었다. 과천(果川)에 이르러서 임금(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사가 매우 애통해 하며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과천에 며칠 머무는 동안에 경관(京官)이 조정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경상도 경주에 사는 나라의 죄인 동학선생(東學先生) 최제우를 다시 해당 감영에 가두고 문초를 하여 장계를 올려라”고 하였다.
정월 6일에 대신사가 대구감영에 다시 갇혔다. 당시 감사는 서헌순(徐憲淳)이었다. 대신사를 심문하여 말했다. “너는 도당을 불러모아서 좌도(左道)로 백성들의 풍속을 어지럽히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가?”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하늘을 가르키면서 서헌순을 보고 말했다. “천감(天監, 상제의 감시)이 밝게 비친다. 내가 동쪽에 태어나서 대동(大東)의 무극의 도로 서쪽에서 온 학문을 막고, 또 천하로 하여금 한번 도덕을 정했으니, 실로 나는 상제가 명령한 바요. 또 나는 한 몸을 순도해서 앞으로 올 5만년을 크게 펼칠 것이니, 이 또한 오직 우리 상제가 명령한 바이다. 국가가 풍설을 듣고서 실상을 알아보지도 않고, 공 또한 도를 어지럽혔다고 나를 지목하며,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나를 지목하니, 이 또한 천운이다. 사람이 그 사이에 용서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니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감사는 다시 묻지 않고 그대로 감옥에 가두었다.
2월에 감사가 형구(刑具)를 갖추어 놓고 다시 심문하니 갑자기 형장 아래에서 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감사가 놀라 형리(刑吏)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니, 형리가 대답하였다. “죄인의 골절이 부러지는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형장을 중지하고 다시 감옥에 가두고 나서 사형을 결정하였다.
대신사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한 구절의 시를 종이조각에 써서 심지를 말아 담뱃대에 집어넣어 최경상에게 보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등불이 물 위에 밝아 틈이 없으며 기둥이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지만 힘이 남아 있더라”고 하였다.
3월 10일에 대신사가 조용히 순도하자, 사흘 만에 문인인 김경숙(金敬叔)・김경필(金敬弼)・정용서(鄭龍瑞)・곽덕원(郭德元)・임익서(林益瑞)・전덕원(全德元) 등이 대신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자인군(慈仁郡) 후연점(後淵店)에 이르렀는데, 시체에 아직도 온기가 있고 몸과 머리가 서로 이어진 곳에 희고 붉은 줄이 섞여있어서 뚜렷히 다시 합해지는 징험이 있었다. 문인들은 다시 살아나기를 빌면서 3일 동안 머물러 기다렸다. 아침에 채색 무지개가 연못에서 일어나고 흰 구름이 집을 둘러싼 것이 보였으되 오래 지난 뒤에 무지개가 사라지고 구름이 걷히고 시신의 즙이 비로소 나왔다. 이에 임종의 절차를 갖추어서 이튿날 경주 용담에 돌아오니 최맹윤(崔孟倫)이 곡을 하면서 영구를 맞이하였으며, 용담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최경상이 대신사의 명으로 산골짜기에 몸을 피하니 자세한 것은 하편(下編)에 보인다.(미완)

주석
제1편 수운대신사[第一編 水雲大神師] 이글이 연재된 『천도교회월보』 원문에는 이와 같은 편목이 표기되지 않고 본문이 서언에 이어서 바로 나왔다. 그러나 뒤에서 ‘제2편(第二編) 해월신사(海月神師)’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1편 또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하의 내용은 모두 수운 최제우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본 국역총서에는 ‘제2편’과 체재를 맞추어 ‘제1편’의 편목을 표기하였다.
최옥(崔鋈) 호를 근암(近菴)이라 했는데 퇴계 이황 계통의 학자로 과거제의 모순과 토지개혁에 관한 글을 남긴 진보적 학자로 알려졌다. 시문집으로 필사본인 『근암유고』가 전해진다.
포덕(布德) 최제우는 경신년, 곧 1860년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에 전했다고 해서 이를 포덕의 첫해로 꼽는다. 기독교의 기원(紀元)과 같은 뜻이다.
자릉(子陵)은 후한 엄광(嚴光)의 자.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 유수(劉秀)와 어릴 때 교유하였던 자릉은, 유수가 황제가 된 뒤 벼슬을 받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부춘산에서 밭을 갈면서 살았다. 요부(堯夫)는 송나라 성리학인 소옹(邵雍)의 자. 소옹은 강절(康節) 선생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주로 사주 신수 등에 원용되는 상수론(象數論)을 내세웠다.
최제우는 이해 1860년에 상제(上帝)의 강화를 받아 천도를 전했다고 한다. 이를 동학에서는 포덕(布德)이라 불렀다. 『시천교종역사』에는 상제라 하지 않고 천주(天主)라 표현한 것과 차별을 보이고 있다.
상청(上淸)은 도교에서 하늘 또는 도관(道觀)을 뜻하는 말이며 원곤(元昆)은 으뜸 또는 맏이란 말이다. 백의재상은 평민이면서 재상의 역할을 한다는 말로 쓰인다. 백의장군이란 용어도 있다. 곧 상제의 맏아들로 속세의 벼슬을 탐내지 않는 뜻으로 보인다.
모두 한글로 지은 가사로 『용담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언문 가사는 한문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지은 것이어서 여성 교도들이 애송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원고”는 『용담유사』를 말한다.
나교(羅敎) 불교의 한 유파인 라마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티배트를 거쳐 중국, 몽골 등지로 퍼졌다.
『동경대전』에는 강령주(降靈呪)라는 제목에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이라는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검결(劍訣)은 『동경대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칼춤을 추면서 부르는 가사로 “시호시호(時乎時乎) 좋을시고”로 시작된다. 고천문(告天文)도 『동경대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동학의 기본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가리킨다. 이 주문을 의식이나 수도하면서 외운다.
『주역』의 지천(地天) 태괘(泰卦)의 구삼(九三)의 효(爻) 풀이인 상(象)에 나오는 글귀. 곧 “무왕불복(无往不復)”이다. 낮이 오고 밤이 가며 밤이 가고 낮이 오는 것처럼 군자가 가고 소인이 돌아온다는 것으로, 군자가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뜻을 담고 있다.
지천 태괘를 풀이하는 단사(彖辭). 이를 괘사라고도 하는데 곧 그 괘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단사를 단전이라고도 한다. 단(彖)은 ‘돼지 어금니’를 뜻하는데 매우 단단한 성질이어서 무슨 물건이든지 잘 끊어서 ‘끊을 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밤과 낮처럼 군자의 도나 소인의 도는 반복해서 순환하다는 뜻. 원문은 곧 “군자도장, 소인도소(君子道長 小人道消)”이다.
구삼(九三)의 효 구(九)는 양을 나타내는 수, 삼(三)은 괘 효의 세 번 째 순서. 곤괘 구삼에 나오는 구절임. 어렵게 하고 바르게 하면 허물이 없어서 좋은 시절이 온다는 뜻.
이 효의 상에는, 천지가 바뀔 즈음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 접해 있고 소인과 군자가 접해 있어 다시 소인이 돌아와 권력을 잡을까봐 걱정이 된다는 뜻. 『주역』 원문의 “천지제야(天地際也)”는 ‘사귐’ 또는 ‘접함’을 나타낸다.
지천태(地天泰)의 괘는 천지의 순서를 바꾸어 하늘과 땅이 잘 교접을 해서 태평하게 된다는 것. 이 괘를 두고 개벽이론에서 후천(後天)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천도교의 개벽이론은 이를 원용하고 있다.
지천 태괘의 운수에 따라 사람들이 참여하여 평등 세상을 이룬다는 뜻.
『동경대전』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잠언. 성경신(誠敬信)을 강조했다.
완석점두(頑石點頭)를 말하는데, 곧 설법의 공력이 있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심한 바위라도 감화를 깊게 한다는 뜻이다.
원문에는 “관행흉억(官行胸臆)”이라 표현하여 나쁜 뜻을 나타내고 있다. 곧 음모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첫 구절에 나오는 대목. 성리학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재편(齋扁)’은 재실의 현판을 말하는 것같지만 편은 오자로 재경(齋扃) 곧 재실(齋室)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흥비가(興比歌) 운문으로 된 『시경』에는 운의 고저를 나타내는 “흥야(興也)라, 비야(比也)”라고 운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본받아 운문체 가사를 지은 것이다.
지통기념일 최제우를 천통(天統)으로 보고 이를 차별하여 2세 교주인 최시형을 다음 자리인 지통(地統)으로 명명한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지통’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
용담은 최제우, 검악은 최시형을 나타낸다.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에 사람이 있어 일편단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내 마음의 지극한 생각은 아득한 사이인데 의심컨대 태양이 비치고 그림자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불연기연(不然其然)은 “그러하지 않은 것과 그러한 것”이라는 뜻이요 최제우의 마지막 글로 생명현상을 논한 것이다. 팔절사(八節詞)는 ‘부지(不知)’라는 용어를 써서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모두 해득하기 어렵다. 또 ‘팔절’은 여덟 글자인 명(明)・덕(德)・명(明)・도(道)와 성(誠)・경(敬)・외(畏)・심(心)을 풀이한 글이라고도 한다.
풍습(風濕) 습기로 말미암아 뼈마디가 저리고 아픈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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